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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2016년 [시] 남루의 안쪽 외 / 최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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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030회 작성일 16-12-21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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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최명선

봄과 여름 사이,
어머니 하늘나라로 새집 마련해 떠나시고
한뎃잠 자던 내 시들도 제집 지어 나가고
따뜻하던 내 서정의 집에 찬바람이 불었다.
그래도 여기,
지어야 할 또 하나 집이 있어
추슬러 몇 잎의 시를 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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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루의 안쪽

바람 찬 봄날
벚나무 아래 서서 나무를 봅니다
검게 색이 변한 채 마르고 갈라지고
몸 어느 한 곳 성한 곳이 없습니다

아이를 낳으면
열린 마디 아무는데 백날이 걸린다는데
해마다 겪는 산고가 오죽할까요

세상에 나오는 일
이름 하나 다는 일
사람이나 나무나 다름 있을라고요

남루해 보였던 것이 때로는
귀한 것일 때가 있듯
가만히 안아보는 갈라진 나무의 몸

그 끝 어디쯤에서 피었을 기쁨이
지금 내 안에서 환하게 피어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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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신던 신발
함부로 버릴 수 없는 것은
어제가 들어 있는
내 생의 도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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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문

한적한 오후 찻집
칸막이 너머 들려오는 말이 붉다

성큼성큼 건너는 진실과 농담 사이
그들의 말문은 쉽게 닫히지 않고
나갈 곳을 찾다가 주저앉는 나의 귀

기다림이 켜놓은 지루한 시간 속
고요를 깨는 구두 소리 들리고
드디어 나에게도 혀가 돋기 시작했다

벗어 놓은 침묵 위에 쌓이는 소음

누군가의 귀가 맵지 않길 바라며
돋은 혀를 슬그머니 아래로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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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눅한 습성

설거지를 하다 포개진 컵
이리저리 돌려봐도 꿈쩍 않더니
찬물을 채운 채
더운물에 담그니 쉽게 빠진다
좁히고 넓히고
조금씩 양보하면 어려울 게 없다지만
매일 좁히기만 하면서 살아가는 건 아닌지
매일 넓히기만 하면서 살아가는 건 아닌지
매끄러운 서울 한복판에서
유리 벽을 넘나드는 아이가 시리게 다녀가고
물컹한 습성 한 자락에 마음을 적신 나는
포개진 컵 사이에 끼어 오래도록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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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슬픔

도배를 새로 하려 벽지를 걷어내자
벽 한쪽에 실금이 나 있다
꽃 속에 감추어진 상처 한 줄
아버지 몸에 난 수술 자국 같았다

어둡고 시린 곳에서
스스로 살을 찢어야 한다는 것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웠을까

시든 꽃들을 뽑아내고
하얀 벽지를 입혀 보지만
눅눅한 마음 먼저 가 길을 내는 곳

기대면 눈 붉어지는 벽 하나 있다

상처마저 따뜻한 아버지의 등
오늘도 나는 그 벽에 기대
아버지와 한참을 그렇게 있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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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

말을 걸면
쟁여 놓은 슬픔이 우르르 쏟아질까
까치발 들자
마음에 당부하고 돌아서는데
인기척에 놀랐는지 숨 멎은 꽃잎 몇 장
풀린 문고리 사이로 따라나선다

제 발등에 쌓는 붉은 꽃무덤

한 장 들어 꼬옥 눌러본다
손끝에 묻어나는 따뜻한 피

익다가 만 내 젊은 날 같아
기억 닫고 얼른 봄을 건넌다

꽃 진 곳에 살 차오르면
푸름이 자라리라
꽃 오던 문으로 꽃 떠났지만
꽃 떠난 문으로 꽃 다시 맞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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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

오차 없이 팔딱이던 시계의 심장이
순간의 기억을 잃은 채
과거와 미래를 잇는 끈을 놓아 버렸다

충전이 되자
힘차게 피돌기를 하지만
건너뛴 시간의 행방은 묻지도 않은 채
앞만 보고 달리는 서늘함

그 아래
잊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린
알츠하이머 할머니
모락모락 김 오르는 따끈한 기억만
골라 솎아내며 함께 가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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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망(迷妄)

무료한 오후
뜬구름 타고 앉아 낚싯줄을 늘인다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기던 순간
손끝으로 전해오는 짜릿함
월척이구나, 힘차게 당겨본다
하지만 나올 듯 나오지 않고
끝내 끊어져 버리는 낚싯줄
아쉬움에 들여다보니 웬일인가
미늘 문 채 사라진 등이 휜 어족
갑자기 한랭전선이 형성되고
비가 된 뜬구름
한 남자를 가는 줄에 태우고
서서히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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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곡

목련에 부치다

야윈 부리로 갇혔던 봄 꺼내 놓고
꽃자리 내주며 떠나간 어머니와
시퍼런 슬픔 간직한 채 우렁우렁 봄 건너는
저기, 말 잃은 채 그늘 짙은 새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