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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호2003년 [소설-김성록]이오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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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갈뫼
댓글 0건 조회 3,965회 작성일 05-03-26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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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수라는 이름은 흔하다. 최광수나 김광수라면 그저 외무장관이나 야구
선수쯤으로 기억하고 있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흐리마리 버리
면 그만이다. 혹은 그보다 더 이름을 드높인 또 다른 광수가 나타나기라
도 한다면, 그때 가서 적당히 기억의 방에 올려도 그 방면의 경쟁력에서
별반 뒤쳐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찌 이광수라는 이름을 기억 속에서 지워 없앨 수 있을까. 그
의 소설 한 마당을 그대로 꺼내 읊을 수는 없어도 몇몇의 제목만큼은 한
여름 햇빛처럼 너무도 또렷하다. 고집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만, 그 점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의 기억도 매일반일 것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같은 이름의 이광수가 나타나 한동안 정연했던 나름대
로의 인명부에 혼란을 가져다 주었는데, 그로부터 자꾸만 가물가물 잊혀
졌던 기억이 꼬리를 물고 따라나왔다. 보통은 이름과 얼굴이거나, 더하여
일이 어울려야 오래 기억에 남는 법이 아니던가. 그렇지 않다면 어쩌다 마
주치는 대부분의 이름들은 단명에 그치고 말 일이다. 그랬다. 분명 보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이광수의 얼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날도 근수는 늦은 아침을 뜨는 둥 마는 둥 물리고 나서 아홉 시 삼
십분부터 시작되는 뉴스를 보았다. 어느새 일곱 달째 계속되는 판에 박은
일과지만, 때 이르게 일을 놓고 난 뒤부터 오전 시간은 그야말로 한밤중
이나 다름없었다. 학교로 직장으로 세 식구가 다투어 집을 빠져나가는 눈
치가 보이면 그때서야 근수는 방에서 천천히 기동했다. 여름까지만 해도

가장의 언저리에서 두리번거리던 아내의 시선도 마주치기가 겁 날 정도로
시큰둥해진 지 오래였다.
그러니까 아내의 따가운 시선으로부터 해방되고 나서 다시 두 시간 반,
날씨를 끝으로 뉴스도 바닥이 나면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거실 한켠에
놓인 그놈의 새빨간 전화통도 거짓말처럼 먹통이기 십상이었다. 어쩌다
잘못 걸려온 전화에 대고 짜증을 부린 일이 넌지시 후회될 정도였다. 요
즘 들어서는 그조차 뜸하다 못해 귀하기까지 하였다.
그 다음은, 물론 자신이 전화로 다가가는 수밖에 없었다. 벌써 몇 해째
너저분하게 덧붙여진 인명부를 앞으로 뒤로 넘기다 보면 짜장 한 명 정
도는 걸려들게 마련이었다. 대개는 이쪽이 먼저지만 점심이나 하지, 혹은
저녁 때 소주 한 잔 어때, 거기까지는 아직 유효한 경우가 많았다. 그나
마 출근보다는 퇴근 시간이 백 번 아기자기할 무렵, 이리저리 말을 돌려
가며 술자리에 매진해 온 덕분이었다. 하기야 인명부도 바닥이 나 이제는
그 이름이 그 이름이었고, 게다가 점점 퇴짜를 당하는 경우가 늘기는 했
지만.
어쨌거나 뉴스의 태반은 무장공비에 관련된 기사였다. 그것도 무엇 하
나 진전된 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한번도 들어 보지 못한 산이나 봉
이름 몇 개가 더 추가되었을 뿐이었다.
얼마 안 있어 얼추 인명부 쪽으로 막 생각이 이동할 때였다. 아나운서
의 꽃잎 같은 입술이, 열 시부터 생포 공비 이광수와 또 누군가의 기자회
견이 방송된다고 말했다. 한창 작전이 진행중인 상황에서 퍽 이례적인 호
들갑이었다. 그렇거나 말거나, 굳이 전화기에 매달릴 것도 없이 아직은 고
스란한 기다림이 남아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그 참에 근수는 아예 팔베개
를 하고 텔레비전 앞에 길게 누웠다.
이광수. 광어회가 먹고 싶다는 사람답게 이광수는 줄곧 입맛을 다시며
질문에 대답해 나갔다. 물론 근수의 관심이 이광수의 대답이나 그 내용에

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광수가 지닌 교양의 깊이에 관
심을 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근수가 이광수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찾아내
고자 했다면, 그것은 무정(無情)이나 유정(有情)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눈
물이었다.
여느 귀순자나 또는 탈북자들의 기자회견 화면에서 근수는 한번도 눈물
을 본 기억이 없었다. 부모나 아내나 자식을 두고 온 사람이, 어쩌면 다시
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를 피붙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대면서도 약속
이나 한 듯이 눈물을 감추기 십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더러는 어린아이들
도 기자회견장에 동원되었는데, 고만고만한 아이들에게서조차 근수는 눈
물은커녕 이렇다 할 표정 하나 제대로 찾아내지 못했다.
그 장면에서 매번, 근수는 어김없이 눈 주위에 감겨오는 눈물을 주체하
기 힘들었다. 자꾸만 이오의 얼굴이 눈 앞에 어른거려서였다. 인명부에조
차 오르지 못한 이름, 오랜 세월 동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름이
지만, 그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전화번호나 주소조차 한번도 갖지
못한 이름, 이오.
아무려나, 이오를 처음 만난 곳은 역시 기차역에서였다.
기차역이 그곳에 있다는 말을 기준으로부터 들었을 때, 근수는 그냥
지껄여본 말이거니 받아들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게 멋드러진 놀이구
역을 그때까지 모르고 지나쳤다는 일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서였다. 덧
붙이자면, 산이 막히고 길이 막혀 고향에 가지 못하고 낯선 땅에 주저앉
은 마당에, 그곳이 수복지구니 점령지구니 따지면서도 아이들한테 기차
역을 알려 주지 않은 어른들이 내처 얄밉기도 하였다. 너도 나도, 어른들
이 떠나온 고향에도 숨겨 놓은 기차역이 있었는지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
았다.
어정버정 학교가 파했을 때, 어느새 해는 정수리 위에 떠 있었다. 집까
지 근수를 따라나선 그림자가 더욱 짧고 가늘게 보였다. 그러잖아도 안팎

으로 근수가 턱없이 모자란다는 놀림을 받는 터에, 그림자마저 따라다니
며 기를 죽였다.
아무렇게나 책보를 방안에 던져둘 때만 해도 마음은 벌써 기차역에 거
지반 가 있었지만, 근수는 우선 안달부터 가라앉혔다. 지나가는 바람소리
뿐 집안은 조용했다. 처마 밑에 둥지를 튼 제비 내외도 아직 외출에서 돌
아오지 않아, 그러다 보니 낯익은 얼굴이라곤 해님뿐이었다.
근수는 부엌문 앞으로 다가갔다. 둔탁한 소리를 내지르며 문이 밖으로
열렸다. 이번에는 그림자 대신 한 줄기 햇빛이 따라 들어왔다. 뒤쪽으로
나 있는 쪽문을 마저 열자 부엌 안은 한결 환했다. 천천히 발걸음을 죽이
며 근수는 정지 위 한쪽 구석에 놓인 물동이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뚜껑을 내려놓는 서슬에 놀라서인지 물동이 속에서는 작은 파문이 일었
다. 근수는 파문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그때서야 숨죽이고 있던 물의 표
면에 하나의 얼굴이 나타났다. 얼굴은 완전했다. 이제까지 가게의 유리문
을 통해서 보았던 얼굴은 일그러지거나 찌그러진 얼굴이 고작이었다. 그
렇지 않으면 펑퍼짐하다거나 길쭉한 얼굴이기가 십상이었다. 그때마다 그
얼굴들은 모두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고 근수는 굳게 믿고 있었다.
따로 거울이 없었으므로, 근수는 오랫동안 물 위에 떠오른 자신의 얼굴
을 바라보았다. 그러기를 한참, 근수는 옆에 놓인 사발을 들어 단번에 자
신의 얼굴을 흩트렸다. 두 사발째, 물배를 채우는 일은 한번도 보지 못한
기차를 하얀 도화지 위에 그리는 것보다는 쉬웠다.
그렇게 해서, 무슨 먼 길이라도 떠나는 사람처럼 근수는 집을 나섰다.
보나 마나 기준은 벌써 기차역에 먼저 닿았을 것이었다.
큰 거리를 지나 근수는 ㄷ자로 놓인 시장의 위쪽 꼭지점을 벗어났다.
그곳 야트막한 언덕 밑에도 길을 사이에 두고 초가집들이 들어서 있었
다. 오른쪽으로 커다란 정미소를 지나자 제법 큰 길이 나타났다. 사거리

에서 갈라진 길이었다. 다시 그 길을 따라 북쪽으로 얼마쯤 갔을 때, 벌
써부터 콩콩 뛰어오르던 가슴이 가다리지 못하고 마구 방망이질을 해대
었다.
아아, 그곳에 기차역이 보였다. 그리고 북쪽을 향해 머리를 둔 채 폭격
을 당한 화물차가 몰골도 사납게 서 있었다. 한눈에 들어왔다.
거기서부터는 금방이었다. 취수탑 하나만 눈에 띌 뿐 아무 것도 눈 앞
을 가로막지 않았다. 널따란 길 위에는 여러 가닥의 레일이 놓여져 있었
으며, 그 끝 부분쯤에 기차가 앉아 있는 모양이었다. 기차는 파란 색이나
빨간 색이 아닌 까망 색이었다.
근수는 다짜고짜 기차 앞에 다가섰다. 금방이라도 레일 위를 달려가기
라도 할 듯이, 기차가 숨을 할딱거리는 것만 같았다. 모두 네 량의 연결된
화차를 지나 맨앞 기관실에 다가갔을 때, 아쉽게도 이미 다른 아이들이 기
관실을 차지하고 있었다. 반쯤 대가리가 달아난 대로, 아이들은 앉거니 서
거니 금방이라도 기차를 몰고 북쪽을 향해 내달릴 것처럼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관실은 근수에게도 자리를 내주었다. 멋있었다. 틀
림없이 그 자리에 있었을 계기들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긴 해
도, 약간 높은 곳에서 정면으로 바라다보이는 기찻길은 신비롭기까지 하
였다. 멀리 북쪽 언덕을 빠져나가는 레일의 간격은 만날 듯 말 듯 점점 좁
아졌다. 더 멀리 어디쯤인가에서, 두 줄의 레일이 결국은 하나로 만나게
되고, 그곳에서 기차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그곳
이 바로 하늘 끝은 아닐까.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오래 가지 못했다. 기관실에서 내려와 화차의 받침
대에 발을 괴고 안을 넘겨다본 근수는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하늘로 향해 가는 기차는 초
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탄가루를 뒤집어쓴 채, 온통 시커먼 빈 몸뚱어리
뿐이라니.

근수가 세 번째인가 네 번째인가 기차역에 갔을 때였다. 처음 보는 기
차에 대한 감격과 충동도 전쟁놀이라는 현실적인 안성맞춤의 마당 앞에
자리를 내줄 즈음이었다. 전에도 한두 번 본 적이 있는 아이가 그 날의 놀
이에서도 땀을 흘리며 열심히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였다.
아이들은 녀석을 이오라고 불렀다. 다른 아이들처럼 한자로는 어떻게
쓰는지 알 수 없었다. 대신 아이들은 이오만 보면 난데없이 구구단을 외
어대었다. 그러면서 이오는 십이오, 열 달이 되지 않아 덜 떨어진 자식이
라는 뜻이라고 둘러대기도 하였다. 더러는 성이 육 씨는 아니지만, 육이오
에서 그냥 이오를 따 온 이름으로, 전쟁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뜻
이라고 지껄이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럴 때면 이오에 관한 말들은 의례 한
짐씩 더 불어나게 마련이었는데, 할아버지와 단둘이 산다는 둥 누이와 형
과 셋이 산다는 둥 여러 가지였다. 그러나 딱 부러지게 이오의 어머니를
대거나, 사는 곳을 가리키는 아이는 하나도 없었다.
그렇거나 말거나, 전쟁놀이에서 이오가 맡은 역에 대해 투정을 부리는
아이도 드물었다. 누구도 이오의 역을 대신 맡겠다고 나서는 아이도 없었
다. 언제나 초장에 죽어 나자빠지는 역이기 때문이었다.
화차 위거나, 바퀴 밑이거나, 레일 위거나, 심지어는 길바닥 위에서도 아
이들은 이오만 보면 마구 총을 쏘아대었다.
따다다다당 땅땅 땅땅따다다다다----
그러면 총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영락없이 이오는 바닥에 쓰러졌다.
아냐, 난 안 죽어. 아직 안 죽었어.
행여라도 다른 아이들처럼 떼거리를 쓰고 시간을 끌다가 죽는 법도 없
었다. 삶보다는 죽음에 더 욕심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다가도
여기저기서 총소리가 사라질라 치면 이오는 누구보다도 먼저 살아났다.
곧바로 다시 죽는 한이 있어도. 그렇게 일어서기가 바쁘게 열 두어 번 죽
고 나면 옷은 거지반 탄가루 투성이가 되었다. 검정 옷에 탄가루가 무에

걱정이 되었을까마는, 그때마다 처절하게 이오는 옷에서 탄가루를 털어내
었다. 한 줌 남김없이 털어내느라 애썼다.
이오는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였다. 말하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는 것,
그것은 전쟁놀이에서는 허깨비에 지나지 않았다. 때문에 이오의 총은 대
부분 헛발이기 일쑤였으며, 이오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 아이도 장난삼아
어쩌다 한번이었다. 엉겁결에 쓰러졌던 아이도 곧장 웃으며 일어났다. 소
리 없는, 그래서 누구도 죽고 죽이지 않는 총을 이오는 자랑스럽게 생각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오는 항상 이오였지 아니오는 아니었다. 이오가 아니오
라고 말해야 할 장면에서, 언제나 이오는 벌써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이
상하게도 이오는 필요할 때면 언제나 나타났으며, 필요하지 않을 때면 의
례 사라지고 없었다. 알 수 없게도, 이오는 그 때를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그 무렵 신작로에 면한 양쪽의 집들도 하나둘 얼굴이 달라지기 시작했
다. 특별히 남향받이 구호주택의 맨 앞줄은 미리 가게 터로 구획되어 있
었던 만큼, 크기로 본다면 시장통의 여느 가게들과는 상대도 되지 않았
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대단한 건물이 들어선 것은 아니었고, 허우대만
크다 뿐이지 초가지붕이기는 뒤편의 구호주택이나 매일반이었다. 다만
시장통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잡화점, 철물점, 문방구, 목공소, 사진관, 이발
관, 수선점, 그리고 식당들로 겉보기에도 다소 점잔을 빼고 있다는 것뿐
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간판들이었다. 사람으로 본다면 이마빼기거나 가슴
께가 되겠는데, 대부분 간판들은 그 둘, 또는 한 군데에 걸려 있었다. 위
것은 흰 함석판에 검정 글씨, 그리고 아래 것은 나무판에 역시 검정 글씨
였다.
마찬가지로 대부분 간판들은 무슨 무슨 상회(商會)에서 벗어나 있지 않
았으며, 예외가 있다면 무슨 무슨 관(館)이나 점(店)이 고작이었다. 말하

자면 무슨 무슨이 그 가게의 이름이겠는데, 그 이름도 지도가 표시하는 어
느 지방을 크게 벗어나는 법은 없었다. 나진, 청진, 신포, 장진, 함흥, 흥남,
원산, 통천, 고성, 그리고 금강들이었다. 중에서도 청진 함흥 흥남 원산 통
천 고성 금강은 단연 으뜸으로, 서울이니 부산이니 강원이니 하는 이름들
은 발붙일 곳이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했으나, 근수 또래에게 가장 신경이 쓰이는 곳은 아무래도 시장거리였
다. 기차역으로 통하는 사거리 위쪽으로, 그러니까 신작로를 끼고 북쪽 자
리에 ㄷ자 모양으로 형성된 시장거리에는 하루가 다르게 볼거리가 불어나
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이름을 내건 간판들도 그러했지만, 때로는 열린 문
으로, 때로는 유리창 앞에 붙어 안을 훔쳐보는 눈도 요기만은 쏠쏠했다.
손 안에 넣을 수 없는 물건을 탐하는 눈길이라 더욱 은근했을 법하다. 특
히 주위 환경이 담아내는 자연 색을 빼고는 온통 검은색과 흰색 계통의
색깔에만 의존해 있던 아이들의 감각으로 본다면, 시장 안쪽에 새로 들어
선 포목점에 진열된 천이나 옷감들의 색깔은 다른 가게에서는 볼 수 없는
경험이자 혼란이었다.
그뿐만은 아니었다. 얼마만큼씩인지는 몰라도 그곳에서는 장이 서기도
하였다. 장날이 되면, 이른 저녁까지 시장통은 사람들로 붐비었다. 할아버
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아저씨와 아주머니, 형과 누이, 그리고 동생
할것없이 모두가 그곳에 모여들었다. 마치 근동의 크고 작은 동네를 한꺼
번에 옮겨다 놓은 것처럼.
어김없이 장날 아침이면 근수도 금강댁의 손에 이끌려 집을 나서곤 하
였다. 그때마다 금강댁의 발길은 한결같았다. 우선은, 시장거리 맞은편에
앉은 차부에 들르는 일이 먼저였다. 아침 저녁 두 번씩 오가는 버스에서
장날만큼은, 특히 아침 차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내렸다. 사람들의
손과 머리에는 하나같이 무엇인가가 들려지거나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금강댁에게 그들의 짐은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보다는 사람들의 얼

굴을 살피는 게 분명했는데, 유독 간단한 행색의 사람에게 더 큰 관심을
쏟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표정이 완연했다. 그러나 금강댁은
그때마다 실망과 수심으로 가득한 눈을 내리깐 채 돌아서야 했으며, 그제
서야 발길을 시장통으로 옮겨 놓는 것이었다.
시장거리에 들어선 금강댁에게 무슨 따로 바쁜 일이 있어 보이지는 않
았다. 그렇기는 시장에 모여든 대부분의 사람들도 어슷비슷해 보였다. 대
개의 사람들이 파는 일과 사는 일보다는 보는 일에 열심이었다. 몇 번씩,
거기가 거기인 시장통을 도는가 하면 별로 살 염도 없이 좌판이나 가게
앞을 서성이기가 십상이었고, 더러 아는 사람을 만나기라도 할 양이면 아
예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사방을 두리번거리기가
일쑤였다.
모두가 그랬다. 도통 바쁜 일이 없었다. 그러니 자연 시장통에는 나는
사람보다는 드는 사람의 발걸음이 많았고, 그래서 장날은 하루 종일 붐빌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는 사람은 아는 사람끼리, 또 모르는 사람은 모르
는 사람끼리 만나고 헤어지고, 그래서 모르던 사람도 다음 장에서 만나면
아는 사람이 되는, 그런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그 무렵 넘쳐나던 장터의
모습이었다. 아침나절 시장에 내놓은 물건의 임자가 저녁 때 누가 되었는
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려나 장날의 해는 저마저도 바쁜 일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빈 손
으로 시장을 빠져나오거나, 아니면 든 손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모두에게
해는 똑같은 잔광(殘光)을 남겨 놓고 있었으며, 진작부터 주막에서 진을
치고 앉았던 어른들은 연신 한 손을 허공에 대고 흔들며 같이 온 사람들
로부터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그렇지만 문 밖에 섰던 사람들은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주
막 안의 어른들을 이기지는 못했다. 그때부터 어른들의 목소리는 한숨과
눈물을 담아 한없이 높아져 갔고, 나절은 또 한번 바뀌어 이번에는 달과

별이 나서서 지칠대로 지친 육신을 어루만져 주었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시장통에 모인 사람들은 난리 중에 헤어진 핏줄
의 생사를 수소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인민군에 입대한 맏이를, 또
는 맏이를 보았다는 사람을 기다리는 금강댁의 빈 발걸음도 그랬으며, 먼
발치에서 훔쳐본 이오의 말없는 발길도 그와 같았다. 그러나 슬프게도 헤
어짐은 어쩔 수 없이 다시 헤어짐으로 남았다. 눈물을 다만 눈물로 가슴
깊은 곳에 감춰둔 것처럼.
사실 아직 말은 안했지만, 이오는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난리 중에 모
든 것의 순서가 흐트러진 가운데, 시대가 바뀌어 어떻게든 일이삼사나 가
갸거겨는 떼고 봐야 한다는 부모들의 등쌀에 못 이겨 국민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은 애초부터 나이와는 아랑곳없었다. 두세 살은 보통이고 너덧 살
차이도 만만치 않게 있었다. 그러나 딱 부러지게 이오의 나이를 모르는 데
다가, 도무지 그 시간을 이오가 어디서 어떻게 보내는지, 불쑥불쑥 궁금증
이 일었다. 매일같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앞자리 책상에 앉은 아이가 이
오처럼 보이는 때도 있었으며, 어쩌다가는 꿈 속에서 이오를 만나기도 하
였다. 꿈 속에 나타난 이오는, 그때마다 늘 혼자였다.
전쟁놀이 구역을 기차역에서 북천교로 옮겼을 때의 일이었다. 땡볕을
피해 전쟁터를 기차역에서 북천으로 이동했으니, 아마도 여름이었을 것이
다.
읍내를 벗어나는 신작로를 따라 가면 남쪽에는 남천, 북쪽에는 북천이
가로놓여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남천과 북천은 읍내가 끝나는 지점으로부
터 남과 북 쪽으로 1킬로미터쯤 되는 거의 같은 거리에 자리했다. 그러나
남천은 수량도 적었을 뿐만 아니라 콘크리트로 된 다리도 밋밋하기 짝이
없었다. 그에 비하면 북천은 물도 깊었으며, 천을 따라 작은 수풀도 어우
러져 있어 여름철 놀이 장소로는 그만이었다.
물론 그것이 다는 아니었다. 북천에는 실향민들에게 망향의 염을 다독

거려 줄만한 충분한 징표가 있었다. 바로 북천교가 그랬다. 남과 북의 방
위를 정확히 차고 앉은 북천교는 모두 여덟 개의 교각이 떠받치고 있는
꽤 긴 다리였다. 왕복 2차선의 차도와 양쪽에 인도까지 두어 의젓한 다리
모양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름 한철에는 풍족한 그늘을 안겨 주
기도 하였다. 그에 더하여 막힌 데 없이 사방팔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시
원하기가 얼음창고나 진배없었다. 그늘 따라 바람 따라 이리저리 옮겨 앉
을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징표는 다름 아닌 상판이었다. 다리의 반이 나머지 반과 달랐다.
북쪽의 것은 나무였고 남쪽의 것은 콘크리트였다. 그러니까 본래는 북이
세운 다리였는데, 난리 중에 남쪽의 다리 절반이 절단 났고, 다시 그 절단
난 반쪽을 남에서 붙여 세운 것이었다. 말하자면 남과 북이 반반으로 세
운 다리인 셈이었다.
다들 그런 마음을 가졌다고는 볼 수 없어도, 다리 위를 지나거나 설령
다리 밑에 누워 있다 하더라도 남과 북, 또는 북과 남이 마주서서 눈 앞에
아른거렸을 성싶다. 실향민과 그 개 같은 자식들에게는.
그 날도 읍내의 아이들은 바짓가랑이를 걷어붙이고 포탄의 흔적이 그대
로 남아 있는 교각 밑을 따라 돌며 죽고 죽이기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그
것도 잠깐, 무언가 허전하고 시큰둥하기 짝이 없었다. 말하자면 결정적인
게 없었다. 그때 어디서부턴가 이오가 나타났다. 구세주처럼. 아이들은 모
처럼 너도 나도 신바람을 내었다. 물론 이오도 신이 나 하기는 마찬가지
였다. 살짝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미소로 너끈히 알 수 있었다.
전쟁놀이는 그때부터가 가경이었다. 아이들은 교각을 따라 돌다가도 이
오가 교각 아래쪽에 자리잡았을 때만 총을 쏘았다. 그러면 풍덩 소리와 함
께 이오는 옷을 입은 채로 물 위에 나자빠지는 것이었다. 정말로 총소리
가 멎을 때까지 그 자세로, 이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죽은
사람의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아이들은 한참만에 이오를 살려내었다. 그리

고는 똑같은 방법으로 또 죽였다.
이번에는 근수가 이오를 죽일 차례였다. 근수는 교각을 한 바퀴 돌아 이
오를 교각 아래쪽에 서게 했다. 이미 죽을 각오가 되어 있던 이오는 총소
리가 들리지 않자 재빨리 교각 뒤로 몸을 숨겼다. 근수가 다가갔다. 이오
는 한 바퀴 더 돌 셈인가 보았다. 근수는 이오가 죽던 자리에 그대로 섰
다. 교각 위쪽으로 이오가 돌아서는 게 보였다.
쏴, 어서. 어서 쏘란 말이야.
근수가 소리쳤다. 갑작스런 고함에 놀라서인지 이오가 빈 총을 들이대
었다. 순간 근수는 총소리와는 상관 없이 뒤로 나자빠졌다. 이오가 하던
대로.
이오가 물 속으로 뛰어든 것은 거의 동시였다. 다른 아이들은 전혀 예
상하지도 못했던 갑작스런 일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시
시하게 이오의 총에 나자빠진 근수를 측은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이오
는 그 달음으로 점점 소용돌이 속으로 밀려들며 발버둥치는 근수를 아래
쪽으로 떠다밀었다.
교각 아래쪽 물은 그다지 깊지 않았다. 아주 짧은 동안이었다. 물살을
따라 가다가 근수가 두 발로 서게 되었을 때, 이오는 슬그머니 근수의 손
을 놓고 앞서 물에서 빠져나갔다. 이오는 교각 밑 물의 깊이와 소용돌이
를 환히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그 날만큼은 세상 없어도 따라잡으
리라는 근수의 마음으로부터도, 이오는 아니오란 말 한 마디 없이 어느새
멀리 벗어나 있었다.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는 등장과 퇴장, 근수에게는
신비스럽게까지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북천은 단순히 그늘과 물과 놀이터와, 그리고 어른들의 망
향만을 다독거려 준 것만은 아니었다. 못지 않게 여름에는 한철 먹거리와
또한 볼거리를 덤으로 얹어 주었다.
궂은 날만 아니라면 거의 하루 건너큼씩 벌어지는 어른들의 천렵 날이

면 아이들까지 두루 풍성하였다. 그저 똥개처럼 물가에서 빙빙 돌다가 가
마솥 불이 사위어들 때쯤 근처를 어정거리기만 하면 탕 한 그릇은 예약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특별히 어른들은 이오에 대해서만큼은 한과 보상 심
리가 합쳐져서 그랬는지 보통은 곱으로 배를 채워 주는 데 인색하지 않았
다. 이오는, 그때가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그보다, 해 떨어진 천변에는 더 아기자기한 볼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그렇게 말했다. 다리에서 동쪽으로 뚝방을 따라 가다 보면 후미
진 곳에 수풀이 있는데, 그곳에서 말만한 처녀들이 밤이면 미역을 감는다
는 말이었다. 그야말로 듣지 않았다면 훨씬 더 좋았을 얘기였다. 이오가
누구한테서 그 얘기를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야말로 기다릴 것도 없었다. 훤한 달빛이 길을 안내하였다. 별들도
뒷짐을 지고 있지만은 않았다. 마냥 뛰는 가슴에 콩닥콩닥 불꽃을 일으켰
다. 아이들은 바람처럼 몸을 숨기고 그 은밀한 장소의 가장자리까지 이동
하는 데는 늘 성공했다. 그러나 다음이 문제였다. 그때마다 한 발 앞서
그곳을 차지해서 눈에 불을 켜고 있던 형들에게 들키기 마련이었고, 마빡
에 피도 마르지 않은 녀석들이라는 말도 세 번 들어 욕이 되었다. 그런
데, 그런데 이오만은 용케도 그때마다 형들의 망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달빛과 별빛이 지키고 있는 그곳에서 이오가 훔쳐 보았던 것은 무엇이었
을까.
여름방학이 끝나고 나서 이오와의 만남이 다소 뜸했던 것은, 근수에게
무슨 중뿔난 사정이 생겨서가 아니었다. 눈에 보이게 짧아져 가는 해 탓
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루, 또는 며칠씩 이오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일이 잦아졌다. 불길한 예감은 아니어도, 무언가 마음 한 구석이 썰
렁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여름의 끝에서는 달밤에 별을 헤는 일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먹는 일만큼은 대충 해 있는 동안에 모두 해치웠으므로, 그

다음 기다리고 있다면 잠뿐이었다. 만고에 끄먹거리는 등잔불을 켜 놓고
해야 할 일이 없었다.
도통 시계라는 것이 없으니 지금이 몇 시인지도 몰랐고, 어쩌다 시계 있
는 집을 찾아 나서 꼭 시간을 알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저 일찌거니 잠
자리에 들면 그만이었다. 또 그만인 대로 모두들 그렇게 했다. 희미한 불
빛 아래 삼삼하니 고향산천 부모형제도, 허기진 뱃속도 귀잠 앞에서는 잊
혀졌다. 마기말로 잠은 어른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보약인 셈이었다. 그래서
달과 함께 자고 별이 있는 동안에 꿈꾸는 것이 곧 건강이나 다름없었다.
별이 지고 나면 꿈도 그만이었다.
얼떨결에 눈을 뜨기는 했으나 천근만근인 눈 앞에 잡히는 것이라고는
대연밖에 없었다. 옆에 누운 기준은 아직 한밤중이었다. 대연은 이번에는
기준을 깨우는 중이었다. 바람 한 줄기가 온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일어나, 어서. 자식, 빨리 일어나라니까.
그렇게 보니 대연네 집 평상 위였다. 엊저녁 초롱초롱하게 내려앉은 별
자리들을 세면서 그만 잠이 든 모양이었다. 이른 새벽에 펴 보기 위해 반
딧불 한 마리를 손바닥 안에 꼭 쥐고 잠들었는데, 놈은 이미 손에서 빠져
나가고 없었다. 그보다는 주먹을 펴서 놓아준 것이겠지. 새벽녘의 별자리
들은 어젯밤보다는 조금 높게 보였다.
야, 가자. 저기 진짜 총싸움 났대. 어서.
뭐?
눈이 다 번쩍 뜨였다. 별빛이 더욱 낮은 곳에서 반짝였다.
시장을 지나 기차역까지는 한 달음이었다. 정말 총소리에 섞여 여기저
기에서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부터였는지 모르게 이오
가 옆에 따라붙었다. 저도 모르게 근수는 어깨동무를 하였다. 이오도 싫
지 않은가 보았다. 그때 잠시 멈춰 섰던 총소리가 사정없이 귓가를 때렸
다. 콩콩 탕탕, 콩콩, 탕타타타탕, 탕 콩콩. 그 소리에 어깨동무는 맥없이

풀렸다.
기차역에서부터 ㄷ리 해안까지는 두 갈래 길이 있었다. 이미 철거되어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기찻길을 따라 가다가 오른쪽으로 빠지는 길은
자동차가 다닐만한 큰길이었다. 그 길 왼쪽 옆에는 아이들이 씨아이디라
고 부르는 작은 군 막사가 있었고, 다른 한 길은 논 가운데를 가로지르
는 좁은 둑길로 ㄷ리 남쪽으로 연결된 지름길이었다. 어느새 예닐곱 명
으로 늘어난 아이들이 마을까지 도착하는 데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
다. 까만 어둠 속이어서 그랬는지 누구 하나 겁에 질린 아이도 없어 보
였다.
근수도 ㄷ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곳은 ㄱ읍에서 직선거리로도 가장 가
까운 바다였으며, 바위만 없다 뿐이지 다른 바다가 갖추지 않은 안온함을
품에 지니고 있었다.
마을의 중앙으로 넓게 뚫린 길을 곧장 벗어나면 아주 작은 개울이 비스
듬히 막아섰다. 개울 앞으로는 오른쪽에 알맞은 크기의 소나무 숲과 왼쪽
에 해당화 밭이 이어졌다. 다시 그 앞으로 펼쳐지는 모래사장과,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 고운 모래사장에 찍힌 사람의 발자국은 손을 꼽
지 않아도 셀 수 있을 만큼 한가로웠다.
물론 근수가 앞장을 설 수도 있었으나 이오에게 맡겨두었다. 총소리는
더욱 가깝게 들렸지만 기차역에서 보이던 불꽃은 왠지 보이지 않았다. 아
이들은 마치 방공호 속에서처럼 자세를 낮추고 마을의 남쪽을 돌아 개울
가에 닿았다. 그리고는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담이 큰 순서대로 움푹 패
인 서덜 아래 납작 엎드렸다. 아, 그곳에서는 정말 총싸움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마치 한 쪽의 만화책에 그려진 것처럼.
이오의 앞장은 옳았다. 총알이 정면으로 날아드는 마을의 큰길을 피해
옆구리로 접근한 것도 그랬다. 그쪽 어디쯤에서는 모여든 구경꾼들의 접
근을 통제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기차역에서도 보았지만 벌써 여

러 대의 군 트럭이 마을 쪽으로 달려가지 않았던가.
사격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소나무 숲과 마을의 끝 부분으로부터 오가
고 있었다. 몇 그루 소나무 밑동에 의지한 채 버티고 있는 사람들은 무장
간첩임에 틀림없었다. 이따금 소나무 등걸에서 튀어나온 불꽃이 아무렇게
나 어둠 속을 날아다녔다. 그런가 하면 마을 쪽에서는 당췌 종잡을 수 없
는 곳에서 불꽃이 튀었다. 감나무에서도, 집에서도, 외양간에서도, 그리고
언덕 위에서도. 그런데 두 방향에서 나는 총소리는 서로 다르게 들려왔다.
근수도 알 수 있었다. 소나무 숲에서 들리는 소리가 콩 볶는 소리라면, 마
을 쪽 소리는 콩밭에 우박 떨어지는 소리나 같았다. 어둠 속을 떠다니는
불꽃만 보아도 그 숫자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들이 차지한 자리도 얼마 지나지 않아 거덜이 나고 말았다.
어느새 측면으로부터도, 배치된 군인들이 포위망을 좁혀 들어온 것이었다.
군인들은 아이들의 숫자보다도 엄청나게 많았다. 이 녀석들이, 누군가가
말했다. 그다지 높은 목소리는 아니었으므로 아이들은 엉거주춤 몇 걸음
밀려나면 그만이었다. 아무래도 후방이라면 안전할 테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한 차례 소나기가 지나가듯 전방의 군인들이 총
을 쏘아대자 이번에는 소나무 쪽에서 맞받아 이쪽을 향해 불꽃을 쏘아댔
다. 아이들의 머리 위로 빨간 불꽃이 꼬리를 이어 날아갔다. 불꽃 한 방을
맞는다면, 근수는 생각하기조차 싫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잠시 총소리가 멎었는가 싶었는데, 어디선가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가
들려왔다. 확성기 소리였다.
사격중지.
명령은 양쪽에서 모두 지켜졌다. 사격중지가 계속 말했다.
너희들은 포위됐다. 완전 포위되었다. 항복하라. 손을 들고 나와라. 다시
한번 말한다. 항복하라. 어서 손을 들고 나와라----.
그때였다. 이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것은. 그리고는 두 손을 높이

쳐든 채 한 발 한 발 앞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너, 죽고 싶어?
한 아이가 소리쳤다. 저도 모르게 근수는 엎드린 자세에서 윗몸을 일으
켰다. 북천교 다리 밑에서 근수를 안전한 물 가로 밀어내던 이오의 모습
이 떠올랐다. 단숨에 뛰쳐나가 이오의 다리를 걸고 넘어져야 마땅했다. 그
러나 무언가,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근수의 두 무릎을 땅으로부터 풀어
주지 않았다.
또다시 그때였다. 침묵을 가르는 몇 발의 총소리가 울려 퍼졌고, 이오가
소리 없이 그만 앞으로 고꾸라졌다. 기차역 전쟁놀이에서도 다른 아이들
과는 다르게 이오는 곧잘 앞으로 쓰러졌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총을
쏜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야, 이오는 절대로 죽지 않아. 근수는 몇 번
이고 다짐하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몇 번째 똑같은 말이 확성기로부터 되풀이되었다. 확
성기는 바다 쪽에 대고 자꾸만 항복하라고 소리쳤다. 항복하면 목숨은 살
려 준다고도 말했다. 그리고는 한참을 생각했다. 소나무 뒤에 몸을 숨긴
간첩도 생각했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얼마 동안 바다 같은 생각에 빠
져 있었다. 아무도 이오 생각은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어둠은 마냥 서 있지만은 않았다. 희번하게 어둠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언제나 어둠은 바다로부터 걷혔다. 바다가 열리고 하늘이 열
리고, 그리고 땅이 열렸다. 어둠은 죽음이고 삶은 빛인가. 더 이상의 총소
리가 들리지도, 더 이상의 불꽃이 피어오르지도 않았다. 모두가 생각에 빠
져 놓여나지 못했던 삶이 여명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두 사람뿐이었다. 금방 바다에서 건져 올린 듯, 삶을 선택한 두 사람은
두 손을 높이 쳐들어 밝아 오는 하늘을 가리켰다. 그들의 얼굴에는 죽음
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으며, 그림자 아래로는 불꽃 같은 피가 내
비치기도 하였다. 나머지 다섯 명의 무장간첩은 깊은 어둠 속에서 미처 빠

져나오지 못했다. 한 장씩의 가마니가 그들의 얼굴 위에 씌워졌다.
뒤늦게, 이오도 가마니 아래로 듣지 않고 말하지 않던 몸을 감추었다.
가마니 밖으로 빠져 나온 검정 고무신 한 짝이 더욱 쓸쓸해 보였다. 돌아
올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는 길에는 외짝 고무신이 더 어울렸던가, 아니
면 다시 돌아오마 그 한 짝을 한 맺힌 땅에 약속처럼 남겨둔 것인가.
이오와 헤어져 힘없이 돌아오는 길에서는 화약과 불꽃과 땀과, 긴장과
죽음의 냄새가 흥건히 묻어났다. 바다는 더는 바다가 아니었다. 바다가 아
닌 바다의 아침, 어느새 아침 해가 어른들의 키보다 더 큰 그림자를 만들
어 아이들이 가야 할 길을 가리켜 주었다.
그러나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누구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말
하지 않고 아무도 울지 않았으므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날 아침, 반듯하게 하늘을 올려다보고 누운 이오의 얼굴을 근수는 보
았다. 그 뒤로 가끔은 물동이 안에서도, 거울 속에서도 이오의 모습이 나
타나곤 했지만, 그보다 더 화평한 얼굴을 본 기억은 없었다.
예정 시간을 넘겨 기자회견은 계속되었다. 그때까지도 이광수는 멈추지
않고 입맛을 다셨다. 어느 기자가 앞으로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잠깐
사이를 두고 생각에 잠겼던 이광수가 대답했다.
당국에서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분명했다. 이광수의 눈에 잠시 눈물이 머물다 지나갔다. 처음 보는 눈물
이었다. 근수는 놓치지 않았다. 그 날 아침 이오를 바다에 남겨 놓고 돌아
오던 길에서 근수가 머금은 눈물도 꼭 그 만큼이었을 것이다.
헤어짐이 눈물이라면 만남도 눈물이다. 혼자 된 몸을 일찌감치 저 세상
으로 가져간 이오는, 그곳에서 그리던 어머니와 핏줄을 만났을까. 그러고
도 남았겠지. 근수는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었다.
이제 이름으로만 남아 있을 뿐, 금강댁이 그토록 공들여 찾고자 했던 형
의 얼굴을 근수는 기억하지 못한다. 때문에 형에 대한 생각은 항상 꼬리

가 짧다. 그러나 언젠가 형의 아들이, 형의 아들의 아들이 이광수처럼 불
쑥 나타나 근수라는 이름을 수소문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한번도 불러
보지 못한 그 이름 광수.
그 날이 오면, 오랫동안 빈 칸으로 남아 있던 인명부에도 그리운 이름
들이 살아나게 될 것이다.
그때 요란한 전화 벨 소리가 눈물로부터 근수를 흔들어 깨웠다. 이오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