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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2016년 [시] 구름 방정식 외 / 채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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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1,311회 작성일 16-12-21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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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채재순

산그늘 같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들, 어둑한 나를 힐끗 쳐다보는 이들과 이
세상에서 허둥지둥 살고 있다. 가끔씩 한 사람이 남기고 간 불후의 시간을 생각하
면서. 벼락 치듯 그리워 적막하게 이름을 불러보는 날들이 늘어간다. 창을 환히 밝
히던 바람결, 나비 날갯짓, 뭉게구름의 흔적 읽기에 골몰하면서 여름 들판 뙤약볕
한가운데서 잊지 말자 기약하던 약조를 추억하면서 쓸쓸해지고, 쓸쓸해져 저녁 산
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훗날 얼마나 촘촘하게 기억할 것인가에 이르러 글썽이게 되
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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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방정식

마침내 어딘가에서 만나는 것이 구름의 일이라며 다독이는 저녁

구름 방정식 풀면 날씨가 보인다고
구름물리학자 쿠리치 씨 말하지만 쉽지 않은 날이 이어지고

새털구름, 뭉게구름, 소나기구름, 안개구름, 두루마리구름, 면사
포구름, 비늘구름 이런 마음에서 배어 나오는 한나절

만나지도 못한 채 어느 산정에서 다른 곳으로 흘러간다 해도 흘
러 흘러 다시 가랑비로 오는 그 마주침을 고대하는 사이 구름 씨앗
하염없이 기다리다 잔주름 늘어가는 사이

다시금구름, 제아무리구름, 어쩌다구름, 그러니까구름, 하여튼
구름, 시나브로구름, 가뭇없이구름에 스며드는 날

당신이 내게로 오는 사이 높은 산을 만나 좀 더디게 오는 사이
글썽이는 마음으로 당신을 기다리는 사이

널어 말리지 못한 마음을 그렇게 한 백 년 군불 때며
울먹이는 마음을 데리고 어디로 가야 하나 서성거리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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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가지 하나

멀리 가는 철새 부리에
나뭇가지 하나
저렇게 움켜쥐기까지
물었다 놓은 나뭇가지는 또 몇 짐일까

날갯짓,
그 탱탱해진 울림으로
아침은 붉어 오고
박차고 가 닿아야 할 곳을 떠올리는 순간
온 힘이 집중되어 핏기 번지는 부리

바다 건너가다 힘 부치는 순간
나뭇가지 내려놓고
그 위에서 잠깐 쉰 후
천 리 길 다다를 수 있는 힘이라니

뼛속까지 파고드는
바람 채찍에도
절대 놓칠 수 없는
나뭇가지

공중에 남긴 드높은 날갯짓으로
구름이 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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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정원

아지랑이로 아른아른 기별 보내 놓고
잎샘추위로 주춤주춤
데리고 온 바람 어디다 부릴까
두리번거리는 사이
햇살 눈길 따라 줄지어 피어난 산수유
봄이 노릇노릇 익어가는 동안만이라도
꺼둘 순 없을까

가랑비로 목축인 꽃들 각축 벌이는 푸른 고랑엔
수척한 날들이 갸륵하잖아

봄 엽서엔
환한 말줄임표 찍은 시간들이 가득한데
적막을 깨고
날개가 가진 것의 전부인 새 한 마리
끙끙거리며 허공을 물고 날아가는 저녁
노을이 야단법석 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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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가 좋다는 떡갈나무와 잣나무

서먹하다는 뽕나무와 오동나무

그들이 숲을 이루며 살고 있다

산그늘 같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들

어둑한 나를 힐끗 쳐다보는 이들

이들과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다

파란만장, 허둥지둥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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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

컴컴한 구멍이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모퉁이를 돌다가
꺼진 불도 다시 보자

겨울 강 징검다리 앞에서
잠근 물도 다시 보자

막다른 골목을 돌아
잠근 몸도 다시 보자

스멀스멀 올라오는 바람 구덩이 주위를
걷고 또 걷는
구절양장의 날들

번개 치고
천둥소리 요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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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한 마리 한 획을 그으며 날아가자 무덤덤했던 살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무슨 기별이라도 올까 오랜 두절 후라 눈은 아득해지고

파고드는 달빛에 수척해진, 맨살 드러내 놓고 뒤늦게 뭉게구름을 배경으로 꽃 피우는 목백일홍, 안간힘으로 사랑을 기록하는 중이라고

살에 꽃무늬 점점이 살랑이며
담벼락에 꽃 그림자 깊어지고

저 살이 감내했던 슬픔으로
마음은 이미 첩첩산중

쓸쓸한 맨살 위로 산 그림자 성큼 길어지고
서로의 몸을 얼마큼 촘촘하게 기억할 것인가
살은 늘 먼저 알게 마련이어서
손차양으로 기다리며 낯붉히는
저 무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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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월

어미 쥐 한 마리, 새끼 쥐 여덟 마리
솜털 송송한 새끼 쥐들은 이미 숨 거뒀고
뒷다리가 끈끈이에 붙어버린
어미 쥐는 가쁜 숨 몰아쉬는 중
발 떼어주니 살점 뜯기고 말아
비 내리는 십일월 오후, 뒷다리 끌며 가는
어미 쥐 등을 바라보네

바닷가 모래사장에 얼굴을 반쯤 파묻힌 채 발견된
아일란 쿠르디 사진, 무차별 공격 뉴스 화면을
차마 볼 수 없어
금방이라도 폭설로 바뀔 것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상처 물어뜯으며 으르렁거리는 세상에 대해
무얼 말할 것인가
서성거리고 있는 사이
툭, 석간신문이 배달되자
또 한 개의 절벽이 생겨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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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 도서관

씨앗 대출받았다가 씨앗으로 반납해야 하는
영하 18도에 맞춰져 있는 도서관

노르웨이 저장고엔 300만 개의 씨앗이
대출을 기다리고 있다네
올해 심은 씨앗 추수 후 몇 톨 남겨
내년에 심어도 새싹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 기막힌 사실
누가 막아 놓았단 말인가,
씨앗 한 톨의 폭발성을

세 알의 씨앗 심어도
다음 해에 하나도 싹 틔울 수 없는 날들이 가고
새로운 종자 사느라 바빠진 세상
씨앗 가진 자만이 최후에 살아남을 수 있다고
소리 없는 전쟁, 이미 시작되었다고

씨앗의 침묵은 계속되고
아욱, 근대, 옥수수, 상추, 수수, 조, 보리, 밀
이런 이름을 나지막이 불러보는 아침

지금 이 순간도 빠짐없이 한 톨 씨앗이 되는 걸
이제 곧 여름 가고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르게 가을이 오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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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멀었다

엄마가 입원했다
팔십 평생에 처음이다

엄마가 쓰러지셨다
몸 가누기 힘들어도
자식새끼 깰까 봐 홀로 일어서다가
그 지경이 됐다

병원에 있는 날이 늘어나자
제 걱정에 바빠진 자식들
외롭다고 하셨다
엄마 입에서 나오리라 생각지 못했던 말
휘둥그레진 눈으로
환자는 원래 외로운 거라고
퉁명스럽게 내뱉는 아들

그 후론
말수가 부쩍 없어졌다
입맛이 없다 했다

난 아직 멀었다

얼떨결에
엄마 꿈이 뭐냐고 물었다
악전고투 끝에 감던 눈을 번쩍 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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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나보다 조금 먼저 간 사람

이게 전부냐고 따지듯 누군가에게 묻고 싶은

벼락 치듯 그리워 적막하게 이름 불러보는

한 사람이 감내해야 했던 파도

생전에, 가던 길 멈추고 하염없이 바라보던 것들

가까스로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불우가 아니라 불후인 그가

남기고 간 시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