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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2015년 시 - 'A정신 병동' 외 / 박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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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859회 작성일 16-02-16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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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자]


갈뫼 45년.
홀로 걷는 내 삶의 길에 / 언제나 든든한 인격처럼 / 동반자가 되어준 갈뫼.
때때로 삶의 고빗길에서 / 휘청거릴 적이면 / 갈뫼는 어김없이 손을 내밀어
내 혼과 비틀거림을 안아주고 부추겨 주었다.
<갈뫼>는 내 문학의 고향. / <갈뫼>는 내 시의 어머니.
갈뫼 45년. 장년으로 성장하기까지 / 에너지를 팍팍 넣어주시는
베드로병원 윤강준 원장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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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정신 병동


눈을 감고 A 신 병동 앞을
빠른 걸음으로 스쳐 건너왔지만


하이톤 그녀들 웃음소리
유리가루처럼 나의 9월의 발끝에
반짝거리며 부서져 내렸지만
서둘러 나는 어둠의 옷을 껴입었어


아니 차라리 그녀들 천진무구한
악보는 들새들 보다 신선하게 입을 오므려
휘파람처럼 빛이 나더라.


막다른 생의 골목길에 흩어 날리던
민들레 홀씨처럼
서둘러 내 감성의 옥타브에 기어오르던
그녀들의 대화


내 몸의 지축 흔들며 째깍 째깍 . . . .
내 정신의 등불을 2등분으로 쪼갤 것 같아


총총히 내 무덤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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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설악산과 불꽃놀이


설악에는 연 달포간
가을 산불이 마른 삭정이 사이사이로
붉은 혓바닥을 들이밀었다


빨강댕기 살랑 흔들며
원색의 가설을 이리저리 던지다가
힐끗 돌아보는 황홀한 모습


백두대간 능선 따라
불꽃 춤은 계속 성난 듯이 번져나며
헛소문을 팡팡 쏘아 올렸다


리듬 타는 단풍나무 춤사위가
미친 무당의 속 울음을 재연하니 ?


사람 같은 나무와
나무 같은 사람이 서로서로 혼을 맺으며
생의 마지막을 춤사위로 승화 !


오, 생의 마지막 장면을 불꽃으로 장식하는
오, 환장할 가을산의 불꽃놀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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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오솔길에서


가을 심연 속으로 오솔길 하나
하얗게 열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깊이에의 외경
맑은 고독 속에서
이심전심으로 풀피리 하나 들고
그대의 뜨락에 홀로 닿으렵니다


세상의 때 묻은 말이 아니라
영감의 눈짓으로
영혼의 램프 하나 켜들고
그대의 창을 노크 하렵니다


산길에 피어난 들꽃들도
어둠 속에서는 별보다 반짝이네요


가을에는 작은 풀씨들도
알찬 삶으로 익는다는 걸 발견합니다


잎새들 내려놓고 더욱 겸허해진
나무들처럼 다 비우고 다 버리고


조용히 내면을 응시하는 삭정이 같은 마음으로
가을 오솔길에서 오직 그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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넝쿨장미 울타리


넝쿨장미 울타리 그 집 앞을 지나올 때
나는 두 눈을 꼭 감는다


층층이 하늘 계단을 오르는
꼿꼿한 관능의 그녀들 손톱과
유리가루처럼 흩어지는 웃음 소리.....


한순간 아찔해버린다


송이송이 말문을 열어 폭죽처럼
솟구치는 교성이 겁난다


그녀들 꽃뱀의 혀 같은 덩굴손이
나란히 다가올 때 나는 몸을 조그맣게 움츠린다


가시덩굴 사이사이로 막 도망쳐 나올 때
가슴이 콩 콩 콩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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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세트 반 고흐의 노란집


드디어 고흐는 마른수수깡 집으로
이주하고 침대 없이 잠을 잤다


키다리 해바라기 뼈대로
둥근 울타리 둘러치고


고흐는 파이프와 담배쌈지가
둥둥 떠도는 영상을 바람 위에 그려 나갔다
햇볕 잘 드는 월세 15프랑짜리
자신의 집이 노란빛깔이 아니라는 이유로
면도날 바짝 머리에 붙여
오른쪽 귀를 싹둑 잘라냈다


빈 세트 반 고흐
그는 바람 속에 집 한 채
지상에 오두마니 남겨두고
해바라기 숲속으로 이내 녹슨 몸통을
까무르륵 숨겨버렸다


다시는 큼큼거리며
시간이 멈춘 노란집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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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기행


햇솜처럼 소올솔 피어오르는
새벽안개 속으로 하염없이 내 사유의 집 한 채
생소한 저쪽 처소로 밀고 나아가네


안개의 미립자 속에서는 모두가 한 세상
자작나무들은 밑동부터 촉촉한 감성의 새옷으로
갈아입고 가슴과 가슴 포개이지 . . . .


안개는 이승에서 할퀸 내 마음 상채기
가만히 쓰다듬어 헤아리다가
저만치 우뚝 돌아선 나의 실체를 흘깃 돌아보네


안개는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저만치 사라졌다가 가끔 집게발을
내 창에 올리기도 하지


드디어 진한 농도의 안개 속에서
구멍 뻥 뚫린 허수아비처럼 펄럭거리다가
안개 속으로 슬쩍 흡수되는 나의 영상


은은한 숨결로 이내 지상에서 나는 까무르륵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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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플 스테이(Temple stay)


산그늘 깊고 물소리 드높은 가을 산사에
시간과 제도에 꽁꽁 묶였던
내 혼의 태엽 잠시 풀어 놓았다


성난 듯 솟구치는 기계소음과
모바일 속도에 쫒기우는 시장논리도
저만치 잠깐 밀어놓았다


마음 속 잔결 이루는 잡동사니들도 쓸어버리고
한층 높아진 하늘 한번 호젓이 바라다 보면
상수리나무 스쳐온 바람 속에서
이상한 새소리가 살가운 춤을 추며 다가온다


태어나고 죽고 사랑하는 생사윤회가
아지랑이처럼 허망한 것이라고
길 떠나가는 잎새들이 귓속말로 건네주지만


가을산은 오늘 한번 크게 뒤척이고 다시 편안히 눕더니
니르바나의 미소 한아름을 내 가슴에 안겨 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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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의 한 페이지를 클릭하다


동해비치 7월
어디서 금싸라기들이 삐끗 부서져 내려
더욱 투명한 7시 10분
바다의 뾰족한 모서리를 스쳐
낯선 풍경을 열어 보았을 때


파도의 흰 피톨 푸른 피톨이
서로 맞물려 교차하는 거품들이
백열등처럼 반짝반짝 눈을 떴다


바다 심층에서 누가 쿵 쿵 쿵 . . .
해저 3만리
밀리고 밀리우는 파도의 페이지들이
철수세미처럼 꼬이고 꼬여
물새들의 이동경로를 검색하는데
땀이 흘렀다


각설탕 같은 구름 송이들이
추상의 선 위에 낯선 궁전을
빠르게 짓고 있을 때


나는 온몸의 나사를 슬쩍 풀어놓고
파도의 한 페이지를 얼른 클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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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들에게도 눈치가 있어


밭두렁 논두렁에
흔하게 엎드린 이름 없는 풀 풀 풀
그네들에게 눈치가 살아있음을 이제서 알았네


뭇 발길에 이리저리 밟히우고
비바람 천둥 번개에 떠밀리우고


무량한 눈칫밥
그 풍진 다하며
모질게 살아남은 목숨 . . .


쇠똥 흩어진 길 위에
뒤집혔다가 또 한 번 밟히우는
뼈와 살이 으스러질 때까지
덩굴손 끝자락에 꿈의 궁전을
번쩍 들어보이는
풀 풀 풀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