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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2016년 [수필] 상수(上壽) 할머니 자식 사랑 외 / 최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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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803회 작성일 16-12-09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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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최효선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귀한 것임을~~

오늘도 불편한 아내의 손을 잡고 남은 여정을 위해

마음을 추스르며 하나님의 손을 잡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영혼 속에 감사함을 느끼며

내 목숨을 내어 줄 만큼 사랑하는 아내가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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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수(上壽) 할머니 자식 사랑



이 씨 할머니는 올해 97세로 ‘밥 사랑 공동체’ 최고령 어르신이다.
부군이셨던 호옥선 할아버지는 95세 되던 해에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그야말로 보기 드문 장수 부부이셨다. 이 씨 할머니는 화천에서 출생하였는데 15세 때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양구에서 화전을 일구며 겨우 연명하는 18살 된 호옥선 씨에게 시집을 오셨다.
그렇게 시작된 결혼생활은 참으로 고단하고 힘든 여정이었다. 할머님 말씀을 빌려 표현하면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면서 어떻게 자식 여덟을 낳았는지 나도 몰라” 하시면서 자식들에 대한 애환이 메마른 눈가에 서려 있다.
“첫째가 3년 전 77세에 넷째는 작년에 60세 때에 내 눈앞에서 먼저 세상을 떠났다”며 한숨을 지으셨다.
지금은 육 남매가 살고 있는데 그 자식들을 살림이 어려워 공부를 시키지 못해 모두 일자무식이라 변변한 직업이 없어 그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형편이라 할머니를 제대로 봉양하지 못하고 있단다.
체격이 왜소하고 하얀 백발을 뒤로 쪽지어 허름하게 빗어 넘기신 할머니는 하얀 치아가 매우 인상적이셨고 고단한 삶 가운데서도 항상 웃는 얼굴로 사셨다.
성함이 이 씨로 되어 있어 여쭈어 보았더니 시집오기 전에 이름이 있었는데 시집을 온 후에 호적을 새로 하면서 시부모가 며느리 이름을 몰라 성씨만 쓰기 뭣해 이 씨로 등재했단다. 그것이 이름이 되었고 정작 처녀 때 불리던 이름은 잊어버렸다고 하셨다.
밥 사랑 공동체에 식사를 하시러 오시는 어르신들 평균 연령이 77세인데 이 씨 할머니만 오시면 깍듯이 인사를 하신다. 15세에 시집오셔서 18살에 첫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80세이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할머니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장사하지”
“할머니가 무슨 장사를 하세요. 어디서 뭘 파시는 데요”
“고속버스 터미널 옆 길가에서 파두 팔구 콩, 감자, 다 팔아”
“언제부터 장사를 하셨어요.”
“평생을 했지 길거리에서 장사해서 자식들 키우고 영감태기가 돈을 안 벌어다 줘서 애들 먹여 살리려 기 쓰고 했지”
“고생을 많이 하셨네요.”
“고생? 그런 건 고생이 아냐” 한숨을 내려 쉬시곤
“먹일 것이 없어 배를 쫄쫄이 굶기고 부황이 들어 배며 얼굴이 퉁퉁 부어오르는 자식들을 바라보는 거 그게 큰 고생이지, 자식들을 하나같이 공부를 못 시켜 지금도 사는 게 말이 아녀.”
배부르게 먹이지 못하고 공부도 시키지 못해 자식들이 못 산다고 여기시는 할머니의 회한이 눈가에 스친다. 그런 애절한 마음이 자녀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 97세의 노구를 이끌고 길거리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청호동 아바이 마을 사람들이 잘 팔아 주어서 그나마 생계를 유지하고 계신다고 누군가가 귀뜸해 주었다.
“내가 왜 이렇게 오래 사는지 모르겠어.”
점심을 드시고 나서 허름한 유모차를 지팡이 삼아 밀고 가시는데 그 유모차 위에 쌀 한 포를 얹어 드렸다.
“내가 도와주어야 하는데 밥 먹여 주고 쌀까지”

미안스러워 어쩔 줄 모르시는 할머니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쪽진 비녀 옆으로 흐트러진 백발 머릿결이 바람에 흩날리고 끌리듯이 딸려가는 검정 고무신이 불쌍하기보단 정겹게 느껴졌다.
평생의 아픔과 고난 속에도 팔십이 되어 가는 자식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던져 헌신하시는 어머니의 사랑이 너무도 고귀하게 가슴을 친다. 97세인 이 씨 할머님은 노구를 이끌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통해 자식들을 사랑하고 계시는 것이다.
“할머니! 자식을 사랑하는 그 열매가 손주와 증손주 대에서 복스럽게 주렁주렁 열리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이 씨 할머님은 그 후 3년이 지난 100세에 힘든 이 세상과 근심 덩어리인 자식들을 뒤로 하고 천국으로 이사를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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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연화 할머니는 올해 76세로 곱상하게 생기셨고 얌전하신 분이시다. 부산이 고향이신데 둘째 아들이 속초에 살고 있어 이곳에 계시는 날이 많아 ‘밥 사랑 공동체’에서 매일 점심을 드셨는데 올해 들어서는 통 뵙지를 못하였다.
초여름 날씨가 기승을 부리던 유월 초, 할머님이 공동체에 점심을 드시려고 오셨다. 반가운 마음에 손을 붙잡고 “할머니 어디 다녀오셨어요?” 여쭈니까 내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말씀이 없으셨다.
노인분들을 매일 대하다 보니 이제는 눈빛만 보아도 건강상태를 가름할 수 있게 되었는데 몇 개월 만에 만난 할머님이 상태가 예전 같지 않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식사를 하시는 모습을 살펴보니 치매 증상이 많이 진전되신 것 같아 보였다. 반찬만 계속 드시다 밥만 연거푸 드시는가 하면 주변을 살피시는 등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식사를 마치신 할머니한테 다가가서 “할머니 어디 다녀오셨어요? 하고 여쭈었더니 그제야
“부산 큰아들네 갔다 왔지”
“거기서 재미있게 지내셨어요?”
“맨날 혼자 있어서 무서워”
“내일도 오셔서 식사하시고 다리 아프시면 물리치료도 하세요.”
살짝 웃으시곤 집으로 돌아가셨다.
급식을 마치고 자원봉사자들도 다 돌아간 후 잔일을 정리 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그 할머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할머니 왜 오셨어요.”
“밥 먹으러 왔지, 밥 안 줘”
“조금 전에 진지 드셨잖아요.”
“아 참, 먹었지 내 정신 좀 봐” 하시더니 쑥스러운지 얼른 나가셨다.
할머니가 나가신 후 나의 경솔함을 후회하였다 미안하지 않도록 조금이라도 밥을 차려 드렸으면 좋았을 것을……. 다음에 그런 일이 있으면 꼭 그렇게 하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정리가 끝난 후 내일 급식을 준비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시장을 가는데 그 할머니가 뒷짐을 집고 어슬렁어슬렁 거리를 배회하고 계셨다.
“할머니 더운데 왜 밖에 나오셨어요.” 하고 여쭈었더니 빤히 쳐다보시며 하시는 말씀이
“우리 집이 없어졌어.”
집을 찾지 못하시는 할머님을 집 앞 층계까지 모셔 드리면서 걱정이 앞섰다.
이튿날 아침 식사준비가 한창인데 할머니가 들어오셨다. 어제보다는 표정이 밝아 보이셨다. 식탁에 걸레질도 하시고 말씀도 엽렵하게 잘 하시었다.
그날 오후 그 할머니 며느리가 다급히 찾아와서 어머님을 못 봤느냐고 했다. 사연인 즉 다섯 살 손녀딸을 데리고 나가셨는데 손녀딸은 집에 돌아왔는데 할머니가 집에 안 돌아오신 것이다.
함께 동네를 몇 바퀴 돌았는데도 행방이 묘연하였다. 아들 내외가 차를 가지고 사방을 돌아다니며 찾았지만 찾지 못한 것을 보고 시장을 다녀왔는데 할머니가 ‘밥 사랑 공동체’ 문 앞에 앉아 계셨다
“할머니 어디 갔다 오셨어요.”
“손녀딸이 없어졌어.”

“집에 있어요.
“집에 있었지.”
“집이 어딘데요
그 할머니가 손가락으로 보일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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