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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2016년 [시] 나의 바코드 외 / 송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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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004회 작성일 16-12-21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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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송현정

장마를 겪으며 덮어둔 장독을 열었다
나잇값 하는 장들의 묵은 냄새들
연륜에 맞게 풍겨 나오는 저들의 장맛
그보다 더 오래 묵힌 내게선 어떤 맛이 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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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바코드

커튼을 달다 넘어져
구급차에 실려 갔다

의사는
나를 해부하기 위한
최신의 장비들을 호명하며

몸 하나 간신한 통속에 가두고
무시무시한 투시력으로
살면서 지은 죄 다 불란다

말하기에 앞서
숨 한번 크게 쉬지 못한 채

사는 동안
왜 한 번 소리도 질러보지 못했는지
갇힌 통 속에서 소리쳐 울었다

실핏줄에 엉겨 있는 비밀을 캐듯
세상에 흘리고 다닌 암호들을
내 몸 어딘가에 찍어 두었지만
나는 모른다
내게 박혀 있는 바코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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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길

봄꽃들이 지는 게 아쉽다고
뻐꾸기 울어대는 모노길 돌아
향교로 가는 소로로 들어서면
곱던 꽃빛 고개 숙이는 숲길
잎 넓힌 나무들이 초록을 풀어 놓는다

내게도 저리 꽃피던 시절이
아득한 옛일만 같아
가슴 한쪽 저려올 때

보랏빛 꽃들이 깔려 있는 산길
그 꽃잎 밟지 못해 한참을 서성일 때
아직 가지 않은 길 어서 가라고
오동꽃 향기 슬며시 말을 걸어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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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딸이 가져온 소파 한 짝
자리를 많이 차지한다는 핑계를
다시 데려간다는 약조로 대신하고
소박맞듯 피신 온 지 몇 해
반갑진 않지만 홀대하지도 못하고

얘들이 커가면서 만남은 늦어지고
형편도 좋아지고 자리도 넓혔으니
짝을 찾아가라 사정하지만
그들 격이 달라도 너무 달라
상봉은 어렵다는 최후에 통첩

그래
서로 각자의 삶이 달랐다
툭하면 얘들 발길질에 채이고 찍히고
어디 성한 곳 없는 몰골과

눈총은 줬지만 흠 하나 없이
아직도 고운 모습인데
만나본들 어찌 어울리랴

혼수로 장만한 것이라
버리지도 못하고
애물단지가 돼버린
저들의 인연
언제쯤 만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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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두리 꽃

한여름 마당 가에
분홍의 나비 떼 내려앉았다

곱게 단장한 머리 위로
찰랑거리던 칠보 족두리
연지곤지 꽃물 든
수줍던 열아홉의 언니가

여든을 바라보며 치매를 앓는
곱던 날의 기억들은
언제쯤 돌아올까

오늘도 꽃은 피고 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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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의 집

집안에 거미 한 마리 오가길래
잡는 게 아니라기에 그냥 두었다
어느 저녁 무심히 본
방충망과 천장 구석구석
마치 복병을 쳐 놓은 듯 식솔들을 데리고
아예 살림을 차렸다
안 그래도 벌레라면 기겁을 하는데
계약서도 없이 무단으로 들어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있었다니
요즘 이층이 불편하고 시끄러워
높은 층에 살아볼까
한창 붐 일은 모델 하우스 몇 번 다녀온
쥔 여자의 맘을 용케도 알고 슬며시 입주를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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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추

네 이름을 부르면
왠지 신비스런 새소리가 들릴 것 같아
비비추비비추 하고
자꾸만 입안에서 되뇌어 본다

넉넉한 이파리와
누구도 넘보지 못할
고고한 보랏빛 아름다움

어느 한때 저 꽃처럼
도도하고 싱그러운 날들
내게도 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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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일바이크를 밀다

가을 햇살도 찰랑거리는
구절리에서 레일바이크를 탔다
나비 같은 두 여인 뒤에 한 무게 하는 내가 앉으니
네 사람 자리에 모자람을 눈치챈 바퀴가 얼마나 삐걱대는지
내리막에선 힘주지 않아도 잘 가더니
오르막에는 아무리 구령을 모아 봐도 헛발질뿐
앞으로 나가길 거부하며 막무가내 요지부동

그때서야
탑승자 세 사람의 수령이
이백 년이 넘는다는 사실에
미안함도 잠시 뒷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에
두 사람 내려서 달래듯 밀 수밖에

어디 세상천지 관광지에서 바퀴를 미는 해프닝이라니
웃음 뒤에 스미는 서글픔
녹슨 몸과 늙음이 무슨 죄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