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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호2003년 [소설-강호삼]맘모스의 멸종의 대한 최종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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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갈뫼
댓글 0건 조회 5,546회 작성일 05-03-26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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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동구 시베리아 동토 층에서 완전히 제 모습을 갖춘 맘모스의 동
결된 시체가 발견되었다. 일반적으로 알프스와 코커서스 산맥 이북의 구아
(歐亞)대륙과 멕시코 이북의 북미대륙에서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맘모스
의 동결된 시체가 의외의 지역에서 발견됨에 따라 학자들 사이에 큰 논란
이 일어났다.
맘모스의 동결된 시체가 발견된 백 킬로미터 반경 주위에는 단 한 점의
맘모스 화석도 발견된 바가 없는 점으로 봐서, 단 한 마리의 맘모스만이 자
기의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동토 층에서 최후를 맞이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후일 일단의 과학자들이, 탄소 동위원소를 이용하여 정확한 연대를 측정
하고 엑스레이를 투시해서 맘모스의 해부학적인 조사를 한 결과, 맘모스는
젊은 암컷으로 형태를 뚜렷이 갖춘 새끼를 배고 있었다. 위 속에 아무 것도
없고 눈의 상태로 보아 맘모스는 심한 영양부족 상태에서 굶어 죽은 것으
로 판명되었으나 어떻게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죽었는지는 규명되지
는 못했다.
지구는 약 46억 년 전, 우주공간을 떠돌던 극히 작은 우주 성운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우주공간의 아주 작은 소립자에 불과했던 우주먼지는 우주의
물리적 대순환에 따라 우주공간을 떠돌면서 다른 우주먼지와 합쳐지고 같
은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점점 체적과 질량이 증가시켰고, 그 결과 중력이
작용하고 몸체가 커가는 데 비례해서 더 큰 중력이 작용하면서 가까이 있

는 우주공간의 유성과 다른 소성운들을 끌어들였다. 소성운들을 끌어들이
는 과정에서 충돌이 일어나, 원시지구는 지금의 태양처럼 액체상태의 거대
한 불덩어리가 되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지구표면이 식어 오늘과 같
은 모습이 되었다.
원시지구는 처음부터 사람이나 생물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지구
를 둘러싸고 있는 대기의 성분은 지구가 만들어지는 충돌과정과 화산활동
에서 생성된 질소·탄산·아황산가스와 수증기 같은 것이었다. 대기 중의
가스와 수증기가 포화상태에 이르러 구름으로 응결되고 다시 비로 지표면
에 내려 저지대에 모여서 바다가 생겼났고, 원시 바다의 바다 물은 대기 중
의 염산가스나 아황산 가스가 녹아 있는 진한 산성용액이었다.
생물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산소가 있어야 했지만 원시지구 대기에는 산
소가 존재하지 않았다. 산소가 없는 지구에 맨 처음, 생물이 나타난 것은
약 4억 년 전 바다로부터였다. 대기 중에 산소가 존재하지 않아 여과 없이
강렬하게 내려 비치는 태양의 자외선을 막을 수 없었던 지상에는 생물이
존재할 수 없었다. 때문에 최초의 원시생물은 자외선이 닿지 않는 바다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자외선이 닿지 않는 바다 속에서 이끼류 같은 남조류가
생기고 이 남조류가 광합성을 통해 산소를 만들어 냈다. 이렇게 만들어진
산소가 대기 중에 방출되고 강력한 태양에 의해, 광해리 작용을 거처 O2에
서 O3로 분리되고, O2에서 분리된 오존이 태양의 자외선을 차단함으로서
약 4억 년 전에, 비로소 지상에 생물의 생존이 가능한 환경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따라서 모든 생물의 시원은 같다. 바다에서 비롯된 생물의 시원은 처음에
는 모두 같은 종에서 분화되어 수십 수백만 종으로 갈라지고, 수 억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생존환경에 따라 진화과정이 각기 다르게 발달했다. 인간
의 생명도 바다 속의 하찮은 이끼로부터 시작됐다는 것이다.
시조새와 공룡이 지구상에 출현한 것은 열대 원시림의 숲으로 뒤덮인 중

생대(中生代)의 트리아스기(triassice)이다. 쥬라기(jurassic)에 이르러 공룡의
전성시대가 되지만 대 빙하기가 엄습하면서 지구는 얼음에 덮여버렸고 백
아기(白亞期, cretaceous)에 이르러 지구상에서 어룡과 공룡들이 갑자기 사
라져 버렸다. 거대한 유성이 지구에 떨어지면서 지구는 불바다가 되었고
Co2의 증가가 햇빛을 가려 빙하기가 시작되면서 공룡의 멸종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코끼리의 선조 뻘이나 사촌쯤 되는 맘모스가 지구상에 나타난 것은 이
보다 훨씬 뒤인, 지질시대상으로는 제 4기(QUATERNARY)에 해당하는 플라
이스토세(pleistocene, 洪績世)이고, 이 시기에 이르러 드디어 인류의 조상인
호모사피엔스도 맘모스와 같이 지구상에 나타났다.
맘모스는 지금의 코끼리와 비슷한 동물이지만, 코끼리보다 더 크고 코끼
리에게 없는 검고 긴 털을 가졌으며 코끼리의 상아에 해당하는 어금니는 3
미터나 되었다. 순하고 큰 눈을 가진 맘모스의 그림을 보면, 맘모스는 마치
멸종의 위기를 예감이라도 한 것처럼 처량하고 슬픈 모습이다. 알프스와 코
커서스 산맥 이북의 구아(歐亞)대륙과 멕시코 이북의 북미대륙에 널리 분포
되어 살고 있던 것으로 보이는 맘모스가 지구상에 그 모습을 감춘 시기는,
제4기 홍적세에 접어들어 기후가 한냉해지고 빙하기와 간빙기를 교대로 맞
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멸종한 맘모스(Mammoth)는 다행히도 자신의 생생한 실체를 남겼
다. 맘모스의 거대한 화석이 하얼빈 지역에서 발굴되었고, 1901년 동부시베
리아의 동토 층에서 동결된 맘모스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맘모스가 사람들
앞에 그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탕! 타아앙! 탕 탕 탕 탕!”
분명 총소리였다. 두영은 반사적으로 총소리가 난 쪽을 보았다. 혈색 좋
은 노인이었다. 뺨까지 덮은 흰 턱 수염에 실크 해트를 쓰고 어깨로부터

가슴까지 온통 화려한 금장식의 한껏 위엄있게 정장한 예복차림의 노인은
너무 화려하게 치장을 한 복장 때문에 중세를 배경의 오페라에 출연하는
가수 같았다. 총성이 울린 순간, 노인은 입을 약간 벌리고 허공으로 멍한
시선을 보낸 채 손바닥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움켜쥔 손가락 틈으로 붉
은 선지피가 배어 나왔다. 일시 주위의 모든 풍경이 정지된 비디오 화면
처럼 움직임을 멈춘 것 같았다. 가슴을 움켜진 채로 노인이 뒤로 풀썩 넘
어지면서 정지된 듯한 사물이 되살아났다. 노인이 넘어지는 서슬에 실크
해트가 벗겨져 저만큼 바닥에 나뒹굴었다. 옆에서 수행하던 사람들이 황
급히 부축했으나 노인은 이미 치명상을 입고 수행원의 팔에 안겨 고개를
밑으로 축 늘어트렸다.
두영은 분명 노인이 저격 당하는 장면과 총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착시나 환청이었다. 두영의 시선에 다시 들어 온 것은 초여름인데
도 회색이거나 검은 옷차림을 한 사람들의 행렬이었다. 군데군데 홈이 패
인 차도를 하나 가득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느릿느릿 페달을 밟으며 지나
가고 있었다. 그 속에 자동차도 섞여 있지만 자동차보다는 자전거 탄 사
람들이 훨씬 많았다. 한 무리의 자전거가 지나가고 나면 파상적으로 다시
한 무리의 자전거가 다가오고, 자전거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두영은 망연한 기분으로 시선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이 나라의 하늘은
언제나 황사로 누렇다. 황사로 누런 하늘에, 손때 묻은 동전 같은 해가 역
시 실루엣으로만 보이는 동쪽의 키가 큰 버드나무 꼭대기 위에 걸려 있었
다.
하늘에 준 시선을 거두고 두영은 약간 짜증스러운 기분으로 팔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이씨가 차편을 구하려 간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아직 모
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 호텔 앞, 보도 한 가운데 서 있는 그를 사람
들이 흘깃거리며 지나갔다. 그들의 얼굴 표정에는 이방인에게 보이는 얕
은 호기심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언짢다거나 적대감을 가진 표

정들이 아니었다.
중국인들은 이제 자신들과 무관한 일들에 신경을 쓸 만큼 한가하지 않
은 것 같다. 그들은 뒤늦게 학습한 자본주의의 달콤한 맛에, 꿀을 발견한
개미 떼들처럼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돈 버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그 결과로 그들은 불과 몇 년 사이에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이루어냈다.
이제 더 이상, 세계 전략상 미국의 적은 러시아가 아니라 중국입니다.
중국은 무서운 속도로 경제성장을 하고 있고 그 잠재력은 무한합니다. 얼
마 있지 않아 세계는 중국을 주축으로 하는 아시아권과 미국이 주축이 되
는 유럽권으로 재편이 될 것이 확실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국가전략은 물
론이고 우리의 경제전략도 이에 초점을 맞추고 개편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됩니다.
간부 연찬회에 초빙된 이십대 후반의 젊은 정치학 박사가 확신에 찬 어
조로 말했다. 그는 하바드에서 정치학 학위를 하고 미국의 부르킹스 연구
소에서 아시아 문제를 연구했다고 했다. 그의 분석이 아니더라도 이미 중
국은 확실하게 세계 무대에서 명실상부한 강국으로 등장했다.
<쥐를 잡는데 흑묘면 어떻고 백묘면 어떠냐?>는 등소평의 정책이 중국
을 굶주림에서 구하고 나라를 반듯하게 세계무대에 다시 올려놓았고 무서
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두영은 어깨를 추슬러 어깨에 맨 가방 끈을 올려 맸다. 그때였다. 자전
거 행렬들을 비집고 일제 구식의 낡은 혼다 택시 한 대가 두영의 옆에 와
서 멈추었다. 조수석의 문이 열리고 조선족 이씨가 머리를 내밀었다.
‘“공작하러 가는 시간이어서 타꾸시가 없었습네다. 선생.”
이씨는 늦은 데 대한 변명으로 토막 친 반말에 겸연쩍은 얼굴로 대신했
다. 그의 말은 아침 출근 시간이어서 택시 잡기가 어려웠다는 말이었다.
여름인데도 이씨의 코끝이 빨갛다. 코끝에 모여 있는 실핏줄이 유난히 도
드라져 보인다. 주독이 오른 탓이다. 영하 섭씨 2.3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

의 겨울 날씨가, 이곳 사람들을 알콜도수 40도에서 60도가 되는 독한 술
을 상음하게 한다고 한다. 그렇다고 이곳 사람들의 코끝이 모두 빨간 것
이 아니고 보면 딸기코는 체질에 따른 것인 모양이다. 조선족 2세대인 이
씨는 조선족으로는 드물게 베이징 대학을 나왔고 요녕성 성청에 공무원으
로 일하고 있다. 회사가 중국 현지에 공장을 세우는 설립 교섭과정에서부
터 이씨는 요녕성 측 통역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이씨의 우리말 실력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북한식 발음은 그
렇다 치고 말끝의 어미가 생략되는 것이 보통이어서 잘못 들으면 반말이
나 이제 막 말을 배운 어린아이의 말 같다. 이씨에게 그런 부분을 지적하
면, 얼굴을 붉히면서 자신의 발음을 교정하려고 애를 쓰지만 그리 쉽지 않
는 모양이다.
두영의 이번 출장은, 현지 공장의 생산설비를 더 늘리기 위한 사전 조
사 작업이 출장의 주목적이었지만, 때마침 요녕성이 초청한 요녕성 투자
사절단에 회사 오너의 수행원으로 공식행사 참가를 겸하고 있었다.
요녕성은 본디 길림성과 헤이룽장성과 함께 동북삼성으로 고구려의 구
토다. 고구려의 멸망과 함께 우리가 잃어버린 땅이지만 지리적으로도 가
까운 탓에 일제 강점기에 우리 동포들이 가장 많이 이주해서 살고 있는
지역이고 역사적으로도 이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다.
그 중에도 요녕성의 성도인 심양은 일제시에는 봉천이라고 불리던 곳으로
옛날부터 우리의 상품이 중국으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해왔던 곳이다.
요녕성 관리들은 당시의 이러한 입지를 되살리기 위해 한국자본의 유치
를 중국 내 어느 곳보다 적극적으로 활발하게 벌이고 있었다. 이번 투자
사절단의 유치도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어서 투자사절단 일행은 어
디에서나 국빈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일반 입국
자와는 다른 출구로, 세관수속 없이 바로 대기하고 있던 리무진에 태워져
공항 밖으로 빠져 나왔을 뿐만 아니라, 공항 외곽에서부터 도심으로 들어

오는 가로에 온통 대형 태극기로 장식해 놓고 있었다. 투자사절단을 맞는
그들의 모습은 한결같이 진지하고 정중해서 명분보다 실리를 중시하는 그
들의 면모를 확실히 읽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사절단으로 참가한 나이든
한 기업인은 한 때 총부리를 맞대고 싸웠던 공산주의 국가에 게양된 태극
기를 보면서 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한국은
세기 전만 하더라도 중국의 예속국이었고 동이(東夷)라고 부르던 오랑캐
의 나라였지만 이제는 더 이상 아니었다. 국빈대접을 받으면서 닷새간의
공식행사가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투자사절단이 중국을 떠났으나, 두영은
그대로 중국에 혼자 남았다. 이번 출장의 주목적이 남아있었다. 국내의 생
산설비를 심양으로 옮기는 문제를 요녕성 당국자와 구체적으로 협의하는
일이었다.
국내의 생산설비를 심양으로 옮기기로 결정한 것은 국내에서 더 이상
채산을 맞출 수 없다고 생각한 경영진의 판단이었다. 주위의 기업환경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기도 했지만, 국내에서의 생산은 더 이상 불가능했다.
악화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가 잦은 노조 파업과 생산에 웃도는 과도한
인건비 인상 요구 때문이었다. 물건을 만들면 만들수록 손해여서 그대로
가다간 공장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이미 상당수의 중소기업들이 국내에서 기업활동을 포기하고 생산시설
을 모두 중국이나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말레시아 등으로 옮기고 있었다.
이렇게 빠르게 생산설비가 국외로 빠져나가면, 머지 않아 국내는 산업공
동화가 되고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 불을 보듯 확실했으나 군사독재시절
노조운동이 반정부 운동처럼 여겨지던 관성은 쉽게 멈추어지질 않았다.
두영은 며칠 동안 이씨를 앞세우고 요녕성의 관리들과 기업인들을 차례
로 만나고 다녔다. 공장설비를 옮겨오겠다는 회사측의 교섭을 받은 요녕
성의 성 관리들은 처음부터 대환영이었다. 시기적으로 투자사절단이 다녀
간 직후라 분위기를 잘 탄 까닭도 있었지만 이 쪽이 다소 무리한 요구라

고 생각되었던 사항들도 일사천리로 처리되었다. 한마디로 필요한 지원을
모두 해주겠다는 것이 두영이 만난 요녕성 관리들의 자세였다. 순조로운
협상의 밑바탕 한 편에는 회사가 그 동안 현지에서 오래 동안 쌓은 신뢰
가 바탕이 된 것이 물론이지만 공장 하나를 세우려면 일년 동안이나 백여
가지가 넘는 서류를 만들고 그래도 설립인가가 나지 않는 한국과는 좋은
대조였다.
공장설비를 중국으로 옮기는 일이 생각보다 일사천리로 순조롭게 끝난
후, 두영은 요녕성 성 당국자의 양해를 얻어 중국말과 중국지리에 밝은 이
씨와 함께 창춘을 거쳐 하얼빈으로 왔다. 그리고 어제까지 사흘 동안이나
막연히 하얼빈의 구석구석을 헤매고 다녔다.
“오늘은 어데로 가갔슴니까?”
두영이 택시의 뒷좌석에 오르자 이씨가 돌아보며 오늘의 행선지를 물었
다. 두영은 어깨에 매고있던 가방에서 하얼빈시의 지도를 꺼내 펼쳤다. 어
제와 그제는 송화 강이 있는 시의 북서쪽 외곽으로, 중심가나 번화가는 피
하고 주로 시의 변두리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족 동포들의 집을 찾아다녔
다. 가축도 기르고 농사일을 하면서도 시내로 나가 품을 팔 수 있는 곳은
시내의 중심가이기보다 시의 변두리 지역일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중국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지역적으로 심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하얼빈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시의 중심가를 벗어나 변
두리 지역으로 나가면 1970년대의 한국 농촌과 같은 풍경이었다. 수로와
함께 포장되지 않은 좁은 농로가 있고 들판 가운데 짚과 갈대나 억새로
지붕을 이은 토담집과 벌겋게 녹이 쓴 것 같은 함석지붕의 집들이 들판
여기저기 옹기종기 몰려 있어 놀랍도록 6,70년대의 한국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제는 조선족 동포가 사는 마을의 한 집을 방문했다. 초가집을 담장처
럼 둘러친 갈대 바자울타리와 소가 여물을 씹고있는 외양간과 쟁기며, 서

래와 쇠스랑과 괭이 호미와 곰배 같은 농기구가 보관된 헛간이 있었다. 너
무나 낯익은 풍경이어서 두영은 어렸을 때 어머니와 함께 간 김해 외갓집
의 기억을 떠올렸다. 헛간의 처마 밑에, 비를 맞지 않게 바짝 붙여 놓은
발로 밟는 탈곡기가 놓여있는 것까지 같은 꼭 같은 풍경이었다. 물어보지
않아도 동포가 사는 조선족 집임이 분명했다.
인기척을 내며 사립문을 밀고 마당으로 들어서자, 마침 헛간 옆에 있는
돼지우리에서, 돼지먹이를 주고 있던 여자가 낯선 사람들을 아무런 경계
심도 없이 무심히 쳐다 보았다. 햇볕에 그을려 얼굴이 검고 주름살이 많
은 얼굴이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칼로 미루어 보아 쉰이 넘은 나이인 것 같
은 여자는 설거지한 개숫물에 쌀겨 같은 것을 섞어 돼지먹이를 주고 있는
중이었다. 조선족 아주머니임에 틀림없었다. 이씨가 다가가 사진을 내밀고
중국말로 뭐라고 하자 여자는 사진과 두영을 번갈아 쳐다 보았다. 두영은
여자의 시선을 받으며 웃음 띈 얼굴로 머리를 숙여 보였다. 여자가 다시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머리를 흔들면서 사진을 이씨에게 도로 내밀
었다.
처음부터, 이 넓은 중국 땅 하얼빈 바닥에서 쉽게 그녀의 소재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사진 한 장, 달랑 들고 그녀를 찾겠다고
나선 것부터 황당하고 무모한 일이었다. 그녀가 감쪽같이 사라진 후 사방
팔방으로 그녀를 찾아 나서면서 두영은 새삼 자신이 그녀의 신상에 대해
서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놀랐다. 손을 뻗으면 언제
나 그녀가 그 자리에 있을 것으로만 알았던 그의 무심을 지금 와서 아무
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두영은 이씨에게 지도를 넘기며 손가락으로 찾아갈 지점을 짚어 보였다.
두영이가 가리킨 곳은 하얼빈 도심의 북서쪽 외곽이었다. 이씨가 지도를
받아서 위치를 확인하더니 운전기사에게 중국말로 설명했다. 운전기사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액셀레이터를 밟아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두

영은 차창을 스쳐 지나가는 하얼빈의 도심 풍경을 보면서 하얼빈은 아직
도 난징이나 베이징 비해 발전속도가 느리다는 것을 느꼈다. 가까운 창춘
이나 심양에 비해서도 발전 속도가 늦어 보였다. 새로 신축 중인 건물도
있지만 시가지는 아직도 옛날 러시아식 건물 그대로의 퇴색한 건물들이
많았다.
“이 선생! 저 무엇 하나 물어 볼 게 있는데 실례가 되지 않을는지 모르
겠습니다.”
“뭡네까? 일 없습네다. 무엇이든지 물어 보시라요.”
“선생의 부모님은 언제 중국에 왔습니까?”
“우리 부모님 말씀입네까?”
이씨가 일없다고 하면서도 의외의 질문이라고 생각했는지 뒤를 돌아보
며 반문했다. 두영은 이씨가 받아들이기에 따라 다소 사적인 질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 동안 같이 다니면서 물어보고 싶었던 말이었다.
많은 조선족들이 중국 땅에서 살고 있는 사연은 거의 비슷하지만 두영은
그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다. 돌아보는 이씨의 얼굴을 마주 보
며 두영은 겸연쩍게 싱긋 웃었다. 그러나 이씨는 처음과는 달리 두영의 질
문을 별로 괘념치 않는 것 같았다. 이씨가 앞쪽으로 도로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우리 아바이 말씀입네다. 일천구백삼십년에 북조선 원산에서 간도 땅
으로 왔시오. 왜놈들에게 땅 뺐기고 묵고 살수가 없어서 어마이와 할마이,
할바이 가족 모두 압록강을 건너 동포들이 모여 사는 간도로 온기라 했시
요.”
“그럼 원산이 고향이시군요?”
“아니래요. 아바이 고향이 원산이지요. 본인의 고향은 이곳 용정이야요.
용정에서 출생 했으니께 용정이 고향 아니갔시오?”
“참 그렇군요. 선생은 용정에서 출생하셨으니 용정이 고향이시네요. 그

런데 해방되고 어떻게 부모님들은 귀국할 생각을 하시지 않았는지 모르겠
습니다?”
“하! 거기엔 기막힌 사연이 있지 않갔어요. 조국 광복되었을 때, 우리
오마이 산달이 아니었겠어요. 아바이 말이, 아가 오늘 나올지 내일 나올지
모르는 아 밴 산모를 데리고 도저히 질 떠날 수가 없었다는 기야요. 아 나,
낳고 산모 몸이나 추슬리고 질 떠난다는 게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고 했
시요. 그리고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마찬가진데 그 동안 개간해 놓은 농
토도 버리고 가는 것이 아깝고 해서 그만 용정에서 살기로 작정했다고 했
시오.”
“그런데 이선생은 어떻게 요녕성에서 일하게 되었습니까?”
“그야 학교 졸업을 하구서 당에서 요녕성에 복무명령을 내렸으니까요.”
“그랬었군요.”
두영은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중국에서 항일독립을 하다가 해방
후 귀환했다는 말을 하려다가 부질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그만 입을 다물
었다. 문득 서울 일이 궁금했다. 어쩌면 지금쯤 그녀가 서울에 나타나서
자신을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찾아 나선 이번 일
은 두영보다 오히려 영수 쪽이 적극적이었다. 우유부단하게 질질 끌고만
있던 지혜와의 문제를 먼저 제기한 것도 영수였다.
영수가 두영을 만나자고 전화 한 것은 그가 제품 판로 확장을 위해 미
국과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를 방문하는 긴 여정을 마치고 돌아
온 후 한참 지나서다. 이사회에 제출할 출장보고서를 작성하고 그의 부재
중에 밀렸던 일을 처리하느라 바빴다. 출장보고 회를 겸한 간부회의에서
두영의 얼굴을 잠깐 보았으나 두 사람이 따로 자리를 같이 할 시간을 아
직 가지지 못했다. 두 사람이 서울에 있었다면 이미 몇 차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전화를 해서 퇴근시간에 만났을 것이다. 영수는 얼추 바쁜 일이
끝나자 두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아! 너 오늘 퇴근 후 시간 있니?”
“그래, 나야 시간이 넘쳐나지. 그래 바쁜 출장 갔다 온 일은 대충 끝났
니?”
“야아, 말 마라. 오늘에야 겨우 끝났다. 너도 알다시피 미주 쪽 수출이
점점 전만 같지 않잖니? 이번에 가보니 여건이 많이 달라졌어. 중저가품
은 중국아이들이 싹쓰리를 하고있는 실정이야. 사장 말처럼 이제 앉아서
바이어 찾아오길 기다리면서 물건 파는 시대는 지나간 것 같애. 적극적인
시장공략이 필요한 것 같아. 아 그건 그렇고 퇴근 후 텍사스에서 만나. 오
랜만에 한 잔 하자.”
“간부회의 때 네가 안을 낸 그 기획 안도 결재 났니? 그거 대단한 발상
이던데...”
“그래 그것도 끝났다. 자세한 건 만나서 이야기하고.”
두영은 사무실을 나와 회사현관에서 잠시 영수를 기다렸다가 먼저 약속
장소로 갔다. 약속장소는 회사에서 불과 30미터 정도의 거리다. 종로 2가
의 네거리에서 YMC 회관을 지나 첫 골목 입구에 있는 텍사스 카페가 두
사람이 퇴근시간에 자주 들리는 곳이다. 회사와 가깝고 분위기도 괜찮은
편인데다가 술값도 그리 부담되지 않아서 좋았다. 그리고 미모의 시를 쓴
다는 카페 마담이 있다.
이른 시간이어선지 카페 안이 비어 있다. 구석자리에 남녀가 한 쌍 앉
아 있을 뿐, 안으로 들어서는 두영을 마담이 먼저 알아보고 카운터를 돌
아 나와 활짝 웃으며 반색했다.
“어서 오세요. 왜 요즘 토옹 들리시지 않으세요? 전화라도 걸까 했어
요.”
두영은 아무 색깔이 없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한다. 사십대 초반의 마담
은 상당한 미모를 갖춘 여자다.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안아보고 싶을 만
치 세련되고 우아한 용모와 물이 오를대로 오른 풍만하고 섹시한 몸매를

가지고 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하나 있다고 했다. 방송국 PD인 남
편이 어린 탤런트와 바람을 피워 홧김에 맞바람을 피우다가 결국은 이혼
을 했고, 위자료 받은 돈으로 이 카페를 차렸다고 한다. 두영은 퇴근 후
텅 빈 아파트로 돌아가는 것이 싫을 때마다 자주 이곳에 들린다. 그리고
손님이 없을 때는 마담을 상대로 술을 마시기도 했다. 마담은 학교 다닐
때 시인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뒤늦게 어느 계간지
의 추천으로 시인이 되었다고 한다. 마담이 지었다는 시가 그림과 함께 카
페의 벽에 걸려 있었으나 두영은 그 시의 내용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
다. 두영은 오래 전부터 마담이 자신에게 호의 이상의 관심을 가지고 있
다는 것을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체 하고 있다.
두영의 옆자리에 마담이 바싹 다가와서 앉았다. 네크라인이 깊이 패인
까만 원피스 안으로 풍만한 젖가슴이 출렁거리는 것을 보면서 두영은 시
선을 돌렸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러나 의도된 여자와 하
룻밤 불장난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담에게는 청초한 외모와는
달리, 퇴폐적인 그 무엇이 있는 것 같아서 잘못하면 걷잡을 수 없이 빠져
들 것 같다는 어줍잖은 두려움도 있는 게 사실이었다.
“저는 우리가게 아예 발 끊으신 줄 알았어요. 김 차장님도 안 오시고…”
“그냥 좀 바빴습니다. 연말이다 연시다 해서 말입니다.”
“자주 좀 놀러 오세요. 웬일인가 하고 무척 뵙고 싶었어요.
마담의 눈빛이 진지해진다. 잔잔한 정염이 담겨 있다. 많은 수컷들이 마
담의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지만 수컷의 선택권은 오직 암컷에게만 있다.
온갖 조건과 허세로 접근해 오는 수컷은 많지만 정작 마담의 마음에 드는
수컷은 그렇게 흔치 않는 모양이다. 나비 넥타이를 멘 젊은 바텐더가 두
사람 앞으로 왔다. 두영이 주문을 하려는데 마담이 제지했다.
“오랜만에 오셨으니 오늘은 제가 내겠어요.”
묻지도 않고 위스키 한 병과 자신의 몫으로 진토닉을 시킨다. 그리고 다

리를 꼬고 도발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빙그르, 두영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옆으로 터진 스커트가 벌어지고 다리를 꼬고 있는 허연 허벅지 사이로 팬
티가 보일 정도의 아슬아슬한 자세가 된다. 두영은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얼른 시선을 돌린다. 마담은 당황해 하는 두영의 표정을 놓치지 않는다.
“참, 부인 돌아오셨어요?”
마담은 내킨 김에 한 걸음 앞서 나간다. 다분히 의도된 물음이다. 두영
은 그저 카페의 마담에 지나지 않는 여자에게 아내의 이야기를 듣는 게
거북스럽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마담은 두영의 아내가 초등학생 아이의
공부를 시키기 위해 미국에 가 있다는 것을 안다. 혼자 생 홀아비로 있는
두영을 딱하게 여긴 영수가 마담과 엮어주려고 시키지도 않은 이야기를
마담에게 한 모양이었다.
영수의 선의가 이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두영은 지극히 사사로운 가
정사가 엉뚱한 여자의 입에 오르내릴 때마다, 마치 발가벗기운 채 거리에
서 있는 것처럼 곤혹스럽다. 마침 바텐더가 크리스탈 유리 술잔과 위스키
병을 앞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레몬 한 조각을 컵 가장자리에 끼운 진토
닉과 얼음통을 두 사람 앞에 밀어 놓았다. 마담이 잔을 내밀었고 두영이
그 잔을 받았다. 얼음을 몇 개를 술잔 속에 집어넣은 뒤 술잔을 들었다.
마담이 자신의 술잔을 가져와 두영의 잔에 부딪혔다.
쨍- 하고 크리스털의 맑고 투명한 소리가 카페 안의 공기를 흔들었다.
마담이 눈웃음을 지으며 잔을 얼굴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야아! 그림 좋은데. 나 없는 사이 많이 발전한 것 모양이신데…”
두 사람은 동시에 소리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영수가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들어서고 있었다. 영수는 마담이 앉은 자리를 지나 두영의 옆자
리에 와서 앉았다. 바텐더가 크리스털 유리잔을 하나 더 가져와서 영수 앞
에 놓았다.
“그림이 너무 좋아서 샘이 날 지경인데, 이제 제수 씨라고 불러도 되

나?”
영수가 일부러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두영과 마담이 동시에 얼굴을 붉혔다.
“흠. 얼굴을 붉히는 걸 보니 정말, 나 없는 사이 무슨 일이 있긴 있었던
모양이군.”
“아이, 김 차장님 너무 놀리지 마세요. 우리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니예요.”
“그건 그렇고 출장 가신 일은 다 잘 되었어요. 이번 출장은 너무 길었던
같아요. 얼마나 뵙고 싶었다고요.”
“마담,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해요.”
“아니예요. 정말 오래 안 뵈니 뵙고 싶었어요. 그래서 언제 돌아오시나
은근히 기다리기까지 했는데…”
“날 보고 싶었다니 듣기 싫은 이야기는 아닌데…”
“김 차장님이 출장가시고 나니 이 차장님도 발을 딱 끊으시고, 이 차장
님도 김 차장님 출장 가신 후로는 저희 가게 오늘 처음이세요.”
마담이 위스키 병을 들고 희고 섬세한 손으로 영수의 잔에 술을 부었다.
“오라. 그러고 보니 마담이 날 기다렸다는 게 아니라 저 친구를 목이 빠
져라 기다렸다는 말이군.”
영수의 능청에 세 사람은 동시에 웃었다. 그리고 잔을 들어 부딪히고 건
배했다. 컵이 부딪히는 맑은 소리가 다시 맑게 실내에 퍼졌다. 구석자리의
남녀가 이쪽으로 잠깐 시선을 보냈으나 이내 자기들 이야기에 몰두했다.
“한 달간이나 어디 어디를 다녀왔어요? 여행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잔을 내려놓으며 마담이 물었다.
“여행이라고 했어요? 마담 참 팔자 좋은 소리하시네. 우리 물건 하나 팔
려고 동분서주 미국 전역을 누비고 그것도 모자라 멕시코 브라질 콜롬비
아. 아르헨티나 칠레까지 다녀왔어요. 한 달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시간이
모자랐어요.”

“그래도 짬짬이 관광할 시간은 있었을 것 아네요?”
“전혀 시간이 없었어요. 시간이 있다고 해도 일행이 있으니 나 혼자 움
직일 수도 없고, 뉴욕에서 비행기 스케줄 때문에 겨우 한 나절 시간이 비
어서 쌍둥이 빌딩이 있던 자리에 가 보긴 했지만……”
술을 마시느라 영수는 말을 잠깐 끊었다. 영수의 잔이 비자 다시 마담
이 술을 채웠고 영수가 가볍게 잔을 흔들어 얼음에 술을 섞었다. 얼음이
유리잔 벽에 부딪혀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영수가 다시 한 모금 술
을 마신 후 마담의 얼굴을 보며 입을 열었다.
“뉴스를 통해 쌍둥이 빌딩이 테러 당하는 모습을 보았지만 테러 현장에
가보니까 나는 부시와 미국인들의 분노가 충분히 이해가 가더군. 아직도
뉴욕 시민들은 그날의 악몽을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어. 졸지에 이만 여
명의 무고한 목숨이 죽고 뉴욕의 상징인 쌍둥이 빌딩이 처참하게 파괴당
하고 말았으니 누군들 가만히 있겠어. 그래도 나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점
잖다는 생각을 했어. 만약 그것이 우리의 일이거나 내게 닥친 일이라면 상
대가 누구였건 간에, 나는 지구의 끝까지 그를 좇아가서 단호히 응징하고
말았을 거야.”
영수의 눈은 자신이 아직도 뉴욕의 테러 현장에 있는 듯 열기를 담고
있었다. 그때 일단의 손님들이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마담이 눈을 찡긋하
고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로 갔다. 마담
이 멀어지는 것을 기다려 갑자기 영수가 음성을 낮추며 말했다.
“나, L.A서 누구 만난 줄 아니?”
“……?”
경민이 그 자식 만났다.
영수는 두영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 말을 아꼈다. 지혜가 경민과 같이 있
더라는 이야기는 일부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수가 경민을 만났다는 말
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을 터인데도 의외로 두영의 표정은 담담했다. 두

영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손에 들고 컵의 표면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고 남은 술을 마저 입 속으로 부어넣은 뒤 다시 위
스키 병을 끌어와서 빈 술잔을 채웠다.
영수가 경민과 지혜를 만난 것은 L.A의 패이블 비치의 골프 코스에서였
다. 패이블 비치는 L.A에서 센프란시스코로 가는 중간 지점에 있다. 패이
블 비치라는 이름은 해안이 모래 대신 아이 주먹만한 자갈돌로 되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망망한 태평양을 끼고 있는 패이블 비치는 일년
내내 온화한 날씨에 경치가 빼어나기도 하지만 패이블 비치가 더욱 유명
하게 된 것은 이곳에 미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골프장이 있어서다. 해안을
따라 절묘하게 잘 가꾸어진 골프장은 골프 매니아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 이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고 싶을 만큼 환상적이다. 영화배우인 크린트
이스우드와 대통령이었던 클린튼도 이 골프장을 찾을 만큼 전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골프장이다. 그러나 돈이 있다고 해서 누구나 이 골프장을 이용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철저하게 멤버쉽으로 운영되고 있어서 일반인들
이 골프장을 이용하려면 일년 전부터 예약을 해야만 가능한 곳이었다.
영수는 칠레에서 바로 L.A로 날아와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 마지막으로,
L.A의 빅 바이어와 함께 상담을 진행하기 위해 그와 동행이 되어서 패이
블 비치에 갔다. 그리고 10번 홀에서 11번 홀로 바이어와 카트를 타고 이
동하고 있었다. 해변을 따라 조성된 골프장은 9번 홀에서 U턴을 해, 다시
출발지점으로 돌아가는 순서로 필드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건너편의 7번홀
쪽에, 동양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나란히 카터를 타고 오는 것이 보였다.
영수는 카터가 가까이 올수록 카터를 타고 있는 남녀의 얼굴이 어딘가 낯
익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저쪽은 영수의 옆자리에 바이어가 타고 있
어서인지 이쪽을 전혀 의식치 않았다.
카터가 교차하는 최단거리 지점에서 영수는 그들의 얼굴을 확실히 알아
보았다. 경민과 지혜였다. 영수는 그들을 여기에서 만나게 될 줄을 상상도

못했다. 영수는 순간적으로 움찔하면서 외면하려고 했으나 곧 그럴 필요
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에 빠져서 자신들을 너무
나 잘 아는 또 한 사람의 동양인이 그들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
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영수는 혹시나 자신이 잘못 보지나 않았나 하
고 고개를 돌려 그들을 다시 확인했다. 틀림없는 경민이와 지혜였다.
“아는 사람입니까?”
바이어가 물었고 영수는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비슷한 사람이 있어서 보았는데 아닌 것 같군요.”
“한국에도 골프를 많이 치지요?”
“예에, 한국에도 골프를 치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골
프는 아직 서민들에게는 보편화된 스포츠가 아닙니다.”
바이어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도 영수의 신경은 온통 지혜와 경민에
게 가 있었다. 처음부터 그럴 개연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결국
경민과 지혜는 그렇게 되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넓은 것 같
으면서도 참으로 좁다는 것을 느꼈다. 문제는 두영이가 받을 충격이었다.
필드에 들어서서 샷을 날리면서도 영수의 신경은 온통 경민과 지혜들 쪽
에 가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경민과 지혜
가 돈 많은 동양인의 다정한 젊은 부부로만 보였을 것이다.
카터에서 경민과 지혜가 내렸다. 삿을 날리려 그린 위로 올라가기 전에
그들은 서로의 어깨를 안으며, 현지인들처럼 스스럼없이 키스를 했다. 그
리고 무엇이 그리도 즐겁고 기쁜지 끊임없이 웃고 떠들었다. 영수는 서울
의 두영을 생각하면서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당장 달려가서 경민
에게 주먹을 한 방 날리고 싶었으나 참는 수밖에 없었다.
한때, 두영과 경민과 영수는 밤낮 같이 어울리는 단짝 친구사이였다. 세
사람 모두 강남의 중산층이 몰려 있는 22평 짜리 아파트 단지에서 살았고,
중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 같은 반에서 공부하면서 서로의 집을

몰려다니면서 놀았다. 대학도 과만 달랐을 뿐 같은 대학에 진학했다. 경민
의 집은 만년야당 생활하는 그의 아버지가 생활 능력이 없어, 경민이 어
머니 혼자 힘으로 살림을 꾸려 나가느라 어려운 편이어서 세 사람이 같이
어울릴 때 소소한 비용이긴 하지만 주로 영수와 두영이가 번갈아 가며 부
담했다. 경민은 그 때마다 겸연쩍은 얼굴을 했지만 두 사람은 그런 경민
의 형편을 충분히 헤아리고 있어서 경민이 미안해하지 않도록 배려를 했
었다. 어느 무엇보다 세 사람은 친구였고 친구 사이에 그런 배려쯤은 당
연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시점이라고 정확하게 말 할 수 없지만 세 사람 사이에 차
츰 거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계기가 된 것은 아무래도 만년야당이었던 000
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경민이 아버지가 하루아침에 정권의 실세 중에서도
실세가 되면서부터였다. 영수와 두영은 중학교 때부터 경민이와 어울려
서로의 집으로 놀려 다니면서 야당시절의 경민이 아버지의 모습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얼굴이 유달리 마르고 검어서 전체
적인 인상은 어둡고 침울해 보였다. 생활비 문제로 경민이 엄마의 지청구
를 듣고 있는 초라한 모습의 경민이 아버지를 보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경민이 아버지 모습이 달라졌다. 하루가 모르게 얼
굴에 살이 오르고 모습이 달라지고 일주일이 멀다하고 티브이와 도하 각
신문에 경민이 아버지의 기사와 인터뷰하는 얼굴이 나왔다. 대한민국의
정재계가 경민이 아버지에게 어떻게 해서든 줄을 대기 위해 사돈에 팔촌
까지 동원하면서 법석을 떨던 그 어느 무렵부터 경민은 두 사람과 만나는
회수가 점점 뜸해져 갔다. 매일 어울리다시피 한 세 사람 사이가 아예 한
달에 한번도 경민의 얼굴을 볼 수가 없을 때도 있었다. 어쩌다가 학교에
서 만나는 경민은 이미 옛날에 두영이와 영수와 어울리던 가난한 집의 경
민이 아니었다. 경민은 언제나 그를 따르는 아이들에 싸여 있었다. 실낱같
은 옛날의 우정이 그나마도 단절이 되게 된 것은 경민이네가 압구정동의

80평 짜리 아파트로 이사를 하고 난 뒤부터였다.
그리고 새삼 지혜를 둘려 싼 두영과 경민과의 묘한 갈등이 다시 부각된
것도 그 때쯤이었다. 당시 두영은 지혜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두 사람
의 관계는 지혜의 일방적인 짝사랑에 지나지 않았다. 경민이 은근히 지혜
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관심 밖이었다. 두영은 오히려 두 사
람 사이가 잘 되었으면 하고 바란 적도 있었다.
두영과 영수는 정치권력과 돈이 하루아침에 평범한 인간을 어떻게 변모
시키는지를 경민이 아버지와 경민이를 통해서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할 뿐 말을 하지 못
했다.
그런데 다시 정권이 바꿔자, 경민이 일가는 그 동안 축재했던 어마어마
한 재산을 몽땅 외국으로 빼돌리고 재빠르게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너, 언제까지 두고 보고만 있을 작정이니?”
영수는 우회하지 않고 약간 힐난이 섞인 어조로 두영의 얼굴을 똑바로
보면서 물었다. 영수는 친구의 고민하는 모습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
고 생각했다.
“뭘?”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술이나 마셔.”
“일부러 회피한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지 않아?”
영수가 음성을 높였다. 두영이 컵의 술을 탁 털어서 입으로 부어 넣고
영수를 돌아보았다. 좀 전까지 담담해 보이던 두영의 얼굴빛이 붉게 상기
되었다. 결코 술기운 탓만 아니었다.
“너 이야기 다 했니?”
“아니다. 아직 남았다. 너 정신 차려라. 너 아직도 그 여자 찾아다니니?”
“너 정말, 왜 이러니? 누굴 미치는 꼴보고 싶어서 그래.”

두영이 정색하고 영수를 노려보았다.
“야아, 니가 하도 딱해서 그런다. 집안 단속할 생각은 안하고 그런 여자
나 찾아 다니고 말이다. 지혜를 미국에서 끌고 오던가 이혼을 하든가 담
판을 내야 하는 거 아니야?”
두영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지더니 벌떡 일어나서 카페의 출구를 향
해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당황한 영수가 <어!>하는 사이 두영은 벌써 카
페 문을 나서서 출근길 종로의 인파들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한창 붐비던 저녁 식사시간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식사 손님
네 사람마저 빠져나간 시간이었다. 잠깐이지만 이 시간대가 식당에서는
가장 한가한 시간이었다. 인화가 상 위의 빈 그릇들을 아줌마들과 함께 치
우고 막 카운트로 돌아왔을 때였다. 한눈에 보아도 회사원들임에 틀림없
는 사십대 초반의 남자들 여섯 명이 식당으로 들어섰다. 그 중 한 남자가
춘화가 있는 카운트로 다가왔다. 키가 크고 약간 창백해 보이는 흰 얼굴
을 가진 남자였다.
“전화로 예약을 했는데요.”
“예에, OO말입니까?”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화는 남자의 맑고 잘 생긴 용모와는 달리 왠
지 남자의 눈빛이 어둡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카운트를 돌아 나와 이미 8
인분이 준비되어있는 식탁으로 일행들을 안내했다. 그들은 저녁을 먹고
늦게까지 술도 마실 것이라고 했다. 여자들이 준비한 음식을 나르자 그들
은 소주잔에 술을 채운 뒤 건배했다. 인화는 주고 받는 그들의 대화를 통
해서 그들이 고등학교 동창들이고 연말의 바쁜 일정을 피해 일찌감치 망
년회를 겸해 이 식당에서 저녁 겸 술자리를 마련했다는 것을 알았다. 술
이 한 순 배 돌자 그들의 이야기는 현안이 되고 있는 대통령 선거와 정치
이야기로 화제가 바꿨다.

“야아, 선거가 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지 않니?”
“그래, 뭔가 분위기가 어수선해. 한나라 당에서는 이미 당선을 기정사실
로 생각하는 분위긴데 생각보다 노무현이가 만만치 않을 것 같아. 특히
386세대를 선두로 한 젊은 층의 지지와 결집력이 심상치 않아. 어쩌면 ooo
당이 이번에도 김칫국부터 먼저 마시는 꼴이 되지 않을지도 모르겠어.”
“노사모에 명0남이와 문0근이가 앞장서고 있다면서?”
“걔들 배우 아니야. 배우라면 공인인데 공공연하게 그렇게 선거운동을
해도 되는 거니?”
“배우는 선거운동 못하나. 선거운동원으로 등록하면 누구든지 선거운동
할 수 있어.”
“너희들, OOO이가 노무현 진영에 가담했다는 알고 있니?”
“그 자식, 언제 귀국했는데. 미국에서 교수한다고 들었는데.”
“벌써 귀국했어. 귀국한지 2년이나 됐는데. 어느 지방대학의 교수한다는
이야길 들었어.”
“그런데 그 자식은 왜 우리한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지?”
“그 자식 노무현이 당선되면 장관자리 하나 하겠다는 야심 가진 게 아
니야?”
“그럴지도 모르지. 본디 그 자식 야심 있는 놈이었어.”
“김진국이도 O캠프로 갔다는데…”
“내 그 친구는 진작부터 그럴 줄 알았어. 정치성이 농후했거든.”
요즘 들어 식당에 오는 손님들의 화제는 단연 대통령 선거와 정치 판
이야기였다. 같이 밥을 먹으려 왔다가 심한 언쟁 끝에 밥을 먹다가 도중
에 그냥 가버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는 층은 대개 50
대 이상이었고,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비교적 젊은 40대 이하
층으로 지지 층이 분명하게 갈리고 있었다. 대통령 선거가 다가올 수록 더
욱 극명한 양상을 보이는 것 같았다. 인화가 그들 상에 새로 데운 매운 탕

그릇을 가져다 놓았다. 돌아서서 주방 쪽으로 가는데 그들 중 누군가 말
했다.
“잘 빠졌는데.”
무심결에 인화가 그들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술기운으로 이미 얼굴이
불그레해진 남자 하나가 약간 바보스러운 얼굴로 인화의 엉덩이를 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겸연쩍은 웃음을 히죽 날렸다. 일행들도 덩달아
불콰한 얼굴로 히죽거리고 있었다. 아까 카운터로 왔던 남자의 시선만 다
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흔히 있는 일이었다. 술손님들의 객쩍은 소리 듣는 것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면서도 인화는 새삼스럽게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인화는 음
식 그릇 나르던 일을 아주머니들에게 맡기고 카운트로 돌아왔다.
두영은 영수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여자는 한식집에서 카운트를
맡거나 음식 시중을 들기에는 너무 젊고 아름다웠다. 두영은 여자를 이미
카운트에서 눈여겨보았다. 일부러 보려고 해서 본 것이 아니라 여자의 모
습이 유달리 눈에 띄었다. 여자는 이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이
런 곳에서 일하는 여자라면, 어쩌면 낮에는 식당의 허드레 일을 하다가 밤
에는 접대부로 몸을 파는 여자일 수도 있었다. 여자의 미모로 보아서 차
라리 룸살롱 같은 곳에서 일하는 것이 훨씬 수입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두영은 여자를 그런 여자로 보기에는 너무나 얼굴이 맑고 앳되고 깨
끗하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이 언짢았었다. 모두들 어지간히 술에 취해 있
었다. 식당 안에 손님이라고는 그들 밖에 없었다.
“아가씨! 여기 와서 술 한잔 안 따라 줄라요. 나는 그마 이 집에 딱 들
어서자 말자 아가씨를 보고 술 한 잔 얻어 마시고 싶었는기라.”
영수가 드디어 여자에게 수작을 걸었다. 일순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리
던 여자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일어나서 일행의 자리로 왔다. 영수가 여
자를 일부러 두영의 옆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여자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처음에는 못 마신다고 사양하던 여자가 마지못해 술잔을 받았다. 그러나
술이 반 잔도 차기 전에 술잔을 내려놓고 대신 영수가 들고 있던 술병을
받아 들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저는 술을 못 마십니다. 대신 제가 술을 쳐 드리겠습
니다.”
여자는 정확한 서울 말씨를 쓰고 있었다. 영수가 술을 받고 두영도 여
자의 술을 받았다. 두영은 평소의 주량보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영수
가 집중적으로 여자에게 술을 치게 했기 때문이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친
구들이 하나 둘 슬금슬금 술자리를 빠져나갔다. 두영도 자리에서 일어서
려는데 영수가 도로 주저 앉혔다.
“야아 야! 너, 집에 일찍 가면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노? 우리 이 아가
씨랑 한 잔 씩 더 하는 거야. 어이, 아가씨! 이 친구 말이야. 홀아비야. 집
에 가도 아무도 없단 말이야. 아가씨가 오늘 밤 이 친구 어떻게 좀 해 봐.
이 친구 그런 방면에 꽉 막힌 꽁생원이야.”
영수가 다시 술을 가져오게 했다. 가져 온 맥주를 여자가 영수와 두영
의 잔에 부었다. 영수가 술병을 받아 여자의 잔에도 술을 따르고 건배를
제의했다. 단숨에 맥주 잔을 비워 낸 영수는 저고리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상 밑으로, 팁으로는 너무 많다 싶은 돈을 여자에게 건넸다. 인화는
얼결에 돈을 받았다. 그리고 영수는 두영에게 한 눈을 찡긋해 보이고 일
어섰다.
“나 화장실 가. 오래만에 재미 좀 보라구.”
두영은 영수가 정말 화장실에 간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
도 영수는 돌아오지 않았다. 여자에게 영수의 행방을 묻자 벌써 갔다는 이
야기였다.
두영도 여자가 정말로 간절할 때가 있다. 낮에는 회사의 업무에 매달려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가지만 밤에는 사정이 다르다. 여자를, 암컷을 품고

싶을 때가 있다. 치사스러운 섹스에 대한 욕망을 잠재우기 위해 두영은 그
때마다 화장실에서 손으로 처리를 하지만 배설후의 자괴감은 번번이 견디
기 어려울 만치 수치스럽고 치욕스럽다. 사십대 초반의 신체 건강한 남자
라면 일주일에 적어도 두 서너 번은 여자와 잠자리를 해야만 정상적이다.
수컷의 이런 욕망은 이성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종족보존의 본능이고 이
본능이 지구상에 오늘의 인류와 수많은 종을 있게 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얼결에 영수까지 그냥 보내버리고 혼자가 된 두영은 일어나 아파트로
돌아가야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지지 못했다. 그를
혼자 두고 가버린 영수나 친구들은 기다리는 가족들이 있지만 그에게는
기다리는 가족이 없다. 아무도 없이 텅 빈 아파트의 문을 따고 들어간다
는 것은 언제나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오늘은 더욱 그런 기분이었다.
영수의 말대로 집으로 돌아가 보았자 아무도 그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
도 없다.
두영은 다른 여자들과 함께 식당의 문 닫을 준비를 하고 있는 여자를
다시 불렀다. 인화는 빈 그릇들을 치우다 말고 다시 그의 곁으로 왔다. 두
영은 빈 술병을 들어 보이면서 술 한 병을 더 가져 오라고 했다.
“선생님, 약주가 너무 과하셨어요.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셔야지요?”
“알았어. 알았어. 딱 한 병만 더 갖다 줘. 내 딱 한 병만 더 마시고 일어
날 거야.”
“그럼 선생님, 딱 한 병 만입니다. 그리고 저랑 같이 나가시는 거예요.
제가 택시를 잡아 드릴게요.”
인화는 손수 냉장고로 가서 맥주 한 병을 다시 가져 왔다. 그리고 두영
의 잔에 따르고 남은 술을 자신의 잔에 따랐다. 인화는 이미 만취한 그에
게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자기가 나머지 술을 마셨다. 두
영은 술을 따르기 위해 바투 다가선 여자의 체취가 무척 향기로웠다. 오

래 금욕을 한 탓만도 아닌 것 같았다. 두영은 평소 같으면 자제했을 테지
만 술기운으로 이성을 잃고 있었다. 여자의 어깨를 쓸어안았다. 인화는 한
걸음 비켜 앉으며 그가 무안하지 않도록 손을 가만히 떼어냈다.
어느 때쯤이었을까. 두영은 심한 갈증을 느껴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 알몸의 낯선 젊은 여자가 정신없이 자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
다. 한동안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다. 방도 자신의 아파트 방이 아니었
다. 실내 장식으로 보아 여관이나 모텔 같은 곳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게
다가 자신도 알몸이었다. 한참동안 기억을 더듬었다. 친구들과 식당에서
이른 망년회 회식을 했던 일과 친구들이 권하는 대로 술을 꽤 많이 마셨
던 것까지 기억이 났다. 그리고 영수가 여자를 불러 자기 옆자리에 앉게
했고 친구들이 가고 영수도 가고 그만 혼자 남아서 술을 더 마셨고 여자
가 택시를 잡아주던 것과 한사코 뿌리치는 여자를 억지로 택시에 태웠던
것과, 여관으로 들어가지 않겠다는 여자를 강제로 끌어 들여서는 마치 여
자를 학대하듯이 마구 짓이겼던 것까지도 차례대로 기억에 떠올랐다.
술이 취한 상태에서도 두영은 여자의 반항이 의외로 강했다는 것을 느
꼈지만 그땐 별로 괘념치 않았다. 수컷들에게 항상 노출되어 있는 직업여
성의 수컷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은 당치도 않다는 생각이었다. 어찌
되었던 두영은 여자를 반항 못하게 굴복시켰고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
에 그 동안 음낭 속에 갖혀 아우성을 치고 있던 정액을 깡그리 배출시키
면서 황홀하고 후련한 상쾌감을 맛보았다.
그러나 어젯밤 황홀했던 기분과는 달리 의식이 말갛게 돌아 온 지금, 두
영은 깊은 자책감과 함께 수치스러웠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일들이 일
어나게 된 것은 아내인 지혜의 탓이었다. 아내와 잠자리를 너무 오래 하
지 않았다.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할 수가 없었다. 지혜는 오래 전에
두영의 곁을 떠났다. 명분은 세 살 짜리 아이의 영어 조기교육이었다. 두

영은 반대했으나 다른 꿍꿍이가 있었던 지혜는 일방적으로 수속을 밟았고
미국으로 떠났다. 지혜의 친정은 미국에 있었다.
아이의 조기영어교육은 처음부터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지혜의 부모는
처음부터 운동권 출신의 두영을 탐탁하게 생각지 않았으나 지혜만은 맹
목적으로 두영에게 빠져 있었다. 지혜의 부모가 결혼해서 같이 이민을 떠
나는 조건을 제시했지만 두영은 거절했다. 그들은 이민을 떠났고 지혜는
두영의 곁에 남았다. 지혜와의 결혼은 사랑이 전제된 결혼이 아니라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든 지혜의 일방적인 공세에 말려든 결과였다. 날마다 하
숙으로 찾아와 육탄공세를 벌리는 지혜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로
은비가 지혜의 뱃속에 들었고 임신한 사실을 알리면서 결혼하자고 했을
때 두영은 절제 못한 자신의 행동에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지혜와 결혼
했다.
두영은 여관으로 들어가지 않겠다는 여자를 강제적으로 끌어들인 것은
자신의 이성과는 상관없이 과음한 술과 그 동안의 금욕 탓이라고 편리한
쪽으로 가볍게 생각하려 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생
수 병이 있었다. 병 채로 벌컥벌컥 물을 마시고 나서 침대로 돌아와 곤히
잠들어 있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여자는 실내가 더운지 이불 한 자락을
사타구니에 끼고 있었으나 허벅지 사이의 까만 치모와 봉긋하고 하얀 가
슴이 그대로 드러내 놓고 있었다. 생각보다 여자는 희고 균형 잡힌 아름
다운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여자의 평범한 옷차림 속에 이토록 아름다운
몸매가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곤한 잠에 떨어진 여자
의 얼굴은 어제 저녁에 보았을 때 보다 더 아름다웠다. 두영은 자신도 여
자를 살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혐오감을 느꼈지만 여자의 아름다운 나
신을 보자 다시,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게 발기하는 자신의 본능이 무척 곤
혹스러웠다. 시계를 보았다. 아침 7시를 지나고 있었다. 출근을 할 시간이

었지만 아직 시간은 있었다. 두영은 다시 여자의 깊고 부드러운 살 속으
로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을 고통스럽게 억제하면서 대신 이불을 끌어 당
겨 여자의 몸을 덮어주었다. 옷을 입으면서 윗저고리 안주머니에서 비상
금으로 가지고 다니던 십 만원권 수표 몇 장을 꺼내 여자의 머리맡에 놓
았다.
여자는 식당 일이 고단한 데다가 어제 밤 그와의 섹스로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