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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2016년 [시] 진달래꽃 외 / 장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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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847회 작성일 16-12-21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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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장승진

휴대폰에 메모 된 노트 낱말들
시로 태어나지 못하고 남아있는
그들을 보면 미안하다 죄송하다
기록되지 못하고 잊히는 감동과
지나가는 소중한 순간들이 아깝다

변화는 늘 빠르게 온다
적응하려 애쓰는 사이 달력이 넘어간다
학교를 옮기고 연초의 결심도 수정이 불가피하다
그토록 무덥던 올해 여름에 오래 꿈꿔왔던
바이칼 호수로의 여행이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 기억과 감동으로 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낯설지 않다 당황스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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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

바야흐로 사월 중순
칙칙하던 산허리에 연분홍 꽃 천지
도대체 어디에들 숨었다 나오는 걸까

늘 이맘때가 할아버지 제삿날
6.25때 돌아가셔 얼굴도 모르고
작은 삼촌 닮으셨다 얘기만 들었는데
얼마 전 날을 잡아 뼈를 수습하여
할머니 산소 곁에 옮겨 드렸지
그래서 이런 생각 드는지 몰라

난리통 돌림병에 사람들 쓰러질 때
모자(母子)가 하루 차이로 떠나셨으니
장례인들 온전히 치를 수 있었을까
상주인 내 아버지 군대가 생사 모르고
행여 돌아올까 달포를 더 머물다
마지못해 떠나는 초라한 상여
아마도 온 산허리 진달래들이

까치발로 서서
여린 손 흔들며 배웅했으리
골짝 끝까지 출렁이는 연분홍 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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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

봄비 추적이는 날
동네 이발소에 내가 앉아 있네
안경 벗어 놓고 눈 감은 사내
눈처럼 내리는 희끗한 머리칼
축축한 빗소리 베고 잠시
다른 별에서 아득해지는 사이

생각은 불어나 강물 되고
솜털 끝마다 비명을 매단 채
견고한 바위벽 기어올라
온 생애 물에 헹궈 쥐어짜며
허우적대는 사내가 보였네

사명(使命) 따라 살고자 했으나
욕망 따라 살아온 날들
사정없이 젖어버려
햇볕에 널어 말리자 한다네

참회여 어떤 색깔이더냐
남겨진 머리칼 가지런히 쓰다듬어
염색을 거부한 봄비 내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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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는 제 살을 끔찍이 아껴
바늘에 살짝만 걸려도 뛰쳐나가지 못하고
결국 낚시꾼에게 끌려와 잡힌다는데
작은 상처가 두려워 편한 곳으로만 따라가다
더 큰 굴헝에 빠지는 건 아닐까

죽으면 결국 썩어질 살
흙으로 돌아갈 살
상처가 오면 상처로 감싸고
살이 박히면 살로 껴안고
입김 호호 불며
살아보세 살살 달래며

살려주세요 살살 쓰다듬어 주세요
살짝 손을 잡아 주세요.
살살 달래 주세요
살고 싶어요
살려 주세요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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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라

물안개 이불 덮고 잠자던 대지가
꿈틀꿈틀 깨어나는 걸 본 적 있는가
자명종 소리처럼 퍼지는 햇살이 순백의 자작나무들 스치면
이파리들 흔들며 화답하여 일어나는 끝 모르는 숲 속에서
말갛게 얼굴 내미는 색색의 들꽃 천지를 꿈꿔본 적 있는가
칠팔월을 건너뛰는 시간 속으로
쉼 없이 내달리는 열차 난간 잡고 서서
쏟아지는 사랑 노래와 반짝이며 흩어지는 슬픔 파편들 만나본 적 있는가
묵묵히 밤 들판을 달려가는 길고도 강인한 짐승의 갈비뼈를 베고 누워
우렁우렁 꿈들을 피워 올리다가 그렁그렁 눈물 맺혀보고 싶은가
인생의 파노라마 한 장씩 넘겨보며 새 길을 찾아보고 싶은가
친구여, 그렇다면 주저 없이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라!
흔들리며 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숨겨진 노트를 읽으며
내 인생의 노트에 무엇을 적어갈지 생각해보라
붉은 노을이 지친 대지를 어르며 잠재워
어떻게 다시 말갛게 세상에 내어놓는지
친구여 한 번쯤은 손잡고 흘러가며 천천히 바라보자
이윽고 이르쿠츠크 역에서 내려 에반차이 붉은 꽃길 달려
바이칼을 만나보자 알혼 섬 부르한 바위에 올라 하늘을 우러러보자
블라디보스톡에서 모스크바까지가 아니라
코리아의 부산에서 유럽으로 직행하는 날을 그려보며
그대여, 시베리아 황단 열차를 타라
들판의 꽃과 나무들 읽어내어 숲으로 깔고
만나는 사람들 읽어내어 밤하늘 별들로 심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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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교실
―섬마을 선생님

“이미자 노래에 나오는 섬마을은 낭만적이여
그런 섬마을 선생님은 더 이상 없어야
학부모와 주민들이 이십 대 여교사를 술 먹이고
성폭행하는 참담함이라니
정신이 썩어도 너무 썩은 거 아녀?”

한 선생님을 여자로 보게 한 게 무엇일까

한 여자를 섹스 대상자로 생각하게 한 게 무엇일까

죄 많은 술이었을까 죄 없는 밤이었을까
이 시대가? 천박한 자본주의가?
무차별로 날아드는 야한 스팸메일과 선정적 사회문화가?
아님 독한 마귀와 사탄이? 악한 귀신이?

도서벽지 교원관사마다 감시 카메라가 달린다는데
뒤늦은 카메라가 보게 될 건 뭘까
쓸쓸한 섬마을의 고단하고 외로운 거시기
가르침을 얻기 위한 배움의 거시기한 몸부림?
평온 속에 감추어진 음메 거시기하게 야비한 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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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교실
―3촌(村) 체육대회

강원도 홍천군의 이웃한 3개면 이름도 정겨운 두촌, 화촌, 내촌중학교 전교생들이 버스 타고 한곳에 모여 매년 체육대회를 여는데 학부모는 물론이고 동네 어르신들 동문 선배들까지 모두 모여 성대한 잔치를 열어 신문에도 났었는데 3촌(村)이 다 모여 3촌(寸)처럼 다정하니 얼마나 보기 좋냐며 서로를 격려하기도 했었는데

이젠 이나마 시들해져 열지 못한다는 소식, 이유는 단 하나 학생들이 없으니 보기도 딱하고 신도 안 나고 작은 학교가 희망이지만 어쩔 수 없다고! 처량한 변명같이 들리네 사람이 희망인데 아이들이 희망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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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교실
―학교운영위원회

어떤 시골 학교에서 이런 일도 있었다네
운영위원장님과 몇몇 위원님이 학교의 공사건을 트집 삼아
1박 2일간 국회 대정부 질문을 능가하는 공세를 펼쳤다는데
통상 한 시간이면 족한 회의를 1박 2일 했다는데
그 공사가 자신이 관여하는 업체에 계약되지 않아
학교장을 상대로 분풀이를 심하게 했다는 뒷얘기도 그렇고
민주적 학교 운영을 목적으로 설립된 운영위원회라는데
위원장 자리가 일부에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발판으로 이용되는 현실도 씁쓸하고
학교장이 운영위원으로 참여해서 회의 때마다
위원장 밑에 앉아 있어야 하는 것도 우습고

운영위원들과 간담회를 하는데
기왕이면 바닷가로 가서 회를 먹자고 우겨 가서는
비싼 메뉴를 사전 동의도 없이 막 시키는 통에
책정된 예산을 훨씬 초과하여 폭탄 맞은 행정실 직원이
개인카드로 결재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까지 듣고 나니
이건 칼만 안 들었지 강도가 따로 없구먼 혀들을 찼는데
완장 차고 감투 쓰면 맘대로 휘둘러도 된다고
가르친 건 누굴까? 배워도 더럽게 배웠다고 나무라고 말기엔
속도 쓰리고 나라도 걱정되고 잘못 가르친
선생임이 부끄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