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뫼 호수별 보기

46호2016년 [동화] 청대산의 소나무 -마지막 회- / 이희갑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220회 작성일 16-12-09 16:39

본문

[ 동화 ] 이희갑


장편 동화 「청대산 소나무」를 이번호로 끝을 맺는다.

고향의 고향을 지킨다. 사람은 떠나도 나무는 늘 그 자리에 있으니까. 청대산 소나무도 청대산 시의 글곡의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살아갔다. 또한 청대산 시에서 자라고 크던 많은 아이들에게 정신적 교감과 더불어 '큰 바위 얼굴'처럼 꿈과 이상을 넌지시 주었다.

세월이 흐르고 모든 것이 편리한 세상이 되어도 청대산 시에사는 아이들이 그런 나무 하나늘 만나지 못하고 커간다면 너무나 아쉬운 일이 될 것이다. 필자가 이런 동화를 쓸 수 있다는 자체가 어릴 때 청대산 소나무와의 만남이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이 알겠지만 청대산 시는 바로 속초를 모델로 했다. 속초는 참으로 고난과 질곡의 세월을 꿋꿋이 견디어 온 도시이다. 아무쪼록 청대산 시 아이들이 아름다운 자연이 주는 신성함과 거룩함. 그리고 사랑과 희망을 키우며 청대산 소나무처럼 훌륭하게 자라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이제까지의 줄거리


선유는 아버지를 따라 청대산으로 간다. 지난봄 청대산에 큰 불이 났다.
아빠는 청대산이 불타는 걸 보고 무척 안타까워했다. 청대산은 아빠의 어린 시절, 자라고 생각하고 꿈을 키우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직장 문제로 쉽게 청대산에 가지 못하는 아빠는 산불이 난 뒤에는 더욱 청대산을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 연휴를 맞아 가족을 데리고 청대산을 향해 떠난다.


선유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 아빠로부터 청대산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가난하여 먹을 게 별로 없던 시절, 청대산에서 칡을 파던 일은 평생 아빠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주는 일로 자리 잡는다. 또한 당시 가뭄으로 농사를 짓지 못하는 농촌에 물을 찾아 구덩이를 파던 봉사활동 이야기가 있다. 봉사활동이 끝나면 아이들은 눈앞에 우뚝 선 청대산으로 향하곤 했다. 청대산에는 칡이 참 많았다. 굶주림으로 살아야 했던 시절 칡도 하나의 먹을거리로 중요했던 시기였다. 선유 아빠인 민호는 친했던 네 친구들과 함께 청대산 산속에서 가재를 잡다가 청대산 정상의 소나무 아래까지 가서 놀곤 했다.


청대산 정상에는 다섯 그루 소나무가 있었다. 산 아래에서 보면 마치 거대한 수사슴의 늠름한 뿔처럼 보이는 소나무들이었다. 그래서 청대산의 소나무는 청대산 아래 사는 사람들 마음속에 늘 하나의 표상처럼 인식되었다.


민호는 친구들과 파온 칡을 먹으며 청대산 소나무 아래에서 나른한 낮잠을 즐긴다. 청대산 나무 아래는 봉사활동과 칡 파느라 지칠 대로 지친 아이들이 단숨에 깊은 잠으로 빠지는 마법이 있었다. 솔솔 풍기는 솔 향에 쏴아 하는 바닷소리까지 청대산 소나무 아래는 하늘과 바다를 통하는 문이 있었다. 소나무 아래 자리를 누운 아이들은 얼굴 위로 거대하게 뻗은 소나무를 바라보고 우우웅 하며 소리를 내는 소나무의 소리를 귀담아들었다. 청대산 소나무들은 무엇이나 다 알고 있었다. 우우웅 소리가 날 때 자기의 생각을 떠올리면 청대산 소나무는 곧 그곳으로 데려가는 놀라운 마법의 힘이 있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나무 아래에서 생각에 잠기곤 했다.


민호는 아직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았던 청대산 마을에 정착하게 된 아버지를 떠올렸다. 청대산 마을은 한국전쟁 전에는 북한에 속했지만 한국이 수복한 상태였다.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아 휴전선 근방에서는 전투가 계속 중이었다.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한국군과 북한군의 치열한 전투의 광경이 청대산에 올라서면 멀리 보이곤 했다. 민호 아빠는 국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있었다. 민호는 미군들이 지나가는 길에 서서 ‘헬로’를 외치면서 얻은 코끼리 인형을 소중히 간직하게 된다.


청대산 마을에 참담한 해난 사고가 난다. 현수는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아빠를 생각했다. 갑작스럽게 닥친 돌풍은 현수의 가정에 큰 불행을 가져왔다. 불과 일 년 전에 일어난 일이라 현수의 슬픔은 그만큼 컸다.
그동안 소외되었던 청대산 마을이 해난 사고로 정부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을 알아채고 청대산 마을을 시로 승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태영이 아빠가 그 일에 앞장섰다. 물론 시 승격은 여러 각도에서 검토되어 된 일이겠지만 태영이는 해난 사고 이후 생겨난 나라의 관심 덕이었다고 생각했다. 태영이는 진심으로 현수를 위로한다. ‘현수야, 너의 아빠의 죽음으로 청대산은 시가 되고 우린 청대산 시민이 되었어.’ 하며 속삭인다.



14. 우리 곁을 떠난 청대산 소나무


미시령 오르는 길은 초록의 물결이다. 양쪽으로 쭉쭉 솟은 봉우리들 사이로 초록의 물결이 출렁거렸다. 초록 물결을 타고 바람이 날아왔다. 버스에서 내리면 바로 초록색으로 물들 것 같았다.


선유는 잠시 밖을 내다보며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는 신비함을 느껴보았다. 싱그러운 초록 바람을 들이마시기라도 하듯 선유는 코를 벌름거렸다.


굽이굽이 산줄기 옆을 끼고 버스가 달렸다. 버스는 점점 고개가 높아지자 안간힘을 쓰며 오르고 있었다. 산허리를 돌 때마다 새로운 산줄기가 흥미롭게 나타났다. 초록빛 색깔이 산마다 계곡마다 넘쳐났다.


잠시 후, 고개 정상에 올라섰다. 갑자기 눈앞이 확 트였다. 양쪽 좌우에는 설악산 줄기가 솟아있었지만 눈앞으로는 넓은 바다가 보였다. 그리고 바다를 낀 청대산 시가 다소곳이 내려앉아 있었다.


“미시령 정상이야. 여긴 바람이 무척 세니 날아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
버스가 잠시 정차하고 사람들이 내릴 때 아빠는 선유에게 짓궂은 농담을 했다.


“선유야, 나 꼭 잡아. 설마 우리 둘이 날아가면 니 아빠 어떻게 하나 보게.”
엄마의 반격이 만만치 않았다. 아빠는 웃으며 엄마와 선유를 양쪽 팔로 껴안고 미시령 전망대로 갔다. 미시령 길 골짜기 너머로 펼쳐진 청대산 시의 풍경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미시령 고개를 내려갈 때는 정말 놀이동산 롤러코스터는 저리가라였다. 굽어지고 휘어진 길을 버스는 엉금엉금 기듯이 내려갔다. 버스에 탄 사람들은 이리저리 쏠리는 몸을 바로 잡으며 오뚝이가 되려고 바빴다. 그렇지만 버스가 산비탈을 한 번 꺾어 돌아가면 나타나는 미시령 계곡을 보는 재미는 아슬아슬하기도 떨리기도 했다. 설악산의 높고 낮은 봉우리들이 기다랗게 줄을 서서 선유를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벼랑길 아래로 넓은 산등성이가 펼쳐져 있고 융단을 깔아놓은 듯 초록 나무들이 온통 산을 뒤덮은 풍경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버스가 급경사를 한번 틀고 돌자 우람한 울산바위가 와락 달려드는 것처럼 가까이 보였다.


“우아, 엄청 험한 고개네.”
“아마 내년쯤에는 이 고개를 넘는 일은 별로 없을 거야.”
아빠가 뜬금없이 말하자 엄마가 금방 이어받았다.
“선유야, 저기 내려다봐, 무슨 공사하는 거 보이지?”
선유는 버스가 산허리를 돌아갈 때 목을 쑥 내밀어 밖을 내다보았다.
“이제 미시령은 터널이 뚫려.”
엄마 말에 아빠가 조금은 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름다운 미시령 길, 위험한 미시령 길. 곧 추억 속으로 사라지게 되겠지.”
버스가 고개를 거의 내려올 때 선유는 다시 아빠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 물었다.
“아빠, 현수, 태영이 아저씨 말고 다른 아빠 친구들은 얘기는 없어요?”
“글쎄.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때가 마지막이야.”


아빠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빠 친구 다섯은 항상 붙어 다녔다. 청대산 소나무 아래서 나름대로의 꿈과 희망을 말하며 칡을 맛있게 씹기도 했다. 거대한 청대산 소나무 형제들처럼 다섯 친구들은 늘 변함없는 우정을 쌓아갔다.


“중학교 졸업반이 되자 우린 다섯이 한꺼번에 만나는 일이 점점 어려워졌어. 그리고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 정훈이는 대전으로 이사 갔지. 정훈이 아버지가 대전으로 발령 났기 때문이야. 물론 현수도 곧 서울로 직장을 찾아 떠났고,”


아빠와 태영이, 형근이 셋은 청대산 시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지만 진학을 위해 아빠와 태영이는 고향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청대산 시를 떠난 친구는 형근이었다. 형근이 가족은 브라질로 이민을 떠났다.


“그러나 우리가 청대산 소나무를 완전 떠난 건 아니었어. 어디에 살던지 기회가 될 땐 각자가 알아서 청대산 소나무를 찾았지. 연락이 되는 친구와 같이 오기도 하고.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청대산 소나무들이 변하기 시작하고 우리도 청대산에 갈 수 없는 날이 왔지.”


미시령을 다 내려온 버스가 조금 더 달리더니 갑자기 멈췄다.
“우린 여기서 내려야 해.”
엄마가 안내양이나 되는 것처럼 소리쳤다. 선유네 식구와 몇몇 사람이 버스에 내렸다. 선유와 아빠는 앞장서 가는 엄마를 따라갔다.
“여기 30년 전통 음식점이 아주 맛 끝내줘.”
엄마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걸어가자 아빠와 선유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웃다가 엄마 뒤를 따랐다.
식당 안은 한가했다. 엄마는 종업원을 부르더니 뭔가 귓속말로 속닥속닥거렸다. 선유는 민망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여 인상을 짰다.
‘어휴, 완전 주책.’
“아빠. 청대산 소나무들이 변했다는 건 무슨 말씀이에요?”
선유가 아까 중단되었던 말을 꺼냈다.
“글쎄. 변했다기보다는 슬픈 일이지.”
다섯 그루의 청대산 소나무는 선유 아빠가 중학교 졸업할 때 네 그루가 되었다.
“매일 쳐다보던 다섯 청대산 소나무 모습이 어느 날 달라진 거야. 우린 너무 놀랐지. 쌍안경으로 봤지만 다섯 그루가 있어야 할 그곳에 네 그루만 보인 거지. 우린 학교 끝나기가 무섭게 청대산에 올라갔었어. 정말 청대산 소나무는 네 그루만 있었어. 그런데 하필 세 번째 소나무가 누가 베어 간 거야. 도벌(산의 나무를 몰래 베는 걸 말함)이지. 현수가 칡 캐러 갔을 때 붙잡고 울던 그 나무가 사라졌으니 현수 마음이 어땠겠니. 참 슬피 울더구나. 아빠를 잃고 한참 괴로워하던 현수였으니까. 현수는 잘려진 소나무 그루터기를 쓰다듬으며 한참을 소리 내어 엉엉 울었지. 우린 소나무 없어진 사건보다 우는 현수를 달래기 바빴지. 아빠 잃고 슬픔을 달래가던 현수에게 그 일은 큰 상처가 된 거야. 청대산을 내려올 때 우리도 모두 엉엉 소리 내고 울며 내려왔지. 누가 보면 꼭 우는 시합에 나간 사람처럼 말이야.”


현수는 그 후에도 오랫동안 슬퍼하며 지냈다고 한다.
“참, 현수에게 왜 세상은 그렇게 가혹했던지.”
아빠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눈이 붉어지며 촉촉해졌다. 선유도 눈물이 핑 돌았다.


그게 다섯 청대산 소나무 형제의 첫 이별이었다. 현수 아저씨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가정 형편 때문에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못했다. 상회에 나가 일하는 현수를 민호, 태영이, 형근이는 늘 우정으로 감싸 주었다.


잠시 식당 창가에 참새 떼들이 날아와 짹짹거리며 시끄럽게 떠들다 갔다. 엄마는 아예 주방으로 들어가셨다.
선유는 그다음 소나무가 없어진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아빠가 여전히 슬픈 표정을 하고 있기에 말을 꺼내지 못했다.


“너, 다음 소나무가 궁금하지?”
아빠가 선유의 마음을 알고 먼저 말을 꺼냈다. 선유는 감췄던 속내를 금방 드러내며 머리를 끄덕였다. 아빠는 금방 표정이 달라지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청대산 소나무가 또 하나 사라질 때는 정훈이가 이사를 가고 현수가 서울로 직장을 찾아간 바로 그달에 있었지. 참 어이없는 일이었는데 어떤 농부 한 사람이 집을 짓는 데 쓴다고 허락도 없이 소나무를 베어버린 거야. 그리고 벤 소나무를 당당하게 싣고 가다가 경찰에게 잡힌 거야. 물론 누가 신고를 했지.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며 산에 있는 나무를 그냥 막 베어도 되는 줄 알았다는 거야. 어이없는 일이지. 산의 나무를 함부로 도벌하는 건,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데 그런 걸 자긴 모른다는 거야. 완전히 배 째라고 내미는 식이었지. 나중에 그 농부는 처벌을 받았지만 한 번 베어진 소나무는 다시 되돌릴 수 없었어.”


그 소나무는 다섯 형제 소나무 중 둘째로 큰 소나무였다. 약간 휘어진 몸통에 튼실한 가지를 제일 많이 뻗었고 무성한 솔잎 사이로 바다의 파도소리가 가장 크게 나는 소나무였다. 그 소나무 아래에 서면 마치 바닷가 자장가 소리가 들리는 착각이 들었다는 아빠는 사실 그 나무를 제일 좋아했다고 한다.


아빠는 아주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선유도 너무나 아쉬웠다. 아빠가 젤 좋아했던 소나무가 그렇게 허망하게 일생을 마치다니. 지금 들어도 섭섭하고 분하기까지 했다. 선유가 얼굴이 붉어지고 열 받은 사람 같은 표정이 되자 아빠는 눈치채고 턱으로 엄마 쪽을 가리켰다. 마침 식당 아주머니와 엄마가 각각 쟁반에 음식을 가득 담아 오고 있었다.


“짜잔, 특별 요리 배달입니다.”
엄마가 또 우스꽝스런 말을 날렸다.
“우아”


아빠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빠가 젤 좋아하는 순두부 요리 세트가 가득 담겨져 있었다. 엄마는 놀라는 아빠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입을 삐죽 내밀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은 엄마가 가장 행복할 때 보여주는 표정이다. 알고 보니 붙임성 좋은 엄마가 청대산 시에 오고 가면서 어느새 이 집 식당 주인아주머니와 친하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던것이다.


‘하여튼 우리 엄마. 알아줘야 해,’


선유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선유 가족은 오랜만에 순두부 요리 세트를 맛있게 먹고 식당을 나왔다. 식당에서는 청대산 서쪽 자락이 보였다. 물끄럼이 산을 바라보는 아빠의 뒷모습이 왠지 힘이 빠져 보였다. 그렇게 처량할 수가 없었다.


‘짙은 녹색으로 덮여 있어야 할 청대산에 화마(화재를 마귀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가 훑고 간 검은 띠 자국, 뭔가 듬성듬성 털 빠진 동물의 등처럼 보이는 청대산, 아빠는 그걸 보고 슬퍼하는 거야.’


선유가 아빠의 손을 잡았다. 아빠는 여전히 청대산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잠시 후, 부른 택시가 왔다. 엄마가 얼른 아빠 팔짱을 끼고 택시 안으로 들어갔다. 택시가 출발했다.



15. 날아다니는 불덩어리


“안녕하십니까?”
“오, 강 선배님. 오셨습니까?”
아빠가 청대산 입구에 있는 관리사무소 문을 열자 한 아저씨가 반갑게 맞이한다. 아빠는 아저씨와 인사를 나눴다. 아저씨와 아빠는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라고 했다.
“선배님 오신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저씨는 커피를 타면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오, 준배 씨 커피 맛은 최고야 최고.”
엄마가 또 호들갑을 떤다. 그러고 보니 엄마도 잘 아는 아저씨인가보다.

“형수님의 말씀은 언제 들어도 사람을 신 나게 합니다.”
아저씨는 웃으며 엄마 옆에 있는 선유를 바라보았다.
“아, 내 아들이야. 선유야, 인사드려. 청대산 지킴이 아저씨란다.”
“안녕하세요. 강선유입니다.”
선유는 벌떡 일어나 인사를 했다. 아저씨는 선유의 손을 살짝 잡았다. 아저씨 손바닥 굳은살이 아주 거칠게 느껴졌다.
잠시 후 아버지와 지킴이 아저씨는 청대산 이야기로 꽃피웠다.
“그러니까 선배님도 잘 아시잖아요. 여긴 봄철만 되면 바람이 심하게 부는 걸요.”
“물론이지요, 봄이 되어 땅은 더워지는데 설악산은 아직 흰 눈으로 덮여 있지. 거기에다 바닷물은 여전히 차가우니까 엄청난 기압 차이가 나지. 그러니 바람이 셀 수밖에요. 하여튼 이곳은 정말 센바람이 많이 분다니까.”
아빠 대신 엄마가 줄줄 청대산 바람을 꿰고 있었다.
“형수님, 이젠 여기 날씨에 대해선 박사가 다 됐습니다. 허허.”
준배 아저씨가 너털웃음을 웃었다. 아버지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어머니에게 보냈고 선유는 왠지 얼굴이 가려워지는 게 가만히 있기가 불편했다.
‘하여튼 왕 주책’
그때 아주머니 몇 분이 찾아왔다. 엄마는 눈웃음치며 일어섰다.
‘이제 내 일을 해야지.“


엄마는 사실 엄마의 일이 따로 있었다. 청대산 아랫마을에 오면 그동안 친했던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일이다. 아주머니도 친구이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친구다. 엄마는 빈손으로 청대산 아랫마을에 오는 때가 없다. 떡이나 식혜, 맛 나는 반찬을 만들어 오거나, 혹은 생활용품을 사 가지고 청대산 아랫마을로 온다. 그게 벌써 몇 년째다. 엄마는 청대산 시가 고향은 아니지만 선유 아빠를 따라오다 보니 청대산 시민이 다 되었다. 엄마는 저녁때 다시 만나기로 하고 아주머니들을 따라 아랫마을로 가셨다.


“선배님. 정상에 한 번 가보셔야죠.”
준배 아저씨 자동차가 부르릉거렸다. 아빠와 선유는 준배 아저씨의 차를 타고 청대산을 향해 싸리재란 고갯길로 올라갔다.


사실 아빠는 청대산 소나무 복원 동아리 회원이다. 청대산 아래에서 살다가 외지로 나간 사람들 중에 ‘고향 사랑’ 뜻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다. 전국적으로 200여 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는데 선유 아빠는 청대산 조림 팀 팀장을 맡고 있다. 선유 아빠는 선유가 다섯 살 때부터 맡은 조림 팀 사업을 꾸준히 하면서 많은 소나무 묘목을 청대산에 심었다. 청대산에 조림(나무를 심거나 씨를 뿌려 숲을 만드는 일)이 시작될 때 학자와 산림청 연구원들에게 생태 조사를 부탁했다. 그리고 청대산에 서식하기 알맞은 나무 종류를 선정하여 조림 준비를 마쳤다. 청대산의 조림은 청대산 시와 환경단체 및 시민단체들이 계획을 가지고 꾸준히 조림 사업을 하고 있었지만 아빠의 동아리에서도 그들의 도움을 받아 청대산 소나무를 복원하는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갈참나무류와 오리나무, 자작나무가 우거지고 한때 소나무 숲으로 대낮에도 어두웠다는 청대산 나무들은 한국전쟁 이후 무분별한 벌목과 도벌이 계속되면서 황폐하여 갔다. 청대산은 쓸 만한 나무들이 거의 사라지고 관목(나무의 키가 작고, 원줄기와 가지의 구별이 분명하지 아니하며 밑동에서 가지를 많이 치는 나무로 진달래ㆍ앵두나무 따위와 떨기나무 종류가 있다.)들과 덤불만이 제멋대로 자라는 산으로 변했다.
선유 아빠는 일 년에 한두 차례씩 청대산에 내려와 일을 하고 가곤 하는데 이젠 아빠의 일에 대해 이해할 만해진 선유를 처음 데리고 온 것이다.


선유는 청대산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아빠 친구들이 칡을 캐던 일을 떠올렸다. 하지만 아빠의 얼굴은 찡그리다 못해 울상을 짓고 있었다. 지난봄에 일어난 산불의 시커먼 흔적이 아직도 여기저기 생생히 남아 있었다.
“휴-”
아빠는 한숨을 쉬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아빠 얼굴에는 무척이나 속상한 모습이 그대로 나타났다.
“선유야, 여기서 내려서 걸어 올라갈 거야.”
준배 아저씨가 싸리재 정상에 차를 세웠다. 세 사람은 청대산 서쪽 능선을 타고 걸었다.
“산불 나기 전과 지금은 너무나 달라.”
아빠가 말했다. 준배 아저씨는 괜히 미안한 얼굴을 하며 아빠를 쳐다보았다. 아빠는 말없이 묵묵히 걸었다. 선유는 아빠의 눈치를 살피며 뒤를 따랐다.
“여기가 정상이야. 청대산 정상.”
아빠의 말에 선유는 너무나 놀랐다. 정상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빠가 말하던 청대산 소나무가 정말 사라져버렸다는 게 실감났다.
“아빠, 그럼 나머지 세 그루 소나무는 어떻게 됐는지 말해 주세요.”
아빠가 선유를 내려 보았다. 그런데 아빠는 지금 그 대답을 할 기분이 아닌가 보다.
“아니에요.”
선유는 슬그머니 말끝을 흐렸다.
그때 준배 아저씨가 산 아래를 가리키며 말을 꺼냈다.
“선배님. 저 아래를 보세요.”


청대산 아래로 쭉 이어진 산비탈에는 산불의 자국들이 커다랗게 나 있었다. 마치 우리 몸에 큰 상처가 난 것처럼. 산불이 난 곳에는 아직도 타다 만 나무들이 그대로 서 있었다. 검게 타 죽은 나무들의 모습은 앙상하기 그지없었다.

“산불이 굉장했습니다. 마침 초속 20 미터가 넘는 강풍이 불어 불덩이가 사방으로 휙휙 날아다녔지요. 불덩어리가 떨어진 곳에 새로운 불을 낸 아주 고약한 산불이었지요.”


준배 아저씨의 말을 선유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청대산에 산불이 났을 당시 아빠는 TV에 앉아 꼼짝하지 않고 바라보던 일. 선유도 아빠 어깨너머로 불타고 있는 청대산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청대산의 불덩어리는 바람이 부는 곳이면 어디든지 날아가 떨어졌다. 앞산에 떨어지면 앞산이 불이 붙고, 마을에 떨어지면 마을이 불탔다.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간 불덩어리는 거리가 멀어 여기는 불이 나지 않겠지 하는 사람들에게 불벼락을 안겨 주었다. 자동차 길 위에 불덩어리가 떨어지고 전신주에 불덩어리가 달라붙었다. 곳곳에서 타오르는 불꽃과 연기는 순식간에 청대산 시를 공포의 도시로 만들어 버렸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고 이리 뛰고 저리 뛰었고 집이 불에 타오르자 그냥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강하게 부는 바람에 자칫 나섰다가는 난데없이 날아오는 불덩어리에 목숨까지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불덩어리는 앵앵대며 달려온 소방차에까지 달라붙었다. 불덩어리가 날아가는 곳 어느 곳도 성한 데가 없었다.


청대산 시는 불길이 빠른 속도로 퍼지자 주민 대피령을 내렸고 주민들과 학생들은 가까운 초등학교로 긴급 대피하기도 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심한 연기가 청대산 시를 가득 덮었다. 주요 교통 도로까지 막혀 청대산 도시는 교통이 몇 시간이나 마비가 되었다. 불이 나자 경찰과 공무원, 소방대원과 일반 주민 이천 명이 넘는 사람들과 수십 대의 소방차, 산림청, 군용헬기 15대를 동원해 불을 끄는 작업을 폈으나 강한 바람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정신없이 부는 바람에 간판이 떨어지고 나뭇가지가 꺾였다. 담장이 무너지고 기왓장이 떨어져 나갔다. 청대산에 내린 재앙은 오후 내내 이어지다가 해가 저물고 바람이 잦아들면서 진화에 가닥을 잡기 시작했다.


이날 청대산에서 시작된 산불로 오십여 채의 집이 불에 탔고 주민 이 천여 명이 대피를 했다. 이재민(재해를 입은 사람)도 거의 이백 명에 가까웠다.
“그런데 선배님. 이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강풍으로 온 산불이 오히려 산 전체를 태우는 일은 막았습니다.”


그렇다. 산불이 미친 듯이 날뛰며 강풍이 이리저리 불덩어리를 사방으로 던져 버려 비록 마을도 불타고 교통도 마비되었지만 차분히 타는 산불과 달라서 바람이 멎자 불타는 곳을 집중 진화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산 전체가 홀랑 불에 타는 걸 막았다는 말이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불씨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밤이 되자 다시 피어오른 불씨는 청대산 허리를 가로지르며 타고 들어갔다. 불은 띠를 만들어 넓은 지역으로 퍼지며 타들어 갔다. 정상을 넘어 건너편 산자락까지 불길은 맹렬히 타들어 갔다. 소방대원과 주민들이 온 힘을 다해 진화작업을 하여 결국 불길을 잡았지만 그동안 <청대산 소나무 복원사업 추진위원회>가 심어 온 많은 어린나무들이 불에 타거나 말라죽었다.


화마의 상처가 곳곳에 남은 청대산을 보고 아빠는 허탈감을 넘어 절망감까지 들었다. 선유 아빠는 한참을 여기저기를 살피더니 힘이 빠진 모습으로 터덜거리며 걸어왔다. 아빠는 아직도 검댕이가 군데군데 보이는 바닥을 내려 보며 쪼그려 앉았다.
“선유야, 여기가 다섯 소나무들이 서 있던 곳이야.”
아빠의 목소리에 그리움이 가득했다. 선유는 아빠의 목소리에서 쓸쓸한 생각이 묻어 있음을 느꼈다. 들었다. 우리 아빠와 친구들이 꿈 많던 시절. 서로 교감(서로 어떤 느낌을 받아 서로 마음이 통함) 했던 소나무들은 사라지고 없다. 마치 아빠의 친구들이 다 헤어져 버린 것처럼. 선유는 아빠 옆에 조용히 쪼그리고 앉으며 말했다.

“아빠, 나머지 세 그루의 소나무 이야기를 해주세요.”
아빠는 나무 그루터기 자국이 있던 곳이라고 말하며 선유에게 손짓하고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선유와 준배 아저씨도 같이 앉았다. 아빠는 세 그루의 소나무 이야기를 꺼냈다.



16. 비바람과 해일


“그 해가 바로 고등학교 졸업반이었지.”
선유 아빠는 선유와 준배 아저씨를 데리고 아빠의 그 시절 시간 여행을 떠났다.


“태영아 태영아,”
민호가 태영이 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뚜뚜뚜 -”
전화기에서는 고장 신호음이 들렸다. 몇 번을 전화 걸어도 불통이다. 밤새 불던 비바람이 조금은 약해진 듯했으나 여전히 창밖으로는 거친 빗소리가 났다.
“이거 야단났는데.”
한밤중에 집을 나가는 아버지의 모습도 심상치 않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아버지는 누군가 데리러 온 사람의 뒤를 급히 따라 나갔다.
“어머니 어찌된 일이에요?”
민호가 거실에 우두커니 서 있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시청에서 사람이 왔어. 비상사태래.”
“네?”
민호는 뜬금은 어머니 말을 되물었다.
“지난밤에 청대산 시내가 난리가 났는 가 봐. 한밤중에 폭풍이 불어 닥

쳐서 시내 여기저기 난리가 났단다. 전화도 안 되어 사람이 너희 아버지 데리러 온 거야.”


그러고 보니 밤새 비바람이 치는 소리에 민호는 잠을 설쳤다. 이건 보통 비바람이 아니었다.
“아니 여름도 아니고 늦은 가을에 이런 태풍은 처음 보네.”
날씨 때문에 무슨 행사가 있었다는데 취소하고 일찍 들어 온 아버지의 말이었다. 민호 아버지는 시청에서 대민지원에 관한 책임을 맡고 있었다. 민호와 민호 엄마는 아버지가 나간 뒤 더 이상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밖은 비바람이 점점 더 강해지면서 여기저기 쿠당탕 탕탕하는 소리가 났다. 간판이며 길에 있던 물건들이 날아다니는 소리다. 위잉위잉 사이렌 소리 같은 전깃줄 소리가 귀를 거슬리게 했다. 태풍도 그런 무시무시한 태풍이 없을 정도로 사납고 거친 비바람이 밤새 불고 있었다. 전등불도 껌벅이더니 새벽녘엔 전기마저 끊어져 버렸다.


뜬눈으로 새다 보니 어느덧 뿌연 빛이 창에 어른거렸다. 아무리 진한 어둠이라도 아침이 오는 걸 막지는 못하는가 보다.
“엄마, 여기가 이런데 바닷가는 더 안 좋겠지요?”
민호는 형근이를 떠올리며 말했다.
“글쎄다. 파도까지 높이 친다면 바닷가 쪽은 위험하지 않겠니?”
민호는 엄마의 말에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형근이네 집은 바로 바닷가 옆이다. 조금 큰 파도만 쳐도 옆 담까지 파도물이 튕기는 곳이다.
“이거 큰일 나는 거 아냐?”
민호는 가슴이 조려 참을 수가 없었다. 아침 시간이 지나니 거친 빗줄기는 많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바람은 여전했다.
“엄마, 태영이네 집에 갔다 올께요.”
“얘, 지금 밖에 나가면 위험해.”
엄마가 말릴 새도 없이 민호는 태영이네 집을 향해 뛰었다. 태영이네 집은 계단을 한참 올라가야 하는 곳에 있다.
“태영아, 태영아.”
창문이 열렸다. 약간은 부스스한 표정의 태영이 얼굴이 보였다.
“민호야, 웬일이야.”
“야, 태영아, 형근이가”
“뭐? 형근이가? 형근이가 어쨌단 말인데?”
민호의 말을 다 듣지 않고 성질 급한 태영이가 되물었다. 얼굴이 금세 긴장하면서 굳어졌다.
“형근이가 어쨌다는 게 아니고.”
민호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자 태영이가 밖으로 달려 나왔다.
“형근이가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형근이네 마을이 걱정이 돼서……”
“뭐라고?”
“바닷가잖아.”
“근데.”
“큰 파도가 왔다면 형근네 집이”
민호가 말을 하다말고 끊었다. 태영이 얼굴에 두려움이 확 끼었다.
“그렇구나. 맞아, 형근이네 집은 바닷가와 가까운데.”


잠시 후, 민호와 태영이는 형근이네 집으로 가는 길을 향해 뛰어갔다.
사실 지난밤 청대산 시에 밤새도록 비바람이 친 것은 이상한 기상 현상이었다. 태풍도 사라져야 할 시기인 늦은 가을에 여름 태풍보다도 더 강하고 사나운 폭풍이 청대산 시를 휩쓸고 간 것이다. 어제 오전부터 오늘 오전까지 딱 하루였지만 그 하룻밤이 청대산 시에 공포와 커다란 상처를 준 하룻밤이었다.


어제 오전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잠깐 내리다 말 가을비로 생각했는데 점점 한낮으로 가면서 기상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천둥 번개가 하늘에서 요란하게 터지기 시작했다. 청대산 시 하늘에 엄청난 먹구름 회오리가 일어났다. 하늘은 점점 까맣게 어두워져 가고 있는데 번쩍거리며 하늘을 가르는 번개 섬광이 요동을 쳤다. 번개 뒤에 따라오는 천둥소리는 청대산 시를 들었다 놓을 만큼 요란했다. 비바람은 거센 폭우로 돌변하여 주먹 같은 빗방울이 쏟아졌다. 불과 몇 미터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엄청난 비다. 그런 현상이 계속되면서 밤으로 이어졌다. 밤이 되자 서서히 바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잠자던 거대한 용들이 바다 속에서 살아나 꿈틀거리는 것처럼 바다는 산더미 같은 파도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상한 굉음이 들려오고 거대한 해일이 다가왔다. 한밤중에 밀어닥친 해일은 바닷가 마을을 완전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바다로 돌출되어 나온 마을도 다 덮쳤다. 마을을 덮친 바닷물은 마을 안으로 비집고 들어와 평소에는 바다와 거리가 있는 마을 안까지 밀고 들어왔다. 주택들은 물에 잠기고 곳곳에 물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잠을 자다 날벼락을 맞은 듯, 거리로 뛰어 나왔다. 정전이 된 깜깜한 거리에서 폭우를 맞으며 사람들은 우왕좌왕했다. 그 밤으로 통신이 끊어지고 모든 교통이 마비되었다. 청대산 시가 생긴 이래로 이런 자연 재앙은 처음이었다. 기이한 기상현상에 온 시민들은 두려움에 떨며 밤을 보냈다.


아침이 오자 사람들이 간밤에 일어난 일들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거리마다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렸다. 벽이 무너졌니, 물이 방안까지 들어왔니, 창고가 날아갔니, 사람마다 피해를 이야기하며 그 무서웠던 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우리 애가 집에도 들어오지 않았어요. 얘가 어딜 갔는지 몰라요.”
“우리 딸은 친구네 집에 공부하러 갔는데 지금은 소식이 없어요.”
사람들마다 간밤에 집에 들어오지 못한 가족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었다. 민호네 역시 아빠가 소식이 없다. 통신이 전부 마비가 되니 설령 옆집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말이에요. 저 건넛마을은 완전 쑥밭이 되었대요.”

이야기 중에 이 말은 민호의 머리를 띵하게 했다. 저 건넛마을은 바로 갯배(바다로 나누어진 마을을 이어주는 배)를 타고 넘어가는 그 동네. 형근이가 사는 동네를 말하는 것이다. 형근이가 사는 마을이 전부 물에 잠겼다는 이야기다. 아니, 물에 잠긴 정도가 아니라 완전 초토화(완전히 황폐해지고 못 쓰게 된 상태를 말함)되었다는 말이다. 민호는 마을 뒤편 언덕에 올라가 보았다. 물보라에 뿌옇게 보이는 건넛마을 앞바다에는 산더미 같은 파도가 치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런데 육지를 뒤엎을 만한 파도는 아니었다. 그런 파도는 이미 많이 봐 온 파도다. 그런데 마을이 쑥밭이 되다니. 실제로 가보지 않고는 확인하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확실한 건 형근이네 마을의 집들이 전에 보던 모습과는 달랐다는 점이다.


오후가 되면서 빗방울이 많이 가늘어졌다. 물통을 통채로 쏟아 붓던 빗줄기가 보슬보슬 보슬비로 내리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빗줄기는 더욱 가늘어지고 먹구름이 서서히 청대산 너머로 비껴가고 있었다.


민호는 엄마에게 허락을 받고 시청으로 달려갔다. 아빠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아빠는 시청 재해대책본부에 계셨다.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며 일하는 아빠를 만나보지 못하고 민호는 집으로 달려왔다. 우선 엄마에게 아빠의 무사함을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민호의 소식을 들은 엄마는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눈물을 닦았다.
“엄마, 아빠는 됐고, 형근이가 궁금해. 나, 갔다 올게.”
엄마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민호는 달려 나갔다. 민호는 곧 태영이를 만났다. 이제 민호와 태영이가 함께 달렸다. 형근이네 동네로 가는 길이 막혔다. 형근이네 집은 갯배를 타고 가야 하는데 갯배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갯배를 타는 곳에 사람들이 몰려와 갯배를 찾았다. 하지만 갯배 없이는 건너갈 수 없는 사람들이다.
“민호야, 돌아서 갈래?”

태영이의 말에 민호는 처음에 흠칫했다. 태영이 말은 청대산 항구 한 바퀴를 돌아서 가자는 말이다. 그건 걸어서 세 시간도 넘는 길이다. 선뜻 나설 일이 못된다. 태영이도 말을 엉겁결에 꺼냈지만 민호가 당황하는 걸 보자 이내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무슨 일 일어났을 형근이네를 생각하면 머뭇거릴 상황이 아니다.
“그래 뛰어가면 좀 빠르겠지.”


민호는 쓱 웃으며 태영이를 바라봤다. 태영이가 머리를 끄덕였다. 둘은 달리기 시작했다.
형근이는 작년에 아빠를 잃었다. 형근이 아빠는 일하다 갑자기 쓰러졌는데 끝내 의식이 돌아오지 못했다. 형근이가 졸지에 가장이 되었다. 물론 엄마와 여동생이 있었지만 남자로서 가장 노릇을 할 사람은 형근이 뿐이다.


민호와 태영이는 형근이네 집이 사고를 당했을 까봐 마음이 조급해졌다. 삼십 분 정도 뛰니 지쳐서 더 뛰기 힘들었다. 잠깐 거친 숨을 고르는데 길 건너 전파사 문에 달아 놓은 유선방송 라디오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어제 오전부터 오늘 아침까지 만 하루도 안 되는 시간에 청대산 시에는 거대한 폭풍과 해일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지금 현재 청대산 시의 모든 전화와 교통이 마비가 되어 자세한 소식을 알 수 없습니다. 새로운 소식이 들어오면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민호와 태영이는 서로 쳐다보았다. 불안이 가득한 표정을 서로 확인했다.
‘정말 생각하기 싫은 현실이 온 건 아닐까.’
민호는 입술을 깨물고 태영이는 코를 한 번 실룩거렸다. 둘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17. 탈출


온몸이 비에 젖고 땀에 젖은 민호와 태영이는 항구를 한 바퀴 넘어 돌아 형근이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까지 갔다.
<출입 금지>


경찰이 마을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경찰은 지금 마을 안은 너무 위험하고 빈집이 많아 범죄가 일어나기 쉽기 때문에 가족과 친척 외 사람들은 통제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민호와 태영이는 꼭 친구를 만나야 한다고 사정을 이야기를 했다. 아빠는 없이 어려운 일을 당하는 친구 가족을 우리가 나서야 한다고 경찰을 설득했다. 민호는 시청 다니는 아빠 신분을, 태영이는 청대산 시 승격 위원이었던 아빠 신분을 말했다.
“절대 안전에 주의해야 한다. 마을은 물이 들어차서 위험해, 건물도 무너지고 있어.”


경찰은 말해 주며 허락해줬다.
민호와 태영이는 형근이네 집을 향해 다시 달렸다. 마을은 정말 끔찍한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마을 큰길은 완전히 사라졌다. 초등학교 운동장은 수영장이 되었다. 길가에는 쓰레기 더미가 줄지어 쌓여 있었다. 물이 들어찬 거리와 골목엔 각종 물건들과 어구(고기잡이에 쓰는 도구)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아, 이럴 수가.”
저절로 입에서 소리가 나왔다. 가장 놀라운 것은 형근이네 집 방향으로 있던 주택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또 남아 있는 집들은 대부분 부서졌거나 폭삭 내려앉았다. 마치 전쟁 중에 폭격을 당하고 난 현장 같았다.
“와, 이건 완전 대 재앙이다.”
태영이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둘은 물이 정강이까지 찬 골목길을 걸어들어 갔다.
“어?”
둘은 동시에 소리를 지르고 그 자리에 섰다. 형근이네 집이 없어졌다. 형근이 집터 자리 뒤로 바다가 보일 뿐이다. 눈을 의심할 정도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아-”
그래도 형근이네 집 자리에 달려간 민호와 태영이는 구들장만 남아 있는 형근이네 집터를 보았다. 아주 깨끗했다. 완전히 집은 해일에 싹쓸이 된 것이다. 구들장 위로 바닷모래가 수북이 쌓여 있을 뿐이다.
‘형근이네 가족은 어떻게 되었을까.’


두 사람은 눈앞이 캄캄했다. 기가 막힌 현장에서 더 이상 말이 안 나왔다. 민호와 태영이는 휭 하니 보이는 바다를 보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바다는 아직도 커다란 파도를 앞세우고 밀고 들어왔지만 백사장을 더 넘지는 않았다.
“어 야, 너희들 거기서 뭘 해.”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다. 바다를 향한 얼굴을 뒤돌려 본 민호와 태영은 깜짝 놀라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형근이가 말짱히 서 있었다. 그것도 재난을 당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웃음 띤 표정으로. 정말 기가 막혔다.
“야, 너 뭐야.”


태영이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형근이 역시 생각지도 않은 친구들이 나타나자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민호가 벌떡 일어나더니 형근이를 껴안았다.
“임마,”
민호가 울자 태영이도 일어나 형근이를 껴안았다. 웃던 형근이도 비로소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셋은 한참 부둥켜안고 흐느껴 울었다. 한참

을 울다가 세 사람은 사라진 형근이네 집터 위에 앉았다.
“너 잘못된 줄 알았어.”


민호가 말을 꺼냈다. 태영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야. 괜찮아. 다 괜찮아. 피난 갔다가 지금 오는 길이야.”
형근이는 두 친구에게 지난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빠, 무서워, 무서워.”
엄마는 일 나가고 아직 들어오지 않은 집에 형근이는 두 여동생을 돌보고 있었다. 비바람은 더욱 거세졌다. 문풍지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창문이 털썩털썩거렸다. 밤이 되면서 비바람은 더욱 거세졌다. 형근이는 이런 날씨에 아직 엄마가 오지 않은 것이 걱정되었다. 그렇다고 무서워 떠는 동생들을 놔두고 엄마 마중 나갈 수는 없었다. 파도소리가 더욱 거칠고 요란하게 들렸다.


다른 날보다 엄마는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당연히 오늘 날씨 때문이었다. 오는 길에 벌써 넘치는 빗물이 길을 가로지르며 흐르고 있었고 낮은 지대 집들이 물에 차기 시작했다고 엄마가 말했다.
“꽈르릉 꽈릉”


전기가 나간 칠흑 같은 밤에 식구들은 방안에 우두커니 앉아 무서움을 삼키고 있었다. 번갯불이 번쩍번쩍일 때 서로 마주 대하고 있는 가족들의 공포에 질린 표정이 보였다.


밤이 깊어 갈수록 날씨는 더욱 미처 날뛰었다. 천둥 번개는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고 뒤따라오는 빗방울은 점점 굵어져 지붕을 뚫을 것 같았다. 바다에서는 파도 소리를 뛰어넘는 이상한 굉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파도가 집 앞까지 밀려오는 소리가 났다.
“내가 한 번 나가 보고 올게.”
형근이는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무언가 꼭 큰일이 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날씨가 사람 잡겠네.’ 형근이가 밖을 나오자 비바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형근이 몸을 휙 감아버렸다. 형근이는 다리에 힘을 주고 쓰러지지 않으려고 버텼다.
“헉!”
형근이는 바다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무리 어두운 밤이지만 괴물처럼 변한 바다는 알아볼 수 있었다. 보통 때 같으면 백 미터 정도 모래사장 너머에 있던 바다가 바로 코앞에 와 출렁거리고 있었다. 거기에다 바다에 산이 생겼는지 위아래로 솟아오르고 내려앉았다. 그러면서 일어나는 거대한 파도는 사람이 사는 집까지 와서 꺾어지고 있었다. 형근이는 무슨 힘이 저렇게도 거대한 파도를 육지로 내모는지 그 정체가 궁금했다. 보이지 않는 암흑 저 건너편에서 어마어마한 파도를 보내 육지의 집들을 깡그리 깔아 뭉길 것 같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형근이는 단방에 아주 위험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바다는 허연 이빨을 내밀고 점점 더 거인이 되어 쳐들어오는 괴물이 되어 있었다.
“아, 안 돼!”
형근이는 정신없이 방으로 들어 와 소리쳤다.
“빨리 짐 싸. 빨리.”
엄마와 누이동생들이 하얗게 질렸다.
“뭘 해. 지금 이 집이 날아간단 말이야.”
형근이는 해일이라고 판단했다. 순식간에 닥치는 해일, 쓰나미. 지금이 바로 형근이 가족 앞에 그 해일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때였다.
“꽈르릉”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형근이네 집 한쪽 벽이 푹 밀려 들어왔다. 뿌지직 하고 집이 비틀어지는 소리가 났다. 곧바로 벽에서 물이 새어들고 있었다. 집이 흔들거렸다. 마당으로 커다란 파도가 쓸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집 안으로 바닷물이 들어왔다. 해일이 이미 형근이네 집을 친 것이다.

“뛰어 나가!”
형근이가 소리쳤다. 엄마와 누이동생들은 손에 잡히는 것만 들고 집 밖으로 뛰어나왔다. 바닷물이 마당에서 제집에 온 것처럼 맴돌고 있었다. 집 밖으로 나오자 허벅지까지 바닷물이 차올랐다. 형근이가 앞장서서 달렸다.
‘이건 시작이야. 곧 더 무서운 해일이 들어닥칠 거야.’
형근이는 소리쳤다.
“달려. 달려. 높은 곳으로”
급하게 몸을 피하는 가족들 앞을 비바람이 사정을 봐 주지 않고 막았다.
“꽈다다닥 쿠웅”
형근이 귀 등으로 집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해일이 형근이네 집을 통째로 삼켜버리는 소리였다. 형근이의 빠른 판단이 맞아 들어갔다. 이젠 해일보다 빨리 벗어나야 한다. 잘못 얼쩡대다가는 물귀신이 되고 만다.
“더 빨리, 빨리 뛰어.”
형근이는 목에 피가 나도록 외쳤다. 다행히 형근이네 가족은 해일로 밀려들어 오는 물길에 떠밀려 큰 길까지 나왔다. 어두운 큰길에는 벌써 형근이네처럼 피난을 나와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높은 곳으로, 높은 곳으로.”
형근이는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이젠 가족들만 들으라는 소리가 아니었다. 사람들 모두에게 지르는 소리였다. 형근이네 동네는 한쪽이 바다이고 한쪽이 호수로 되어 있는 반도 같은 지형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바다에서는 해일 밀려들어 오고 호수는 넘쳐나서 완전히 동네가 잠기려고 하고 있었다. 빨리 대피하지 않으면 집이 삼켜지는 것 보다 사람들이 다 물에 잠길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달려라. 피해라.”
굉음이 이는 해일 소리, 폭우로 내리는 빗줄기 소리에 정신 빠진 사람들의 소리까지 범벅이 되어 큰길 위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주민들은 살길을 찾아 어둡고 무서운 비바람 속에서 죽을힘을 다해 높은 곳을 향해 뛰었다. 큰길이 끝나는 삼백 미터 지점에 반부두 고개라는 곳이 있다. 그곳은 제법 높은 곳이기 때문에 거기까지 달려가야 산다. 형근이는 자꾸만 떨어지려는 동생들 손을 잡고 뛰었다. 삼백 미터의 길이 그렇게 먼 길인 줄 몰랐다.
무사히 반부두 고개까지 왔다. 이미 반부두 고개는 피난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사람이 수없이 많이 모인 상태)를 이루었다. 비바람은 여전히 사람들을 괴롭혔지만 누구 하나 그 비바람을 피하거나 대항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마다 모두 넋이 나간 상태로 하염없이 비를 맞고 있을 뿐이다.
형근이는 막내 누이동생이 흐느껴 우는 것을 달래며 말했다.
“영이야, 이만하면 다행이야. 우리가 한 발짝만 늦었어도 죽었을 거야. 죽음에서 살아났는데 고마워해야지. 이젠 고만 울어.”
그때 굵은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비바람 맞고 밤을 샐 거요? 해일이 멈추지 않으면 여기 반부두 고개에서 우리는 고립이 될 거요. 빨리 다른 곳으로 피난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다시 우왕좌왕했다.
“부월리로 가요, 부월리.”


그때 형근이가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사람들은 나를 볼 수는 없어도 소리는 들었을 것이다. 형근이는 앞장서 걸었다. 부월리라는 동네는 반부두 고개 만큼 높은 지대로 다른 안전지대와 연결된 마을이다. 우선 높은 지대로 안전하고 소나무 숲이 우거져 비바람을 피할 수 있고, 자동차 길이 있어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마을이다. 형근이는 청대산을 오르내릴 때 부월리 마을을 지나다니곤 했었는데 이런 위급한 상황에 그 생각이 떠오

른 것이다.
“맞소, 그 말이 맞소, 부월리로 가야 해요.”
역시 보이지 않았지만 한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어두운 밤을 뚫고 들려왔다. 사람들이 움직였다. 반부두 고개 사람들은 물이 한 곳을 쏠리듯이 부월리로 향했다.
부월리에 오니 생각대로 울창한 소나무 숲이 비바람을 막아주고 있었다. 부월리 사람들은 피난 온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방이나 헛간 같은 곳을 내주었다.
형근이네 가족은 어느 농가 곡식 창고에서 악몽 같은 하룻밤을 보냈다.
아침이 되자 형근이는 가족을 부월리에 남겨 두고 자기만 먼저 집으로 돌아와 봤다. 해일도 물러가고 강풍도 많이 수그러들었다. 빗줄기는 가늘게 바뀌었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오후가 되면서 비도 그치고 먹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피난 간 사람들은 다시 하나둘 집으로 돌아왔다. 형근이 역시 그러다가 민호와 태영이를 만났다.
민호와 태영이는 다시 한 번 형근이의 등을 다독거려 주며 힘내라고 위로 했다.
“그래, 너 말대로 죽지 않고 살았다는 게 얼마나 행운이냐.”
민호와 태영이는 오랫동안 형근이의 손을 붙잡았다. 형근이네 집과 수많은 보금자리를 빼앗아 간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넘실거리며 물러가 있었다.
오후에 유선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왔다.


청대산 시 개항 이래 처음 보는 사나운 해일과 폭풍우가 엄습(불시에 습격함)했습니다. 현재 청대산 시는 외부와의 육상 교통과 시외전화 등이 막혀 고립상태입니다.

이날 천재지변(지진이나 홍수 따위의 자연현상으로 인해 생기는 재앙)으로 청대산 시는 인명과 많은 재산의 피해를 입었다. 형근이네가 살던 마을은 거의가 물에 잠겨 버리고 말았다. 정말 청대산 시가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청대산 시가 외부와의 고립에서 벗어나면서 그 피해 사실이 알려지자 각 신문사와 방송에서 대대적인 보도를 하였다.



청대산 시는 바다로 돌출(튀어나옴)된 동네들은 모조리 바닷물로 허리가 끊겼을 뿐더러 곳곳의 해안도로가 유실(물에 떠내려가 없어짐)되어 버렸다. 청대산 시가지는 여러 동강이로 갈라져 있었다.
“해일 덮친 청대산 시는 물바다”



산더미 같은 해일이 덮친 해안 마을. 순식간에 가옥 2백여 동이 전파, 3백여 동이 반파되고 1천여 가구가 물에 잠겼으며, 1만여 명의 이재민을 냈다. 해일과 함께 몰아친 초속 35m의 강풍으로 1백여 년 묵은 소나무들이 뿌리째 뽑히고 전 시가지의 전주가 거의 넘어져 청대산 시는 외부를 잇는 육로 교통은 26일까지 사흘째 완전히 두절되어 시내에서는 쌀값이 두 배나 뛰어올랐다.


10월 24일. 오전 10시부터 부슬비로 내리던 가을비는 오후 1시부터 천둥이 치기 시작하면서 사나운 폭우로 돌변하여 주먹같은 빗방울로 5m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비는 다음날 오후까지 지역적으로 최고 320mm까지 쏟아졌다.


폭우와 해일 피해가 가장 심했던 곳은 청호동. 잠수부였던 박ㅇㅇ씨(43세)는 25일 새벽 1시쯤 아들을 안고 해일을 피하려고 집을 나왔으나 파도에 아들이 휩쓸려 나가자 뒤쫓아 가다 함께 목숨을 잃었다. 폭풍우가 점차 심해지자 주민들은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저녁에는 파도가 더욱 심해져 온정리 솔밭까지 쫓겨 가 밤을 지샜다.
25일 새벽 조양동 야산에 피난했던 시민들은 마치 전쟁터에서 폭탄 세례를 받은 것 같이 허허벌판이 되어버린 마을을 목격했다. 2백년 묵은 노송 일곱 그루가 뿌리째 뽑히고 허리가 동강난 채 쓰러져 있었다. 해안지대 6천백여 주민들은 집과 재산을 모두 잃고 말았다.


물에 잠긴 집을 버리고 피난길에 나선 시민들이 돌아와 물에 떠다니는 가재(한 집안의 재물이나 재산) 를 건지려고 동분서주(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님) 하고 있다.


아빠는 잠시 이야기를 끊었다. 선유는 끔찍했던 그 날의 광경을 머릿속에 상상해 보았다. 하지만 상상하기 힘들었다.
“아직까지 그 일이 아픔으로 남는 사람들이 많아요. 당시부터 살았던 청대산 시 사람이라면 그 기억이 아마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있겠지요.” 준배 아저씨도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형근이 아저씨는 그 후 어떻게 되었나요?”
선유가 궁금해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빠는 그 말을 물을 줄 알았다는 듯이 금방 대답을 해 줬다.
“형근이는 서울에 있던 친척 되시는 분이 많이 도와주었지. 나라에서는 집을 잃은 사람들이 살 집을 지어 주었어. 몇 백 채의 집이 새로 생긴 청대산 시에는 새로운 마을이 생겨나기도 했지. 그래도 고생이 심한 형근이네를 보고 그 친척되시는 분이 브라질로 이민을 갈 때 함께 데리고 갔어.”
선유는 가끔씩 브라질에서 소식이 오는 아빠 친구가 누군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건 그거고, 정말 네가 묻고 싶은 거 있었지?”
느닷없이 던지는 아빠의 질문에 선유는 놀라면서 얼른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눈을 깜박거리고 있었다.
“이런, 형광등 봤나?‘
아빠가 선유에게 한 방 날렸다. 형광등이라니 그럼 내가 스위치 누르면 한참 있다 들어오는 그 형광등이란 말인가.
준배 아저씨가 껄껄대며 웃었다. 선유는 괜히 분한 생각이 들었다. 선유 표정이 안 좋아지자 아빠가 얼른 선유를 달랬다.
“아들, 미안, 농담 좀 했어. 너 청대산 소나무에 대해 물었잖니?”
“아, 그렇지. 맞아요. 청대산 소나무 세 그루만 남았는데 그 후 세 그루의 일생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다고 했어요.”
선유는 막혔던 말문이 떠지기라도 하듯 줄줄이 쉬지 않고 말했다.



18. 히말라야 원정대


청대산 시에 밀어닥친 해일과 폭우는 청대산 시를 또 한 번 크게 변하게 했다. 재난의 흔적은 너무나 깊고 넓어 복구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정부에서는 여러 부서의 장관들을 내려보내 현장을 둘러보고 갔다. 국무총리가 긴급 각료회의를 소집하여 효과적인 복구 작업에 대해 의논하면서 청대산 시는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그해 겨울, 집을 잃은 사람을 위해 재해주택 8백여 채를 지었다. 또한 2천 8백여 척의 침몰 및 파손된 어선도 복구하였다.
특이한 현상은 그 해 유난히 물고기가 많이 잡혔다는 사실이다. 또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해일이 바닷속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기 때문에 물고기들이 많이 잡힌 것이라고 말했다. 너무나 많은 물고기가 잡혀 해일과 폭우로 쓰레기가 넘쳐나던 형근이네 동네에 이번에는 잡아 온 생선들이 거리마다 부두마다 산더미를 이루었다. 사람이 죽으란 법이 없다는 말이 맞다고 이야기들을 했다. 물고기 대풍을 맞은 청대산 시는 그런대로 고통의 보상을 받는 듯했다.


그러나 그해 겨울 엄청난 폭설로 또 하나의 잊지 못할 가슴 아픈 사건이 일어났다. 한 번 내린 눈은 그치지 않았다. 사람들은 하늘에 그렇게 많은 눈이 있는 걸 처음 알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눈은 조금도 쉬지 않고 무려 닷새 동안 퍼부었다. 하루에 1미터가 오는 날도 있었다. 청대산 시내는 닷새 동안 내린 눈이 2미터가 되는 곳도 있었다. 청대산 시는 다시 교통이 마비되었다. 교통은 고사하고 사람들 사이에 왕래하는 일조차 어려웠다. 이웃집을 가는데 눈 동굴을 만들어 갈 정도였다. 청대산 시 교외에는 고립된 마을이 늘어났다. 마치 마을이 조난을 당한 것과 같았다. 제설 작업을 아무리 해도 쌓이는 눈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집 앞 문도 눈 속에 파묻혀 열 수 없었다. 사람들은 집 앞이라도 열고 다니려고 눈을 쳐 길에다 버렸다. 집집마다 버린 눈은 다시 산더미가 되어 새로운 눈 산이 만들어졌다. 어쩌다 길을 가는 사람들은 그 눈 위를 밟고 지나갔는데 집에서 보면 하늘을 걷는 사람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치운 눈은 지붕보다 더 높았고 사람들은 눈 절벽 길을 엉금엉금 조심하며 걷기도 했다.


그 한 해에 청대산의 소나무는 두 그루나 사라졌다. 몇백 년을 살아온 소나무가 같은 해에 사라진 것은 참 이상한 일이었다.


청대산에 남아 있던 세 그루의 소나무 중 먼저 사라진 소나무는 민호 친구들이 가장 많이 걸터앉은 소나무였다. 나무줄기가 낮게 옆으로 퍼지고 가지가 이리저리 옆으로 휘어진 앉은뱅이 모습을 한 소나무는 아이들에게 가장 사랑을 많이 받던 소나무였다. 특히 오지랖 넓은 태영이가 자기 같다고 좋아했던 소나무였다. 옆으로 사방 가지를 뻗은 그 소나무는 옆의 네 그루 소나무 모두에게 가지를 가까이하고 있었다. 남의 일에 어지간히 참견 잘하는 태영이 닮았다고 아이들은 그 소나무를 태영이 동생이라고 부르던 소나무였다.


해일이 일어나던 그날 밤. 천둥 번개가 청대산 하늘에서 정신없이 두들기고 있을 때 날카로운 불꽃이 앉은뱅이 소나무에게 떨어졌다. 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벼락 맞은 소나무를 본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소나무 몸통 반이 꺾이어 날아가고 나머지 줄기는 까맣게 타버렸다고 했다.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이다. 청대산 시에 남아 있던 민호, 태영이, 형근이는 두고두고 가슴 아파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소나무는 그해 겨울에 사라졌다. 해일이 있은 후에 엄청난 폭설에 사람들은 이상한 예감을 했지만 청대산 소나무와 설악산에서의 엄청난 등반사고가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속보 - 설악산에서 히말라야 원정대 조난



눈이 며칠째 정신없이 내릴 때 터져 나온 소식이었다. 설악산의 폭설은 청대산 시에 내린 눈보다 몇 배나 더 했다. 그 때 한국산악회에는 2년 뒤에 본격적인 우리나라 히말라야 등반을 위해 해외원정등반대를 구성하여 설악산에서 훈련 중이었다. 대원들은 우리나라의 손꼽히는 등산가들이었다.


마구 퍼붓는 폭설을 이기며 등반대들은 훈련을 잘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운의 날이 왔다. 등반대 중 10명의 전진 대원들이 설악산 안내피골(죽음의 계곡) 계곡의 막영지(야외나 산에서 천막을 치고 생활하는 지점)에서 잠을 자던 중


눈사태를 모두 목숨을 잃었다.
사고 후, 폭설 때문에 등산로가 다 막힌 상태에서 조난 사고는 이틀 뒤에 알려지게 되었다. 조난 소식을 듣자 곧바로 수십 명의 구조대들이 구조하러 갔으나 워낙 험한 산길에 폭설로 길마저 어딘지 모르는 상황이 구조대들의 발을 막았다. 많은 전문 구조대와 군인, 경찰까지 구조 작업을 펼쳤지만 참사가 난 계곡으로 도저히 접근하지 못했다. 헬기가 뜨고 비행기가 떴지만 강풍에 폭설까지 뒤엉켜 현장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눈사태 속에서 생존 한계는 불과 15분 정도라는데 15분은커녕 15일이 돼서야 구조대들은 겨우 구조대가 아닌 시신 발굴대가 되어 죽음의 계곡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때 대전으로 이사 간 정훈이가 청대산 시에 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