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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2016년 [시] 달 밝은 밤에 외 / 이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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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911회 작성일 16-12-2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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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구재

주민번호 앞 자릴 쓰면서
내 생년월일이 아득해졌다
이 가을 저물녘 혼자 있음도 아득하다
내 눈과 관절들과 생각들도
지난해 보다 더 늙었고
이제 또 한 살 더 늙어지려 한다
옛날 어릴 적 일들과 부모 형제의 그리움만 살아난다.
시 쓰지 말고 그냥 시처럼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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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밝은 밤에

삼경
하늘은 맑게 닦은
유리 테이블
은쟁반 같은 달이
혼자 앉아 있다

저 빛 부신 달 때문에
장미는
은밀하지도 못하게
흠뻑 젖어
오늘도
뜬눈으로 지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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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진 갈매기

주문진 앞바다에는
주문진 갈매기가 산다

갈매기는
푸른 파도가 출렁이는 바윗가나
고깃배 있는 부두에서 노닐었다

수십 년 바닷가 마을에 살면서
갈매기가 내 집 옥상에
찾아온 것은 요 근래부터다

양미리 한 채반 널어놓고
외출했다 오니
빈 채반이다
딱 한 마리 화단에 떨어뜨렸다

고기가 안 나서라고도 하고
사냥 법을 잊어버려서라고도 한다

생활고로 저지른 범죄다
고기가 안 나니 부두가 마르고
어부들의 시름이 커간다

기후변화로 어족자원이 말랐다
자연의 나쁜 징조에
모두 근심의 소문만 질펀하다

주문진 갈매기의 날갯짓에
슬픔에 겨운 울음소리 들리고
무서운 빈곤이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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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동무에게

아득하니
잊혀진 그리움으로
가뭇했는데

슬프지 않게
거기 살고 있어서
고맙다

흘러간 줄 알았는데
고여 있었구나
아직도 삭아지지 않은
그리움아
우리
뉘엿뉘엿 저문
비탈을 걸을지라도
쓸쓸하지 않게
새로 돋은
풀빛으로 살고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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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목소리

내 어머니의 목소리는
언제나
나지막하고 부드러웠지

“엄마”
부르면
“그래”라고 대답하셨지

그 뜻은
엄마 여기 있으니 안심해라든지
어떤 부탁이든 다 들어주겠다는
말이기도 했지

내 아이 키울 땐
그러지 못했는데
딸의 아이들에겐
요즘 그러고 산다

미안해서도 그렇고
어머니가 그리워서
더 그러고 산다

어머니의
둥근 목소리가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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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배추색 뉴똥 치마

내가 봄가을로 입는
분홍 실크 블라우스를
다림질하다가
어머니의 뉴똥 치마가 생각났다

앞마당의 둥근 화단엔
새싹이 나오고
진달래가 봉긋할 즈음

어머니는
배추색 뉴똥 치마를 다림질하셨지
물을 뿜어가며
참숯 다리미로

계란색 저고리를
받쳐 입으시고 나서시면
그날부터는 봄날이었지

뉴똥 치맛자락에
부드러운 햇살이 안겨 와
봄빛 화안히 펼쳐지고
달큰한 바람이 살랑이었지

분홍 실크 블라우스를 다림질하다가
어머니의 화안한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을 만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