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뫼 호수별 보기

46호2016년 [시] 담쟁이 발 외 / 권정남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912회 작성일 16-12-21 13:33

본문

[시] 권정남

옥수수대궁이 빛을 잃어 가고
여름과 가을의 경계가 선연하던
정선 길은 아름다웠다

흐르는 흰 구름과 여울물 소리
풍경을 지문처럼 탁본한
돌의 몸에
우렁우렁 피가 돌고 있었다.

그렇게 아라리 강가에서
한세월 무심히 살고 싶었다.

-----------------------------------------------------------------------------

담쟁이 발

초록 자벌레들이 숨차게 오른다
한 치 오차도 없이 담벼락을 꼭 잡고
위로 질주한다

벼랑 끝까지 함께 가는
톱날 같은 발들이 질서 정연하다
칠월 불땡볕, 등을 내주고도
수없이 담쟁이 발톱에 긁히는
담벼락의 저 무던함을 알까마는

한때 나도, 물집 잡힌 손으로 밧줄 잡고
허공을 오른 적이 있다
세찬 바람에 흔들리며 발톱을 세웠지만
미끄러지기만 하던, 헛디딘
내 안의 생채기들

사각사각 출렁이는 허공 위로
겨자씨만한 발들이 빠르게 오른다
초록 융단에 감춰진
저 시린 비수를

-----------------------------------------------------------------------------

함바집 앞을 지나며

신축 아파트 공사장 앞
함바집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인다

사십 년 전 반포 아파트 공사장 안에
고모는 함바집을 차렸다
큰 가마솥에 국을 끓이면
강남의 주춧돌이 데워지고
높아지는 굴착기 소리에
아파트 웃돈들은 실하게 익어갔다
현장 인부들은 시린 손 불며 떠먹던
국밥 숟가락 놓고 공사비만 챙겨 떠나 버렸다
겨우내 함바집 문지방엔 빈고지서와
덜컹, 머리 푼 바람만 넘나들었고
마이더스 손 아파트들은 날개 단 듯
하늘보다 더 높이 날아올랐다
빚잔치로 얻은 지병 때문에
고모는 한강 변에 가래를 뱉아내며
가슴 뜯다가 세상을 떠났다

영랑호변, 함바집 앞을 지나간다
고모의 피 같은 현수막 광고 문구들이
바람에 뒤틀리며 나부끼고 있었다.

-----------------------------------------------------------------------------

맨드라미보다 붉은

첫 추위가 들던 내 유년의 등굣길
머리에 흰 수건을 쓴 여인이
리어카를 끌고 간다

그 안에는 가마니가 실려 있고
빨간 맨발 두 개가 밖으로 나와
흔들거리고 있었다

이른 새벽 연탄가스에 죽은
열한 살 아들이라고 누군가 등 뒤에서 수근댄다
넋 나간 그 어미, 아들이 추울까 봐
누런 가마니 옷 두껍게 입히고
빙판길 리어카를 북망산까지
끌고 갈 참이다

하늘까지 꽁꽁 언 내 철없던 겨울 아침
나는 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차갑고도 뜨거운
맨드라미보다 붉은
맨 살肉을

-----------------------------------------------------------------------------

누명

음력 정월 초닷새 기도발이 세다는 홍련암엘 갔다. 정초라 좁은 법당에 보살들은 무릎을 맞댄 채 기도 삼매경에 빠져 있는데 내 옆자리 팔순 노보살 좀 보소, 기도는 안 하고 반질반질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더니 다짜고짜 당신 염주를 내가 훔쳤단다. 부처님께 일러바치기라도 하듯 큰소리치며 나를 째려보고 있다. 아니라고 손사래 쳐도 막무가내 대책이 없다

그 소릴 듣고 있던 법당 밖 바닷바람이 내 팔을 당기며 슬며시 어깨를 감싸준다. 상단 위 관세음보살도 한쪽 눈 찡긋하시며 빙그레 웃고 계셨다.

-----------------------------------------------------------------------------

유리 벽 앞에서

비둘기 한 마리
거실에 날아들다가 유리창에 부딪고
허공으로 날아간다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 알고 날아든 비둘기
직립의 유리 벽 앞에서 낭패를 보았다
한때 나도, 열린 듯 닫혀 있는
투명한 너의 문 앞에서 날갯짓 하다가
미끄러진 적이 있다

세상 앞에는 빙하(氷河)보다 깊고 단단한
비수를 감춘 유리막이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마음 다친 비둘기 한 마리
허공을 선회하다가 다시 날아와
유리 벽 밖에서, 물끄러미
거실을 들여다보고 있다.

-----------------------------------------------------------------------------

파를 다듬다가

파뿌리를 칼로 잘라낸다
땅을 움켜잡고 있던
뿌리들의 비명 소리에
움찔 소스라친다

땅과 결별하고 이승까지 따라온
가닥가닥 질긴 무명실 같은
머리털이 진저리친다

어둠과 빛의 경계에서 자란 실타래
탯줄 자르듯 자른다
진동하는 파 냄새
그 집착이 이리도 섬뜩할 줄은

모진 인연 파뿌리 자르듯 자르고
아버지는 떠났다
무늬진 삶을 털어내듯
서걱이는 어둠을 털어내며

눈자위가 붉어지도록
나는 그리워하고 있다
결별하지 못한 내 안의 뿌리를

-----------------------------------------------------------------------------

영랑호 벚꽃

흰 쓰개치마를 걸친
처녀들이 호숫가를 걸어가고 있다

천 년 전
달빛 아래 비파 뜯으며
머리에 꽃을 꽂고 소맷자락 너울너울
영랑*과 춤을 추던 낭자들이다

자세히 보니
전생에 두고 온 내 딸들이다
버선발 쫓아와 눈물 글썽이며 매달린다
호수에 얼비치는 꽃 그림자들
어깨가 들썩인다
눈부신 해후다

이승의 어미길 열어 주려고
벚꽃 잎 한 줌씩 내 발밑에 뿌려 주며
하늘하늘
허공으로 떠나가는 딸들


* 신라시대 화랑으로 속초 영랑호수에 잠시 머무른 적이 있다.

-----------------------------------------------------------------------------

쇠무릎을 뽑다가

질긴 꽃대가
손사래 치며
휘청, 뿌리까지 내준다

흙과 함께 딸려 나온
지렁이, 개미, 무당벌레 혼비백산이다
그들만의 궁전이 함몰되었다
넌출거리던 키 큰 쇠무릎 뿌리가
벌레들의 파수병이었고
마음 한 자락 얹는
절간이었을 지도 모르는데
잡초라고 뽑아 벼렸다

햇볕이 작살처럼 내리꽂히는
7월 한낮,
전생의 나였을지도 모를
저 미물들
꼬물꼬물 대체 어디로 갔을까

-----------------------------------------------------------------------------

돌에 물을 주는 여인

꽃밭에 물을 주듯
풍경을 탁본한 돌의 몸에
물을 주는 여인

돌의 생각이 넝쿨처럼 자라
방안 가득 꽃다지 되어 흔들리고
예수와 부처가 돌 속에서 빙그레
마주 보며 웃고 있다
돌의 몸속에 지문으로 탄생한
12지신들이
알타미라 소처럼 한 마리씩 울음을 토하며
여인의 치마폭으로 뛰어든다
모두 한가족이다

물을 받아먹은 돌의 키가
여인의 머리카락처럼 자라고
단단한 몸에 우렁우렁 피가 돈다.

-----------------------------------------------------------------------------

통곡의 방

누군가 울음을 쏟아 놓고 간 자리
남은 슬픔을 촛불이 핥고 있다
돌로 된 감옥 같은 방에서
주먹으로 명치끝을 친다
우우 빛이 되어 일어서는 고통의 부스러기들
누구나 生을 건너가자면 한 번 즈음 건너는
시퍼런 강줄기들

가끔은 설악산 바람도
계곡을 돌아 나오며 울음을 토하고
동해바다 파도도 모래사장에
제 머리를 때리며 운다 그렇게
누구나 한 번쯤 울고 싶을 때가 있다

천 년 전 울음이 들끓고 있는
늪 같은 통곡의 방*에
목까지 차오르는 울음을 쏟아 놓으려고
누군가
덜컹, 돌문을 연다.


* 통곡의 방 : 캄보디아 씨엠립 ‘타프롬사원’ 안에 있는 돌로 된 작은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