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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2016년 [시] 담쟁이의 동안거 외 / 양양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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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956회 작성일 16-12-21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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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양양덕

또 일 년이 벌써.
자꾸만 늘어나는 흰 머리가 서글프다.
무언가 조금은 이루었다고 생각했는데
빈손인 듯하여 마음이 아리다.
주신 분께 감사하지도 못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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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의 동안거

아파트 높은 방음벽
제 앞마당인 양
수만 개의 잎을 거느리고
위로만 위로만 올랐다

어느덧 찾아온 겨울
담쟁이는 실핏줄 몇 갈래와
거무스름 점들만 남기고
어디론가 떠나갔다

무언가를 짓밟고서라도
높아지려 했던 교만이 부끄러워
땅속으로 숨은 걸까
무언의 죽비로 마음을 다스리며
면벽하고 있는 걸까

언제까지 푸르를 줄 알았던
지금 내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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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의 고향

고속버스 유리창
먼지를 붙잡고 안간힘을 쓰다
또그르르 굴러떨어지는 빗방울

이 땅에 태어나 한 귀퉁이 차지하고
울고 웃으며 버둥대다
이 세상 그늘진 곳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는 어깨 한번 빌려주지 못하고
빈 마음으로 떠나간다

빗방울은 알까
제 고향이 저 높은 하늘
잿빛 구름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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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속에 숨어 버린 선장님

한가로이 오리 몇 마리 노니는 오후
어디선가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다급한 목소리 들리는 듯
“602 하나호 침몰 중”
“602 하나호 침몰 중”

이십여 년 전
하얀 이빨 드러내고
바람보다 빠르게 달려오는 상어 떼처럼
제주 앞바다는 파도로 가득 찼다

한 손에는 부서진 키를 다른 손엔 무전기를 잡고
자신의 삶은 아랑곳없이
스물한 송이 생명 꽃을 피우고
영원 속으로 숨어 버린 선장님

이제 그는 한적한 청초호숫가에
초록빛 동상으로 돌아와 있다
거친 숨소리는 먼 제주 바다
깊숙이 숨긴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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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줍다

신흥사 옆 돌다리 아래
말라버린 자갈밭에서
빨간 가을 한 움큼 주웠다
부산하게 걸어가는 등산화 밑에서
바스러져 버린 노란 가을도

봉우리를 타고 내려온 단풍
산이 폭탄을 맞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울긋불긋 단풍을 입고
그 산을 오른다

나도 위태롭게 얹혀 있는 돌탑 위에
소원 영글기를 비는
마음 한 줄 얹어 주고
햇살 비낀 나뭇가지에
주워 담은 가을을 뿌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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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원

누군가 입혀 준 구명조끼를 입고
죽음의 바다를 헤맨다
벗어버릴 힘도 의지도 없지만
이미 놓아 버린 생명줄

빛을 잃은 지 오래된 눈동자
제 것이 아닌 몸뚱이와 손 그리고 발
코로 공기가 드나들며
죽음인지 삶인지 모를 경계를 지키고 있다

삶 아닌 삶들이 허깨비처럼
시간을 축내며
떠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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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허공에 노란 점 몇 개 떠 있다
며칠 뒤
더 크고 많은 점들로 불어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그맣고 노란 폭죽들이
온 동네를 달콤한 향기로 덮어버렸다

동글동글 불멸의 사랑을 수없이 매달고
봄의 용트림을 시작한다

훗날 제 몸에 맺힐 붉은 열매를 사모하며
샛노란 웃음 자꾸자꾸 띄워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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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굽은 할머니

하얀 눈 잔뜩 이고
나무들 서 있다
구부러지다 못해 누우려 한다

시장 난전에 토시 낀 할머니
굽어버린 허리로 생선을 판다
등허리에 보이지 않는 눈 산만큼 쌓여 있다

봄이 오면 나무들은 꼿꼿이 돌아가는데
할머니 등에 눈 녹여줄 태양은
어디쯤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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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섹션

길가에 논들 카드섹션을 한다
초록 빛깔 판때기를 들었다가
이젠 황금색이다

머지않아 흙갈색
크고 작은 네모를 들고
우리네 삶을 응원할 것이다

열심히 사셨노라고
잘하고 계신 거라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쉬지 않고
거기서 그렇게 응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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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속에 핀 홍매화

제 날이 온 줄 알았을까
마음껏 차려입은 붉은 옷
하얀 얼룩이 지고 말았다

매화나무 마흔아홉 그루 그려 놓고
하루해가 질 때마다
빨간 옷 입히며
봄을 기다렸다는 조선의 선비들

젊은 남정네들 마음 전해졌을까
서둘러 찾아 나온 선홍빛 봉오리들

선비의 기개를 닮아
수줍은 듯 추위 속에
더 붉은 향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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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삶이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메우는 일이다
때로는 기쁨과 평안으로
어떤 때는 슬픔이나 애통함으로
한순간도 그냥
건너뛰는 일은 없다

건강할 때는 건강해서 감사
아플 때는 낫게 해주실 것 기대하며 감사

슬프면 좀 어때
넉넉하지 못하면 또 어때

실수하면 다시 하고
실패하면 오뚝이처럼 일어서며
인생의 시작부터 끝까지 감사하자

웃으면서 돌아갈 본향이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