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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2016년 [시] 연길의 백양나무 외 / 조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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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120회 작성일 16-12-21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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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조인화

좋은 시를 꿈꾸며 시를 쓰지
못하는 것도 습관이 되었습니다.
언제나 좋은 시를 쓸 수 있게나 되는 건지
여름이 더웠던 만큼 열매는 달고
유독 재난안전 문자를 많이 받았던 거 같네요.
아쉬운 마음도 털고 미완성의 시도 털며
다시 가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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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의 백양나무

모든 백양나무는 그곳에 있다
옛 마을로 가는 입구에 서서
솜털처럼 설레이던 기억
끝없는 벌판에 버려진 듯이 자라
군락을 이룬
“플라타너스”라고 부를 때 백양나무는
연연히 이어온 맥으로
다가선다
낯선 곳에서 살아온 살갗 두꺼운
저항도 무색하게
스치고 지나갈 뿐인 비옥한 땅
그곳에 남겨진 이름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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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빨강 열갱이를

그녀의 비닐 봉투에 열갱이 두 마리가
흔들린다
추석이 아직 보름은 남았는데
아마 깨끗이 손질해서 김치냉장고에
보관했다가 제사상에 올릴 것이다
어쩌면 날짜와 무관하게 맘에 드는
생선을 사 들고 오는 것은
파괴하는 용기가 동반되는 것일 테지
시간을 파괴, 비교를 파괴, 공간을 파괴,
애써 열갱이 자리를 만들어 넣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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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강

뻐꾸기가 운다
유월의 숲에서
해바라기 나선 흰 꽃잎들 떨어져 돌아가고
가서는 오지 않는 그 봄이
해마다 낯설게 곱다
어머니 흰 무명적삼 손수 지으시던
마디 굵던 손
여름이면 추어탕 끓여 주시고
반달 모양의 수수전병으로 소박했던 어린 복날
채양 넓던 골목에서 나던 고소함
이제는 그 맛 잊은 지 오래
다시 어린 복날이 온대도
두 가지 맛이면 족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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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화전 삽시다

밭을 일구기도 했네
홍매화나 그런 과실수 몇 심고
또 한해를 기다리며
돌을 고르는 듯 했으나
돌도 자라 목울대를 막아 주던 저녁참에
먼 곳을 떠나려 나서는 경계에
새들이 난다
너는 알까
그 푸른 산맥을 향해
종일 나는 헐거웠음을
먼지를 털며 헤매였음을
가시들 엉킨 비탈에 터전을 삼아
차라리 골목할 수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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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자

울타리가 낮은 십일월이 옷깃을
서성일 때쯤
먼 곳을 떠나는 가시와 싸리나무와 노란 열매가
추위 앞에 선다
언제부터였는지 물빛 라일락 잎을 따라
올라가면 운봉산
그 산에서 만난 건 참꽃이거나 문둥이나
그런 것이었지만
나와 함께 내려온 산은 송지호 한편에
서 있었다
그래 잊은 건 아니나 없다
운봉산처럼 만날 수 있는 실루엣뿐
탱자나무 앞에 섰을 때의 서늘함뿐
아주 소소한 기억의 열매이거니
탱자를 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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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말에

나는 빚이 있습니다
유난히 햇살 밝은 날은 알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지
못해서 흐르지 못하고 무거운 것을
물소리 내며 맑게 들여다보이는
냇물처럼 그런 순간이 그리워지고
그렇게 보여지지 않는 것들에 좌절하고
꺾인 무릎을 세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불쑥불쑥 추한 말이 내 얼굴입니다
매끄럽고 단단한 얼굴이 내 말입니다
별빛처럼 쏟아지는 말의 잔치 속에서
곤고하고 빈한한 건
빚 때문이겠지요.

시댁골, 모루박 뒷재

모루박을 지나간다
홍천과 인제 사이 어디쯤
생경한 이름의 언젠가 왔던 곳 같기도 한
미로 같은 길을 흙먼지 털며
들어가 숙제처럼 다듬어서 새것으로 내놓고 싶은
달빛 아래 미루나무 잎들 부서지던
그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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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천 가자

비포장도로를 달려 도착한 DMZ
세 나라의 국기가 나란히 세워진 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압록강 흐린 물줄기 앞에
중국의 끝초소가 있고
러시아로 가는 철길이 보이는 곳
건물 위에서 내려다 숲은
습지 되어 낮았다
상품화 되어 버린 상처들
함부로 자란 풀들처럼 버려진 이국에서
저 기차를 타면 갈 수 있는 그곳에
내 아비의 빈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