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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2016년 [시] 방풍나물 외 / 김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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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919회 작성일 16-12-22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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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춘만

살아오면서 몇 년 주기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그 큰 변화의 한해가 금년이 되겠다. 먼저 사십여 년의 직장 생활을 마감했다.
거창한 퇴임식은 안 했지만 함께했던 구성원들과
따뜻한 추억의 시간을 만들며 긴 기간을 정리했다. 맘먹고 농사도 지었다.
난생처음 내 손으로 짓는 경작지를 가장 많이 넓혀본 해였다.
무엇보다도 국가지질공원해설사로의 도전이 새로웠다.
약 2주간 새로운 환경에서의 연수는 나를 긴장케 했다.
작품에서도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곤 하는데 만만치 않다.
문득 동인들이 모두 건강하고 좋은 작품을 써서
환하게 웃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소한 것에 눈길이 가고 그런 것에 기대를 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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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풍나물

하얗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을 뛰게 했던가.
흰 모래밭에 뿌리를 박고
파도 소리와 바람 속에서 살아내던
바람막이 나물.

그 너른 가슴에 깊숙이 자리 잡고
이리저리 억센 이파리로 층을 만들더니
한여름 정수리에 눈부신 흰 꽃 올렸네.

마음만 먹으면 만나던 바다 처녀의 꽃
나물 무침으로 잎이 뜯기고
약용으로 뿌리 파헤쳐지기까지
거름 한 줌 없이도 풋풋한 마음 나누던 일.

모두 사라졌는가 했는데
반짝거리는 모래밭 위
푸릇푸릇한 활자로 사연을 적어내는구나.

해안 철책 너머로 수줍게 얼굴 내민
너를 바라보는 이 있으니
수많은 이파리로 층을 만들고
정수리에 다시 흰 꽃 올려라.
그 사람 가슴 뛰며 찾아오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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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미 이빨

무심한 땅도 이빨을 키웁니다.
콩밭에 나가니 기시미란 놈이
여린 콩 순을 모조리 씹어놓았습니다.

나도 이빨 하나 솟구칩니다.
어떤 날은 무도 씹을 수 없는 여린 놈이 돋아나고
어떤 날은 날카롭고 단단한 이빨이 기어 나옵니다.

이빨로 씹을 수 없는 몇 마디 말이
자꾸 입안에서 돌고 돌아 녹아내립니다.
물이 된 말들이 하루 종일 꾸르륵거립니다.

돌덩이를 씹어대는 이빨도
단지 마르지 않는 이슬일 뿐입니다.
풀잎에서는 풀잎을 씹고
돌 위에서는 돌을 씹습니다.

세상에는 무수한 이빨이 살아갑니다.
콩대를 밀어 올려 콩잎을 펼쳐야 할
저 부드러운 콩 순을 한순간 절단 내는
기시미 형상의 수많은 이빨이 어울려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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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틀거리는 길

꿈틀거리는 길
수십 번 탈바꿈하며
주변을 맴돌고 있다.

이 언덕에서 저 언덕까지
바라보면 그리 멀지 않는 거리

마음 흐려지면 보이지 않다가
구름 몇 점 걷히면 환하게 드러난다.

누구는 발바닥 간지럽다 하고
누구는 발목 푹푹 빠져 헤맨다는 길

싱싱한 이파리의 가로수가
이야기를 건네고
가끔은 당신이 두 손 내밀어 주는

꿈틀, 꿈틀거리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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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 아버지

참 순하게도 생겼다.
평생 화 한번 안내고 살아왔음직한
모나지 않은 저 얼굴
금방 잔 깬 듯 싱싱하기도 해라.

웅크린 황소의 빈틈없는 자세
저렇게 틀을 잡고 앉아 있으니
누가 감히 건들기나 하겠나.

그런 주춧돌 놓고
그 위에 기둥 세워 집 지었던
목수 아버지.

저렇게도 날을 세우는구나.
몸통은 분칠하듯 도닥여 주고
가지런한 날 끝은 한 줄의 무명실이었네.
먹줄 친 대들보 옹이 다듬던
큰 자귀질의 부드럽고 맑은 소리.

닿으면 미끄러지듯
거침없이 나무 밥 일으키던 대패질이라니.
매끈한 서까래 올려 비 막고 바람 막아
날 키우신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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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고 게임 이후

그해 여름
스마트폰을 들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그놈 잡자고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청초호보다 깊은
당신 눈동자 속에서
그놈보다 더 빠르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던
고향 식구들 평생 찾던 청호동 어마이
그런 거 해보았다.

스마트폰에 앱을 깔아 주고
충전소가 생기고
생수도 무료로 주던 열풍이
가을도 오기 전에 모두 호수에 가라앉고

떠들썩하던 적십자회담 잠잠하고
이산가족 상봉 열기도 사그라진
그해 여름
폭염으로 온 동네가 정신없을 때

‘나 찾아봐라’
망향동산으로 들어가는
조용한 발길 하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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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모거나 네모거나

세모를 묻었더니
모두 삭았다.
네모를 묻었더니
그것도 삭았다.

세모진 마음을 풀면
한 개의 선
네모진 마음도 그렇다.

그러나 한 개의 점은 완강하다.
그것을 가슴에 담으면
삭지도 않고
풀어지지도 못한다.

오늘도 우린
세모거나 네모거나
그런 얘기로 두런두런거리고 있다.

이산의 죄
굳어진 점 가슴속에 굴리며
애태우는 사람들과도
그런 얘기 나누며 어울려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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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약국

지하 약국으로
아픈 다리들 내려온다.
덜컥 가슴을 치는 소리다.

장정의 짐 이고 다니던
저 든든했던 다리들의
덜거덕거리는 소리.

한 달 치 처방전을 앞세우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모여들어
마음들 쏟아낸다
어딘들 못 날아다니리.

환하게 한바탕 웃고
저마다 익숙한 약봉지를 찾아서
내려온 순서대로 올라간다.

지하 약국에서
이런저런 약 냄새와
흰 저고리 입은 나비 몇 마리가
날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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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어장
겨우내 문 잠갔다가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날
문을 열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날
파도로만 뒤채이다가
뱃머리 곧추세우고 달려드는 당신을 맞는다.
억센 사내 손길이
허리를 잡아 흔들면
살찐 문어와 고기들을 품에 안긴다.

사람의 가슴 한구석에도
찾아내지 못하는 바다가 있어
오랜 날 혼자 일렁거리며
등 푸른 물고기 키우고 있다.

이곳과 저곳을 가르는 야릇한 경계의 한 곳
수십 년 문을 여닫는 바다가 있고
그 속엔 기다림이란 물고기들이 펄떡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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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들만을 위하여

노후 된 차체 떼어놓고
신경 쓸 화물도 없이
가볍게 핸들만 잡고 간다.

속도위반에도 걸리지 않는 길
휴게소 들릴 일도 없는 이 길을
쉽게도 간다.

후박나무 위에서
바쁘지 않은 경적인 양
느린 새 소리가 들렸다.

줄기차게 몰고 다니던 큼직한 화물차
그런 모양의 꽃구름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환한 대낮
바람으로 돌아가 들국화로 피어날 당신
가고 싶은 곳으로 가시는구나.
가벼운 핸들만을 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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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국수를 삶으며

아내도 아이들도
별로로 치는 국수를
대낮에 혼자 삶는다.

두어 번 팔팔 끓여서 찬물에 넣는다.

잔칫날 온 동네가 둘러앉아 먹던 국수
생일날 온 식구 두레 반에서 먹던 국수를
혼자서 건진다.

흐느적거리던 생각의 올들이
여남은 개씩 주르륵 건져지고
끊어지지 않은 면발들은
일제히 고개를 든다.

국숫발은 차가운 물 속에서
두어 번 곤두박질치더니
조금 더 질기고 긴
생각의 올들로 타래를 짓는다.

아무도 모르는 이 시간에
혼자 대하는 한 그릇의 그리움
면발처럼 가늘고 긴
구수하고 질긴 날들을
후루룩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