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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2017년 [동화] 하늘을 타고 올라가는 꽃 / 이희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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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963회 작성일 17-12-12 11:57

본문

아름다운 세상

멋있는 세상도

모두 맘속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 어린이들이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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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타고 올라가는 꽃



하늘이 개었다.
먹구름 속에 오래 가려진 하늘이라 더욱 파랗게 보였다. 햇볕이 뜨거워졌다.
골목길에는 매미가 요란하게 울었다. 오랜만에 보는 맑은 하늘이라 너무 좋아 맘껏 노래하고 싶은 가 보다.
마을에서 제일 높은 곳을 향해 꼬불꼬불 올라가던 골목길이 멈추는 곳에 큼직한 담장이 있다. 담장 너머는 산으로 이어졌다. 막다른 골목을 만든 담장이다. 담장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만 매미들에겐 노래 부르기에 여간 좋은 곳이 아니다. 담장에는 초록 덩굴이 거미줄처럼 기어오르고 있었다.
담장 앞에 집 세 채가 있다. 집 한 채는 골목 아래를 향해 비스듬히 서 있고, 조금 위편으로 두 집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한 낮이 조금 지나 대문 있는 집에서 소녀 하나가 나왔다. 소녀는 햇빛이 눈부신 골목길 담장 아래로 조르르 달려가 앉는다. 그러자 금방 마주 보던 방문이 열렸다. 또 다른 소녀 하나가 달려 나왔다. 그리고는 먼저 온 소녀 앞에 쪼그리고 앉는다. 매미 소리가 한층 더 요란해졌다. 매미들 소리만 빼면 골목길은 한적하기만 하다. 매미들의 합창이 약간 누그러질 때 골목길을 향해 비스듬히 서 있던 집 문이 열리고 소년 하나가 달려 나왔다.
“정수야.”

두 소녀 중 먼저 온 소녀가 이름을 불렀다.
“응, 미라야. 향이도. 안녕”
정수는 미라에게 대답하면서 눈은 향이를 향했다.
“미라야. 할머니한테 물어봤어?”
정수가 앞에 앉으면서 말했다.
“뭘?”
미라는 두 눈을 깜박거리더니
“아, 깜빡했네.”
하고 자기 머리를 살짝 쳤다. 하지만 속으로는 할머니가 아파서 못 물어봤어 하고 말하고 싶었다. 정수는 향이에게 얼굴을 돌렸다.
“향이, 넌?”
“아니.”
향이 목소리는 기어들어 갔다. 정수가 코를 실룩거리며 바라봤다. 향이는 잠깐 숨을 고르더니 미라를 향해 눈을 돌렸다.
“엄마가 늦게 왔단 말이야. 엄마 못 보고 잤어.”
향이는 오늘도 풀이 죽어 있었다.
“향이한테 그지 마. 내가 할머니한테 물어봐야 하는데…”
미라는 향이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하긴, 향이 엄마도 밤늦게 들어오시니까.”
정수가 힘 빠진 소리를 했다. 정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엉덩이에 하얗게 묻은 먼지를 툭툭 털었다. 미라와 향이도 일어나 치마를 툭툭 털었다. 안개같이 엷은 먼지가 솔솔 피어올랐다.
미라와 향이와 정수는 담장을 쳐다보았다. 덩굴이 하얀 담장 벽을 거미줄처럼 퍼지며 초록으로 가리고 있었다. 덩굴에는 꽃 두 송이가 피어 있었다. 어제는 한 송이. 오늘은 두 송이. 꽃이 환하고 예뻐, 담장 벽에 꽃 전등불을 단 것 같았다.

사실 어제 처음 꽃을 봤을 때 아이들은 무척 놀랬다. 딱 한 송이였지만 진한 초록 바탕에 불꽃같은 꽃은 정말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어디서 저런 꽃 한 송이가 나타났을까. 밤에 별님이 와서 켜 놓고 간 전등불일까. 아니면 누가 담장에 예쁜 점 하나 찍고 싶었을까. 아이들은 담장 앞에서 턱을 들어올렸다. 꽃은 아이들 키 두 배 만큼 위에 피어 있었다.
“꽃이 넘 예뻐.”
“이 꽃 이름 알아?”
“몰라.”
아이들의 놀란 입에서 종알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미라야. 너네 할머니한테 꼭 물어봐. 무슨 꽃인지.”
미라는 알았다는 듯이 정수를 바라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모르시는 게 없다. 특히 꽃이나 채소에는 박사다.
“향이야. 혹시 너네 엄마도 아실까?”
정수는 향이에게도 말했다.
“글쎄.”
향이는 간단하게 대답을 했지만 자신 없는 목소리다. 아이들은 꽃 모양을 좀 더 자세히 살폈다. 나팔처럼 생겼다. 그러나 나팔꽃은 아니다. 색깔도 전혀 다르다.
“생긴 게 나팔처럼 생겼으면 다 나팔꽃 아냐?”
정수가 뚱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미라와 향이는 못 들은 척했다. 아이들은 한참을 그렇게 쳐다보다 목이 아파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오늘 만났다. 그런데 정수는 좀 기분이 언짢았다. 정수는 북한에서 왔다. 그래서 전부터 살던 미라와 향이가 꽃 이름을 알아올 줄 알았는데 실망했다. 하지만 정수도 미라와 향이의 형편을 안다. 미라 엄마는 서울에 가 있고, 할머니는 아프다. 향이 엄마는 베트남에서 시집와 한국말 배우러 다니고 또 늦도록 시장에서 일한다. 정수는 언짢은 기분을 침한번 꿀꺽 삼키며 넘겨 버렸다.
미라와 향이는 꽃 이야기 대신 어제 만들던 종이학을 더 만들었다. 정수 생일 때 줄 선물이다. 우리나라에 온 지 얼마 안 된 정수의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종이학 백 개를 만들기로 했다. 정수의 간절한 소원은 아빠를 다시 만나는 일이다. 탈북할 때 정수는 아빠와 헤어졌다. 정수 엄마는 아빠의 생사를 알기 위해 매일 정신 나간 사람처럼 헤매고 다닌다.
매미 소리가 그치고 골목길로 뜨거운 바람이 들어왔다. 아이들이 일어났다.
“그럼, 낼은 꼭 꽃 이름 알아 오는 거야.”
정수가 먼저 말하며 집으로 달려갔다. 미라와 향이는 손가락을 짝 펴고 흔들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에는 담장에 꽃 네 송이가 피었다.
“우와”
정수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향이가 정수의 다음 말을 이어주었다.
“이상한 꽃이야, 매일 배로 늘어나고 있어.”
“그러게. 하나, 둘, 넷.”
미라가 웃으며 말했다. 아이들은 잠시 꽃만 쳐다보았다. 그때 미라가 불쑥 말했다.
“꽃 이름 알았어.”
“진짜?”
“뭐야, 장난쳐?”
향이와 정수가 처음부터 말 안 하고 시치미를 뗀 미라에게 눈을 흘겼다.
“그래, 정말이야. 어제저녁 할머니랑 같이 와 봤거든.”
“할머니 괜찮아?”
향이가 웃음을 거두며 말했다.

“조금 괜찮아지셨어. 그래서 저녁 무렵 잠깐 나와 보셨어.”
“할머니가 금방 알아보셔?”
“그럼, 우리 할머니가 누군데. 이 꽃 보자마자 ‘하늘을 타고 올라가는 꽃이 피었구나.’ 하셨어.”
“하늘을 타고 올라가는 꽃?”
“응, 하늘을 타고…”
“무슨 이름이 이야기 같애..”
“그러니까 못 외우겠다.”
향이와 정수는 야단이나 난 것처럼 소란을 떨었다.
“꽃에 날개라도 있는 거야?”
“그럼 하늘 아무 데나 막 갈 수 있는 거야?”
향이와 정수는 궁금해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이다. 아이들은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을 다 했다. 하늘로 훨훨 올라간다. 구름도 타고 갈 거야. 푸른 하늘 끝까지 가겠지. 그곳에 무엇이 있을까. 누구를 만날까?
“잠깐!”
아이들의 상상이 더 높은 하늘로 올라가려고 할 때 미라가 분위기를 깼다. 미라는 왼손에 감춘 종이를 살짝 앞으로 내놓았다. 성미 급한 정수가 미라의 손에서 종이를 빼앗아 얼굴 앞에 댔다.
“뭐야?”
미라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어느새 향이와 정수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종이에 쓴 글을 읽느라 정신이 없었다.
미라 할머니가 쓴 글씨다. 미라 할머니가 이렇게 글씨를 잘 쓰는지 몰랐다.


능소화,
하늘을 타고 오르는 꽃. 땅 위 뿌리로 아무 데나 붙어 자라는 덩굴 식물..

여름에 피고 초가을에 지는 꽃.
노란색에 빨간 물감을 덧칠한 붉은 꽃.
한 번 피기 시작하면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피는 꽃.
슬픈 전설이 있는 꽃.


미라 할머니가 아픈지는 석 달 전부터다. 차가운 봄바람에 들린 감기인줄 알았는데 더워지는 여름이 오면서 더욱 기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한 달 전부터는 집 밖으로 잘 나오지도 못한다. 아픈 할머니지만 진작 담장으로 모시고 나왔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미라는 생각하며 할머니에게 꽃 이야기를 꺼냈다. 할머니는 미라가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 이제 꽃이 피려는 구나.”
“할머니. 묻기도 전에 어떻게 알아요?”
미라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핏기없는 할머니 얼굴에 발그레한 색이 돌았다.
“기다렸지. 기다렸어. 그리고 올해는 분명히 꽃이 필 거라고 생각했지.”
할머니는 미라가 묻는 말을 글씨로 다 대답을 해 주었다. 종이에 쓰는 할머니의 손이 파르르 떨렸지만 글씨는 또박또박 종이 위로 내려앉았다.
“할머니, 뭘 기다려요?”
“뭘 기다리긴, 꽃피는 걸 기다렸지.”
할머니는 몇 해 전 담장 밑에 능소화를 심은 이야기를 했다.
“니 엄마가 집 떠날 때 같이 심은 거란다.”
미라는 안다. 할머니는 능소화 꽃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엄마, 나 다시 시작할 거야. 이 꽃 네 번만 피라고 해. 그때 미라 데리러 올 게.”

미라 엄마는 서울로 떠났다.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겠다고 집을 나섰다. 엄마 신발을 쥐고 안 내놓던 미라를 할머니에게 맡겼다. 엄마는 대학교도 가기 전에 미라를 낳았다. 아버지가 누구라고 말할 수도 없는 미혼모가 되었다. 몇 날 며칠을 할머니와 함께 눈물을 닦아내던 엄마는, 할머니가 구해 온 능소화 묘목을 담장 아래 심고 지주를 단단히 세웠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자기의 결심을 말했다.
“엄마, 미안해. 하지만 걱정 마. 난 다시 일어날 거야. 그래서 능소화가 가득 핀 이 집에서 미라랑 다시 살 거야. 행복하게.”
절망을 딛고 스스로 자신을 일깨우며 일어서는 미라 엄마를 할머니는 그저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줄 뿐이었다.
능소화는 겨울에 관리가 잘못되어 꽃이 피어야 할 시기를 두 해나 넘겼다. 아직 한 번도 능소화가 핀 적이 없다. 엄마가 네 번 피면 온다고 했는데 아직 한 번도 피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 할머니는 정성을 다 해 능소화 덩굴나무를 키웠다. 덧 자라는 가지도 잘라주고. 담장에 땅 위 뿌리가 잘 붙나 살펴보기도 하고 특히 겨울에 덩굴이 얼어 죽지 않도록 담장에 헌 이불도 덮어주곤 했다.
“미라야. 미라야.”
아직 한낮이 되지도 않았는데 밖에서 정수 목소리가 들렸다.
“나와 봐. 엄청나.”
미라는 정수와 담장으로 달려갔다. 향이가 벌써 와 있었다. 미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담장엔 마치 축제의 꽃 전등불이 수없이 달려 있는 것 같았다.
“무지 많이 폈어. 이십 개도 넘어.”
향기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미라는 신이 나서 제자리에서 팔짝팔짝 뛰었다. ‘그래 이제 능소화가 세 번만 더 피면 엄마랑 같이 살 수 있어.’ 미라는 그 생각이 멈출 때까지 쉬지 않고 팔짝팔짝 뛰었다.

“미라야. 하늘을 올라가는 꽃에 슬픈 전설이 있다는 거 얘기해줘.”
향이가 아직도 팔짝 뛰는 미라를 불러 세웠다.
“아, 그래. 해줄게.”
미라는 할머니가 들려준 전설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다시 정리하느라 한참 눈알을 뱅글뱅글 돌렸다.
“옛날에 아주 예쁜 소녀가 살았대. 근데 어느 날 임금님이 그 소녀를 봤대. 임금님은 한눈에 반했대. 임금님과 소녀는 서로 사랑을 했대.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임금님이 오지 않았대. 소녀는 매일 매일 임금님을 기다렸대. 하지만 임금님은 영영 오지 않았대. 소녀는 임금님을 무척 그리워했대. 너무나도 기다렸지만 임금님은 끝내 오지 않았대. 소녀는 기다리느라 몸도 약해지고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대. 소녀가 숨진 곳에서 꽃나무 하나가 나기 시작했대. 그게 바로 능소화래. 하늘을 타고 올라가는 꽃. 짜잔. 됐지?”
“슬퍼. 우리 엄마처럼.”
향이가 약간 울먹이며 말했다. 향이 엄마는 베트남에서 시집온 뒤 홀로 남은 친정엄마를 그리워 우는 날이 많았다.
“우리 엄마랑 비슷해.”
이번에는 정수가 말했다. 정수 목소리가 흔들렸다. 정수네 가족은 북한에서 나올 때 두만강 건넜다. 탈출하는 과정에서 북한경비대에 발각되었다. 정수 아빠는 가족을 살리기 위해 건너던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북한경비대가 아빠를 쫓는 사이 정수 엄마는 정수를 데리고 무사히 강을 건넜다.
“그래 향이야. 니네 엄마는 고향 엄마를 그리워하지.”
향이는 미라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눈에 눈물이 일렁거렸다.
“정수야, 너네 엄마도 너도 아빠 기다리고 있지.”
정수도 미라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수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져 갔다.
“난 우리 엄마가 이 꽃이 네 번 피면 온다고 하니까 울지 않고 기다릴 거야.”
그러는 미라도 어느새 눈물을 찔끔 짰다.
“난, 외할머니가 우리 엄마랑 만날 날을 기다릴 거야. 나도 안 울 거야.”
향이도 눈물방울을 똑똑 떨어뜨렸다.
“난 우리 아빠를 찾았다는 소식을 기다릴 거야.”
정수는 헤어진 아빠의 소식을 알려고 낮과 밤을 헤매는 엄마를 생각했다. 목이 콱 막혀 왔다. 목에서 크크 소리가 나더니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
다음 날 담장에는 어제보다 더 많은 능소화가 피었다. 담장이 온통 꽃으로 뒤덮인 것 같았다. 셀 수가 없을 만큼 많이 피었다.
“우리 할머니가 말하는데 기다리는 건 힘든 일이래.”
그때 미라는 할머니가 한 말이 생각나 아이들에게 말했다. 기다리는 것은 힘들지만 그런 기다림까지 없다면 어떻게 살겠느냐고. 그래서 기다림은 희망이 될 수 있다고.
무더운 여름은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담장의 능소화가 하나둘씩 떨어졌다. 하지만 아직 담장에는 꽃이 가득했다. 꽃이 떨어지는 것만큼 더 많은 꽃들이 앞다투어 피어났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매일 담장 아래에 모였다.
아이들은 하늘을 타고 올라가는 꽃을 보며 매일 상상의 날개를 탔다. 꽃 한 송이 한 송이가 모두 상상의 날개다. 하늘을 타고 올라가는 꽃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면 서울에서 열심히 일하는 엄마한테 갈 수 있을 거야. 하늘을 타고 올라가는 꽃을 타면 비행기보다 더 높이 올라 베트남 하롱베이 바닷섬에서 물고기 말리시는 외할머니를 만날 수 있을 거야. 하늘을 타고 올라가는 꽃과 함께라면 북한 어느 곳이라도 아빠가 계신 곳을 알아낼 수 있을 거야.

서늘한 바람이 골목길을 한 바퀴 휭 돌았다. 능소화가 수북이 떨어졌다. 그러나 꽃은 떨어져도 꽃 모양은 그대로 나팔 모양이다. 아이들의 상상의 꽃은 아직 지지 않았다고 하늘을 타고 올라가는 꽃이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팔 모양 속에서는 아직도 미라 할머니의 목소리가 울림으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꽃이 많이 떨어져야 내년에 더 많은 꽃이 달리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