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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2017년 [평론] 견딤에 대한 세 개의 양 / 조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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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950회 작성일 17-12-12 11:44

본문

1. 「경옥의 노래」 - 윤대녕
2. 「천국의 문」 - 김경욱
3. 샤를 보들레르



1. 존재의 가치


1) 액체의 아파테이아


우리는 언어로 규정되기 전의 상태를 지나, 먼지 사이를 지나, 지구별에 액체로 소환된 물음투성이의 종족이다. 누가 우리를 불러들여 시간의 칼날 위를 걷게 만들었는지, 견딤의 미학을 가르쳤는지, 칼날 끝에서 한 번도 움직인 적 없는 저 어둠 너머엔 또다시 먼지 사이로 되돌아가는 길이 놓여있는지, 아니면 어둠 속의 어둠뿐인지 알 길 없이 그저 흘러가는 존재일 뿐이다. 흘러감은 연속적인 것이다. 인간의 삶 역시 견딤의 연속이다. 그리고 견딤은 액체를 필요로 한다. 땀과 피와 눈물의 원천이 견딤, 즉 살아감이다.
윤대녕1)의 단편소설 「경옥의 노래」는 물이 흥건하다. 페이지마다 비바람이 불거나 눈이 내린다. 그도 아니면 바람이 나서서 산꼭대기에 먹구름을 만들거나 파도를 돋우어 독자들의 마음이 마를 틈을 주지 않는다. 화창한 날에도 기어이 폭포 아래나 물가로 데려가 비애를 환기시킨다. 부박한 경옥의 삶이 평생 동안 물가에서 서성대고 있었으므로.
작품 속 두 주인공은 삼 년여 동안 바닷가를 떠돈다. 경옥과 상욱이 이십 년 만에 재회한 곳은 제주도 서쪽에 있는 비양도였고, 이후 제주도 민박집에서 사흘을 묵으며 집을 한 채씩 태워버리는 듯한 사랑을 나눈다. 태풍을 뚫고 내려간 통영을 거쳐 제주도 산방산 근처에 머물던 경옥은 속초로 몸을 옮겼다가 눈보라를 따라 부산으로 간다. 미륵도를 지나 다시 고향인 여수를 거쳐 고흥 거금도, 완도, 해남 땅끝, 진도, 목포, 신안, 영광을 거쳐 변산 채석강을 돌아 결국 속초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녀가 잠시 고국을 떠나 살았던 곳도 태평양 연안의, 일 년의 절반이 비가 내린다는 시애틀이었다.
바닷가는 바다와 육지의 변경선이다. 또 다른 말로 바다와 육지의 접점이기도 하다. 육지의 모든 액체가 귀소를 이루는 끝이 바다일 때, 바닷가는 삶과 죽음의 변경선이며 접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곧 육지는 견딤의 대상이며, 바다는 견딤의 해제를 의미한다. 더불어 견딤과 견딤의 해제가 서로 공동의 부분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산소마스크를 쓴 상태였는데도, 도무지 숨이 쉬어지지 않아 저는 발악하듯 마스크를 벗어던지려고 했어요. 곧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으니까요. 그때 누군가 다급히 제 손을 잡고 외쳤어요. 아가씨! 참아야 해요. 조금만 참으면 다시 숨을 쉴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제발 조금만 견디세요..... 이윽고 조였던 숨통이 트이면서 저는 가까스로 호흡을 되찾았죠. 곧바로 울음이 터져나오더군요. 그러자 귀에 다시 이런 소리가 들려왔어요. 알아요. 아가씨가 지금 얼마나 힘든지. 네. 잘 알고 있답니다. 그러나 모두가 힘들고 아픈 것이겠지요? 누구라도 등에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게 마련이니까요. 그러니 비록 힘들더라도 견뎌야만 해요. 차츰 나아질 테니까요.”


경옥은 견디는 것이 사는 일임을 안다. 그녀의 나이 세 살 때 집을 나간 엄마를 대신한 새엄마를 견디고, 매일 술을 마시는 아버지를 견디고, 학대를 견디고, 천식이라는 병을 견뎌야 했다. 성인이 된 후에는 혼자라는 외로움, 가정이라는 담을 쌓지 않고 흘려보낸 남자 몇과의 이별, 타국에서의 삶이 주는 고독이 그녀를 허기지게 만들었다. 이런 경옥에게 오드 아이(Odd Eye)는 불행의 화룡점정쯤으로 보인다. 왼쪽의 검은색 눈동자, 오른쪽의 옅은 갈색 눈동자. 상욱의 느낌처럼 그 두 눈은 외부를 향해 있으면서 동시에 내부를 응시하는 듯한 불균형한 느낌과 함께 깊은 공허함이 서려 있다. “왼 눈은 감정 있는 것을 보고/ 오른 눈은 죽어 있는 것을 보”2)는 것처럼, 평범한 사람들에겐 심심하게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하는 일상생활이 경옥에 이르면 매 순간마다 삶과 죽음이 넘실대는 동시상영 다큐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의 접점인 바닷가로만 맴돌고 있는 그녀의 발자취는 당연해 보이며 바닷가와 물의 이미지는 경옥의 짧으면서도 긴 견딤, 삶의 배경화면으로 적절해 보인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노래들 또한 액체의 나열이다. ‘머나먼 저곳 스와니강물 그리워라’, ‘비 오는데 두고두고 못다한 말 가슴에 새기면서 떠날 때는 말 없이 가오리다’, ‘밤이 새도록 가득히 무심한 밤안개’, ‘물레방아 소리 그쳤다 매기 내 사랑하는 매기야’. 젖은 몸에서 나온 노랫말은 축축하다. 목이 메어 부르는 노래는 목소리가 잠길 수밖에 없다. 또한 오래 잠겨있던 목소리는 갈대 몸에 깃든 바람처럼 맑고 깊어진다. 단지 술을 마시기 위해 제주도까지 내려갈 형편이 아니었던 상욱을 비행기에 태웠던 경옥의 목소리는 허스키한 톤에 맑은 운율이 실려 있었다. <스와니강>과 <떠날 때는 말없이>와 <밤안개>와 <매기의 추억>은 바닷가 배경화면의 다른 제목들이다.
물은 흐른다. 사람도 시간을 따라 흐른다. 생겨났으므로 흘러야 하는 것이다. 어느 모퉁이를 어떻게 돌아 흐를지는 각자의 몫이다. 경옥에게 유독 가팔랐던 생도 흐르고 흘러 바다에 닿았다. 상욱과 머물렀던 곳들에 한 줌씩, 마지막 한 줌은 술에 섞여 상욱의 몸속에.


2) 노래의 아파테이아


「경옥의 노래」는 존 에버렛 밀레이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물에 떠내려가면서도 노래를 멈추지 않았던 햄릿의 여자 오필리아. 많은 예술가들에게 물과 죽음을 한 쌍으로 엮어 놓은 오필리아가, 랭보의 표현대로 ‘창백하고 황홀한 부유(浮游)’로서 완성된 것은 노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버드나무와 양귀비와 팬지와 쐐기풀과 함께 흘러가면서 몽환적인 입술로 읊조린 노래는 삶을 육지에 두고 온 오필리아의 죽음의 방편이다.
반면 경옥은 노래를 삶의 방편으로 삼았다.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며 벙어리처럼 입을 닫고 살았던 그녀의 말문을 틔우고 제대로 숨을 쉬게 해준 노래는 밥벌이를 넘어 자신을 치유하는 주술 행위 같은 것이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는 존재론적 가치이기도 했다. 지하 술집에서, 라이브 카페에서, 케이블티브이에서, 영화 속에서 그리고 시애틀의 광장에서 그녀는 끊임없이 노래를 불렀다.


“지독한 외로움에 빠져 있을 때마다 그 환청들을 들으며 저는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어요. 내 안에 무당이 살고 있구나. 그 무당이 힘들 때마다 나 스스로를 달래고 보듬어주는구나. 그렇다면 그 무당이 다른 사람의 아픔과 상처까지 치유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게 어쩌면 내 운명이 아닐까. 그런 생각들까지 하게 됐어요. 물론 노래를 통해서겠죠.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으니까요.”


과거의 어두운 기억으로 가끔 자해를 하고 그럴 때마다 삶에서 멀어지는 일이 되풀이되곤 했지만 경옥은 한꺼번에 바다 쪽으로 기울지 않았다. 생에 대한 푸념이나 좌절을 노래로 다듬어준 도구가 세고비아 기타였다면, 에코백에 수놓인 부엉이는 현실과 미래의 희망에 대한 부적이다.3) 그리고 경옥을 살아가게 해준 노래가 자기 위안에 그치지 않고 타인을 향해 작동한 것이 상욱이다.


3) 경옥의 아파테이아


상욱에게 경옥은 존재 자체로 이미 노래이다. 에메랄드빛과 연둣빛의 에너지다. 이혼 뒤 십 년 가까이 혼자 지내온 삶에 울려 퍼진 아리아다. 그녀의 목소리는 몸속에 까맣게 잠들어 있던 새가 깨어나 지저귀는 듯 귀를 트이게 했고, 수은처럼 스며들어와 혈관으로 샅샅이 퍼지며 새벽녘의 빗소리처럼 영혼을 두드려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의 진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간 감쪽같이 잊고 있던 삶에 대한 맹렬한 허기를 느끼게 했으며 그것을 경옥이 채워주었다. 처음엔 먼 데서 돌아온 여자, 마치 저녁의 어둠이 내리고 있는 것을 감지하고 있는 눈먼 사람인 듯 보였으나, 천둥벼락이 치듯 사랑에 빠진 뒤부터는 놓여날 수 없는 존재였다. 경옥의 유골함을 들고 삼 년여의 추억을 거슬러 오르던 상욱은 그녀가 사고를 당했던 자리에서 똑같이 교통사고를 당해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된다. 그는 꿈결에 경옥의 목소리를 듣는다.


“당신과 함께했던 날들이 떠오릅니다. 바닷가의 방들. 그 방에 어둠이 차오르고 이윽고 새벽이 올 때, 나는 그 놀라운 고요함 속에서 혼자 깨어나 당신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았지요. 그렇듯 늘 제 옆을 지켜주셔서 고마웠습니다. 그 누구보다 사랑한 당신.


그의 사랑은 무의식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로, 사랑으로 되돌아왔다. 살아갈 기력을 잃어가던 상욱에게 마지막 응원가를 불러준 것이다. 경옥에게 상욱이라는 존재 역시 그 누구보다 사랑한, 함께 부르고 싶은 노래였던 것이다. 경옥은 바닷가에서 바다로 옮아간 뒤 평정에 이르렀고, 상욱은 그런 경옥의 평안으로부터 평정을 찾아 남은 생을 완성할 것이다.
「경옥의 노래」는 경옥이라는 인물이 상욱에게 들려준 삶의 위로, 존재 가치의 다른 이름이다. 또한 상욱이라는 존재가 경옥의 삶에 바친 위로의 노래이다. 상욱이 경옥이라는 존재로 인하여 얻게 된 위안은 그의 여생을 밀고 갈 동력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재순이 찍다 만 ‘경옥의 노래’는 상욱이 살아있는 한 미완일 수밖에 없다.
윤대녕 소설 「경옥의 노래」는 슈베르트의 가곡 <백조의 노래>와 닮아 있다. 경옥의 노래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상욱이 부르는 세레나데의 느낌이다. 슈베르트가 곡을 붙인 하이네의 시와 정조를 같이 한다.


바다는 아득히 먼 곳까지 저녁노을 속에 물들어 있었다.
우리는 쓸쓸한 어부의 오두막 곁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안개가 내리고 파도가 일고 갈매기는 저편과 이편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너의 상냥스런 눈동자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나는 네 손에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무릎을 꿇었다.
나는 너의 하얀 손에서 살며시 눈물을 받았다.
그때부터였다.
내 몸은 여위어 갔고 영혼은 뜻밖의 것을 그리워한 나머지 마치 죽음의 길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 불행한 여자가 눈물의 술을 마시게 했던 것이다.
먼 수평선에 안개속의 모습처럼 몽롱한 몇 개의 탑이 보이고 거리가 땅거미에 싸여 있었다.
눅눅한 바람이 불어오면 잿빛 뱃길에 잔물결 일고 구슬픈 노래 따라 사공은 내 작은 배를 저어 가리라
햇빛은 다시 한 번 수평선에 흘러 내려라
그리고 내 여인이 있던 그곳을 말하여 다오
— 「바닷가에서」 전문


경옥은 마흔 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나 상욱의 몸속에 한 줌 노래로 남았다. 오필리아의 노래는 죽음을 향해 있지만 경옥의 노래는 살아서 견디라는 전언이다. 견딤의 연속이 삶이다. 삶은 결코 친절하지 않다. 불친절의 연속을 통과하며 우리는 누군가에게 노래인 적 있었던가. 액체로 소환된 물음투성이의 동족에게 오늘 당신의 존재는 짐인가, 노래인가.



2. 실비아 플라스를 따라


아빠
당신은 하지 마, 하지 마
이제는, 검정 구두가 아니야
나는 그걸 삼십 년이나 발처럼
신고 다녔지, 초라하고 창백한 얼굴로,
감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재채기도 못하면서.4)


실비아 플라스의 시 「Daddy」는 아빠로 상징되는 거대한 힘에 대한 인식과 고뇌이다. 가부장적 권력으로부터 느끼는 억압과 분노, 이로 인한 자기분열적 성찰이다. 여성의 삶에 내재된 주술적 폭력의 다른 이름이 아빠인 것이다. 남성중심사회의 제도와 규범은 여성에게 있어 몰개성적이지당한 “검정 구두”이다.
김경욱5) 소설 「천국의 문」6)은 표면적으로 삶과 죽음에 대한 단상이다. 삶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가정할 때, 죽음은 가장 추한 것이 된다. 죽음이 아름다워지면 삶은 추하게 된다. 아버지의 죽음을 미소로 포장한 사내나 죽음 앞에서 화장품으로 꼼꼼하게 감춘 여자의 얼굴은 추하다. 그러나 여자의 이런 추함은 길들여진 것이다. 가부장제의 규범과 가치들을 내면화해 온 가부장적 여성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암묵적으로 동의한 젠더는 여자의 행동과 택시기사의 태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아버지가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것 같다는 기별을 들었을 때 여자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화장을 고치는 것이었다. 옷도 여러 벌 입어 보다가 그중 가장 얌전한 원피스를 입고 택시를 탄다.


한 시간 가까이 발을 동동 구르다 택시에 오른 여자를 맞은 것은 시끄러운 음악 소리였다. 라디오에서 올드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영등포요.”
여자가 차문을 닫으며 말했다.
“영등포 어디?”
운전수가 백미러를 쳐다보며 큰 소리로 물었다.

눌러쓴 야구모자 밖으로 머리카락이 온통 새하얬다.


길에는 불빛이 많았고 운전수는 말이 많았다. 여자로서는 뭐라 대꾸하기 난감한 말이 대부분이었다. 여자가 얌전해 보이지 않았다면 차를 세우지 않았을 거라고 운을 떼더니 심야운행 중 겪은 진상 승객들의 만행을 늘어놓았다.


결혼이라는 청춘의 빛이 가장 가까이 다가왔던 순간에도, 그러니까 일몰의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느껴지던 카페에서 반지 케이스를 앞에 두고도 여자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의 끼니, 아버지의 불면, 아버지의 발작. 말하자면 아버지라는 어둠.


머리카락이 온통 새하얀, 그러니까 나이를 잡수실 만큼 잡순 택시기사가 감사하게도 여자를 태워준 이유는 얌전해 보였기 때문이다. 같은 시간에 여자가 다른 이유로 핫팬츠를 입고 서 있었다면 혀를 차며 그냥 지나쳤을 인물이다. 운전수는 여자가 탑승한 뒤에도 음악 소리를 낮추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당연하다는 듯 반말을 하고 버럭 소리치기까지 한다. 운행 중에는 여자로서는 뭐라 대꾸하기 난감한 말을 늘어놓는다. 택시기사의 이 같은 언행은 세간에서 ‘개저씨’로 풍자되고 있는, 가부장적 사고로 점철된 남성의 한 예이다.
여자의 아버지는 운전대를 잡기 전에 지도부터 찬찬히 살피고, 퇴근하면 신발이 가지런히 놓였는지부터 확인하던 남자였다. 여자의 동생에게 자주 폭력을 휘둘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이튿날 손등에 화상을 입고 나타났던 동생의 실종을 여자의 탓으로 돌리며 윽박지르던 아버지다. 무시로 얼굴을 내미는 폭력성과 강박성, 가정과 직장에서 상반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중성(동료 교사들에게 ‘샌님’이라 불리던 사람), 의심의 촉수를 끝까지 놓지 않았던 아버지의 무의식적 억압은 여자를 ‘핏기 없는 얼굴’로 만들어 놓았다.
여자의 동생 역시 가부장제의 피해자이다. 유년기 체험의 내용이 기억에 의해 재구성되는 것이라고 볼 때, 그녀의 기억에서 사라진 1박 2일간의 무단외출 사유가 손등의 화상보다 더 큰 공포였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감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재채기도 못 하면서” 자라날 도리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뒤 일본 유학을 떠나 핀란드까지 가게 된 것은 그런 아버지라는 어둠에서 가장 멀리, 혹은 가장 완벽하게 벗어나고 싶은 욕망의 발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욕망은 언어로 발화되지 못하고 억압의 기제로 기능할 뿐이다.


혀는 가시철조망의 덫 안에 박혀 있지.
나, 나, 나, 나,
나는 말을 할 수 없지.
나는 모든 독일인은 아빠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음란한 언어7)


뤼스 이리가라이가 볼 때, 가부장제에 포박되어 있는 여성들에게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부장제가 보고 싶어 하는 여성의 표상을 모방하는 것이다.8) 여자는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할 사람으로 적절해 보이도록 신경을 쓴다. 최대한 자연스러운 화장을 하고 까만 벨벳 원피스를 입는다. 정체성을 규범적으로 규정하는 가부장제적 질서에 예속된 여자는 택시기사의 반말을 문제 삼지 않는다. 말 많은 운전수의 입을 다물게 하지 못한다. 택시기사는 또 다른 이름의 ‘아빠’이고 수천, 수만 대의 택시는 스물네 시간 길거리를 종횡무진하고 있다. 그리고 다수의 택시기사들은 파놉티콘의 감시탑에 앉아 각종 권력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다.
또한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에겐 자매애가 없다. 보부아르에 따르면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남성을 중심으로 한 문화와 전통, 역사적 기록이 보존되어온 것에 비해 여성이 자신의 예속 상태를 인식할만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여성은 언제나 남성에게 전념한다. 소설 속 여자는 아버지에게 전념한다. 여자의 어머니와 여자와 여자의 동생은 공통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심리적, 정치적 유대를 보이지 않는다. 보부아르의 주장대로 아버지나 남편과 같은 특정한 남성에게 주거, 가사, 경제적 조건, 사회적 신분 등이 얽매인 채로 남성들 사이에 흩어져 살고 있다.9)


휴대폰 폴더를 열고 버튼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던 여자는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가족에게 연락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임종을 해야 할 것 같다며 전화를 돌린 것만도 이미 두 차례였다. 엄마와 여동생. 고작 두 통이었지만 스무 통은 돌린 기분이었다.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엄마는 남의 집 얘기처럼 데면데면 굴었고,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여동생은 남의 나라 얘기인 양 시큰둥했다.


무엇 때문인지 여자의 부모는 그 일을 쉬쉬했다. 부부싸움 와중에 어쩌다 한 번씩 입에 오르는 게 다였다. 그럴 때면 불똥이 여자에게 튀기도 했다. 하나뿐인 동생을 건사하지 못했다고(여자는 친구들과의 놀이에 정신이 팔려 동생이 사라진 것도 몰랐다) 윽박지른 쪽은 언제나 아버지였다. 엄마는 여자의 역성을 들어주지 않는 것으로 암묵적인 동조의 뜻을 내비쳤다.


여자에게 있어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엄마나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여동생은 피를 나눈 가족이지만 식구의 개념에서 멀어진 지 오래이다. 동질의 특성으로 말을 걸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이다. 두 통의 통화만으로도 스무 통은 돌린 것 같은 피로를 유발하는 관계에서 정서적 공감이나 정신적 유대가 이루어질 리 없다.
여동생이 사라졌다가 돌아왔던 날부터 이혼을 마음에 품었다던 엄마는 여자의 역성을 들어주지 않는 것으로 이미 여자의 입을 막은 셈이었다. 윽박지르는 아버지를 피해 달아날 유일한 안식처가 막혀버린 여자는 의사 표시 단계에서 나, 나, 나, 나로 멈칫대다가 표현하지 못하고 결국 아버지 곁에 남겨지게 된다. 여자의 멈칫거림은 아버지의 부고를 대신 알려줄 친구 고르기에서도 나타난다.


내가 한 사람을 죽인다면, 나는 둘을 죽이는 셈이지.
자기가 아빠라고 말하며,
내 피를 일 년 동안 빨아 마신 흡혈귀,
사실을 말하자면, 칠 년 동안.
아빠, 이젠 돌아누워도 돼요.10)


줄리엣 미첼(Juliet Mitchel)은 가부장제의 기원을 심리적인 것에서 찾았다. 개별주체가 이데올로기와 맺고 있는 오인과 허구성을 인식한다고 해도 그런 상상적 관계에서 풀려나오기는 쉽지 않으므로 경제적 계급문제가 해결되어도 ‘허위의식’은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 있게 된다. 미첼에 따르면,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는 무의식적인 것이므로 계급 해방 이후에도 집요하게 남아 있게 된다.11)
여자는 아버지의 병원비를 대기 위해 반지하로 내려앉은 것도 부족해 매달 3만 원씩 붓던 연금보험마저 깼다. 그렇지만 고통과 억울함과 죄의식 속에서 아버지의 마지막을 남몰래 상상한다. 폴더폰을 최신형으로 바꾸고, 영어 회화 학원에도 등록하고, 오로라를 보기 위해 당장이라도 떠날 수 있도록 항상 여권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아버지만 없다면’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질 거라고 믿는 여자는,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아버지가 요양병원으로 떠나고부터 살이 빠지고 반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처럼 지쳐 보인다. 이처럼 무의식의 수준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억압은 여자의 일상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내와의 관계에서도 남성성을 향한 심리적 예속 상태가 이어진다. 아버지가 과도로 여자의 목을 겨누었던 아찔한 상황에서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사내만 뭔가를 했다. 그 후로 사내와 연관된 단어는 호기심, 당당함, 자신감, 확신에 찬 말투 등이다. 여자는 사내에게 은연중에 속내를 내비친다. 자판기 커피로 물꼬를 튼 대화가 술이나 한잔 하자고 청하게까지 한 여자의 휴대폰 속에 사내는 단축번호 1로 자리매김 한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는 사내와 아버지 두 사람에게서 각각 다르게 작동하지만 여자에게 모욕감으로 돌아와 뺨을 후려치는 것은 같다. 모욕감의 사전적 의미는 ‘깔보고 업신여김을 당하는 느낌’이다. 여자는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내의 행위에서 모욕감을 느낀다. “아빠, 아빠, 이 개자식, 나는 다 끝났어.”라고 끝내 내뱉지 못했던 구절에 깃든 자기인식과 현실에서 느꼈던 것처럼.
마지막으로 소설 속 여자의 직업이 어린이집 교사라는 것과 치매에 걸린 아버지, 주요 배경이 요양병원이라는 설정은 매우 흥미롭다. 전통적 성 역할에서 여성은 계급의 하위구조에 속해 있었다. 교환되거나 거저 주어지던 여성의 의무 중에는 가족 내 건강한 남성뿐 아니라 혼자 힘으로 지내기 어려운 다른 가족 구성원을 돌볼 의무가 있었다. 어린이와 병든 노인은 사회적으로 반드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들이다. 기요맹의 표현을 옮기자면, 여성은 남성들이 하기 싫어하는 “그러한 일들을 떠맡는 사회적 도구”인 것이다.
소설 속에서 여자는 사회적 ‘도구’로 기능한다. 당연히 여자가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정해놓고 시스템이 이를 밀어붙이고 타박한다. 흙수저 물고 태어난 여자에게 오로라는, 그저 인스타그램의 한 컷일 뿐이다.
일부 학자들은 21세기 현대 여성들의 지위가 급속도로 상승해 사피엔스 종족이 모계사회로 접어들었다고 주장하지만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는 가부장적 메커니즘은 아직도 아버지 슬하에 머물러 있다. 사람살이의 온갖 견딤이 삶이라면 여성으로서의 삶은 견딤의 제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와로부터 시작된 여성의 서사적 나이가 인류 역사와 궤를 같이함에도 불구하고, 소설에 나타난 여자의 서정적 나이는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3. 알바트로스 - 샤를 보들레르


보들레르가 지구에서 살다 간 시간은 1,450,656,011여 초이다. 그 길지 않은 시간, 마흔여섯 해를 돌며 남긴 발자취에는 시집 『악의 꽃』,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 그리고 『현대생활의 화가』를 포함한 15편의 미술평론과 다수의 문학평론, 에세이와 편지글 등이 있다.
그는 파리에 살면서 서른 번 이상 이사를 했다. 사랑에 울컥하거나 건강상의 이유로, 그리고 대부분은 빚에 쫓긴 도망이었다. 여기에 예술애호가인 그의 아버지 프랑수아 보들레르와 정숙하고 아름다웠던 어머니 카롤린 뒤파이(아버지 사망 후 자크 오픽과 재혼, 오픽 부인)의 더운 피에 댄디즘이 더해졌으므로 ‘파리의 우울’로 ‘악의 꽃’이 피어날 수밖에.


흔히 뱃사람들이 재미 삼아
거대한 바닷새 알바트로스를 잡는다.
이 한가한 항해의 길동무는
깊은 바다 위를 미끄러져 가는 배를 따라간다.


갑판 위에 일단 잡아놓기만 하면,
이 창공의 왕자도 서툴고 수줍어
가엾게도 그 크고 흰 날개를
노처럼 옆구리에 질질 끄는구나.


날개 달린 이 나그네, 얼마나 서툴고 기가 죽었는가!
좀 전만 해도 그렇게 멋있었던 것이, 어이 저리 우습고 흉한 꼴인가!
어떤 사람은 파이프로 부리를 건드려 약올리고,
어떤 사람은 절름절름 전에 하늘을 날던 병신을 흉내낸다!


「시인」도 구름의 왕자를 닮아,
폭풍 속을 넘나들고 사수를 비웃건만,
땅 위, 야유 속에 내몰리니,
그 거창한 날개도 걷는 데 방해가 될 뿐.12)


— 「알바트로스」 전문


알바트로스13)는 보들레르의 시적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번 날아오르면 가장 멀리, 가장 오래 날 수 있는 구름의 왕자(시인)가 무지한 뱃사람들(대중)에게 잡혀 조롱당한다. 몰이해를 넘어 우습고 흉한 꼴로 전락하고 보니 거창한 날개(재능)도 거추장스럽다. 흰 날개의 알바트로스가 시인의 순수성과 정신주의의 표상이라고 한다면 그는 이미 충분히 상처받았으므로 이 모욕의 시간이 어서 흘러가기를 바랐을 것이다.


어떤 친절한 악마에게 나는 감사를 해야 할까? 이처럼 신비와 정적, 평화, 향기에 둘러싸여 있게 된 것에 대해. 오, 지고의 쾌락이여! …… 이 최상의 삶을 나는 일 분 일 분마다, 일 초 일 초마다 음미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이제는 이미 분도 초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사라진 것이다. 이제 이곳을 지배하는 것은 영원, 쾌락의 영원이다! 그러나 둔탁한 어떤 무서운 소리가 문쪽에서 울렸다. …… 그리고는 한 유령이 나타났다. 그것은 법의 이름으로 나를 괴롭히러 온 집달리거나, 궁핍함을 호소하여 내 인생의 고통에 그녀 인생을 섞으러 온 더러운 창녀이거나 아니면 원고의 계속을 재촉하러 온 신문사 편집장의 심부름꾼이겠지. …… 이 모든 마술의 세계가 유령이 두드린 갑작스런 타격에 대번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 이 누옥! 이 영원한 권태의 거처가 바로 나의 거처였지. …… 시간이 다시 나타났다. 시간은 이제 폭군으로 등장했다. 이 무서운 늙은이, …… 초침소리가 이제 더욱 강하고 준엄하게 강조되어, 한 초 한 초가 시계추에서 솟아나면서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14)


산문시 「이중의 방」 일부이다. 옮긴 이 윤영애에 따르면, 인간의 숙명인 시간과 공간의 제한으로부터 벗어나 무한성과 영원성을 소유하고 싶은 욕구는 보들레르 작품세계를 지배하는 집념과도 같다. 세속의 시간의 유한성을 강조해주는 시계추의 진동 소리처럼 그에게 공포를 주는 것도 드물 것이다. 시간도, 분도, 초도 사라진 무한의 시간, 모든 시간 개념이 사라진 도취의 순간이 그가 영혼의 예술적 상태에서 경험한 예외적 행복의 순간이었다.
정신의학적으로 본질적인 우울증에 시달렸던 보들레르는 죽을 때까지 금치산자로 살았다. 법정 후견인으로부터 받는 몇 푼과 어쩌다 가끔 들어오는 원고료만으로는 댄디스트의 품위를 유지하기도 힘들었다. 빚에 쫓기는 생활이 거처와 사랑을 위협했다. 궁핍함을 호소하여 그의 인생의 고통에 자신의 인생을 섞으러 온 창녀 잔느 뒤발은 보들레르에게는 앞으로 껴안은 연인이었고 뒤에 짊어진 짐이었다.


오 목덜미까지 곱슬곱슬한 머리털!
오 곱슬한 머릿결! 오 게으름 가득한 향내여!
황홀함이여! 오늘 밤 이 어두운 규방을
그대 머리 속에 잠자는 추억으로 채우기 위해
손수건처럼 공중에 그대 머리칼을 흔들고 싶어라!


나른한 아시아, 타오르는 아프리카,
거의 사라져버린 이곳에 없는 아득한 전 세계가 고스란히
그대 깊은 곳에 살아 있구나, 향기로운 숲이여!
다른 사람들이 음악에 따라 노를 젓듯,
내 마음은, 오 사랑하는 님이여! 그대 내음 따라 헤엄친다.


— 「머리타래」 중 1, 2연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아우르는 풍부한 색채, 규방을 가득 채우는 향내, 노를 젓듯 물결치는 음악성. 시인의 몽상 속에서 그녀의 머리타래 냄새는 그를 데려가는 ‘공중에 흔드는 손수건’이 되고, 그녀는 소멸해버린 아득한 전(前) 세계가 그곳에 살아 있는 심원이 된다. 후각에 의한 강력한 도취와 이 감각이 유도하는 정신적인 움직임은 이곳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15) 이처럼 검은 비너스라고 불렸던 잔느에게서 받은 시적 영감은 미술비평과 음악비평(음악에 관한 유일한 비평으로 <리하르트 바그너와 파리에 온 「탄호이저」>가 있다.) 으로 이어진다.
많은 사람들에게 시인으로 더 잘 알려진 보들레르는 「1845년 미술전」으로 등단했다. 그는 최초로 색조에는 음악적 표현과 유사한 언어가 있으며, 음악에서의 청각의 역할처럼 미술에서는 시각이 우리 영혼의 깊은 곳에 감동적이며 정신적인 신비스런 동요를 유발한다고 생각했고, 화가 들라크루아의 색채가 잔인할 만큼의 독특함을 가지고 있으며, 언제나 피비린내 나며 끔찍하다고 보았다.16)
보들레르가 1860년에 발표한 「현대생활의 화가」는 삽화가 콩스탕탱 기에게 바치는 헌사이다. 그의 “대단한 독창성”을 칭찬하였고 자신이 쓴 인상적인 구절 “현대의 영웅성”에 대해 설명했다. 보들레르가 옹호했던 아름다움은 화려한 정치와 전쟁에서가 아니라 “사교계 생활의 볼거리”, 고상한 마차, 말쑥한 피부, 민첩한 하인, 사랑스러운 여인, 잘 차려입은 예쁜 아이들에게서 발견되는 것이었다.17) 전쟁터에서 신문사로 크로키를 보낸 최초의 파견 화가 콩스탕탱 기는, 빠른 상황 포착 능력으로 거리의 광경으로부터 이미지를 기록하여 정수를 뽑아내는 현대예술가였다.
삶이 견디는 것이라면 견딤의 숭고미는 시가 아니겠는가. 야유 속에 내몰려 살다간 알바트로스, 샤를 보들레르. 스스로 견디기 힘든 요지부동의 삶이라던 시간, 알바트로스가 지상에 내려와 권태와 우울의 양 날개 사이에 품은 402,960시간은 그의 거대한 정신을 키우고 살찌워 모더니즘의 꽃잎을 열었다. 그리고 활짝 졌다가 마침내 영원히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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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62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198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원」이 당선되었고, 1990년 <문학사상>에서 「어머니의 숲」으로 신인상을 받아 등단, 1994년 『은어낚시통신』을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작품으로 『남쪽 계단을 보라』 『많은 별들이 한 곳으로 흘러갔다』 『대설주의보』를 비롯해 장편소설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 『추억의 아주 먼 곳』 『달의 지평선』 『코카콜라 애인』 『사슴벌레 여자』, 『미란』 등이 있다. 산문집 『그녀에게 얘기해 주고 싶은 것들』 『누가 걸어간다』 『어머니의 수저』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 『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을 펴냈다.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1994), 이상문학상(1996), 현대문학상(1998), 이효석문학상(2003)을 수상했다.

2) 『바람의 사생활』, 이병률, 창비, 2006, <거인 고래> 부분.

3) 유럽에서는 지혜와 행운과 부를 상징하며, 일본에서는 부와 복, 고생하지 말고 잘 살라는 의미로 알려져 있다.

4) 미국의 시인이자 단편소설작가 실비아 플라스의 시 <Daddy> 중 1연

5) 1971년 광주 출생. 1993년 『작가세계』에 중편소설 「아웃사이더」로 등단. 1993년 『작가세계』 신인상-「아웃사이더」, 2004년 한국일보문학상-「장국영이 죽었다고?」, 2008년 현대문학상-「99%」, 2009년 동인문학상-「위험한 독서」, 2016년 이상문학상-「천국의 문」 수상. 소설집으로 『바그다드 카페에는 커피가 없다』(1996), 『베티를 만나러 가다』(1999),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2003), 『장국영이 죽었다고?』(2005), 『위험한 독서』(2008),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2011), 『소년은 늙지 않는다』(2014)가 있다. 장편 소설 『아크로폴리스』(1995), 『모리슨 호텔』(1997), 『황금 사과』(2002), 『천년의 왕국』(2007), 『동화처럼』(2010), 『야구란 무엇인가』(2013)를 출간했다.
6) 이 글은 여성주의 비평 관점으로 작성한 것이다. 「천국의 문」은 대개의 좋은 작품이 그러하듯 풍부한 층위가 존재함을 밝혀둔다.

7) 실비아 플라스, 앞의 시, 6연.
8) 『비평이론의 모든 것』, 로이스 타이슨, 앨피, 2012.

9) 보부아르는 여성들에게는 자신들을 하나의 단위로 조직할 수 있는 구체적인 수단이 부족하며, 집단적 차원에서 기록한 자신들만의 고유한 과거도, 종교도 없다고 말한다. 여성들은 아버지나 남편과 같은 특정한 남성에게 주거, 가사, 경제적 조건, 사회적 신분 등이 얽매인 채로 남성들 사이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그러한 얽매임은 다른 여성들과의 관계보다 공고하다. 로이스 타이슨, 앞의 책, 재인용.

10) 앞의 시 「Daddy」 중 14연.

11) 『젠더 감정 정치』, 임옥희, 여이연, 2016.

12) 샤를 보들레르, 윤영애 옮김, 『악의 꽃』, 문학과지성사, 2003
13) 모든 조류 중 가장 활공을 잘하는 조류로 바람 부는 날에는 매우 길고 좁은 날개로 날갯짓을 않고도 수 시간 동안 떠 있을 수 있다. 알바트로스는 날개 길이가 3m에 이르며 5,000km까지 비행이 가능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14) 샤를 보들레르, 윤영애 옮김, 『파리의 우울』, 민음사, 1995.

15) 윤영애, 『지상의 낯선 자 보들레르』, 민음사, 2001.
16) 윤영애, 앞의 책.
17) 피터 게이, 정주연 옮김, 『모더니즘』, 민음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