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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2016년 [시] 묘연하다 외 / 조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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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714회 작성일 16-12-21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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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조영숙

- 목숨마다 소명이 있을 것이다.

풀이 가진 것, 나무가 가진 것, 고양이가 가진 것...

그중 나중 가진 것이 사람이니

나 이제 먼저 온 것들에게 묻고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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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연하다


한낮 호숫가

신발 한 켤레 물가에 놓여 있다


갈대들이 무어라 귀엣말을 하는데

눈물에 길들여진 나는 무작정 비극적이다


때로 삶이 무거워

물속으로 들어가 몸을 마친 사람들은

돌아온 적이 없으므로


그러나 신발은 아늑한 자세

뒤꿈치가 태연하게 호수를 등지고 있다


길을 향해 나붓이

뒷날에 희망을 걸어둔 겨울나무처럼


어쩌면 왼쪽과 오른쪽이 다정하게 데려온 이는 저녁 찬거리거

나 불현듯 튀어 오른 신념을 건져간 것이라고, 슬픔에 살이 붙어

끝난 이야기가 아니라 새로 오는 약속으로 단단해진

눈 밝은 사내의 내일이 아닐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러 백 년 묵언 중인 호수가

저렇듯 해동갑을 하며 반짝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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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에서


한파경보가 내리고

나는 오래 비워 둔 자궁을 들어냈네


방 한 칸이 전부인 그 궁의 힘으로

동쪽에 살림을 차리고

겨울을 나고

슬픔의 말을 엮어 시인이 되었으나

그것으로 궁을 지킬 수는 없었네


바람이 어둠을 데려다 놓고 우는 동안

나는 돌아갈 데를 잃었네


언제나처럼 하늘에서는 별이 빛나고

추워서 별들은 더 반짝이는데


햇아 얻은 옆 병실 새댁은

간간이 신음도 터뜨리며

문 앞에 꽃바구니로 금줄을 쳤더라만


한파경보가 내리던 날

그것도 여자의 일이라고

빈집에서 미역국을 먹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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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


어린 새들 집으로 가고

한 점 어선

수평선에 걸려 있다


인생보다 긴 밥벌이에

갑판을 아랫목 삼아

미역마냥 검어진 얼굴

보이는 듯도 하다만


우리들 삶도 한철인데

저녁은 자셨는가

하늘이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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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언저리에서


첫눈은 먼 데로 몰려다니고

다 늙은 어제가 잠이 든 골목

고양이 울음소리 터진다


사람들이 꿈에 들어 빈

틈을 타 피난의 시간을 벗고

상처 입은 것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


누군가의 죄를 미리 살 듯

질문도 없이 이 별에 와 받은 몸으로 오늘 밤

살얼음판에 자리를 폈으나


봄은 멀고

그림자 밖으로 떠도는 달빛은 절간처럼 무정해져서

오래오래 귀를 내어줄 뿐


어쩌겠냐고,

그래도 한번 살아보자고

숨어 다닌 온기가 전속력으로 서로를 끌어안는다


슬픔에게 유독 다정한 새벽

어둠을 초례청으로

노숙(露宿)이 대를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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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승


가끔은,

다른 열차로 갈아타고 싶을 때가 있지

같은 곳만 맴돌 때

사람에 치여 숨쉬기조차 힘들 때

하는 수 없이 늙어갈 때

건너편 열차가 여기보다 나아 보이지

가끔,

다른 인생(人生)으로

갈아타고 싶을 때가 있지

세월은 정시에 도착하고 목적지는 같은데

나만 힘들게 가고 있는 것 같아

한눈을 팔지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한 평(坪) 열차가 이미 출발한 건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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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널 산수유


터미널 메뉴판에 커피와

오렌지 주스

사이 해묵은 엽서처럼


글자로 핀 산수유

둘레는 환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바삐 늙은 사람들

빈속에 봄볕이 돌기도 하는


지나온 것들의 어느 모퉁이쯤으로 가만히 뿌리를 뻗어보면

단벌의 여행자들이여, 우리는

한때 몸 밖의 고요를 나누며 한 어미의 젖으로 익은 붉은 열매

먼지의 동족이었으리


객지는 무궁하여

산수유 체온 아랫입술 오므린 산새같이

잠시 앉았다 가는


내 몸을 입고 선 이여

오후의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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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의장풀꽃


케케묵은 등 뒤에서

사십오억 개의 홀씨들이 말했다

직립은 최선이 아니다


지난 계절 그것과

또 그것들과 빗방울도 접어 새기면서

시간의 이랑을 따라

여들여들한 뼈가 한마디씩 걸음을 세웠다


그가 걸어서 간다

그는 앉아서 걷고 서서 걷고 자면서 걸었다

아버지는 쉬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으므로


위대한 복사뼈는 태양을 향해 있다 해도

너무 오래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하늘


스름스름 초록이 뒤처진다

빗금의 꽃이 걸어

산부인과를 지나 옷가게를 지나 김밥집을 지나 문방구를 지나

가로의 나뭇가지들이 뻗어 있는


저녁답에 이르러

그는 마지막 남은 햇살 한 올 내려놓고 이파리를 벗는다

사선의 발목이,

다리가,


허리가,

어깨가,

마침내 아청빛 머리가 어두워진다


그래왔듯이, 흰나비

팔랑 시선을 거두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