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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2016년 [소설] 우리 눈 여소서 / 이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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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254회 작성일 16-12-09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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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은자


많이 살았다.

이런저런 집단에 들어 있어 자리해 보면

내가 좌상일 때가 많다.

나잇값을 해야 하는데 대책이 없다.

아직도 나는 12월 달력 앞에 서서

진로를 놓고 갈등한다.

"내년에도 성가대를 해도 되나 말아야 하나.

야심차게 장편을 시작해도 될까?

몸 생각해서 수필, 단편소설로 만족해야 하나?"

죽기 전에 철들기는 영 글렀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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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눈 여소서



가을비 내린다.
종숙은 대구행 버스표를 연신 들여다본다. 오후 3시 30분, 버스는 정시에 출발했다. 종숙은 대구가 초행길이다. 두렵지는 않지만 오히려 설렌다. ‘은주를 만날 제 나는 무슨 말부터 할까? 은주는 어떤 모습으로 날 만나 줄까?’ 종숙은 손거울을 꺼내서 얼굴을 살핀다. 앞 머리카락이 오늘따라 유난히 희끗희끗하다. ‘은주 머리카락은? 은주는 전혀 늙지 않았을 것이다.’ 버스는 빗길을 안정된 속도로 달린다. 차창 밖 산야는 군데군데 단풍으로 물들었다. ‘죽기 전에 꼭 한 번 은주를 만나봐야 한다.’ 종숙은 지난 10여 년간 투병 중에 있으면서 벼르고 벼르던 일을 결행에 옮기고 있다. 창밖에 스치고 멀어져 가는 풍경처럼 종숙의 상념은 그 끝을 좇아 아득한 시간을 되짚어 헤맨다.
추석이 지나고 한 달 밖에 안 되었는데 햇살이며 바람 냄새가 여름과는 사뭇 달랐다. 그날은 더욱 그랬다. 학교들도 가을 학기가 자리 잡혀갔다. 이틀 전 밤에 은주에게 받은 전화 내용이 너무 궁금한 나머지 종숙은 퇴근 시간에 한 치도 지체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과장님, 계장님, 주임 모두들 자리에 묶인 것처럼 미동도 않는 시각이다. 촉탁이란 명칭으로 한자리를 얻은 주제에, 직장 상사가 층층시한데 발칙하기 그지없는 처사란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눈 딱 감고 사무실을 나왔다. 종숙은 올봄에 시청 보건과에 촉탁으로 발령받았다. 쏘아 보는 눈총을 의식하며 청사 정문을 나섰다. 둥근 광장 왼편 길로 걸어나갔다. 소공동 길에서 조선 호텔 정문을 지났다. ‘미도파 백화점’ 앞에서 또 길을 건넜다. 명동 입구에서 곧장 걸어 들어갔다. ‘송옥’ 따위 양장점이 줄지어 있는 샛길을 건넜다. 오른쪽에 다방 ‘돌체’가 있다. 제법 쌀쌀한 바람에 코트 자락 펄럭이며 재촉해 걸었다. ‘돌체’ 입구에서 잠시 지체했다가 들어섰다. DJ는 이제 막 ‘라르고’를 턴테이블에 올렸음인지 짧게 멘트를 하고 있었다. 종숙은 두리번거리지 않았다. 은주와 만날 때면 정해 놓고 않는 좌석이 있기 때문이다. DJ 박스 왼편, 후미지고 어둑한 데다 작고 딱딱한 의자 둘, 반쪽자리 테이블 한 개. 남들이 잘 앉지 않고 늘 비어 있었다. 촌스런 가시내 둘이서 울고 웃고 수다 떨기에 적당한 좌석이다. 은주는 먼저 와 있었다. 종숙을 보고 엉거주춤 일어나 갸우뚱 손을 까닥거렸다.
“오래 기다렸니?”
“그래. 좀.”
“미안해. 어쩔 수 없었어. 햇병아리 공무원이 지엄한 상사들보다 먼저 퇴근한다는 게 가당키나 하니? 땡 치자마자 튀어나오는 것이 얼마나 맹랑한 일이겠니?”
“알아, 알고 있어. 오히려 내가 미안해.”
“방학도 아닌데 무슨 일이야. 네 전화 받고 이틀 동안 얼마나 궁금했는지 몰라.”
“썩 좋은 일은 아니야. 너 밖엔 말할 사람이 없더라.”
“우리 커피나 시키고-”
“종숙아. 우리 학교에 영어 선생 한 사람이 나와 같이 부임했어. 남자 선생인데 내게 ‘프로포즈’하는 거야. 어떡하니?”
“그게 어째서? 축하한다, 얘.”
“농담 아니야. 아주 진지해 그 선생. 내 입장이 난처해 죽겠어.”
“그 남자 선생, 사람 볼 줄 아네. 아주 잘 된 일이지 뭐니. 넌 어쨌는데?”

“너두 참, 내 입장 잘 알면서. 거절했지 뭐. 내게 가당키나 한 일이니? 염치없지 그런 사람 ‘프로포즈’ 받는다면……”
종숙은 괜히 한숨이 나왔다.
“그 선생 태도는 어때?”
“아주 진지해. 예의에 어긋난 행동은 안 해.”
“그 선생 진심을 믿는다면 조심스럽긴 해도 받아 주렴.”
“안 돼. 난 평생 결혼은 안 할 거야. 너두 알잖아 못해 난.”
커피 두 잔이 탁자에 놓였다. 뮤직 박스에선 ‘라르고’를 끝내고 ‘바하’를 들려주고 있었다. 찻잔에서 엷은 커피 향이 감돌았다. 서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종숙은 탁자 위로 얹은 은주의 두 손을 끌어 잡았다. 눈을 들여다보며 먼저 말을 이었다.
“그 영어 선생은 그렇다 치고 너의 마음. 정직하게 말해서 네 맘은 어떤데?”
“겨우 6개월간이지만 교무실에서나 교정에서 겪어봤을 적에 그 사람 인격이나 성품에 호감을 가진 건 사실이야. 평소 나는 남자와 대화를 나눈 경험이 없었지만. 그 선생은 종교도 같아. 매 주일 성당에서 같은 시간에 미사를 올려. 가치관이나 바라보는 방향이 나와 다르지 않아.”
“결국 너도 그 선생을 좋아하고 있다는 말로 들리는구나.”
“응. 좋은 사람이야. 성실하고-”
“그럼 답이 나왔네 뭐. 받아들여 청혼.”
“너까지 왜 이러니. 누구보다 내 처지를 잘 아는 네가. 그 선생은 그 함 씨 가문의 장손이야. 결혼이 두 사람만 좋다고 다 되는 세상이니 지금?”
“언니도 알고 있니?”
“아니. 내 혈육에겐 말 못해. 이미 나 때문에 많이 아파하고 있는데, 더 아프게 할 순 없어.”
“은주야. 이건 정말 중요한 일 아니냐? 속단 하지 말고 시간을 더 갖자.

우린 아직 20대야. 결혼이 늦은 나이도 아닌데 지금 당장 결판낼 생각은 말자. 용기를 내. 언니에게 의논해 봐. 아무튼 그 함 선생 참 고맙구나. 너의 인간성을 제대로 알아보고 사랑한다는 것이.”
“그렇긴 해. 네 말대로 그 선생 때문에 감동 받을 때가 많아. 좋은 사람이란 걸 느낄 때마다 내가 멈칫거리게 돼.”
“그렇겠구나. 정말 아까운 상대로구나. 어쨌거나 오늘 밤에 언니 기숙사 방에 가서 잘 거잖니. 언니도 학기 중에 네가 불쑥 서울 온 게 궁금하지 않겠니? 언니는 엄마와 같은 존재라 생각해 나는.”
“고마워 종숙아. 그런데 답이 없다, 그지?”
“너 자신을 너무 비하시키진 말아. 함 선생의 청혼이 남의 손에 든 것 빼앗는 것도 아니고, 너를 직접 앞에서 보고 네 약점을 이미 극복한 것 같은데. 네가 무슨 못된 과거를 가진 것도 아니잖어. 가는 데까지 따라가 보면 안 될까? 네 진면목을 그 댁 부모님들이 알아볼 때까지. 두 사람이 진실하게 기다리다 보면 말이야.”
“알았어, 고마워. 이렇게 네게 털어놓은 것만으로도 가슴이 후련해졌어. 일어나자, 언니 기숙사 문이 닫히면 낭패야.”
종숙이 찻값을 치르는 동안 은주는 망토 자락을 고루 펴 몸에 둘렀다.
바바리코트 입는 게 유행이것만 은주는 아직도 긴 케이프를 두르고 다닌다. 종숙은 그 모습이 늘 속상했다. 팔짱을 끼고 ‘미도파’ 앞까지 걷는 동안 서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길에서 헤어졌다. 종숙은 자취방에 돌아와서 은주의 케이프를 생각했다. 아기를 업고 다니는 여성들이나 두르는 케이프를 처녀인 은주가 그렇게 고집스럽게 둘러야 하는 게 쓸쓸했다.
1958년에 종숙은 속초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 해 2학기 초에 은주가 전학 왔다. 속초고등학교는 남녀공학이었지만 여자들만으로 한 학급을 이루고 있었다. 대다수 여학생들은 남학생들과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고, 중학 과정 3년을 따로 보내다 고교에서 다시 만난 셈이라서 남학생들이 낯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은주는 생판 모르는 얼굴뿐이었다. 은주는 교실에 들어와 앉으면 웬만해서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한창때라 여학생들은 찧고 까불고 깔깔대며 몰려다녔다. 은주만은 앉은 자리에서 빙긋이 웃을 뿐 그 틈에 끼질 않았다. 은주는 교정이나 복도에서 마주치는 남학생들이 무척 힘든 존재라고 말했다. 은주에게 먼저 다가간 사람이 종숙이다.
속초고교는 모든 교과목이 남학생 위주로 짜여 있었다. 여학교에서 전학 온 급우에겐 물리, 화학, 제2외국어 따위가 생소했다. 종숙은 반장이기 때문에 그네들이 기초가 잡힐 때까지 노트며 진도며 길잡이가 되어주어야 했다. 마침 은주네 집과 종숙이네 집은 지척에 있었다. 종숙은 아우들이 여럿 있어서 집이 늘 분요했지만 은주네는 늘 은주 혼자였기 때문에 공부하기 좋았다. 자연스럽게 종숙이가 은주 집에 가는 편이었다. 은주는 아버지가 오래전에 세상 뜨셨고, 어머니는 시골 장날에 맞추어 이곳저곳으로 장사를 다녔다. 위로 언니 한 사람, 서울에 유학 중인데 의과대학에 재학 중이었다. 그리고 은주 밑엔 남동생 하나, 모두 세 남매였다. 두 살 터울인 남동생을 은주가 돌봐야 하는 형편이었다. 은주의 언니는 진짜 멋있었다. 서양 여자 같았다. 남동생도 웬만한 배우 뺨치게 잘생겼다. 그런데 은주만은 딴판이었다. 장애자는 아닌데 장애가 있었다. 차렷 자세로 서보면 몸에 좌우가 비대칭이다. 치마 교복을 입으면 좀 가려지지만 바지 교복일 때는 확실하게 짝짝이 궁둥이다. 얼굴까지 완전 비대칭이다. 코를 중심으로 오른쪽이 크고 왼쪽이 작다. 눈, 귀, 볼이 모두 그렇다. 게다가 피부는 붉고 번들번들, 마치 화상 입은 것 같다. 출산한 산모처럼 부석부석하다. 입술은 허물이 벗겨져 허연 살 거스름이 인다. 머릿결은 굵고 뻣뻣한 직모, 단발머리 단정한 여학생과는 거리가 멀어 늘 머리에 시간을 많이 들인다.
종숙은 과외 수업 댓가로 은주의 노래를 조르곤 했다. 학교에선 입시위주로 교과목이 짜였다. 음악 시간은 아예 없었다. 하지만 은주네 집에 서나, 호젓한 하굣길에서, 토방 같은데 앉아서, 은주는 종숙에게 노래를 들려주곤 했다. 은주는 한국 가곡집에 있는 곡들 중에 모르는 곡이 없을 정도였다. 은주는 자기 세례명에 꼭 맞는 성악 실력을 보였다. 종숙은 점점 은주에게 반했다. 고음에 올라갈수록 더더욱 청아해지는 목소리가 정말 아름다웠다. 종숙은 자기도 아는 노래엔 알토로 화음을 넣어 함께 불렀다.
-아베 마리아, 구노의 아베마리아-
성가를 부를 때 은주는 딴 사람처럼 고결했다. 3년 세월이 둘 사이의 우정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고교 졸업반, 진로 문제에 고민하는 시기에 도달했다. 은주는 망설이지 않고 음대 성악과를 선택했고, 종숙은 국문과를 선택했다. 입학금부터 장차 들어갈 학비가 대책 없기는 둘 다 마찬가지였다. 은주는 어머니와 언니의 합의에 따라 2년제 사범대에 원서를 냈고, 종숙은 4년 장학생 선발학교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대학 61학번으로 서울살이를 시작할 때, 서울 거리는 4.19와 5.16을 치른 직후였다. ‘잘 살아보세’가 모든 사람들의 구호처럼 휘날렸다. 절대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과 가위눌린 민주주의가 곳곳에서 신음하며 분출하고 있었다. 종숙은 자기 학교 근처에서 입주 가정교사로 들어갔고 은주는 가족들의 배려로 답십리 끝자락에다 자취방을 얻어서 단독 생활을 시작했다. 학기 초, 서울 지리에 서툰 종숙과 은주는 말로만 듣던 음악다방 ‘돌체’를 찾아냈고, 주말이면 그곳에서 만나곤 했다. 은주는 학교 ‘배지’를 옷깃에 반듯하게 달고 있는데 종숙은 교문을 벗어나면 즉시 ‘배지’를 뒤집어 달고 다녔다.
“종숙아, 너 그 학교 그렇게 맘에 안 들어?”
“응, 수업 자체가 영 맘에 안 들어.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나 있지 고대나 이대, 때론 연대, 숙대에 도강 많이 다녀. 똑같은 챕터를 가지고 똑같은 교수님이 강의하는데, 학교에 따라 전혀 딴판이야. 우리 학교는 애들의 수업 분위기가 영 엉망이야. 그러니까 교수님도 거기에 맞추나 봐.”
“그래도 돼? 들키지 않아?”
“아직 교수님이나 학생들이 서로 모르니까. 어떤 애들은 내가 자기네 학교 앤 줄 알고 노트 좀 빌려 달래. 흐흐-”
“어데 가나 넌 공부벌레로 보이는 거야, 조심해.”
“그건 내게 맡겨. 그보다 나 신 나는 일 하나 해냈어. 나운영 선생님 그늘에 앗싸아-”
“네가 맨날 노래처럼 읊어대던 그 작곡가 선생님 그늘에 들었다고?”
“응. 내가 말했지. 서울 가기만 해 봐라. 무슨 일 있어도 나운영 선생님 그늘에 가서 우리 교회 용애언니처럼 새로 작곡한 성가를 방학 때마다 교회에서 부를 거라고.”
“어떻게?”
“지난 주일 오후였어. 급하게 전갈을 받고 갔지. 나운영 선생님이 대한합창단장이신데 새 단원을 뽑는다는 거야. 물론 오디션을 거쳐야 한다는 거야. 무조건 찾아갔지 뭐. 먼저 ‘코리뷩겐 86번’을 쩍 펼쳐 내밀지 뭐야.
초견으로 ‘싸이씽’을 해보라는 거야. 템포를 느리게 잡고 했지. 내가 맞게 부른 건지 틀린 곳이 몇 군덴지 생각도 안 나. 그다음엔 자신 있는 노래 하나를 불러보라는 거였어. 얼시구-”
“뭘 불렀는지 난 알겠다. 일출봉에 해 뜨거든-”
“맞아, 그거였어. 너 귀신이다. 내 레퍼토리가 얼마나 다양한데 쪽집게로구나. 너도 가자 은주야, 아직 티오가 있다고 했어. 널 생각하고 내가 물어봤어.”
같은 절차를 밟아 마침내 은주도 대한합창단에 들었다. 만나는 장소도 ‘돌체’에서 동자동 연습실로 바뀌었다. 동자동은 참 묘한 동네였다. 남산에서 내리달리다 서울역사가 보이는 지점에서 왼편에 큰 가지를 뻗은 길 이 나온다. 그 길은 약간 언덕지다가 다시 급하게 내리막이 된다. 그 길 초입에서 약 백 미터 쯤에는 색시집(유곽)이 즐비하고 바로 건너편에 ‘성남교회당’이 도도히 서 있다. 나운영 선생님 댁은 그 교회당 마당을 걸어 들어가서 바로 뒤에 있다. 저녁때 선생님이 퇴근해서 댁으로 가는 길에는 뽀얗게 화장하고 치렁치렁 매달리는 아가씨들이 많다. 어제도 봤고 그저께도 보았고 매일 같이 보는 신사 한 분인데 아가씨들은 연신 매달려 가방이건 옷소매를 붙잡고는 “놀다 가세요. 놀다 가세요.”한다. 나 선생님은 획 뿌리칠 일 가지고, 책가방을 고쳐 잡고 이리저리 여자들 발길을 피해 걸으며 허리까지 굽실굽실
“안 놀아요. 안 놀아요.”
우리 합창단에선 유행어가 되었다. “안 놀아요. 안 놀아요.” 나 선생님은 사람들이 질시하는 창녀들일 망정 인간으로서 예의를 다하는 분이었다. 사창가와 성스러운 교회당이 길 하나 두고 마주하고 있었다.
은주는 학업에 만족했다. 고교시절부터 자취생활이 대학생까지 연장선상이었다. 어머니는 방세며 양식을 떨어뜨리지 않고 공급해 주셨다. 속초살이보다 서울살이가 더 안정되어가고 있었다.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반면 종숙은 1년간 가정교사 자리를 세 번이나 옮겼고, 자질구레한 일용품마저 궁핍을 더했다. 은주는 종숙이가 떠도는 것을 연민하여 종숙이의 사정을 자기 어머니께 말했다. 자기 자취방에 종숙이를 같이 살게 하려고. 은주 어머니는 쾌히 승낙, 종숙은 은주의 자취방에 짐을 싸 가지고 왔다.
두 사람의 자취방은 버스로 청량리에서도 얼마만큼 더 간다. 전농동 굴다리를 지나 버스 종점에서 내린다. 그때부터 그 마을은 서울시가 아니다. 종점에서 내려서 30여 분 이상 더 걸어야 했다. 길은 온통 논둑 밭둑길로 외길인 데다 외등(가로등)이 있을 리 만무하다. 둘은 청량리 로터리에서 만나 함께 전농동행 버스를 탄다. 아침밥 짓기는 순번을 정했다. 하지만 종숙은 아침잠이 많아서 제 순번에도 시간 맞추어 밥을 짓지 못할 때가 많았다. 은주는 종숙을 깨우는 방법이 있다. 종숙이가 좋아하는 노래를 골라 조용히 들려주는 것이다. 자명종 치고는 너무 달콤한 자명종이다. 은주는 종숙이와 둘이, 전농동 뚝방길을 걸을 때면 자기 학교 교재 중 이태리 가곡집에서 한 곡씩 종숙에게 가르쳐주곤 했다. 밤길이 즐거웠다.
모든 곡이 다 좋았지만 둘이 쩍하면 흥얼대는 곡이 있다. ‘꿈’이다. 끝에 가면 노랫말이 ‘눈을 감고서 벌린 두 팔에는 하염없이 꿈만 남았으리- 짝사랑하는 소녀의 기도 같은-.’
대한합창단은 대학생들로만 구성된 혼성 합창단이다. 한 해에 두 번 정기 연주회를 갖고, 가끔 군부대 위문도 다녔다. 은주처럼 성악 전공자도 여럿 있었다. 당대 이름 날리던 ‘예그린 합창단’과 쌍벽을 이룬다. 주 레퍼토리는 한국가곡, 세계가곡, 성가였다. 서수남ㆍ하청일 듀엣이 장안에 날렸는데 그 둘 다 대한합창단 단원이었다. 은주들이 보기에 자기들 두 사람만 빼고는 모두가 유복한 집 자식 같았고, 학교생활에 경제적으로 아무런 지장 없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장마철에 은주들은 신발에 물이 들어와 연습실 마루에 발 내딛기가 창피했고, 겨울철 눈길에선 전농동 진흙덩이가 신발코에 얼어붙어 따라왔기 때문이다. 연습이 시작되면 창피한 생각이 싹 없어졌다. 은주는 소프라노 파트에서 인정받았고 종숙이도 알토 파트에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매주 토요일 오후엔 논둑길이건 밭둑길이건 마냥 즐거웠다. 합창단 연습실에서 미흡했던 곡을 듀엣으로 복습하며 걷는 길이기 때문이다. 달밤이면 더더욱 좋았다. 외딴 마을 길이니 떠든다고 시비 거는 사람이 없다. 개구리들만 괜히 숨죽이곤 했다. 누가 봐도 남루한 애숭이 촌뜨기 가시내들의 낭만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 눈 여소서(Open our eyes)
Frederic Wesl MaCDONALD. Wilfc Macfarlane 미사곡일 듯하다.

이 성가는 ‘아카펠라’로 불러야 더 효과적이다. 그리 길지 않은 곡이지만 악상기호란 기호는 거의가 다 동원된 곡이다.
p, pp, subite, cresc, dim, permata, rit, f, ff, fff, moderato, a tempo, piu mosso, harqomente, largo……
곡 전체를 다 암보했어도 정작 연주할 땐 지휘자의 손끝에서 눈을 뗄 수 없다. 안단테로 가다가 어느새 아첼레란토, 순식간에 슈빗 피아노, 다시 어 템포 또 다시 리타르단도에 페르마타-. 맨 마지막엔 바리톤 독창인데 ‘아멘’을 아다지오로 끝낸다. 대한합창단이 성공회 본당에서 예배 송가를 부르는 행운이 있었다. 덕수궁 뒷동네는 각국 대사관이 모여 있다. 그중에 화강암과 붉은 벽돌을 함께 쓴 성당 모양의 건축물인데 성가대석이 돔 형식의 천창 중앙부에 해당되게 배치되어 있다. 40명 정도의 인원이었지만 공명이 좋은 관계로 소리는 넓은 공간을 충분히 채워 나갔다.
합창단에서 많은 곡을 연주했지만 은주는 무심코 콧노래를 부를라치면 꼭 <우리 눈 여소서……> 이 곡의 주제 부분을 부르곤 했다. 종숙이와 은주, 얼핏 남루할 뻔했던 나날이 합창단 생활로 낭만을 안고 갈 수 있었다. 그런 생활도 언제까지 계속되지 못했다. 이듬 해 봄에 두 사람은 각기 다른 길로 헤어졌다.
은주는 사범대 졸업과 동시에 중학교 선생으로 발령 받았다. 강원도 땅 산골 마을 문막중학교 음악선생이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지만 직장이 있어 이제야말로 제힘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어 기쁜 맘으로 짐을 꾸렸다. 그보다 앞서 종숙이도 큰 결심으로 길을 바꿨다. 정 붙이지 못해서 겉돌던 학교, 부침(浮沈)이 심했던 가정교사 자리로 되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공무원 시험에 응시, 말단직으로나마 서울시청에 취직을 했다.
은주가 떠난 자취방에 종숙은 혼자 남았다. 토요일마다 은주의 빈자리가 절절하게 쓸쓸했다. 종숙이 혼자 직장과 합창단 생활을 여전히 했다.

학기마다, 해가 바뀔 때마다 단원의 반 수 이상이 들고 나는 일만 다를 뿐이다. 여자들은 시집간다거나 고향으로, 남자들은 군 입대, 복학, 취직 등등으로.
은주는 학기 초라 초임지 학교 관사에서 살기로 했다. 학생들이 모두 집에 가고 어두워지면 외딴 학교와 관사가 적막에 잠긴다. 산골 밤이 그렇게 캄캄한 데 놀랐다. 섬에 홀로 남겨진 것 같았다. 이런 고요. 이런 적막은 처음이다. 삭풍에 마른 잎이 구르는 소리에도 소름이 돋고, 바람이 지나가다 문짝을 스쳐도 깜짝 놀랐다. 낮과 밤의 정서가 너무도 달랐다. 전농동 자취방의 밤과는 전혀 다른 적막이었다. 은주는 관사에 홀로 사는 게 썩 좋을 줄 알았다. 사람들과 사적인 관계에서 자기에게 주는 시선을 느끼지 않고 살게 돼서 좋을 줄 알았다. 큰 소리로 가슴이 시원하도록 노래를 부르거나 오디오 볼륨을 맘껏 올려도 좋을 것 같았다.
봄 소풍을 다녀오던 날, 모든 직원이 함께 저녁 식사를 가졌다. 헤어질 때 함 선생이 남몰래 은주 손에 쥐여 준 편지. 은주는 관사에 돌아와서 편지를 읽었다. 함 선생은 자신을 소개하는 글로 편지를 가득 채웠다. 진학이나 취직할 때 적어 넣는 ‘자기소개서’ 같은 편지였다. 다만 끝에다
“초임지가 산골 학교라서 망설이다 왔지만 강은주 선생을 만나게 하려고, 인연을 주려고 천주께서 섭리하셨다고 믿습니다. 지금 강 선생과 한 교정에서 후학을 지도하게 된 하루하루가 감사할 뿐입니다.”
은주는 끝말의 뜻을 새겨 보며 거듭 읽었다. 자기에게 각별한 호감을 가진 것, 남녀 간의 특별한 관계? 연정? 넌지시 표현하고 있지만 분명 함 선생은 은주에게 자기 마음을 고백한 것이었다. 은주는 덜컥 겁이 났다.
자기는 사랑 같은 거 않을 것이며 결혼도 않을 사람인데 함 선생의 마음을 어떻게 할까 걱정이 생겼다. 무례한 사람이 아니란 것도 알고는 있지만 이 외딴 방에 혹여 노크라도 한다면 어쩌나. 편지를 받은 후로 은주는 관사에서 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좁은 바닥에 남녀 선생이 어쩌고저쩌고 소문이라도 퍼질까 두려웠다. 가끔은 가위눌리는 밤이 생겼다.
함 선생은 거리를 더 좁히지도 늦추지도 않고, 은주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좋은 서적, 좋은 음악을 꾸준히 건넸다. 은주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어떤 때는 받고 어떤 때는 거절하며 난처한 나날을 보냈다. 두 번째 편지, 세 번째 편지가 교무실 책상 위에 조심스레 놓이곤 했다. 은주는 매번 아무런 답신을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인 편지를 받았다.
“강 쎄실리아님을 사랑합니다. 성모님께서도 제가 쎄실리아님 사랑하는 거 아십니다. 쎄실리아님이 무엇을 망설이는지 저도 많이 생각하고 내린 결정입니다. 일생 동반자로 제게 와 주십시오. 천주님께 맹세할 수 있습니다. 속히 답을 주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언제까지라도 답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은주는 함 선생에게 답을 주기는커녕 서둘러 성당 근처 성도네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미사 시간을 피해 보려는 심산이었고, 성당 오가는 길에서의 동행을 피해 보려는 생각에서였다.
종숙은 아버지의 성화로 박 선생과 만나고 곧장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대문 소리를 들었는지 주인집 아주머니가 대청마루에 나와서 문간방 쪽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문간방 학생, 은주 선생이 좀 전에 전화했는데 전화해 볼란가?”
6~70년대엔 어느 집이나 전화기가 다 있는 때가 아니다. 청색 전화, 백색 전화 해가며 한 마을에 전화기를 놓고 사는 집이 몇 안 된다. 은주들은 위급한 일, 부득이한 일 아니면 주인집에 전화 심부름을 시키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은주는 웬일로, 그것도 밤에 전화 심부름을?
종숙은 허겁지겁 마당을 질러가서 주인집 안방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갔다. 다이얼을 조용조용 돌렸다. 신호음이 두세 번 울렸을까, 마치 전화기 앞에 기다리고 앉았다는 듯이 은주가 받았다.
“종숙이지? 나야 은주. 너 집에 있을 줄 알고 전화했어, 아까.”
“지금 막 들어왔어. 그 사람 만나고.”
“박 선생 어떠니?”
“잘 모르겠어. 싫지도 좋지도 않아. 그냥-”
“나 겨울방학 지나면 이 학교 떠나게 될 거야.”
“부임한 지 일 년도 못 채우고 전근?”
“그러게 말이야. 그럴 사정이 생겼어. 더 못 있겠어. 오지 학교로 상신 넣었어.”
“너 함 선생 땜에 그러지. 문막 보다 더 한 오지가 또 있냐?”
“그럼. 강원도엔 산골학교가 꽤 많다는 것 너 모르지. 나도 여기 와서 알았어. 그간에 있었던 일 편지로 할게.”
“그래 알았어. 전화 끊자. 주인집에 미안해.”
은주는 이년 반 교직 생활 동안 네 번이나 학교를 옮겨 다녔다. 문막에서 도계, 도계에서 정선, 정선에서 또다시 횡성까지. 은주가 학교를 옮겨 앉으면 다음 학기 초엔 어김없이 함 선생이 뒤따라 전근 오는 것이다.
1967년 봄, 은주는 횡성중학교를 끝으로 교직 생활을 접었다. 자기가 가야 할 곳을 정해 놓고 주변 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 무렵 5월 초에 종숙은 박 선생과 결혼했다. 신부의 ‘부케’를 받는 일을 은주에게 겨누자 은주는 손사래를 치며 달아났다. 친구들과 사진 찍을 때에도 은주는 뒤에 서서 몸은 가리고 얼굴만 빼꼼 내밀었다. 그 날 분주한 중에 헤어진 뒤 은주의 소식은 끊어졌다. 종숙은 신혼에, 시집살이에 출산과 직장 등등 참 여유 없는 세월을 살아냈지만 하소연을 들어줄 은주는 만날 수 없었다. 은주는 종숙이 외의 교우관계를 맺지 않았던 탓에 그녀의 소식을 물어볼 곳은 없었다. 서로 간에 기별 없이 지낸 세월이 10년도 넘었다. 종숙은 친정이 속초였으니 여름방학이면 아이들 데리고 속초에서 며칠씩 지내곤 했다.
197x년 여름방학이었다. 그 해 여름방학도 종숙이 집 아이들은 속초 외가 할머니 댁에 가서 한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마침 ‘설악초등학교’에서 전국 음악교사 ‘리코더’ 강습회가 있었다. 종숙의 아우가 강사로 수업을 한다기에, 종숙은 방청하러 아이를 데리고 뒤따라갔다. 설악초등학교는 설악산 ‘도문교’를 건너자마자 소나무 숲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동화책 속에서 보던 집 같은 작고 예쁜 학교다. 종숙 일행이 버스에서 내리는 때에 수업은 이미 시작되었던지 ‘리코더’ 소리가 숲에서 새나왔다. 창을 모두 열어젖혔으므로 밖에서도 교실 안 수업 광경이 잘 보였다. 5~60명쯤은 돼 보이는 수강생들이 수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교과 과정에 ‘리코더’가 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번 강습에서 중고교 음악선생들까지 신청을 받았다는 것이다. 수강생들은 한눈에 봐도 새내기 교사부터 중년의 교사까지 남녀 다양한 연령층이었다. ‘리코더’는 피리보다 부드러운 소리를 가진 악기, 운지법과 음색의 변화 등을 주로 강의했다. 독주도 좋지만 합주는 참 포근하고 따뜻하다. 하모니카처럼 갖고 다닐 수 있어서 아무 때나 아무 장소에서나 연주하기에 퍽 좋은 악기다. ‘리코더’도 합주에서는 풀피리만큼 작은 것, 대금처럼 큰 것, 음역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됐다. 한 수강생 복장이 종숙의 눈을 끌었다. 수녀 복장이다. 중간 줄에 앉았다. 종숙은 가슴에서 ‘쿵’하는 것을 느꼈다. 뒷모습만 보아도 친구 은주? 교실 앞쪽 창문께로 발걸음을 옮겨 자세히 보고자 했다. 수녀의 옆얼굴은 은주였다. 하지만 은주가 아니었다.
은주의 얼굴이 아니었다. 수녀는 악보와 악기를 번갈아 보며 연신 운지 연습에 몰두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은주인데 자세히 보면 은주가 아니라서 혼란스러웠다. 못 본 세월이 10년이 지났다고 해도 은주를 못 알아볼 종숙이 아니다. 수업은 어찌나 진지하게 진행되고 있는지, 언제 끝날지 모를 일이었다. 종숙은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쩔쩔맸다. 창틀에서 물러났다. 저만치 나무 밑 정원석에 앉았다. 은주가 마지막으로 보냈던 편지를 떠올렸다.
-종숙아, 너의 조언, 그간에 고마웠어. 하지만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학교생활 그만둬야 될 것 같아. 고교 시절, 대학 시절 내내 네게 말했지. 나는 수녀가 될 거야. 남에게 폐 끼치는 인간으로 살 순 없어. 그 길이 내 길이란 결심이 함 선생을 계기로 더 확고해졌어. 내가 교직을 떠나 다른 일에 종사한다 해도 함 선생은 또 따라올 것 같아. 그 사람이 따라 올 수 없는 곳에 숨어 살란다. 수녀가 되면, 수녀원에 가야만 함 선생 마음이 돌아설 것 같아.-
종숙이 시집가던 날에 황망히 헤어진 은주, 그 겨울학기가 끝나갈 때 횡성에서 띄운 편지가 어제 받은 것처럼 선명히 회상됐다.
‘수녀, 그래 은주가 수녀 되는 거 이상할 게 없다. 그런데 저 수녀가 은주일 턱도 없지 않을까?’
종숙은 정신을 가다듬고 창 너머 그 수녀에 집중했다. 수녀의 미세한 표정, 민첩한 손놀림, 입가의 피부까지 찬찬히 살폈다. 은주가 맞는데 은주가 아닌 것이 가슴만 뛰었다. 수녀는 얼굴이며 입술, 손까지 피부가 마치 ‘스밀도 복숭아’ 같았다. 아기의 피부 같았다. 은주가 옛적에 저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웠다. 연한 회색빛 수녀복, 흰색 ‘슐레이어’ 도련이 그의 얼굴을 더욱 또렷하게 나타냈다. 종숙이가 허공에 뜬 기억의 끈을 잡고 허우적거리는 중에 휴식시간을 알리는 멘트가 들렸다. 종숙은 정신을 고쳐 세우고 몸을 추스르고 교실 뒤편 문께로 총총히 걸어갔다. 그 수녀님이 제발 밖으로 나와 주기만을 바랐다. 한참이나 기다려도 수녀님은 악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운지 연습만 반복하는 것이다. 밖에 나갔던 수강생들 거의가 제자리에 돌아와 앉아 빈자리가 몇 개 안 남았다. 곧 다시 수업이 이어질 것만 같아 종숙이 더는 조바심을 누르지 못하고 큰 소리로 “강은주 선새앵……”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종숙 쪽으로 쏟아졌다. 수녀님도 움찔, 창 밖 종숙에게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쳤다. 이번엔 수녀님이 더 놀랐다. 수녀님이 황급히 밖으로 나왔다.
“종숙이- 이게 얼마 만이야. 여긴 어쩐 일이고-”
“은주 맞지요. 쎄실리아님 맞나요?”
“맞아 나 은주, 쎄실리아지 누구겠어.”
은주는 제 가슴을 손바닥으로 탁탁 두드리며 종숙에게 다가왔다.
종숙은 ‘슐라이어’ 끝자락을 받쳐 들며
“언제부터였니?”
“응, 네 결혼식에 다녀와서 곧 학교에 사직서 냈어. 그리고 곧바로 이 길을 택했어. 수녀가 되는 길도 긴 수련기간이 있어. 너도 직장 그만두었으니 기별할 길이 없더라.”
“그러느라 10여 년 소식이 없었구나. 얘 빈아, 인사드려라. 이 수녀님 엄마 친구시다.”
종숙은 초등학교 2학년 된 아들을 불러 인사시켰다. 두 사람은 나이와 신분을 잊고 한참 동안 얼싸 안고 손을 맞잡고 깡충깡충 뛰며 반가운 감정을 발산하였다. 수업 시작 멘트가 재차 울렸다. 은주를 교실로 들여보내고서도 조금 전 만났던 수녀가 정말 은주였나, 꿈을 꾸고 있나 멍멍했다. 은주는 변해도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비대칭이던 몸매는 반듯하고 아름다웠다. 케이프를 두를 이유가 없었다. 비대칭인 구석이 한 곳도 없었다. 얼굴, 가슴, 엉덩이 정대칭이었다. 목소리만 은주였다. 이럴 수가. 이렇게 변모될 수가…… 어떤 힘이 은주를 완전히 고쳐놓았단 말인가?
고쳐놓은 정도가 아니다. 아주 곱게 가꾸어 놓았다. 종숙은 은주의 연락처가 적힌 쪽지를 손에 쥐고 있었다. 짧은 시간의 만남에 반가웠고 한결 아름답게 변할 수 있게 된 사건을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 수업은 오후 늦게야 끝날 것이며 은주는 밤 버스로 떠나야 했다. 섭섭한 마음으로 친정집에 돌아온 종숙이도 내일 아침 버스로 서울에 가야 하는 사정이 있었다. 은주는 연락처 쪽지에다 청주 OO여상 음악선생. 숙소는 학교와 가까운 수녀원이라 적었다. 종숙은 마냥 감사, 감사만 연발 입 속에서 흘러나왔다. 은주의 현재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또 있으랴. 새 몸을 입고 새 삶을 사는 은주가 참 고마웠다. 자존심 하나에 죽고 사는 사춘기에나, 몸치장하며 멋 부리는 청년 시절에 늘 제 몸 하나 드러내지 않고 사느라 조바심 하던 친구였다. 반듯하고 사랑스런 함 선생의 사랑 고백이 아프기만 했던 친구였다. 지금만 같았어도, 지금의 반의반만큼이라도 고칠 수 있는 몸이었다면, 수녀복을 입지 않았을 친구. 대체 어떤 의술로 정상인 몸을 만들었을까? 무슨 힘이 은주를 저렇듯 아름답게 매만져 놓았을까?
설악초등학교서 받은 주소로 종숙은 이따금 편지를 보냈다. 은주는 편지 대신 전화로 응답했다. 종숙은 나이 들어갈수록 세상살이가 버거웠다. 거느려야 할 가솔은 물론, 아이들의 학업과 진학, 시집 친척들 간의 인간관계와 애경사. 게다가 제 몸에 병마까지 들어와 산 넘어 산이었다. 은주에게 소식 전하는 횟수가 점점 뜸해졌다. 반면 은주를 생각하면 아름다운 외모에 고운 목소리, 게다가 천성적 착함이 있으니 그의 일상은 늘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종숙은 편지에 인생사 온갖 우수사려만 잔뜩 적어 보냈고, 은주는 성서적 관점에서 간결하게 답변을 해왔다.
여전히 <우리 눈 여소서…>가 그의 콧노래라 적어 보냈다. 종숙은 은주와 차원이 달라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은주가 어느 때부턴가 종숙의 편지에 아무런 응대가 없었다. 종숙이 작품집을 보내도 답신이 없었다. 수차례 시도해도 종내 은주는 답신을 보내지 않았다. 종숙은 불길한 생각이 들어, 은주를 수소문했다. 청주학교에 전화하면 사임했다 한다. 수녀원에 전화하면 서울에 출타 중이라 했다. 서울 정릉 베네딕또에 가보면 대학병원에 입원 중이라 했다. 대학병원에 가서 환자 이름을 들이대면 며칠 전에 퇴원했노라 했다.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은주 소식은 오리무중이었다.
공교롭게 종숙이 마저 갑상선암 절제 수술을 받고 말았다. 종숙은 성대를 잃는 치명상을 입었다. 일 년 뒤에 성대 보완 수술을 세 차례나 받았다.
은주와 통화가 된 것은 종숙이가 외마디로나마 소리를 만들 수 있었을 때였다. 은주는 전화에다 대고 첫 마디가 “미안하다.”였다. 실은 자기가 그간에 뇌종양 수술을 여러 번 받았노라. 그래서 학교를 사임하고 서울대병원, 정릉 베네딕또, 또 대구 베네딕또를 줄곧 오갔노라 했다. 종숙은 그 와중에 집을 옮겼으니 달라진 주소를 받아 적으라 했다. 은주는 얼핏 당황하는 듯하더니
“가만, 가만 좀 기다려.”
종숙은 생각하기를 메모지나 필기구를 찾느라 그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전화선을 타고 덜그럭 덜그럭 부시럭 송수화기 들었다 놓는 듯한 소리가 부산했다. 누군가와 소근 대는 소리도 들렸다.
“전화 바꿨습니다. 말씀하세요. 받아 적을 테니까요.”
“방금 쎄실리아님 하고 통화 중이었는데, 댁은 누구세요.”
“네, 저는 쎄실리아님을 돕는 수녀에요. 실은 쎄실리아님께선 실명(失明)이라서-”
“-네?”
종숙은 엄청난 소식에 토를 달지 못하고 자기 주소와 전화번호 숫자를 천천히 불렀다. 대필 수녀는 “제가 다시 말해볼 테니 확인해 주세요.” 그녀가 종숙이가 불러준 대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완벽하게 옮겨 적었다. 그리고 나서 전화를 은주에게 다시 대 주었다.
“종숙아. 나야 전화 다시 바꿨어. 잘 지내고 있지 너. 박 선생과 아이들도?”

종숙은 울음이 터질 것 같아 말을 잇지 못했다.
“종숙아 왜 그래. 말해.”
“내 목소리 듣기 힘들지? 나도 그간에 성대를 잃었다가 겨우 이 모양으로 되찾았어. 우리 이제 어떻게 소통하지?”
“너도 고생 많았구나. 이런 식으로 하면 돼. 너는 편지 쓰면 되고.”
“알았어. 고마워 쎄실리아. 또 연락할게 잘 지내.”
종숙은 못할 짓이라도 벌이는 사람처럼 당황스러워 할 말을 삼키며 전화를 서둘러 끊자고 했다.
버스가 멈췄다. 앞뒤 좌석에서 안전벨트 벗겨지는 소음이 요란하다. 종숙은 상념을 털고 자기도 안전벨트를 풀었다. 휴게소에 잠시 쉬어가는 것이다. 비는 그곳까지 따라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휴게소 정차 시간은 불과 15분 정도다. 용변을 보고 바깥바람을 쐬고 버스는 다시 고속도로에 진입한다. 종숙은 잠시 끊겼던 회상의 그림자를 다시금 좇아가고 있다.
은주에게 새 주소를 적게 한 뒤로 종순은 침묵으로 세월을 보냈다. 2년간의 긴 침묵이었다. 어느 날 은주가 먼저 종숙에게 전화했다.
“말이 안 되면 글은 쓸 수 있잖아. 왜 편지조차 안 해?”
“눈을 잃은 네게 읽을거리를 보내기가 죄스러웠어.”
“아냐. 대신 읽어주고, 답장도 대필해 줄 사람이 늘 옆에 있어. 아무 염려 말고 네 소식이나 네가 쓴 글(작품)까지도 보내줘.”
“그럴게.”
대답과는 달리 종숙은 그 이후로 10여 년간 글자적인 것들은 은주에게 보내지 않았다.
“비대칭 몸과, 피부를 새롭게 고쳐주심 감사했는데, 실명을 외면하신 하나님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의문의 끝은 없었다.
종숙이가 보내는 편지나 책을 받을 때마다 은주 맘이 슬플 것 같아서였다. 성대를 잃은 지 5~6년이 지났음에도 종숙은 예배 도중 눈물이 솟구칠 때가 있었다. 성가대가 일어서고 전주가 울리는 순간이다. 미루어 짐작건대 은주도 편지를 대면할 때 그렇지 않을까 싶었다. 은주는 가끔씩 전화로 자기의 근황을 세세히 알려왔다. 몇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시력 회복은 영영 불가하다. 대구 베네딕또 수녀원에서 살고 있다. 어린 수녀 한 사람이 옆에 붙어 있어서 그의 눈이 되고 발이 되준다. 하지만 일상이 매우 만족스럽다고. 한 번 오라고. 보고 싶다고. 볼 수 없으면서 보고 싶다 했다. 앞 못 보는 사람이 보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종숙은 그 청을 들어주고자 길을 떠난 것이다. 푸르던 청춘을 다 지나보내고 왕성했던 중장년의 세월도 다 흘려보내고 이제는 거죽만 남아 살짝 바람에도 휘청대는 70의 저문 날에…… 만날 수는 있어도 볼 수는 없을 걸음인데 그냥 길을 떠났다. 대구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다. 종숙은 너무 늦은 감에 초조했다. 수도자들의 시간은 세인들의 시간과는 다르다. 대구는 온통 안개비에 젖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건물들이 몽롱한 실루엣을 드리우고 있었다. 택시기사가 한눈팔지 않고 속력을 높여 달려주었다. 시내 외곽에서 몇 차례 내비게이션에 주의하며 속도를 줄이더니 긴 담벼락을 따라 천천히 다가갔다.
-베네딕또 수녀원- 정문에서 수위에게 확인하고는
“손님 다 왔습니다. 나도 여긴 처음이라서-.”
종숙이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수위가 걸어 나와 맞아주었다.
“서울에서 오시지요? 쎄실리아님 손님 맞지요. 저 앞으로 큰 건물 보이죠. 그 건물 왼편에 있는 작은 문으로 들어가십시오.”
종숙은 캐리어를 끌며 안개비를 개의치 않고 천천히 걷는다. 정문에서 아득하게 보이는 본체 건물, 드넓은 뜰 가장자리엔 단풍으로 영롱한 나무들이 가랑비를 받으며 가지를 나른하게 늘어뜨리고 있다. 사방은 조용하기 그지없어 종숙은 제 캐리어 바퀴 소리가 너무 부담스러웠다. 옛 생각에서 훌쩍 뛰어넘어 현재 눈앞에 집중한다. 건물 앞 서너 계단을 만나 옆으로 난 비스듬한 길로 옮겨 디뎠다. 마침내 문으로 들어선다. 앳된 수녀 두 사람이 맞아준다.
“쎄실리아님 손님이시죠?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선 여기 이 방에서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세 개의 방이 문마다 커튼으로 출입구를 막고 있다. 그중 한 방으로 인도되어 탁자에 앉았다. 한 수녀가 차와 빵을 담은 바구니를 종숙이 앞에 놓으며
“오늘 ‘피정’ 온 자매 두 분이 있어요. 잠시 뒤에 그분들과 저녁식사 하실 겁니다. 그다음에 쎄실리아님과 대면하시겠습니다.”
종숙은 설레고 두근거리고 어색했다. 은주의 대면에 어찌할까? 무슨 말부터 할까? 머릿속이 마구 헝클어지고 있다. 빵 한 조각을 담은 바구니라도 ‘레이스’ 뜨개질로 앙증맞게 싸매 있다. 짐작은 했지만 수녀들의 작은 목소리 대화, 너무 엄숙한 분위기가 몸 둘 바를 모르게 한다. 설악초교에서 만나 본 쎄실리아. 이곳에 와서야 깨달아진다.
―은주는 아니, 쎄실리아는 그때 이미 성화(聖化) 되어 있었다. 쎄실리아로 살면서 성령의 만지심을 입었으리라. 지금도 하루하루 성화의 길만을 가고 있을 것이다. 눈 뜨고 살 때보다 더 높은 곳, 더 아름다운 것을 보며 살고 있을 것이다. 은주를 대면하기가 두렵다. 눈이 부실 것 같다. 나는 오염된 세상에서 쓸데없는 것들을 너무나 많이 보며 살아왔다. 안목의 욕심 때문에 안달복달 하며 늙었다. 내 모습이 얼마나 누추한지 여기 와서야 소름치게 깨닫는다. 내 사는 안목도 바꿔야 할 것 같다. ―
주여! 우리 눈 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