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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2016년 [시] 불두화 외 / 정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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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972회 작성일 16-12-21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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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정영애

기형도 시인은 질투는 나의 힘이라고 했다
분노는 나의 힘이었다
분노가 사라졌다
나는 지금 작은 벌레 한 마리로 솔숲에 살고 있다
소나무 울울창창한 나의 뜰에서
뒹굴뒹굴 시를 잊고 늙어간다
그래도 좋다
이름 모를 풀들과 햇빛과 바람과 연못의 물들이 나를 대신해
날마다 시를 쓰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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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두화

한 잎의 자비
한 잎의 용서
한 잎의 생각들이
한 송이 깨달음으로 모여
둥근 수행 꽃 피우니
나비도 온몸 접어 합장하다 날아간다

진즉에 삶이 헛된 일임을 알았는지
세속적인 욕망 보고도 못 본 듯이
온몸에 눈물 같은 등 밝히면서
생각 없이 서 있는 나를 향해
부처님 머리로 절하는
생각이 깊은 나무
부끄러움 한 덩이 안고 서서
조심스레 쓰다듬어 보는
불두화 한 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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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류 사랑

머리 희끗한 영화감독과 젊은 여배우의
염문설이 뜨겁다
통속적인 것은 술 냄새가 난다
한 가정의 대들보를 냉큼 뽑아버린
새파란 여배우의 매력이 내심 약 오르기도 하지만
영화감독의 로맨스는
동시상영관의 질 나쁜 화면 같아
리모컨을 던지고 맥주 한 잔 한다

야한 란제리처럼
그들이 열연하는 삼류 사랑을
관람하다
슬쩍 시나리오를 수정해본다
크랭크 인!
마지막 작품을 남기기 위해
절벽 끝에 서 있는 영화감독과 여배우
서로의 머리를 묶고
사랑의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장면부터 찍는다
개봉할 수 없는 필름

삼류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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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카페에서3

4인용 식탁의 가족이 카페로 들어온다
정사각형의 단란함이
지루한 아파트와 닮았다
부부는 각각 안개 자욱한 카푸치노와
침묵의 에스프레소를
아들과 딸은 폭풍 같은 스무디와
반항의 핫초코 한 잔씩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는다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각자의 스마트폰 화면을 터치한다
일제히 고개 숙인 채 나누는
가족 대화
반항심이 미지근해지고
침묵이 식어서 하품이 될 때까지
대화는 계속되었다
누군가 손에 든 대화를 종료하자
조용히
4인 가족의 식탁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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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을 기억하다

자고 나면 가슴이 조금씩 봉긋해졌다

당신에게 감염된 봄이 상처로 덧났다

하얀 이마에선 온종일 열이 났다

상사병으로

참을 수 없는 몸에 전류가 흘렀다

알전구 밝히듯

앞 다투어 한꺼번에 목련이 터졌다

스무 살 때의 내가 꼭 저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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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백일홍

병원 뒷마당
목백일홍 나무 아래 어머니 서 계신다
분홍 꽃 자욱하게 핀 양산 한 그루
그 그늘 속에 안겨
누굴 기다리는지
목백일홍 나무 한 그루 접었다 폈다 하신다

아무도 모르게 연애하는
황씨 집 셋째 딸
백일홍 꽃무늬 양산 쓰고
청년이었던 아버지의
휘파람 소리 따라
흰 구름 신고 걷는 열아홉의 어머니

아버지의 뜨거운 입김이
스쳐 지나간 자리마다
백일홍꽃으로 피고 진 어머니
어느새
한 여자의 청춘이 굽이굽이 굽어서
꽃잎 모두 떨어진 나무 한 그루로 서 있는데

환자복의 아버지 6층에서 내려다보신다
목백일홍 나무 서둘러 세워 놓고
아버지의 깡마른 기침 소리 따라
절뚝절뚝 걸어가는 오래 전의 처녀
목백일홍 꽃잎 하르르 하르르
굽은 허리 묻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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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골반이 아파 병원을 찾았다
엑스레이 사진을 찍고 의사 앞에 앉았다
모니터에 펼쳐진 벌거벗긴 나의 아랫도리
다행히 뼈에는 이상이 없다는
의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남루하고도 볼품없는 내 안쪽의
사막 한가운데를 보고야 말았다
나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던 그곳
온몸의 세포를 떨리게 하던 그 위태로운 황홀이
이 빈약한 곳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배반이었다
어디에도 서로를 쓰다듬던 흔적 하나 없는
텅 빈 무덤
물기 하나 없는 동굴 같은 곳에서 뿜어내던
열기들은 다 무엇이었을까
육체라는 이름의 집으로 포장된 저 안의 허상
통증도 잊은 채 진료실을 나왔다
골반이 아팠던 게 아니라 몸의 기억이 아팠던 것일까
한 번도 날지 못하고 나비로 박제된
골반 한 쌍이 나를 비웃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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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

겨우 손가락 하나 들어가는 구멍 앞에
우리는 인생을 걸죠
영수증을 교환하듯 나누어 가진 텅 빈 약속에
손을 꼭 잡죠
가끔 탄소의 결정체가 크면 클수록 구멍도 빛나겠죠
사랑을 믿어봐요
스스로 걸어 들어가 굴리는 저 맹세의 쳇바퀴
언제든 출입이 자유로운 굴레라고
결코 생각하기 싫은 거죠
약속은 깨어지기 위해 존재할 수도 있지만
당분간 굴러가는 데로 두겠죠
점점 손가락이 자라고 맹세의 덧칠도 떨어져 나가면
약속 혼자 서랍 속에서 뒹굴죠
가끔 먼 여행에서 돌아온 것처럼
풀지 않은 가방을 머리맡에 둔 채
벽을 보고 돌아눕기도 하죠
철컥,
뻥 뚫린 구멍이 수갑으로 놓였다고 깨달을 때
제 머리를 쥐어뜯고 싶을 뿐이죠
* 탄소의 결정체 : 다이아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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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길을 묻지 말아요
우주의 먼지처럼 스쳐 지나가세요
흰 나방이 날갯짓 할 때
우리는 각자의 저녁을 먹을 거예요
만날 수 없는 숙명 한 접시와
뜨거운 키스 같은 탄식을 준비하며
새로 산 드레스를 입겠어요
잊고 있던 내 안의 불행들이
당신 눈빛에 들킬까 봐
마당엔 레몬빛 등을 켜 놓을 거예요

누군가와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기로 결정한 순간
사랑이 시작된다고 믿지만
사랑이 멈추는 때이기도 해요
잠깐, 운명을 생각했지만
이미 가지고 있는 약속도 있는 걸요
저 다리를,
저 다리를 건널 수 없어요 나는

이별이 빗속에 젖고
책 속의 당신도 예정대로 떠나고 나면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도 평범해지겠지요
아무도 모르게 끝이 난 사랑이
가라앉을 즈음이면
우리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서로를 향해
펜을 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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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굴하다

티브이를 본다
속옷보다 더 속옷 같은 차림으로
앳된 여자아이들이 몸을 꼬며 노래를 한다
저 어린 것들이 무엇을 알까

세상은 변했다
긴 것을 자랑하는 남자들의 습성으로
머리카락은 쉬지 않고 자라고
미니스커트는 몰래몰래 허벅지 위로 올라갔다
눈금을 뭉개고 혁명처럼 일어서던
장발과 미니스커트
장발은 위대했고 허벅지는 당당해져
덩달아 여자들도 길어졌다

나는 이제 미니스커트를 입지 않는다
마리아처럼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사내 몇이라도 거뜬히 수장시킬 만한
깊은 연못 하나 몸속에 묻어
두리뭉실 세상을 갖고 놀만 하니
길고 짧은 것에 헐떡거리지 않는다

장발과 짧은 치마는 흑백이 되고
총천연색의 고화질로 우뚝 선 자유는
아슬아슬 눈금 없는 경계마저 무너뜨렸다
죄 짓던 미니스커트

짧은 치마 입었다고 끌려갔던 다리가 억울해서
지금이라도 확, 벗고 싶은 게 누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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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자 외 출입금지

직설적으로 막고 선
저 완강한 거절
벽과 한통속이 된 문
관계를 가진 사람에게만 복종하는 벽
단호한 명령 어기고
그곳에 들어가
딱 한 번만
죄 짓고 싶어
금지된 벽을 기어코 넘어
출입금지와 관계 갖고 싶어
아무렇지 않게 걸어 들어가
휘파람 불고 싶어
기분 나쁜 명령어에
온몸으로 불복종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