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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호2003년 [소설-윤홍렬]逆風은 불어도 江물은 흐른다 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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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갈뫼
댓글 0건 조회 3,425회 작성일 05-03-26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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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달려 오는 굉음이 아주 크게 들린다. 김남철은 시계를 볼까하다
가 그만두었다. 닐이 뿌옇게 밝아 지기는 하옇지만 짙은안개가 온천지에
꽉차있으니 시곗바늘이 제대로 보일 것 같지도 않다. 게다가 지금달려오
고 있는 기차가 창렬동에서 5시 10분에 출발하여 05시 17분에 무산역에
들렀다가 일분후에 청진을 향해 출발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시각이 약
5시 15분이 조금 지났을 것으로 짐작한다. 철광석 6량과 객차 한 칸 그리
고 우편물을 비롯한 각종 소수화물 (小手物)을 실은 화물칸 하나까지
를 끌고 오는 것이니 모두 여덟칸의 기차라는 것도 알고 있다. 화차 바로
뒷칸이 소화물칸이고 그 뒷칸이 객차며 그 뒤로 이어진 칸들이 철광석을
실은 화물칸들이다. 일반승객이라면 서둘러 승강장에 나서야 할 시각이지
만 철저한 비밀을 유지하며 차에 올라야하는 김남철은 여전히 웅크리고
앉아 기차가 들어와 멎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제 오는 기차가 이 무산역
에 정차를 한다면 대개 맨 뒷칸이 머무르는 위치로 기억되는 위치에 숨은
것이니 여기서 다소곳이 숨어 있으면 될것이다라는 생각이다. 굉음이 가
까워지면서 김남철의 긴장도 조여진다. 가슴이 울렁거린다. 자무스(佳木
斯) 까지 무사히 가야하는 것이 긴요한 목적이지만 그렇기 위하여는 지금
달려오고 있는 기차에 틀림없이 무사히 올라야한다. 그렇기 위하여서도
지금 짙은 안개가 드리운 것도 한 덕이다. 만주엘 무사히 가게하기 위한
신(神)의 도움인 것 같다. 개나리 가지 사이를 통하여 이제곧 기차가 들

어올 선로를 응시하는 김남철은 심하게 가슴이 울렁거림을 느낀다. 그 순
간 번개처럼 머릿속을 휘젓는 충격이 있다.
(내가 지금 어디를 가겠다는 것인가.)
문득 허무감에 휩싸이는 김남철은 다가오는 기차에 오르겠다던 긴장감
이 확 풀렸다. 도대체 어디로 …누구를 만나러 간다는 것인가.
(만주? 만주의 자무스(佳木斯)? 그리고 히데꼬를 만난다? 히데꼬는 누
군 데? 그 여자도 일본여자 아닌가? 히데꼬가 나를 위해 오까모도를 막아
주기를 기대하고 찾아간단 말이냐? 그만한 힘이 히데꼬에게 있으리라는
기대인가?. 그 여자는 한낱 자무스역 부속시 설인 열차종사원들의 합숙소
의 감독관이다. 원래는 남자였지만 전쟁이 하도 오래 걸리고 대부분의 직
장에서 한창 일하던 남자들이 전선에 나가 죽자 여자들로 빈자리를 메운
경우가 많다. 히데꼬도 예비역 육군대위였던 남편이 만주의 조그마한 역
의 역장으로 근무하다가 재소집되어 갔다가 중경(重慶) 근처의 전선에서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불행한 경로를 격는 전몰장교들의 유족
을 보호한다는 정책에 의하여 자무스역 합숙소의 감독이 된 여자다. 죽은
남편의 종사하였던 직장의 연고를 좇아 열차 종사원 합숙소의 감독이 된
여잔데 조선인인 나를 위하여 위험한 모험을 할 리가 없다. 내가 이 위험
한 처지에 히데꼬를 구원을 받겠다고 엊저녁 이후 지금까지 기대를 가졌
던 것은 순전히 마른 해삼을 구해주고 그 귀한 빼갈을 여섯병씩이나 구해
주는 성의를 보였던 여자, 그 귀했던 빼갈을 구해줬던 친절과 성의가 지
금까지도 흐르고 있으리라는 기대…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된 기대라는 결
론이 뱅뱅 머릿속을 빠르게 휘젓고 다닌다. 나는 내생명의 구원을 받고자
하는 간절한 염원으로 찾아가지만 히데꼬는 자기생활의 안전과 자기조국
의 안전을 위하여 자기의무를 다하여야 할 처지가 아니겠는가.)
기차는 들어왔다. 그리고 멈췄다. 예측했던대로 맨 꽁무니칸이 김남철이
숨어 있는 곳 바로 앞에서 멈췄다. 그러나 만주행 계획을 포기한 김남철

은 개나리 가지사이를 통하여 말없이 묵직하게 서있는 기차만을 응시한
다. 지금 당장은 아무런 계획도 희망도 없다. 그저 멍한 머리로 기차를 응
시할 뿐이다. 이어 기차는 기적을 울리고 서서히 떠나갔다. 기관차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김남철은 화다닥 제정신이 들었다. 이제는 이곳을 빨리
피해야 한다. 만주로는 가지 않는다. 문득 가족들이 그립다. 날이 완전히
밝아지기 전에 집으로 숨어들어 갈까? …지금 빨리 달려가면 누구의 눈에
도 뜨이지 않고 집에 숨어들을 수 있지 않을까? …고 재빠르게 머리를 돌
려보았다. 그러나 이웃사람들 눈에 뜨이는 문제보다도 자신의 집에, 또는
주변에 경찰들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섶을 짊어지고 불
구덩이로 뛰어드는 꼴밖에 안된다. 그렇다. 집으로는 못간다. 그럼 어디
로…? 아무리 생각해봐도 안전이 보장된 편안한 곳은 샛강골 누님댁 밖에
없을 것 같다. 거기는 엊저녁에 소동이 벌어졌던 곳이니까, 경찰들의 견해
로는 감히“내가”그 주변에 버티고 있던가 다시 숨어들을 것이다라고는
생각치 않을는지도 모른다. 샛강골이 완전히 안전한 곳이 아니라면 여운
골은 어떨까? 김남철은 무심결에 고개를 져었다. 만주제국이라고 하는 것
이 형식상의 독립된 국가이지 조선이나 마찬가지로 일본의 식민지나 마찬
가지다. 일본군의 관동군 사령관이 실질적인 만주의 통치자다. 그런 처지
에 여운골이라고 하여 일본경찰들의 감시망에서 김남철이 자유로운 곳일
수는 없다. 날은 완전히 밝아지는 데 다만 짙은 안개 덕분에 시야갸 극히
좁을 뿐이다. 어디로 가든간에, 그 문제는 가면서 생각하기로 하고 우선
이 자리는 떠야한다는 압박감에 김남철은 개나리 울에서 빠져나와 동구밖
좁은길로 접어들었다. 무심결에 방향은 서쪽… 그러니까 샛강골로 향하고
있었다. 지난 밤에 오던길을 되 짚어 가고 있는 것이다. 어서 빨리 이른
아침에 피사리든가 물꼬를 본다든가의 목적으로 논에 나오는 사람들이 있
을런지도 모르니까 어서 빨리 논들이 있는 구역을 벗어나야겠다는 초조감
으로 줄기차게 속보로 걸었다. 아무리 짙은 안개라 할지라도 지척은 보였

고 제고장의 논틀길이라노니 방향이 헷갈리는 법도 없이 잘 걸었다. 무산
역 구내에 숨어 있을 적에는 제법 한기를 느끼는 정도로 씰쌀하든 기온이
이제는 온몸에 땀이 줄줄 흐른다. 상의를 벗어 어깨에 걸었다. 그러면서도
계속 걸었다. 걷는다기 보다는 거의 달렸다. 그의 목적지는 무의식 중에
샛강골로 향하고 있었다. 이제는 날이 완전히 밝았다. 안개도 많이 엷어졌
다. 주변을 둘러봤다. 샛강골 뒷산이 바로 눈앞에 보인다. 거의 다 왔다.
시계를 봤다. 6시 15분. 무산역을 떠난 지 한시간 남짓한데이십리길을 달
려 온 것이다. 김남철 스스로도 감동스러운 속보였음을 깨달었다. 여기서
부터는 주변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 혹 숨어 있는 경찰이 있을지도 모르
니까. 그러나 여기는 농토는 없다. 갈대가 무성한 습지의 연속이다. 아니면
야트막한 동산의 산자락이 두만강으로 이어지는 비탈의 연속이다. 낭림산
맥의 동쪽 끝부분이다. 까마득한 서쪽 하늘아래에 가물거리는 산이 백두
산이라고 들었다. 우리의 독립군들이 우굴거린다는 백두산이 새삼 그리워
진다. 김남철은 발걸음을 멈추고 백두산이라는 아득한 산봉우리를 잠시
바라보았다. 쫓기는 신세가 마냥 백두산만 바라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이
일대엔 논이고 밭이고 간에 농토는 전연 없다. 그러니까 피사리를 하든 물
꼬를 보든간에 농사일로 이른 아침에 여기에 오는 사람은 절대로 없을 것
이고 누군가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반드시 의심스러운 사람이다.
엊저녁에 샛강골에서 경찰의 기습을 받고 도피행각을 벌이면서 김남철의
의식이 완전히 바뀌었다.
경찰에 붙잡히기만 하면 반은 죽다시피할 정도로 맞을 것이고 그리고나
서 징역살이를 하든가 징용으로 보내지든가 할 것이다. 징용으로 간다는
것은 미군의 폭격을 받아 죽는다는 것과 같다. 천상 일본 아니면 남양군
도로 가게될텐데 그럴라치면 반드시 배를 타야하고 그 배는 목적지에 가
지도 전에 미국 비행기의 공격을 받아 갈아 앉을 것이다. 망망대해에서 배
가 침몰된다면 나의 목숨도 그것으로 끝장이지 않은가. 그럴바에는 차라

리 여기서 죽어 고향땅에 묻히는 것이 가족들을 조금이라도 위로하는 셈
이 되지 않겠는가.
(어떤 놈이든지 나를 건드리기만하면 모조리 목을 비틀어 버릴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핏값이라도 할 것이다.)
평소의 김남철답지 않은 극단적인 잔인성을 지니게 된 것이다. 온몸이
땀투성이가 된 상태에서 그래도 연신 주위 상황을 살피면서 샛강골 뱃소
근처에 다달았다. 시계를 봤다. 무산역에서 출발하여 한 시간 반조금 지났
다. 길도 변변치않은 데 빨리 온 것이다. 현재 김남철이 처해 있는 형편이
조급해서인지 발걸음이 빨랐던 것같다.
(자…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모르겠다. 수십미터의 공간을 통
과해야 하는데 거기에는 갈대도 없고 관목들도 없다. 잡초만이 듬성듬성
깔려 있을뿐인데 거기를 통과 한다고 하는 것은 김남철의 온몸이 완전히
드러나는 것이다.)
엊저녁도 이곳을 통과 하였지만 그 때는 밤이었기 때문에 김남철의 온
몸이 노출 되는 것에 관한 두려움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
히 밝은 낮이고 게다가 안개마져도 완전히 걷혔다. 누님댁으로 가기위해
서는 이래저래 몸을 숨기고 다가가기는 어렵다. 모험을 해야할 것같다. 그
는 다시한번 갈대 줄기를 조금 제치면서 가로놓여 있는 황무지의 넓이를
헤라려 봤다. 약… 2백미터쯤 될까? 보통걸음으로 걸어서라면 약 2분정도
걸리리라. 잽싸게 뛴다면… 2∼30초밖에 더걸리겠나. 그렇다. 2∼30초 동
안만 무사하면 된다. 만일에 이 풀밭을 가로지르다가 숨어있던 경찰들에
게 들킨다면 이 갈대밭을 헤치면 되짚어 뛰어가면 될 것이다. 달리기에도,
주먹을 쓰는 경우에 못지않게 자신이 있다고 자부한다. 뛰자. 문득 매부
생각이 났다. 많은 매를 맞았을 것이다. 일본은 곧 망할 것이다. 제발 하루
속히 망해라.
(16일 낮) 그러나 2분이 아닌 단 몇초라도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노출

시킨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것이다. 그런대 누님댁엘 아니 갈 순는 없
다. 이제날이 완전히 밝았는 데 그냥 이 갈대밭에 쓰러져 오늘하루를 보
내고 밤에 간다는 방법도 있을 수는 있는 데 갈대밭이 온통 물바다 아니
면 질척거리는 정도로 모조리 물이 깔려 있다. 이런 데서 하루해를 보낸
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어차피 이 갈대밭에서는 떠나야 한다.
최악의 경우 경찰들이 총을 쏘면서 좇아오는 상황이 벌어진다 할지라도
그런 때는 그런 때대로 최선을 다해 도망을 가드라도 우선 이 갈대밭은
벗어나야한다. 그래야만 샛강골로 가는 방도가 생기는 것인 데야 우선은
뛰자. 김만철은 우선 시야를 가리는 갈대 줄기들을 살며시 좌우로 헤치며
건너야할 잡초밭을 다시 한번 꼼꼼히 살폈다. 그리고 갈대밭 끝까지 조심
스레 앞을 살피며 걸었다. 갈대밭 끝에 다다르자 다시한차례 앞쪽의 관목
숲을 살폈다. 그리고는 아득히 높은 절벽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심정으로
뛰기 시작하였다. 잡초밭을 가로지르는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리는 것같
은 지루함을 느끼면서 이를 악물고 달렸다. 그리하여 건너편 잡목숲에 다
다르자 우선 잔솔포기 밑에 주져앉으며 주변의 동정을 살폈다. 호흡이 가
쁜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가빠서인지 무심결에 한숨이 나왔다. 그렇게 잠
시 마음을 가다듬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일어서며 주변을 다시 한번 주의
깊게 살폈다. 그리고 은신할 만한 곳이 없는 뱃소는 피하고 그 남쪽의 잔
솔 숲속 길을 이리 저리 돌고 에돌면 사돈집을 향해 긴장된 마음으로 가
다 멈췄다했다. 그렇게 한참을 가고 나니 누님댁 오양간을 마주 볼 수 있
는 지점에 다달았다. 잔소나무 사이를 가리어 앉았다. 그리고 사돈댁 마당
을 살피며 혹 누가 나와있지 않을까를 살폈다. 이어 주변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약간 마음이 노이는 안정감이 든다. 그러자 흠뻑 젖은 상의를
벗어서 비틀어 땀을 짜냈다. 많은 물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제법 물
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것을 소리나게 털어 구겨진 것을 펼 수는 없으
니 무릎에 펼쳐 놓고 두손으로 우로 좌로 당기고 켕기고하여 대강 구김살

을 폈다. 그리고 만일에 도망을 가야하는 사태가 벌어질는지도 모르니까
그 것을 입었다. 축축한 옷이 몸에 불편하였지만 잠시후에 곧 그 불편은
사라졌다.
(매부는 어찌 되었을까. 매를 많이 맞았을 텐데… 크게 다치지나 않았
으면 좋을텐데. 내가족들은 어떨까. 어제 배상근네 집에 와서 울면서 나의
안부를 애타게 궁금해 하더라는 아내가 가슴을 에이듯 그립다. 성갑아, 성
갑아.)
김남철은 슬며시 전달되어 오는 시장기를 느꼈다. 지난 새벽에 배상근
부부가 가져다 준 옥수수와 감자를 배불리 먹었었지만 벌써 여덟시가 다
됐다. 그로부터 3시간이 넘었으니 시장기를 느낄 때도 되었겠다. 하기는 시
장기보다는 갈증이 더 심해지는 것 같다. 당장 조 아래 누님댁의 부엌에만
가면 아주 시원하고 맛있는 샘물이 철철 넘쳐나는 데… 그렇지만 여기까지
이렇게 왔는데 섣불리 누님댁엘 들어 갈 수는 없다. 이제는 모든 고통을 최
대한으로 참아야 한다. 갈증과 시장기를 달래려 하는 데 이제는 졸음기까
지 찾아든다. 따져보면 그제 저녁에 잤었고 엊저녁에는 밤새도록 두만강변
을 헤매였고 오늘 새벽에 무산역 개나리 숲에서 새우잠을 조금 자 봤다. 그
리고는 또 3∼4시간을 걸어 샛강골까지 왔다. 피곤은 그 육체의 주인이 처
해 있는 상황엔 별 관심이 없이 제자신의 임무만을 수행하는 모양이다. 아
직도 주변의 상황, 경찰들의 잠복여부 또는 불시의 기습등이 조심스러우니
방심을 할 처지는 아니다. 함부로 마음을 놓고 잠을 잔다든가 하는 일을 하
여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데 악마구리 떼처럼 몰려드는 잠엔, 무산군 정도
가 아니라 함경북도에서 제일 세다는 김남철의 체력으로도 감당이 안 되었
다. 그는 내리덮이는 눈꺼풀을 치켜올리려 안간힘을 썼지만 기어히 눈꺼플
은 내리 덮였고 몸도 걷잡을 수 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아내의 독촉에 눈을 뻔쩍 뜬 김남철은 멀떡 일어나 앉으며 본능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꿈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잠깐 멍청히 하늘을 보다가 다시

그 자리에 누었다. 새삼 아내가 그리웠다. 지난날에 자주 겪었던 생활 경
험이 꿈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술 좋아하는 김남철은 늦잠을 자는 경우가
많았다. 청진역에서 시발하여 자무스로 석탄을 실으러 가는 화차의 화부인
그는 한달에 다섯 번정도는 집에서 자고 아침 5시 17분에 무산역에 들르
는 기차에 편승하고 청진에 가서 11시발 자무스행 기차의 기관차 화부일
을 하여야 한다. 그런데 그 무산역 아침차를 한번도 김남철 자신이 때맞춰
일어나 승차한 적이 없고 매번 어김없이 아내가 짜증스레 흔들어 깨워서
야 허둥거리며 새벽밥을 먹고 집을 뛰쳐 나오곤 했었다. 그런데 엉뚱하게
그 새벽잠을 깨우는 아내를 만난 것이나. 김남철은 누운채로 눈물이 핑그
르르 돌았다. 아내를 얼싸안고 볼을 싫컷 비벼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시계는 오후 한시를 지나가고 있다. 땀에 흠뻑 젖었던 옷은 많이 말랐
다. 제법 부스부승해졌다. 그런대도 몸은 개운치가 않다. 다만 머리는 개운
한데 뱃속은 아까보다도 더욱 허전해졌다. 일어나 앉았다. 태양의 위치가
바뀌어서 그늘의 위치도 바뀌었다. 여선규의 소식이 몹시 궁금하다. 시장
기도 심하고 갈증도 심해졌다. 어떻게 좀 해결책을 세워야 겠다. 그는 잔
솔패기 사이를 통해 우선 오양간을 비롯하여 집 주변을 차근차근히 훑어
봤다. 조용히 기지개를 늘어지게 키고 머리를 수그린채로 헛간 뒤쪽으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길로 집앞 개울물을 마시기로 하였다. 엊
저녁에 기석이와 재석이가 경찰의 습격을 염려하여 망을 보던 곳을 지나
집앞의 개울로 내려 섰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물줄기에 코를 묻다시피하
고 물을 마셨다. 마치 황소가 뜨물 마시듯이 힘차게 기세차게 쭉쭉들이켰
다. 배가 불룩해 졌다. 정신이 한층 더 시원하게 맑아졌다. 주변의 상황을
거듭 살피면서 천천이 일어섰다. 이어 고양이걸음으로 대문앞에 다달았다.
이 집은 밤이나 낮이나 대문을 걸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기야 이
집뿐민이 아니라 이 일대의 화전민들의 집 누구네 집을 가릴 것없이 대문
을 거는 법은 없다. 다만 어쩌다가 곰이 슬며시 집안에 들어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대문을 지쳐 놓기만 한다. 지금도 그렇다. 그는 조심스레 손
가락을 여며진 문틈으로 넣어 찬찬히 당기며 주변에 경계도 늦추지 않았
다. 이 대문은 공들여 다듬은 두꺼운 송판으로 만들은 문짝이기는 한데 너
무 무거워서인지 열고 닫을 적에 삐걱거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난다. 지금
문을 열려는 김남철은 주인몰래 들어가려는 것이 아니니까 소리가 난들
상관은 없다. 그런데 이 집안에 경찰이 도사리고 있다든가 또는 이 집 주
변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대문여는 소리가 신호가 되어 달려 나오면 큰일
이기 때문에 이 대문을 열기가 극히 망서려지는 것이다. 잠시 그렇게 대
문 틈에 손을 끼어 넣은채로 궁리와 망서림으로 머뭇거리다가, 이판 새판
이라는 오기로 대문을 천천히 당겼다. 그러나 마찰음은 여전히 났다. 다만
좀 약하기는 한데 그 대신 소리나는 시간이 길었다.
“뉘김둥?”
기석의 할머니가 불안해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태양이 이글거리는 밖
에서 집안에 들어서니 시야는 가려졌는데 음성은 또렷하게 들려왔다. 이
집은 함경북도의 전래풍속대로 부엌과 안방사이의 벽은 없다. 기석할머니
의 소리나는 곳이 벽없는 안방에서 들려 온다는 것을 안다. 김남철은 무
심결에 입에 손가락을 갖다대며“쉬잇”소리를 냈다.
“애고 사돈 아지비 아임둥?”
김남철이 입을 가리느 것을 봤음인지 여기석 할머니의 음성은 약했다.
“무시래? 남철이 왔음둥?”
사돈 아지비∼라는 소리에 깜짝놀란 여혁룡 노인도 소리를 죽이고 반색
을한다. 그제서야 시야가 트인 김남철은 방으로 들어가 여혁룡 노인의 손
을 지긋이 잡았다.
“옳소. 남철이 맞습메”
“어찌된기둥”
여혁룡 노인은 무사하게 살아 있는 김남철의 손을 잡은 것이 무척 감동

스러운 것 같다. 흐느긴다. 김남철은 여혁룡 노인의 두손을 지긋이 잡으며
엊저녁에 겪은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부엌 아궁이에 들어가 숨었었다
는 것과 헛간 뒤에서 소동이 벌어지는 것을 다 들어서 알았다는 것과 그
리고 밤을 패다시피 걸어서 무산역에까지 갔다가 만주행 예정을 포기하고
다시 돌아 왔다는 전말을 설명했다.
“궈래가 집에서 바람처럼 빠져 나와 뱃소쪽으로 가는기능 기석이가 봤
닥해서 무사히 어디론가 피했닥하능기능 알고 있었지비. 그 다음을 몰라
하이 됫새 궁금했재이요. 됐소. 이제 우리 기석애비만 무사히 돌아오믄 조
상님께 절해야 합매”
극대문이 요란스럽게 열리며 기석의 흥분한 음성이 크게 울려 왔다.
“큰아매요. 애비 왔습매”
기석이 형제가 대문안에 들어썼음을 볼 수 있었지만 기석 형제는 어두
어진 시야가 개이기를 기다리느라고 잡시 정지앞에 서있다. 방에 있던 세
사람들은 일제히 일어서며 일제히 외첬다.
“무시래?”
잠시후에 방으로 들어선 기석이 형제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신명이 나서
“아버지의 용태”를 늘어 놨다. 그리고“어찌나 모질게 매를 맞았는지 경찰
서 정문에서부터 우리들이 교대로 업고 성갑이네 집으로 갔습메”라는 대
목에서는 재석이가 엉엉 울었다. 여혁룡씨 부부도 울었다. 격렬하게 흐느
껴 울었다. 한동안 방안이 숙연하였다. 잠시후 기석이 울먹이며 아버지 비
참한 몰골을 설명했다. 얼굴은 퉁퉁부어서“내 애비를 알아볼 쉬 없었읍
메. 몸을 움직이지 몽하오. 조금만 움직이면 에구구 비통한 소리르 내오.
옷을 베껴보이 온몸에 시퍼렇게 벌것케 멍이 들고 그리고 됫쇠 부었습데”
울음을 딱 멈추며 여혁룡 노인이 벌떡 일어선다.
“이러고 있을 일이 애이요. 모진매를 맞았으니 그 독으 풀어야 하재이
요? 한바위골에 다녀 오겠음메. 장 아바이한테 있는 고무열 (곰의 쓸개〓

웅담) 개오겠슴메”
“그러문 내가 가야겠음메“
김남철이 벌떡일어섰다. 엊저녁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고 또 제대로
먹지도 못한 몸으로 어떻게 다녀오겠느냐는 여혁룡노인의 만류를 무릅쓰
고 김남철이 나서며 여기석을 데리고 떠났다. 김남철은 여전히 쫓기는 몸
이니까 혹 한바위골엘 가는 길에서건 오는 길에서건 경찰을 만나기라도
하는 날이면 움담을 가져 오는 데에 차질이 있을 수 있으니까 그런 경우
에 대비해서 여기석을 데리고 떠난 것이다.
“외삼촌 들었슴둥?”
뱃소애서 좌측으로 꼬부라져 백두산 쪽으로 한참 걷다가 느닷없이 던지
는 질문이다.
김남철은 영문을 몰라 부지런히 걷기만 하며(무슨말이냐)는 표정으로
여기석의 얼굴을 흘깃봤다.
“청진 앞바당에 미국 잠수함이 됫쇠 많다는 이바구 말임매. 아적 몬 들
었슴둥?”
“알고 있읍메. 들었슴메”
김남철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담담하게 대답했다. 외삼촌
의 무감각한 대답에 여기석은 조금 허전하였다. 다시 보충하여 물었다.
“미국 잠수함이 부산 앞바다 인천 앞바다에 됫새 몰려 있닥하는 말도
들었음둥?”
김남철로서는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부산앞바다 인천앞바다도 미국잠수함이 만탁합데?”
“많다 많다 수도 없닥합데”
김남철은 고개를 치켜들고 서쪽하늘을 바라봤다. 엷은 구름 한 조각이
기울은 해의 앞를 가로막으려는 듯이 서서히 앞지르려한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