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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2016년 [시] 반딧불이 외 / 정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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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040회 작성일 16-12-21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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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정명숙

떠나보낸
내 삶의 봄과 여름을 돌아봅니다.
곁 지켜주던 따듯한 사람들이 있어
힘들었지만 아름다웠던 시간들을

지금 나는
단풍드는 가을 길을 걸어갑니다.
사랑하는 노금희 작가의 빠른 쾌유를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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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모노골 풀숲에
별 하나 앉아 있다
콩알만 한 반짝임에 끌려
숨죽이고 다가간다

낯선 인기척에 놀라
숨어버린 별을 찾다
올려다 본 하늘
반딧불이 천지다

몰랐다
허공을 노닐던 별들
힘들면
풀숲에서 쉬어가기도 한다는 걸

마음속 현란한 불빛 다 끄고
어둠 속에 온전히 나를 맡기니, 보인다
검은 여백 속에서 돋아나는 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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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눕다

생전에 뿌려 놓은 제 그늘 아래
몸을 눕힌 목련
바람이 찍어 준 스냅사진 속
깃털 같이 가벼운
한 잎, 한 잎의 기억들을
뒤적이고 있다

팽팽하게 물오른 꽃잎
눈웃음칠 때
머물던 발길의 뜨거운 입맞춤과
허공을 뛰놀던 흐드러진 웃음

벗어나지 못한 생의 무게를
제 그늘에 내려놓은 목련
바람 곁에 누워
지워져 가는 하얀 기억들을
뒤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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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수(斷水)

수위를 넘어 콸콸 흐르던 말들
갑자기 멈췄다

묵언 수행하던 말들
허공에 매달려 위태롭게 흔들린다

흔들리다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조각난 말들
너의 등을 찌르고
나의 가슴을 찌르고

주워 붙일 수 없는 조각난 시간들
흐름을 멈춘 물 위를
부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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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칠

어제 위에
오늘을 덧칠한다

잿빛 구름 앉아 있던 자리에
살랑이는 새털구름 앉히고

채도 낮은 허공은
명도 높인 물빛 옷 입혀 준다

음영 짙은 감청색 산에
연둣빛 치장을 하고
여기저기 붉은 꽃도 피워 주고

나뭇가지에 새 한 마리
덤으로 그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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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회초리

뚜껑 닫힌 풍금 위에서
리듬 타는 회초리
톡톡 타다닥
풍금이 가락 대신 나무 소리를 낸다

섬마을이 고향이라
풍금 연주를 배우지 못했다는 선생님이
건반 대신 회초리로 연주할 때

풍금이 왜 소리를 내지 않느냐고
우리들은 묻지 않았다
나무 소리 내는 회초리의 연주로도
음악 시간은 충분히 즐거웠으니까

때론 손바닥에서 때론 종아리에서
매의 눈으로 춤을 출 때도 있었지만
매가 아닌 악기로 기억되는
선생님의 회초리와 친구들의 노래를

회초리를 마주한 일 없는 아이들
인터넷 반주에 길들여진 아이들에게
들려준다
옛날 옛날에
노래하던 회초리가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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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종들

좁은 틀에 갇혀 있던 모종을
밭으로 옮겨 심었다
상추, 쑥갓, 토마토, 가지, 고추……

무럭무럭 자라서
밥상 푸르게 빛내 달라고
초보 농부의 미덥지 않은 손으로
다독이며 심었다

드문드문 힘들다고
납작 엎드린 놈도 있지만
기특하게도 뿌리 내리고
여린 몸 곧추세우며
하루하루 몰라보게 자라고 있다

볼수록 신통하다
바람이 간질인다고
까르르거리는 모종들이
얼굴에 흙 묻힌
영락없는 개구쟁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