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뫼 호수별 보기

46호2016년 [수필] 속삭이는 자작나무 / 권정남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939회 작성일 16-12-09 17:17

본문

[수필] 권정남


요즘 수필 쓰는 일이 재미있다. 마음 속에 고여 있던 이야기를

실타래처럼 풀어 내면 후련하다.

미세한 통증마저도 치유 된 듯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난 그걸 즐기는지도 모른다.

인제군 원대리 석양에 물들어가던 은빛 자작나무들,

神이 그려 놓은 수채화를 잊을 수가 없다.


----------------------------------------------------


속삭이는 자작나무



살아오면서 우리는 수많은 사람과 자연을 만나게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나를 설레게 하는 것은 경이로운 자연과의 만남이다. 그런 만남은 좋은 글벗을 우연히 만난 듯 오래도록 행복하다.
그러니깐 가을이 깊어가던 작년 이맘때 즈음해서 몇몇 문우들과 강원도 인제군 원대리에 있는 자작나무 숲엘 갔다. 내린천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가 보니 초록 물 위에 단풍이 내려앉아 어른거리고 래프팅하던 배 위에는 한여름의 환호가 메아리처럼 남아 있었다. 산 입구 주차장부터 약 4km 정도 산 언덕을 올라가니 넘어가는 석양 아래 약 69만 그루 자작나무들이 일제히 기립한 채 손을 흔들며 우리를 반겨주고 있었다. 마치 하늘 한가운데 은색 장대비가 쏟아지다가 허공에 물구나무로 서 있는 모습이었다.
인제군 원대리 깊은 산 속에는 오래전부터 화전민이 살던 곳인데 1974년부터 1995년까지 인제군에서 화전민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고 그 자리 25ha에 약 69만 그루 자작나무 어린 묘목을 심었다고 한다. 30여 년 세월이 흐른 지금 그 나무들은 아름드리 숲이 되어 산 중턱부터 빼곡히 하늘을 덮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69만 그루 자작나무들이 발레 <백조의 호수>의 무희들처럼 흰 타이즈를 신고 원무를 하며 내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흰 살결의 여인들이 모여서 달빛 아래서 찰방 거리며 목물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도 아니면 6.25 때 인제지구 탈환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다가 희생된 수 많은 전사자들의 유골 같았다. 아픈 역사의 현장에서 어머니를 부르다가 숨져 간 무명용사들의 원혼이 백골이 되어 원대리 깊은 구릉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시위를 하는 듯했다.
자작나무는 불에 잘 붙으며 불에 탈 때 자작자작 소리를 낸다고 해서 자작나무라는 학명이 붙여졌으며 약 효험이 많아 치료 재료도 널리 쓰인다고 한다. 또한 윤기 나는 표피는 옛날 종이가 없을 때 종이 구실을 했으며 전쟁 때는 부상병들의 다리를 감아 주는 나무로 사람들을 이롭게 해주는 나무라고 한다.
내가 처음 만난 자작나무는 사춘기 시절에 읽었던 이광수 소설 「유정」에 나오는 나무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주인공 최석이 러시아로 떠나자 남정임은 기차를 타고 자작나무가 우거진 바이칼 호수까지 따라간다. 얼어붙은 바이칼 호수에서 최석을 찾던 남정임의 애틋한 목소리가 살을 에는 듯한 밤바람 속에 절규처럼 들렸다. 바이칼 호수와 겨울 자작나무 풍경을 작가 이광수는 눈으로 보듯 묘사를 하였다. 소설을 읽은 지 40년이 지났는데도 바이칼 호수와 자작나무를 흔들던 밤바람 소리가 아직까지 내 가슴에 살아 있다.
그렇게 환상 속에서만 느끼고 있던 자작나무를 실제로 만난 것은 육 년 전 중국에 갔을 때이다. 백두산 산비탈에 근엄하게 서 있던 자작나무들,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천지(天池)를 떠받들고 있어서 그런지 장엄해 보였었다. 장백폭포 올라가는 산길에 수많은 자작나무 뿌리가 길 밖으로 나와 있어서 흡사 커다란 백사(白蛇)가 구불텅거리며 발밑을 기어가는 듯 소름이 끼쳤다. 6월 훈풍이 불어오던 밤 숙소 옆 자작나무 살결을 만지고파 숲에 들어섰을 때 갑자기 총부리를 겨누며 따라오던 중국군인들 때문에 얼마나 놀랐던가.
30여 년 전 묘목이었던 원대리 자작나무가 청정 지역에서 거목으로 자라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귀공자의 모습으로 당당하게 서 있다. 몇 년 전경주 여행 때 천마총에 보존된 천마도(天馬圖)를 본 적이 있다. 자작나무 껍질에 쓴 글이나 그림은 질감 때문에 오래 보존된다고 해서 그런지 천 년 전에 그린 그림인데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흡사 자작나무 껍질에 그려 놓은 흰색 말이 다래를 풀고 뜀박질하는 모습이 신라인의 기상인 듯 천 년 세월이 지났는데도 그 느낌이 역동적으로 다가왔다.
나도 문학에 입문한 지 30여년이 되었다. 그런데도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좋은 작품을 제대로 못 쓰고 있다. 천 년이 지나도 사람들 가슴을 흔들어 놓는 오래 묵을수록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천마도(天馬圖) 같은 그런 시(詩)를 나도 쓰고 싶다. 그리고 사계절 다양한 변화 앞에 서도 묵묵히 산비탈을 지키며 자기 색깔을 잃지 않고 겸손한 듯 기품을 잃지 않고 서 있는 자작나무 닮은 수필을 쓰고 싶다. 또한 침묵을 통해 교훈을 일깨워 주는 조선의 선비 같은 자작나무의 지조 있으면서도 고상한 품격을 배우며 세월 속에 나이 들어가고 싶다. 자작나무 껍질에 편지를 써서 보내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중년이 훨씬 넘은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자작나무 껍질에 애틋한 사연의 편지를 써서 나에게 보내 준다면 설레며 그 사랑을 선뜻 받고 싶다.
산을 내려오면서 돌아보니 석양에 반사된 늦가을 자작나무 숲이 신(神)이 그려 놓은 수채화처럼 신비스럽고 아름다웠다. 아니면 거대한 두루마리 한지를 허공에서 펼쳐 놓은 듯 은빛 숲은 말 그대로 ‘속삭이는 자작나무’ 대서사시였다. 계절이 바뀌고 봄이 오면 연둣빛 자작나무의 싱그러운 이파리들이 눈부실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진실로 보고픈 자작나무의 모습은 눈 오는 날 허공 가득 면사포를 쓴 신부 같기도 하고 시린 발을 눈 속에 담근 채 고행하는 순례자 모습의 자작나무를 보고 싶다.
언제쯤이 될까? 정중동(靜中動) 멈춘 듯 움직이는 고요한 눈 내리는 숲에서 흰색 성의(聖衣)를 어깨에 걸치고 수행하는 백색 자작나무 그 영원한 선(禪)의 세계와 손잡고 원대리 산자락을 거닐고 싶다. 그런 자작나무를 상상하고 있노라니 문득. 내가 좋아하는 백석 시인의 「백화(白樺)」 시(詩)가 생각이 나서 천천히 읊으며 늦가을 산을 내려왔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모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 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백석, 「백화(白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