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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호2003년 [소설-최재도]꿀벌의 바벨탑, 그 도시에 대한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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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갈뫼
댓글 0건 조회 4,663회 작성일 05-03-26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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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건대, 나는 지금 꿀벌 5만 마리를 훈련시키고 있는 중이다. 이들
은 현존하는 모든 벌 중에서 가장 진화되어 있다. 벌의 종류가 10만 종이
나 되고, 그 수가 전 세계적으로 수천 억만 마리에 달하지만, 그들 중 가
장 지능이 뛰어난 집단이 바로 이들이다. 나는 이들의 문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켜, 이 지구에서 인간에 버금가는‘제2의 이성(理性) 집단’으로 키
울 생각이다.
우리 아버지는 양봉(養蜂)업자였는데, 수백 개의 벌통을 들고 전국을
유람하며 벌을 쳤다. 벌은 꿀을 찾고, 꿀은 꽃 속에 숨어 있기 마련이니,
당연히 아버지는 전국의 꽃밭을 헤매고 다녔다. 봄이 되면 제주도 유채꽃
밭에서부터 시작해, 전라도 벌판, 경상도 산골, 충청도 큰 내를 넘어 저 휴
전선 아랫마을까지 천천히 벌통을 옮겨 놓으면서, 벌들이 물어오는 꿀들
을 채집하였다. 그래서 일찍부터 나도 벌통을 따라, 아니 꽃밭을 찾아 전
국을 유람하였다.
아버지는 평생을 오로지 벌떼들을 좇는 것으로 보냈다. 당연히 아버지
에겐‘벌 박사’니, ‘벌의 황제’니 하는 별명이 뒤따랐다. 그 중에서도 아버
지가 가장 흡족해했던 별칭은‘벌 장군’이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아버지는
벌을 지휘하여 천하를 평정하겠다는 야심에 찬 프로젝트를 추진했었다.
아버지의 이런 의도는 결코 무모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벌을 지배
함으로써, 이미 초인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가령 아버지가 강을 건널
때엔, 벌떼들이 몸을 이어 공중에 다리(橋)를 놓곤 했다. 까치들이 만들었

다는 그 전설의 오작교처럼, 벌떼들은 자신의 몸을 지탱해 아버지의 다리
가 기꺼이 되곤 했던 것이다. 그것은 사실상 허공을 마음대로 걸어 다닐
수 있는 능력이다. 손오공이 구름을 타고 다니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거기에 비하면 나는 아직 초보단계에 불과하다. 고작 약간의 의사소통
이 가능할 뿐이다. 몇 년 전, 벌거벗은 내 몸을 벌떼들이 휘감고 있는 사
진을 공개한 적이 있다. 아마 잡지나 신문에서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살아있는 벌들로‘즉석 의상’을 만들 수 있다. 실제로 나는, 완전히 벌거
벗은 상태에서 벌떼들을 이불 삼아 덮고 들판에서 잠을 자기도 한다. 벌
들은 내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그 긴 밤 내내 내 몸에 달라붙은 채, 요
동조차 하지 않는다. 아직 보잘 것 없지만, 그러나 나도 언젠가 아버지처
럼‘벌의 신’으로 등극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벌들은 군집하여 생활한다. 이들은 집단을 위해
개체를 희생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어린 시절 나는 많은 것들이
궁금했다.
여왕벌은 산란을 시작하면 하루 평균 2000마리 분의 알을 낳는다. 알이
3일 만에 깨면, 그 중 여왕벌의 후계자로 선택된 유충에겐 로열젤리만 먹
이고, 일벌로 선택된 유충에겐 꽃가루에 꿀을 섞은 경단을 먹여 키운다.
미(未)수정란에서 나온 유충은 수벌이 된다.
도대체 누가, 알에서 갓 태어난 이들을 여왕벌과 일벌로 구분 짓는 것
이고, 또 이들에게 먹이를 따로 공급하도록 지시하는 것일까? 누가 무엇
을 근거로 그것을 판단하는 것일까? 적절한 양의 여왕벌과 수벌을 구분
지어 양육하며 일벌들에게 일거리를 분배하는 그 총체적인 지휘를 하는
자는 누구일까? 그 자가 여왕벌이라고?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그렇듯 뛰
어난, ‘조직의 존속을 위한 지휘 능력’을 확보하게 된 것일까? 평범한 유
충에 불과했던 그가 단지 로열젤리를 조금 더 먹었다고 그런 능력이 느닷
없이 생길 수 있는 걸까? 정녕 그렇다면 모든 일벌들을 여왕벌로 성장시

켜 그런 지능을 활용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일벌들은 알에서 깨어난 지 3주일이 지나면 성충이 되어, 이후 3일 동
안은 벌집 내부를 청소하는 일을 맡으며, 그 다음 20일간은 꽃가루를 저
장하거나 파수병(把守兵) 또는 심부름꾼 따위의 임무를 맡게 된다. 그 이
후부터 죽을 때까지는, 꿀을 모으고 꽃가루를 수집한다. 여름에 태어난 것
들은 50일밖에 못살고, 가을에 태어난 것들은 그 이듬해 봄까지 수명을 잇
는다. 그 짧은 생애동안, 그들은 자신의 풍습과 문화를 숙지하고, 조직 내
에서의 역할과 사명을 수행한다.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역할을 그처럼 분별하고, 조직을 위해서 헌신하는
그 습성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육각형의 정교한 집을 짓는 방식, 밀
원(蜜源)을 발견했을 때 자신들끼리 나누는 통신, 그 능력과 언어는 어떻
게 처음 고안되었고, 어떻게 전수되고 있는 것일까?
훗날 나는 이런 의문들 중 상당 부분을 아버지로부터 채웠다. 내가 당
시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 중 하나는, 꿀벌들이 자신의 적에 대해 사생결
단의 자세로 대응하는 것이 기실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벌은 꽁무니에 있는 독침을 이용해 적을 퇴치하지만, 그 침을 쏘고 나면
꽁무니가 빠져버려 곧 죽어버린다. 그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나는 큰 충
격을 받았다.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것도 아니면서 적을 공격하는 이
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집단을 위해서라고? 대체 일벌들이, 집단을 위해
그런 희생을 감수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처럼 지키고자 애쓰는‘조
직’은, 일벌 자신에게 있어 어떤 존재일까. 개체와 집단 사이에는 어떤 계
약관계가 있는 것일까. 강요당하는 희생에 상응하는 혜택은 무엇일까?
이처럼 내 의문은 꼬리를 물고 맴돌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내가
그런 초보적인 궁금증에 사로잡혀 있을 때 아버지는 이미‘벌의 진화’를
도모하고 있었다. ‘집단우선주의’라는 벌들의 습성, 그리고 그런 풍부한
지식을 전수하고 있는 경로, 그것들을 파악할 수만 있다면, 필시 벌의 진

화를 도울 수 있으리라 확신하였던 것이다. 개체로 존재할 때보다 집단을
이루고 있을 때가 훨씬 진화 속도가 빠른 법이다. 그러니 여기에다 지식
전수의 경로를 찾아, 거기에 새로운 지식을 추가로 투입할 수만 있다면 진
화의 속도를 한층 더 가속화시킬 수 있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었다.
지금에야 안 일이지만, 그때 이미 아버지는 벌들의 은밀한 지식전달 체
계를 확인해 두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저 아
버지가 꿀벌의 언어를 관찰하는 것이려니 하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몸짓과 날갯짓, 그리고 후각과 시각 따위가 그들의 전달 수단임에
분명했고, 따라서 아버지는 그런 것들을 살펴,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고 있
으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벌들의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아버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벌통 하나
를 개조한 것이다. 벌들의 생활을 관찰할 수 있도록 투명한 유리를 단면
에 씌우고 그 입구 밖에 문을 달아, 단지 아버지의 의지에 의해서만 개폐
가 가능하도록 했다. 이윽고 며칠 후 아버지는 교미를 막 끝낸 여왕벌을
곤충 채집망으로 잡아채어 이 벌통에 넣었다. 여왕벌은 그곳에서 꾸역꾸
역 알을 낳았고, 차차 알에서 부화된 벌들로 벌통이 채워져 갔다. 이로써
아버지의 벌통은 인위적인 신생왕국이 되었다.
아버지는 이들에게 먹이를 공급하며 계속 관찰했다. 벌들은 저항하지
않았다. 먹이만 안정적으로 보급해주면, 이들은 벌집 내부에서의 생활에
적응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듯 했다. 더군다나 아버지는 벌의 생태
를 잘 알고 있었고, 이미 벌들 세계에서는 존경을 받고 있는 터였다. 벌들
은 각기 새 왕국에서의 역할을 부여받아 아무런 내부 분규 없이 질서를
유지했다. 아버지는‘겨울과 흡사한’외적(外的) 환경을 만들었는데, 그것
또한 이들의 적응을 도왔을 것이다.
아버지는 로열젤리와 꿀, 그리고 꽃가루를 섞은 경단을 보급하며 이들
의 생육을 유도했다. 이들은 아버지가 공급하는 먹이로 연명했다. 아버지

가 먹이를 공급할 시간이면 입구 쪽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몇 방울의 꿀
을 떨어뜨리면 몰려들어 입에 물고 달려가 여왕벌과 유충들에게 토해놓았
다. 아버지는 그때마다 손가락을 적절히 활용해 언어를 만들었고, 휘파람
신호로 이들을 교육시켰다. 휘파람을 짧게 불어 식량을 공급할 것임을 알
리고, 손가락으로 8자 모양을 작게 그리면서 먹이를 넣어주면, 이들은 이
것으로 식사시간임을 인지했다. 그런 방식으로 아버지는 몇 개의 언어를
그들에게 가르쳤다. 무릇 언어란 사회적 약속이며, 약속이란 누군가가 제
안하고, 또다른 자들이 그것을 수락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버지는
제안했고, 꿀벌들은 훈련에 의해 수락했던 것이며, 이로써 그들 사이에는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 아버지는 휘파람으로 불러내고 손가락으로 지시
하는 언어전달 경로를 확보한 것이다.
그 얼마 후 아버지의 벌통에는 새로운 여왕벌 후보들과 일벌 수 천 마
리가 서식하게 되었다. 이들은, 그 갇힌 벌통에서 아버지의 언어를 충실히
숙지하고 있었다. 몇 달이 지나자 이 벌통에서 처음 생을 시작했던 일벌
들이 모두 죽었고, 곧이어 여왕벌마저 수명을 다했다. 이제 이 벌통은 완
전히 새로운 세대로 구성된 것이다. 아버지는 이렇듯 몇 대의 세대를 그
대로 유지했다. 세월이 흐르자 이들은 아버지를 유일한 밀원으로 인식하
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충분히 길들여 질 즈음, 아버지는 느닷없이 벌통을 개방했다. 이
미 먹이 공급이 중단된 상태였고, 신세대 여왕벌 체제 아래에서는 어느 누
구도 꽃으로부터 꿀을 채취한 경험이 없으므로, 당연히 이들 조직에는 상
당한 시련이 전개될 판이었다.
하지만, 왕국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신세대 벌들은 기존의 다른 조
직과 조금도 다름없이 질서를 유지했다. 그들은 꽃을 찾아 꿀을 채취해 오
는 일에도 서툴지 않았다. 생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행위, 그리고 종족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행위는, 때때로 훈련이나 교육이 없어도 가능하다. 태

초부터 누적된 유전 정보가‘본능’이라는 양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게다
가, 나도 최근에야 알았지만, 그들 나름대로 생존을 위해 정보를 취득하
는 경로가 별도로 있었던 것이다.
외형상 여느 조직과 다름없는 지극히 일상적인 꿀벌 집단이었지만, 그
러나 이들은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는, 아버지와 의사소통이 가능한, 대단
히 지성적이고 독특한 벌의 집단으로 이미 변해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언어 외에도, 아버지의 언어를 별도로 숙지하고 있는, 말하자면 2
개 국어에 능통한 신세대 꿀벌조직인 것이다.
이런 상태에 다다르자 아버지는 우선, 이들의 생존방식을 대폭 개선시
켜, 이들에게 실질적인 이득이 발생하도록 유도했다. 건축양식의 획기적
변화를 시도해, 집을 지을 때 특정 꽃가루를 일부 섞어 단열효과를 높이
면서도 채색효과가 발생하도록 했다.
“아름답도다! 내 심히 만족하도다!”
아버지는 새로운 양식의 벌집들을 보면서 이렇게 외치곤 했다. 수 만년
동안 무지한 채로 남아있던 벌들의 세계가 문화시대로 접어들었음에 심히
만족해했다.
또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시에 적을 퇴
치할 수 있는 전술들을 개발해 가르쳤다. 굳이 꽁무니의 바늘을 적에게 꽂
지 않고도 세(勢)의 위협만으로도 퇴치가 가능한 전술방식을 개발한 것이
다. 아카시아 나무나 장미의 가시를 뽑아 물고 다니면서, 이로써 적을 공
격하게도 하였다. 벌의 세계에서 최초로 무기가 도입된 것이다.
“돌격하라! 전속력으로 전진하라!”
다른 벌 집단과의 싸움에 대비해, 아버지는 이처럼 직접 훈련을 시키곤
했다. 벌이 무기를 만드는 과정과 그것을 활용해 전투하는 요령을 아주 치
밀하고 섬세하게 지도했던 것이다.
이것을 발전시켜 훗날, 꿀을 운반하거나 전투를 할 때가 아닌, 평상시에

도 꽃잎조각을 물고 다니게 했다. 이는 거미줄에 걸리거나 개인적인 적으
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실용적인 목적과 더불어, 자신을 군중으로부터
식별하고 자신의 고유한 이미지를 표출하는 문화적인 행위로까지 발전되
었다. 전쟁으로 인한 문화 창출 행위라고나 할까. 그밖에도 학익진(鶴翼
陣)이니 장사진(長蛇陳)이니 하는 진형(陣形) 짜는 법도 아버지의 강 훈
련에 의해 가능했다.
아버지는 또 이들 세계에 여가문화를 보급하기에 힘썼다. 이들은 지나
치게 근면한 나머지, 도무지 휴식이라는 것이 없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이
들은 잠도 자지 않는다. 비 오는 날이나 바람이 심한 날, 그리고 겨울철
내내 벌통 안에서 꼼짝 않고 지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잠을 자는
것은 아니다. 이들 세계에서 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
지는 이들에게 적절한 휴식과 여가를 즐기는 법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아버지는 축제를 개발해 보급했다. 봄이 되어 일을 시작할 때,
겨울이 되어 일을 마감할 때, 또 아기 벌들의 첫 작업 때는, 축하행사나
소득에 대한 기원(祈願)행사를 반드시 벌이도록 했다. 이때는 날갯짓을
통해 춤을 추도록 했는데, 이는 벌의 세계에서 긴박한 생존의 수단으로서
가 아닌, ‘유희의 한 양태’로 날갯짓이 이루어지게 된 기원이 되었다. 먼
훗날 자신들의 몸짓이 훌륭한 예술임을 느끼게 되고, 그들이 고도로 진화
되었을 때, 그 춤을 무척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아버지는 믿었다.
“춤추라, 노래하라! 즐기라, 기뻐하라! 생(生)은 즐겨야 하는 것이나니,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허락하노라!”
아버지는 벌들의 축제 때 직접 참석해 이렇게 축사를 하곤 했다.
또 여왕벌의 인계인수나 분봉(分蜂) 때에도 조직의 번성을 기원하는 큰
잔치를 벌이도록 했다. 이때 술이 사용되었는데, 그건 꿀을 의도적으로 발
효시킨 것이었다. 이로 인해 이들은 술도 만들어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생
존을 위해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닌, 유희를 위해 먹기도 한다는 아주 경이

로운 체험은 이때에 비롯되었다. 본디 꿀은 매우 달아서, 굳이 맛을 내기
위한 요리기법이 필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이처럼 꿀을 발효시켜 술이라
는 별도의 음식을 개발한 것은, 이들 세계에서는 획기적인 일임에 분명했
다.
이밖에도 여러 개의 축제가 보급되었다. ‘꿀 채집 최고 벌’을 뽑는 행사
도 그 중 하나이다. 여기에서 뽑힌 일벌은 여왕벌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다. 이로써 생산체계의 대폭적인 개선이 가능하고, 생산성 향상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때부터 각 개체별 생산량을 기록해두는 새로운 제
도도 발생했다. 수량의 개념이, 이들 세계에서도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여하간 이런저런 문화행사의 개발로, 아버지의 벌들은 일과 여가의 개
념을 구체적으로 가지게 되었으며, 소득과 분배의 개념도 더불어 갖추게
되었다.
최근 어느 학자가, 꿀벌들은 숫자를 헤아릴 수도 있고 표지물을 이용할
수도 있으며 색을 구분할 수도 있다고 아주 대단한 발견을 한 양 학계에
보고한 적이 있으나, 이는 모두 아버지가 이룩해 낸 업적 중 하나였던 것
이다.
또 아버지는 이들 세계의 냉혹함도 파악하고 있었다. 가령 겨울을 넘길
양식이 모자랄 경우 다같이 조금씩 적게 먹는 것이 아니라 특정 계층의
벌부터 먹이 공급을 단절한다든지, 또 교미가 끝난 후에는 수벌들을 쫓아
내어 버린다거나, 비바람이 심한 날 늙은 벌을 내보내 입구를 막게 한다
든지 하는 따위가 그것이다. 아버지는 이런 야만적인 처사에 대해 벌들이
자신의 풍습을 개선하도록 유도했다.
또한 아버지는, 이들이‘삶의 가치’를 스스로 부여할 수 있도록 배려했
다. 지금까지 벌의 세계에서는 조직을 위해 개체를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
게 여겨왔다. 하지만 아버지로서는, 벌들이 그렇게까지 해가며 조직을 존
속시켜야 할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개체의 가치가 인정되지 않는 집

단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아버지는 벌 개개의 존엄성이 유지되는
그런 윤리관을 심어주기 위해 당신의 언어를 사용했다.
아마 전 세계 꿀벌들 중에서 장례식을 치르는 예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
다. 아버지의 벌들은 죽은 동료에게 깊은 애도를 표한다. 벌통 안에서 노
환으로 숨진 벌들을, 전에는 그냥 물어내다 버렸지만, 지금은 여러 마리가
공동으로 물고 나와 꽃밭에 눕혀놓고 그가 생전에 좋아하던 꽃잎을 덮어
주는 절차를 반드시 거친다. 아버지는 당시, 앞으로 이 절차를 좀더 고급
스럽게 변화시킬 계획이었다. 이로써 개체의 가치에 대한 의미를 분명히
인식하게 될 것이고, 나아가 이들에게 종교적 의미도 부여할 수 있을 것
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는 벌들에게 윤회사상과 미륵사상을
가르칠 예정이었다. 현생에서의 근면은 내생에서 축복으로 바뀌고, 그때에
는 도처에 꿀과 꽃가루가 넘쳐, 일하지 않고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시대
가 도래하리라는 것을 믿게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이들 세계의 문명발달을 촉진시키기 위해, 사회적 능력을 갖
춘 여왕벌들을 대량 사육했다. 여러 마리의 여왕벌들을 양육해, 이들 중
상당수는 자신들의 문화를 연구하고 전승(傳承)하며, 자신들의 조직을 전
달하고 관리하는 능력을 키웠다. 이로써 아버지의 벌들은‘우수한 두뇌 집
단’과‘효율적으로 움직이는 하부집단’으로 구분된 조직체계를 갖추게 되
었다.
이런 노력들이 결실을 맺어, 벌들을 교육시킨 지 9년째 되는 해부터 아
버지는 명실상부한 신(神)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했다. 이들은, 꿀을 채취하
기 시작하는 봄 축제 때나 분봉의 대축제 때 아버지에게 꿀과 술을 바치
며 춤을 추었고, 마찬가지로 늦은 가을날 자신들의 한 해 작업을 마칠 때
도 추수감사제 형태의 축제를 아버지 앞에서 펼쳤다. 1주일에 한번씩 벌
어지는 집단 장례식 때도 그들은 죽은 벌들의 윤회를 아버지에게 기원했
다. 아버지는 그때마다 그들에게 축복된 장래를 약속했고, 당연히 그들은

아버지에게 충성을 다짐했다.
“오, 나의 백성들이여! 내가 곧 그대들의 신이요, 그대들의 구원자로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대들에게 밝은 문명이 머물지 못할 것이로되, 나
는 그대들 자자손손 그 문명을 유지하도록 허락하노라.”
아버지가 벌 집단에 내리는‘계시(啓示)’는 벌들에게 큰 축복이었다.
아버지와 벌들의 이런 교류는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아버지의 벌들은
이제 벌의 세계에서 가장 진화된 종족이 되었다. 아버지는 여기에 만족하
지 않고, 벌들의 진화속도를 좀더 빠르게 진행시키고자 하였다. 전 세계
벌들이 자신들의 원시적 생활양태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게 되기를 갈구하
였다. 게다가 대량 양육된 아버지의 여왕벌들에게 적절한 왕국을 분배해
줄 필요도 생겼다.
결국 아버지의 벌들이 전쟁터로 내몰렸다. 지금까지 벌들은 자신을 방
어하기 위한 전쟁, 때로 흉년이 들어 양식이 부족할 경우에나 싸움을 했
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 이들의 역사에도‘정복을 위한 전쟁’시대가 열린
것이다. 아버지의 벌들은 무기를 사용할 줄 알았고, 진법(陳法)을 구사할
수 있었으므로 피해를 최소화하면서도 적을 속속 물리쳐 전승(全勝)을 거
두었다. 패배한 적의 여왕은 즉결 처분되었고, 아버지의 벌통에서 양육된
여왕벌들이 그들 조직을 장악하여, 새로운 문명을 전파했다. 그리하여 아
버지의 벌들은 끊임없이 번성하며 날로 세(勢)를 확장해 나갔다. 양봉업
계에서 지금도 그 원인을 찾아 내지 못한‘벌들의 제1차 전쟁’, 흔히 우리
양봉업자들이 말하는 이른바‘유채꽃 전쟁’이 기실 이렇게 비롯되었던 것
이다.
반경 60km내의 꿀벌들은 모두 아버지의 군대가 정복했다. 물론 정복의
과정에서 엄청난 피해가 발생한 것은 사실이다. 다른 꿀벌들은 재래적인
방식으로 전투에 임했고, 그 과정에서 당연히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 전투
가 상당히 진행되었을 때는 영역 내 벌의 수가 1/5로 줄어들어 있었다. 아

버지의 벌들은 승전을 거듭했고, 그때마다 큰 축제를 벌였다. 이에 벌들의
세계에는 전쟁과 축제가 반복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듯, 생존을 위한 몸짓을 제외한 모든 행위, 즉 문화행위
는 착취를 그 바탕에 두는 법이다. 이들의 흥청거림은 다른 벌 조직의 희
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버지의 벌들은 다른 꿀벌조직을 정벌한 후 그
들의 양식을 약탈하여 술을 빚었으며, 미개한 조직의 신생아들을 멸절(滅
絶)시켜 버리곤 했다. 벌들의 세계에 강력한 변혁의 바람이 불었으니, 이
로써 이들의 진화는 적어도 수천 년을 앞당길 수 있었다.
아마 이때 아버지의 벌들은 행복했을 것이다. 정복자의 성취감과 생명
가진 자의 문화적 포만감을 향유할 수 있었으므로 아버지의 벌들은 지금
까지 이 땅에 생존했던 어떤 벌들보다도 즐거웠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
다. 이들은 살아서 낙원을 맛보았을 것이다. 도처에 꿀이 넘치고, 술과 음
악과 춤이 끊이질 않는, 일벌들에게조차 로열젤리가 공급되는, 그런 꿈의
세계가 지속되었다. 아버지의 고된 노력이 완벽하게 성취된 것이었다. 아
버지가 벌들에게 약속한 낙원의 시대를 예상보다 일찍 앞당겨 제공한 셈
이다. 비록 벌 세계의 무궁한 진화를 위해서 아버지가 할 일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지만, 현세에 당장 가시적인 이득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아버지
는 매우 만족해했다.
“사랑하는 나의 벌들아, 너희들의 행복을 마음껏 구가하라!”
아버지는 꿀술에 취해 늘 그렇게 외치곤 했다.
전성시대는 당분간 지속되었다. 정복당한 벌들도 새로운 여왕벌의 지휘
에 비교적 원만히 순응했다. 따라서 새로운 문명은 순조롭게 전파되었다.
아버지의 지시를 조직에게 전달하는 벌 몇 마리가 늘 대기하고 있었고,
그래서 아버지가 마치 음악을 지휘하듯 손가락을 휘둘러 언어를 구사하
면, 그 명령은 즉각 하달이 되었다. 들판에 누운 채 허공을 향해 손가락
명령을 내리기만 하면, 입에 절로 꿀이 들어가게 할 수도 있었다. 아버지

의 손가락은 마치 마술사와 같아서 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었고, 오케
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와도 같아서 무엇이든 연주해 낼 수 있었다. 아
아, 우아한 아버지의 손가락 언어는, 벌들 세계에서는 가장 선진된 언어였
다. 아버지의 손가락 끝을 주시하다 곧바로 명령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은
벌 -우리로 따지면 종교적 사제(司祭)와도 같은- 의 지위는 여왕벌과 동
등했다. 놈은 아버지와 벌들 사이의 중계 역할을 훌륭히 해냄으로써 당연
히 이들 세계에서 큰 권위를 누릴 수 있었다. 벌들의 행복은 애당초 아버
지의 손가락 연주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이들 사제의 역할이 결코 소홀하
게 취급될 수는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때 벌들은, 사제가 아버지의 손
가락 명령을 받기 쉽도록, 곳곳에 예술적인 조형의 대형전망대를 설치했
다. 사제들은 이곳에서 아버지의 명령을 관찰하다 즉각 자신들의 벌통에
전달하곤 했다. 꽃가루를 넣어 색을 만든, 긴 삼각뿔 형태의 새로운 탑이
었는데, 그 모양의 우아함이라든지 구조의 독특함만으로도 충분히 예술적
가치가 있었다. 우리 양봉업계에서는, 곳곳에 세워진 이 구조물의 용도를
잘 이해하지 못해, ‘유채꽃 전쟁’의 불가사의한 산물로 여기고 있다. 아버
지는 이 탑을‘꿀벌의 피라미드’라 명명하였다. 나는 이것을‘꿀벌의 바벨
탑’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전성시대는, 솔직히 말해 2년이 채 못 되어 기울기 시작했
다. 언제나 그렇지만 착취세력의 확장에는 그 한계가 있는 법이다. 우선
연속된 승전과 그로 인해 축제의 희열에 젖어 있는 아버지의 벌들이, 더
이상 싸움을 즐기지 않게 된 것이다. 전투에서의 부상이나 전사(戰死)를
두려워하기 시작했고, 헌신적인 희생도 피하려 했다. 이미 개체의 존재가
치를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맹목적이고 무모한 희생은 원하지 않았던 것이
다. 이들은 전쟁을 재난으로, 또는 불행으로 인식했다. 당연히 전투력이 감
소되면서 더 이상의 세 확장은 불가능해졌다.
“돌격하라, 돌격하라, 돌격하라!”

아버지가 들판에서 벌들의 전쟁을 지휘하는 모습만 지켜보아도 전황을
알만 했다. 다급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메아리치곤 했던 것이다.
이때부터는 내분도 싹트기 시작했다. 정복된 벌통에서 빼앗은 식량들,
그 중에서도 로열젤리를 둘러싼 분배 문제가 새로운 쟁점으로 등장했다.
포상 형태로 분배되던 로열젤리를 일벌들에게도 균등하게 분배해야 한다
는 주장이 대두한 것이다. 이는 여왕벌의 존재가치가 의심 당하고 있으며,
그 권위가 무너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이미 개체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는 아버지의 벌들 세계에서는 이들의
이런 주장을 묵살할 아무런 명분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이제 벌들의 세
계에도 평등의 개념이 확고히 자리 잡고 있었다.
로열젤리를 분배받은 아버지의 일벌들은 그 수명도 연장되었다. 그들은
노동을 할 필요가 없었는데, 그렇듯 현저하게 줄어든 노동시간이 이들의
수명연장을 도왔던 것이다.
수펄의 증가도 패망이 한 요인이다. 급속한 세의 확장과 더불어, 많은
종자의 보급이 요구되었으므로 교미를 위한 수펄의 수가 증대되었다. 물
론 수펄은 교미 외에는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좌식(坐食) 계
급이 급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일하지 않는 자’의 증가는 곧 소비와 생산의 불균형을 가져오
게 되었다. 정복당한 일벌들의 근면에도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아
무리 꿀을 물고 와도 정복자의 식량을 충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렇
게 되자 정복자들 상호간의 식량분배 문제가 또다른 현안으로 등장했다.
무엇보다도 장기간의 전쟁으로 밀원이 소멸되어 버린 것이 가장 큰 문
제였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벌들은 꿀 채취작업에 전념할 수 없었고,
이는 꽃의 수정을 불가능하게 했다. 그것은 재난이었다. 꽃은 열매를 맺지
못했고, 열매가 없으므로 당연히 씨앗이 없었으며, 그리하여 이듬해 봄이
되어도 새로운 꽃을 피울 수가 없었다. 꽃이 없으므로 꿀도 사라지고, 꿀

이 사라짐에 따라 굶주리는 벌들이 속출했다. 그나마 정복자들에게 바치
고 나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었으므로, 이들의 아사(餓死)가 늘어났다.
전체 벌의 87%가 굶주린 배를 움켜쥔 채 잠자리에 들었고, 아침이 되면
상당수는 시체로 변해 있곤 했다. 벌들의 수난시대가, 전성시대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굶주림을 참지 못한 벌들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다른 지역으로 도망가기도 하고, 몇몇은 여왕벌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
치기도 했다. 아버지의 벌들, 즉 애초의 정복자들 상호간에도 싸움이 시작
되었다.
‘아버지의 사제 벌’과 여왕벌과의 대립도 점차 극심해져 갔다. 이때쯤에
는 일부 진보적 성향의 벌들이 주동이 되어, 이른바‘봉본주의(蜂本主義)’
사상을 퍼뜨리고 있었다. 이들은, 평소 아버지의 명령을 간간이 위반하던
놈들이었는데, 거듭된 아버지의 용서와 은혜를 무시하고 이처럼 오만한
행동을 거침없이 벌였다. 그들의 신(神)인 아버지의 명령을 절대가치로
여기는 것에서 벗어나, 자신들 벌의 입장에서‘벌의 사고(思考)’를 우선해
야 한다는 주장이 일부 벌들 사이에서 제기된 것이다. 지하에 잠적해 있
던 이런 사이비 사상가들이 혼란을 틈타 점차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었
다.
벌들의 세계는 점입가경 점차 혼란스러워지면서, 좌충우돌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복잡한 내부 싸움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또한 엄청난 희생이 따랐다. 이를 우리 양봉업계에서는‘벌들의
제2차 전쟁’, 이른바‘벚꽃 전쟁’이라 부르고 있다. 이 재난으로 아버지의
벌들은 결국 벌통 한 개 분량에도 크게 못 미치는 수천 마리만을 남겨놓
은 채 멸종위기를 맞기에 이르렀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아버지 당신 탓이기도 했다. 벌의 근면은 꽃의 만개
를 위한 것이고, 이는 생태계를 유지하려는 대자연의 의도이기도 하다. 벌

이 꽃에서 얻는 꿀이라는 소득은 그 근면의 대가(代價)이며, 벌은 이렇듯
자연생태계에의 봉사를 그 사명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벌이 타고난 숙명,
곧‘벌의 근면’이란 생태계의 유지를 위한 것임을 아버지는 소홀히 보아
넘겼던 것이다. 일벌들이 출산의 고통도 면제받고 오로지 꿀 채취에만 전
념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자연의 배려였던 것이다.
벌의 근면은 꽃의 만개를 위한 것이며, 꽃은 생태계의 기본적인 질서를
유지시킨다. 그러나 일하지 않는 벌들은 그러한 기본 질서 유지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생태계 전체의 존속이 위협을 받았다. 반
경 60km 내에는 어떤 꽃도 피지 않는 초토화 현상이 일어났고, 결국 꽃
밭을 떠난 벌들이 생태계의 응징을 받게 된 것이다. 일하지 않는 벌들은
그래서 불행해 질 수밖에 없었다. 벌들의 평균수명은 대폭 연장되었고 춤
과 노랫소리도 드높았지만, 극심한 식량부족과 내분에 의해 멸종위기에
다다른 것이다.
3년이 지나자 황량한 이곳에 새로운 벌들이 전입했다. 인위적으로 뿌린
씨앗에서 핀 새로운 꽃의 꿀은 이들 몫이었다. 아버지의 벌들은 이들에 저
항했다. 하지만 아무런 문명도 갖지 못한 이 무지한 벌들은, 아버지의 진
화된 벌들을 무참히 살해하며 영토를 잠식해 들어왔다. 외국산 수입 벌들
은 그 강한 체력과 몽매한 용기로, 마구잡이로 침략을 일삼았다. 아버지의
벌들은 이제 완전히 패배하고 말았으며, 이로써 수년간의 양봉업계 이변
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아버지는 그 무렵, 벌들을 지휘하다, 수입 벌들의 집중 공격을 받고 병
원으로 후송도중 끝내 숨을 거두었다.
“내, 내 벌들아, 돌격하라, 돌격하라, 돌격하라∼!”
아버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패전을 인정하지 않고, 당신의 벌들에게
끊임없이 손가락 명령을 내렸다.
아버지가 떠나던 날, 아버지의 남은 꿀벌들은 모두 하늘 높이 치솟아 몸

과 몸을 이어 무지개를 만들며 아버지의 장례 행렬을 따라왔으니, 이것이
수년 전 그 유명한‘봉궁교(蜂弓橋)’사건이다. 벌이, 마치 활처럼 굽은
다리를 놓았다는 뜻으로, 당시 연이어 벌어지던 여러 천재지변 중 하나로
꼽혀, 타임캡슐에도 그 이야기가 수록되어 묻힐 정도였다. 사실, 그 날 벌
들의 그 장중한 몸짓들, 입에 색색의 꽃잎을 물고 춤추던 그 기이한 행위
들은 아버지가 이룩해 놓은 벌들 세계의 문화적 실체였다.
나는 그것으로, 아버지가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아버지는 벌
의 진화를 도왔고, 실제로 벌들은 행복을 맛보았다. 아버지는 벌들에게 문
화와 역사를 가르쳤고, 종교와 전쟁이론을 전수시켰다. 벌들은 아버지로
인해 여가를 즐겼고, 이 때문에 생의 가치를 새삼 인식할 수 있었다. 이들
문명이 비록 단명하고 말았으나, 그 시도는 높이 평가할 만한 것이다. 벌
들이 쌓은 그 피라미드, 아버지의 손가락 지휘를 받기 위해 자신들의 문
명을 총동원하여 세운 그 예술품 하나만으로도 아버지의 성공은 의심할
바가 없다.
여기서 고백하지만 사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몇 달 전, 당신의 모든 능
력을 내게 전수해 주었다. 아버지는 겨울날 그 황량한 들판에서 내게 아
주 작은 -핀셋으로 간신히 집어낼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작은- 꿀 덩어리
하나를 건네주었다. 나는 그 날의 아버지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얼마나 장
중하고 얼마나 엄숙한지, 일찍이 내 생애에서 그런 분위기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은박지에 고이 싸두었던 그 작은 꿀 덩어리를 펴 보이었다. 아
버지는 그것을‘봉밀(蜂蜜)상자’라고 칭했다. 아아, 거기에는 내가 그토록
궁금해했던 것, 벌들이 그 풍부한 지식을 어떻게 전수하고 조직 구성원으
로서의 역할을 어떻게 분배하는지 그 비밀이 감추어져 있었다.
벌들은 자신들이 체득한 모든 지식을 그 작은 상자에 모두 담아놓았던
것이다. 더듬이를 그곳에 꽂으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이 입력되며,

반대로 선조나 동료들이 얻은 모든 정보도 더듬이를 통해 전수 받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꿀벌 세계의 모든 지식과 조직에 관한 총체적인 정보들
이 모두 그곳에 담겨있는 아주 신비스런 장치였던 것이다. 숨지기 직전 벌
들은 모두 이곳에 인도되어 자신의 정보와 지식을 남겨놓는다. 조상 대대
로, 수십만 년 간 내려온 꿀벌들의 총체적 정보가, 마치 불씨처럼 그렇게
소중하게 전수되어왔던 것이다.
오, 나의 의문들이 이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풀렸다. 태어나면서부터
그토록 많은 지식을 체득할 수 있었던 신비, 조직의 유지를 위해 개체를
희생해야 하는 사회적 의무, 로열젤리를 공급하고 직무를 분배하는 조직
의 규칙, 그 모든 행동적 지침과 사회적 원칙이 다 그 안에 있었던 것이
다.
하지만 나는 애초 아버지의 대(代)를 이을 생각은 없었다. 벌을 지배한
답시고 생태계의 원리를 깨뜨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때때로
분통이 터졌다. 아버지는 벌들로 하여금 개체의 존재가치를 부여하려고
애썼으나 바로 그것 때문에 조직력이 약화되어 결국 정복 과정에서 주저
앉은 것이며, 자비를 베풀어 저항세력들을 방치한 것이 결과적으로‘벌 위
주의 사고’, 이른바 봉본주의를 확산시켜 아버지에게 대항하게 한 셈이 되
기 때문이었다. 나는 벌들의 배신에 치를 떨었다.
가끔 아버지가 그립기도 했다. 벌의 세계에서 장군처럼, 신처럼 군림하
던 아버지! 그 작은 체구에 손가락을 펴 허공 중에 휘저으며 벌들에게
호령하던 그 위풍당당한 모습! 벌의 피라미드에서 신속하게 아버지의 명
령을 하달 받아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동료들에게 전달하던 그 근면한 사
제들! 영화처럼 전개되던 그 흥미진진한 장면을 나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돌격하라! 전진하라!”
“춤추라! 노래하라!”

“내 너희에게 영원한 축복을 내리노니, 자손만대 행복할 지어다.”
“사랑하는 나의 벌들아, 너희의 행복을 마음껏 구가하라!”
아버지의 이런 호령들이 아직 귓가에 쟁쟁하다. 아버지가 성공했더라면,
나는 그 뒤를 이어 벌의 신으로 추앙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영
광이 당대에 그친 것이 나로서는 못내 아쉬웠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쌓아
놓은 그 큰 공적이 바벨탑처럼 일순간에 무너진 것이 너무 억울했다.
그래서 나는 생각 끝에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기로 결심했다. 나에게
는 비장의 문명 컴퓨터, 가장 진보된 꿀벌 문명의 총체적 정보가 들어있
는 이 봉밀상자가 있다. 꿀벌의 신으로 등극할 수 있는 열쇠가 내겐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맨 첫날 아버지가 그러했듯, 나는 우선 여왕벌을 납치해 가두었다. 그리
고 이들 집단에 새로운 문명을 전수시키기 시작했다. 아버지와는 달리, 나
는 우선‘조직을 위한 희생의 당위성’을 주지시킬 것이다. 그리고 또, 신
이 존재하는 한, 정확히 말해 내가 존재하는 한, 꿀벌의 세계는 멸망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시킬 생각이다.
궁극적으로 우리 일가는 벌들의 세계를 진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번에도 나는 아버지처럼, 이들의 지능을 개발하고, 이들에게 역사와 문
화를 가르치며, 종교와 전쟁이론을 숙지시키고, 경작술과 연장 쓰는 법을
전수할 예정이다. 고작 몇 달밖에 되지 않는 벌의 수명을 대폭 늘리고, 벌
에게도 여가문화를 보급할 생각이다.
이 과정에서 내 의지에 대항하는 자들은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
건 순전히 벌들의 행복을 위해서이다. 아버지의 실패는, 이런 대항자들을
방치함으로써 비롯된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저항세력을 방치하면 봉
본주의 사상이 확산되면서 저들의 신(神)인 나를 부인하는 못된 풍조가
또다시 널리 퍼질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내 자비로운 의지에 대항하는
자들은, 저들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제거되어야 옳다. 또한 지나치게 개체

의 가치를 인식시키다보면 전쟁터에서의 죽음을 거부하는 이기적인 풍토
가 싹틀 것이므로 그것 또한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개체는 단지, 조직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다시 말해, 조직의 뜻을 거부하고 신을 부인하는 자
들은, 벌들 세계의 행복과 진화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므로, 나는 이
들을 강력히 응징할 수밖에 없다.
이 새로운 벌들도 나의 언어를 이해하기 시작했으며, 나의 명령에 순종
하고 있다. 아까도 말했듯, 아직 아버지의 단계에까지 이르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벌떼들을 몸에 감고 있는 수준은 되며, 제식동작과 같은 기초적인
훈련은 마친 상태이다. 우리 아버지도 맨 처음 여기에서부터 벌들의 진화
를 도모했던 것이니, 아버지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
할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벌의 신으로 등극할 옥새를 가지고 있다. 봉밀상자
가 그것으로, 여기에 수록된 정보의 양과 질을 조작해 꿀벌의 문명을 획
기적으로 발전시킬 생각이다.
나는, 나의 성공을 확신한다. <끝>
(한국소설 2003년 6월호 재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