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뫼 호수별 보기

47호2017년 [소설] 진짜 사나이 / 이은자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119회 작성일 17-12-12 17:40

본문

참 많은 세월 살아냈다.

이제는 말해도 되는 시점에 왔다.

내가 나를 위로해도 될까?

고백록을 주님 발밑에 엎드려 바친다.

----------------------------------------------------------


진짜 사나이



마당 가득 아이들이 재잘대던 소리가 잠잠하다.
한 지붕 밑에 세 가구가 살다 보니 내 집 아이 하나 주인집 막내아들 하나 합쳐 모두 여덟 명이나 된다.
어느새 모두 우르르 예배당에 간 것이다.
X-MAS가 사흘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이맘때면 교회 유년주일학교에선 성탄 축하 공연을 위해 밤마다 아이들을 모아 합창, 무용, 동극을 연습시킨다. 내일 저녁엔 그것들을 순서지어 총연습 할 예정이다. 때문에 오늘은 여느 날보다 애들이 일찍 갔다. 으레 그러려니 했는데 내 아이(아들) 방에서 두런두런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다가가 귀 기울여 들으니 혼자서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 웬일인가? 아이 방문을 열고 보니 내 아들이 혼자 웅얼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빈아, 넌 왜 여태 안 가?”
“선생님이 난 오지 말래요.”
“그게 무슨 소리냐. 넌 한 달 동안 하루도 빼먹지 않고 연습하러 가지 않았냐, 그런데 선생님이 웬일로 널 오지 말라셔?”
“내가 하면 합창부 다른 애들이 틀린대요.”
아이는 남의 말 하듯 방바닥을 보며 말했다. 순간 내 짐작이 머리에 스쳤다. 빈이는 합창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방해가 되는 소리를 냈을 것이다. 흔히 말하는 음치이다. 거듭 연습하면 나아지려니 했는데 결국 탈락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건 너무한 것 같았다. 진즉에 합창부에서 다른 부로 옮겨 주었어야지, 3일 앞에 두고 자르다니? 가면극, 성극 같은 것 시키면 잘 해낼 수 있었을 것을. 내가 들어서서 참견했어야 옳았다. 사실 나는 엄마란 호칭이 버거웠기 때문에 나서지 못했다.
나는 지난 몇 개월 동안 이렇게 기죽어 있는 아이를 보지 못했다. 푹 숙인 아이의 머리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에 충격받았다. 어린것의 머리를 쳐들게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 아들은 내게로 온 지 이제 겨우 8개월이다. 가슴에 상처를 안고 왔을 것이고, 새엄마에게 아직은 어색하고 한쪽 가슴에 찬바람이 불고 있을 것이다. 6살, 학교 가는 나이도 되기 전에 버려짐과 거절당함까지….
어린것이 건너온 6년이란 세월이 어떠했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여느 아이들처럼 가족의 보호나 문화적 혜택은 전혀 없었던 것 같았다. 학교가 무엇인지 예배당은 또 어떤 곳인지 전혀 모르는 아이였다.
마당 안에는 언제나 많은 아이들이 있어서 잘 어울렸고 그늘진 모습이 없어 보였다.
나는 아이 방에 들어가 양반다리로 애 앞에 앉으며
“빈아 아까 네가 하던 그 찬송가 엄마 앞에서 다시 한번 해봐.”
아이는 주먹으로 눈가를 문지르더니 일어서서 그 찬송가를 불렀다. 본래 슬픈 찬송이 아닌데 내 앞에서 부르는 빈의 찬송가는 어찌나 애달프던지, 가슴속에서 오히려 화가 치밀어 올라왔다. 아직 아라비아 숫자는커녕, 국문자도 깨치지 못한 어린것이 어깨너머 귀동냥으로 듣고 익힌 노래를 천천히 불렀다.


① 동방박사 세 사람 귀한 예물 가지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② 베들레헴 임금께 나는 황금 드리네…
③ 거룩하신 구주께 나는 유향 드리네…

④ 주의 죽을 몸 위해 나는 몰약 드리네…
⑤ 다시 사신 구주님 왕의 왕이 되시네…


“ …… ”
나는 말을 잊고 아이를 바라보는데 아이는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어쩌면 그 곡 다섯 절을 순서도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부를 수 있었으며 각 절마다 그에 맞는 몸짓까지 정성스레 해내는 것이 아닌가. 나는 아이 마음 따라 속으로 울었다.
‘넌 장차 무엇이 되겠구나!’ 나는 속으로 확신했다.
“빈아 너 언제 이걸 다 왼 거니? 참 잘했어 아주 훌륭해. 너만큼 잘 외서 할 애가 몇이나 되겠냐, 기다려 봐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나는 아이를 쓰다듬고 칭찬해 주었지만, 아이가 선생님께 받은 거절감 만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내 아이를 탈락시킬 수밖에 없었던 음악 담당 선생님 심정도 어쩌랴 싶었다. 나는 잠깐의 노여움을, 그동안 참아낸 선생님을 생각해서 내려놓는 게 도리라 여겼다. 선생님을 노여워하기보다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할까 고민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었다. 분노는 만사를 그르치는 악이라고 ‘잠언서’에서 누누이 타이르고 있지 않은가?
음치도 유전인가?’
내 남편이 그렇다. 아무리 되풀이 바로잡아 주어도 다시 그 자리로 가곤 한다. 샵(#)과 프렛(b)이 아무 데서나 튀어나오는 애비를 닮은 것이니 어쩌랴.
그 날 늦은 밤까지 마당 안에 아이들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빈의 방엔 일찍 불이 꺼졌다. 아이가 세상 태어나 공동생활에서 처음 겪는 거절감일지 모르는데 어떻게 극복시킬 건가? 나는 하룻밤을 온통 그것을 생각했다.
그 새벽에 주께서 내게 한 가지 지혜를 주셨다. 다음 날 이른 저녁에 나는 예배당 합창 담당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평소에 나와 주고받던 것 같은 편한 기색이 없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당신을 찾아간 것을 짐작했음이다.
“김 선생, 우리 빈이 어떤 아이인지 선생님도 잘 아시잖아요? 그런 애를 외톨이로 돌려놓으면 어떻게 해요? 애의 기 살려 줄 뭐 딴 길은 없을까요?”
“저도 빈을 오지 말라 해 놓고 고민 중이었어요. 이 집사님 정말 미안해요. 아이 사정도 잘 알고요. 정직하고 쾌활하고 영특해요. 아이들 틈에서도 별로 주눅 들지 않고 잘 어울려요. 애가 별 내색은 안 하지만 새엄마와 산다는 것을 우리가 다른 애들보다 배려해야 할 대목인 줄도 알지만, 그래서 끝까지 기다렸으나 빈의 소리 때문에 다른 애들 소리가 흔들려 합창이 아주 불협화음이 된답니다. 아이들이 먼저 못하겠다며 보채니 어쩔 수 없이 이번만은 이해해 주세요.”
내 말이나 선생님 말이 서로가 충분히 이해되는 것이라서 둘 사이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 이 집사님 참, 한 가지 길은 있어요. 하지만 시일이 너무 촉박하군요.”
“그 방도가 뭔가요?”
“아직 인사 말씀(open speech)할 아이를 못 정했는데.”
“그래요? 김 선생님 그걸 제게 주세요. 빈은 글자를 모르지만 동방박사 다섯 절을 다 외우고 있는 애니까, 내가 원고를 만들어 빈을 가르쳐 놓을 테니 믿고 그걸 우리에게 주세요.”
“이 집사님에게 너무 무리한 일을 드리네요.”
“무리라니요. 정말 천행인걸요. 우리 모자가 잘 해 가지고 올게요.”


다음 날 밤, 애들이 예행연습 차 모두 예배당에 가고 마당은 또 고요했다. 방해꾼이 없어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짧게 원고를 만들어 또박또박 빈에게 따라 하게 했다. 아이가 원고를 다 왼다 싶어서, 그 말뜻을 설명하여 몸짓을 곁들였다. 총연습을 마치고 마당 안 아이들이 재잘재잘 돌아올 때까지 빈은 싫은 내색 않고 신명 나서 어미를 따라 외고 또 외웠다.
“오늘은 기쁜 성탄절입니다. 여러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됐다. 빈아! 아주 훌륭해. 동방박사보다 더 잘했어. 알았지? 떨지 말고? 엄마가 맨 앞에 앉아 도와줄게.”
그렇게 빈과 나, 우리 모자는 굳은 결의를 하고 예배당으로 힘차게 걸어갔다.


마침내 크리스마스 이브, 아이들의 재롱잔치 준비도 다 되었다. 이제 막 시작을 기다리고 있을 때, 내 아들 빈은 나비넥타이 차림을 하고 조명을 받으며 무대 중앙으로 아장아장 걸어 나갔다. 조명등 불빛은 셀로판지로 빨강, 노랑, 파랑으로 비추었다. 빈은 제법 의젓하게 걸어 나갔다. 박수가 터졌고 웅성거림도 뒤따랐다.
“잰 뉘 집 애야?”
“첨 보는 앤 걸.”
“새로 이사 온 집엔 저렇게 어린 애가 없던데….”
나는 무대 앞자리 중앙에 쪼그리고 앉았다. 혹여 아이가 긴장해서 대사나 몸동작을 이어내지 못할 때에 도와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빈은 생에 처음무대와 만장하신 어른들 앞에 섰다.
“여러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 오늘은 기쁜 성탄절입니다. 이제부터 저희들이 준비한 노래와 연극 그리고 율동을 즐겁게 보아주시기를….”
빈은 더듬거리지 않았다. 또렷이 몸짓을 하고 한 곳도 틀리지 않았다. 빈이 인사 말씀 마치고 깊이 인사하자 다시 한번 박수 소리가 교회당 한가득 차고 울렸다. 나는 빈의 성공에 감사와 가슴을 쓸어내렸다. 위기를 오히려 성공으로, 낙오자를 단번에 독무대의 스타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김 선생께도 진정 감사했다. 아이는 자라면서 그 선천적일지도 모를 불안정한 소리를 극복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3학년 교과목에 리코더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아이의 출생 비밀을 알아버린 신길동에서 아무도 모르는 서빙고동으로 이사했다.
빈이 고교 시절엔 리코더 연주 실력이 아주 훌륭했다. 신기하게도 리코더 연주는 아주 정확했다. 자연히 레퍼토리가 다양했다. 동요, 가곡, 찬송가에 이르기까지.


“빈이 어머니이…, 빈이 또 싸워요.”
우리 집 쪽대문을 박차고 한 무리 중학생, 빈의 마을 동무들이 들이닥쳤다. 영특해서 학업성적이 좋았고 내게 오던 절로 껌딱지처럼 나를 따르고 매사에 정직한 내 아들인데 동서빙고 동에 싸움 났다 하면 빈이었다.
“동빙고동 언덕배기에서요. 빈이가….”
“어떤 큰 형과 싸워요.”
또래들과 싸우는 일은 어미에게 보고되지 않고 넘어가는가 싶었다. 다만 그의 찢어진 옷소매 바짓가랑이, 콧잔등의 피딱지, 얼핏 비치는 멍 자국 등이 짐작케 할 따름이었다. 아이들이 내게 알리는 때는 저희들이 봐도 빈이 상대하기 버거운 상대라고 생각할 때다. 저희들이 들어서서 말릴 수 없고 빈이 맞아 죽을 것 같은 엄청난 덩치라 판단될 때다. 그럴 때 아이들은 내게 달려와 기별하는 것이다. 아무도 못 말리는 싸움이다. 죽어도 못 놓는다. 피를 흘리면서 엉기다가도 애들이
“야, 빈아 니네 엄마다아….” 내가 현장에서
“빈아 왜 또 이러냐? 제발 그만 해. 그만 하라구…….”

내 탄식을 들으면 그제서야 아이는 상대의 허리춤이거나 옷깃을 틀어쥐었던 손을 풀며 물러났다. 집으로 오는 내내 분해서 와앙와앙 울며 따라왔다.
아버지 퇴근해 오기 전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빈을 씻기고 옷 갈아입히고 분위기 따뜻하게 해 놓고, 나는 지갑을 챙겨 들고 한두 명 목격자 빈의 동무를 앞세우고 좀 전에 빈과 싸웠던 상대의 집으로 간다.
먼저 그 부모에게 사과 인사를 하고 약간의 치료비를 내민다. 그리고 정중하게 묻는다.
“보아하니 고등학생? 아니면 대학생인가요? 무엇 때문에 상대도 안 되는 어린애와 싸우나요?”
“걔가 알은 작아도 고등학생 뺨치는 깡다구라구요. 나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개네들이 나루터에서 위험하게 장난치길래 그러면 못쓴다고 소리 한번 크게 질렀거든요. 딴 애들은 그냥 물러나는데 이놈만 끝끝내 날 따라오며 욕을 퍼붓고 돌팔매질하는 거 있지요. 자길 무시했다나 업신여겼다나 하지 뭐요. 나 참 오늘 재수 없어서……”
빈의 싸움 마무리는 늘 그렇게 내가 정리하여 지났다. 겉으론 건강한 아이지만 속사람은 만신창인 것을 나는 아동 심리발달 과정, 상담심리 같은 텍스트를 통해 유추하며 엄마 수업 중이었다. 빈의 마음이 하나의 공이라 하자. 팽팽하게 공 속이 찼을 경우 그 공 표면에 빛을 쏘면 굴절되어 나오는 빛의 각도는 예측 가능하다. 만약 그 공 속 바람이 빠지면 찌그러지는 부분이 생길 것이다. 그 울퉁불퉁한 곳에 빛을 쏘았을 경우 굴절 각도는 아무도 예측 불가한 방향으로 반사될 것이다. 빈의 마음의 공도 제 어미에게서 버림받는 과정에서 찌그러졌을 게 분명하다. 내가 아무리 좋은 엄마 되려 노력한다고 한들 그 마음이 완전 치유되기까지는 좋은 관계를 만들기 쉽지 않다는 사실에 나는 자주 탄식했다. 빈의 이지러져 움푹 패인 마음이 치유되는 때가 오기나 할는지. 아이가 사랑을 참으로 사랑인줄로 받을 줄 알아서 제 상처 난 마음을 치유받기까지 나는 기다리는 길밖에 없었다. 그 성숙은 긴 세월이 걸릴 것이다. 어쩜 내 품을 떠나는 시기까지도 못 이를지 모른다. 다만 나는 신앙의 양심을 걸고 최선을 다해야 할 뿐이다.
빈이 나를 허망하게 할 적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주술처럼 되뇌는 말에 의지한다. 빈의 존재를 알고 ‘그를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며 목사님 앞에 상담하던 밤에 목사님은 단호히 말씀하셨다.
“그 아이가 박 선생 아이란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이 집사님의 선택은 하나뿐입니다. 박 선생과의 결혼생활을 접고 돌아서면, 그 아이에 대해서 아무 상관이 없소. 하지만 박 선생 아내로 살 것이면 그 아이 받아 안아야 합니다. 지금 이 집사님은 생가슴이니 정서적으로 다른 여자 소생을 안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란 사실 누구나 이해합니다. 그러나 우리 한번 크고 넓게 세상을 둘러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생명은 인간이 어찌어찌할 부분이 아닙니다. 당장 우리 주변에서 그 예를 볼 수 있어요. 저 심 장로님 댁을 보세요. 고대광실 좋은 집에 세단차를 굴려요. 빵 공장, 슬레이트 공장, 밀가루 공장 얼마나 부잡니까? 한데 자손이 없어 늘 쓸쓸해하지 않나요. 반대로 송 성도님 가정을 보세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며 며칠씩 쭈욱 날 궂으면 굶는다지요. 그런 집에 아들 4형제를 줄줄이 주셨어요. 그 아이들 보세요. 교회 마당에 디글디글 구르며 자라도 병 한 번 안 나요. 무얼 말하나요?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 사람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이 집사님에게 하늘이 그 생명을 맡기는 겁니다. 좋은 재목으로 잘 키우십시오. 많은 노고가 요하겠지만 보람은 있을 겁니다.”


<사람의 성품은 6세까지에서 거의 결정된다>란 이론으로 해서 나는 절반의 낭패를 인정하며 앞그림을 그리게 됐다. 내 양육방법에 한계를 느끼는 때가 참 많았다. 빈의 중학 생활 3년 간은 온통 혼란의 연속이었지 싶다. 옛말에 <사나운 개 콧등 아물 날 없다>처럼 빈의 중학시절은 사뭇 거칠었다.


“경래야, 우리 엄마 녹두 부침개 지진다. 얼른 와 알지!”
또 어떤 날엔
“희백아, 우리 집에 와. 우리 엄마 지금 팥죽 쒀. 올 거지? 그럼 오는 길에 영주도 데려와. ”
우리가 아무리 지지고 볶아도 하나님의 시계는 여일하게 흐른다. 빈이 드디어 고등학생이 되었다. 학군을 벗어나 중앙학군 고교에 합격했다. ‘혜화동’에 있는 명문 고교에 미션스쿨이라서 나는 참으로 기뻤다. 남들이 앞다투어 하는 과외를 우리는 못 보냈다. 그 부분이 남들의 말거리가 되기도 했다.
<제가 난 새끼가 아니라서……>
누가 뭐라든 나는 하나님께 정직하면 된다는 소신이 있었다. 어미 말 잘 따르는 아이라서 집에서 어미가 과외선생이 될 수 있었다. 싸움쟁이 내 아들이 남이 못 가는 우수고교에 붙었으니 작은 마을에 소문이 자자했다. 그 일로 빈은 내게 최초의 보람을 안겼다. 빈이 자존감을 얻는 두 번째 계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서빙고동에서 남영동까지, 거기서 종로5가까지, 또다시 돈암동행 버스로 혜화동 로터리까지. 매일 등하교 자체가 극기훈련이었다.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이 끝나며 빈의 싸움판도 슬그머니 사라졌다.
교회 학생부에서 뜻 맞는 벗 세 명을 만난 것이다. 동무가 아니라 친구가 되는 만남이었다. 세 집 모두 한 교회의 교우 가정이고 경제 사정이나 고향은 다르지만, 나름 가정교육 잘 받고 자라는 아이들이라서 나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세 녀석 모두 내 아들이면 좋을 것 같은 청소년이었다.

특별히 이름 붙은 날도 아닌데 제 어미가 녹두 부침이를 왜 하는지, 팥죽을 왜 쑤는지 알 턱 없는 내 아들이 친한 벗에게 빨리 오라고, 같이 나누자고 하는데 내가 무어라 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 집엔 오가는 식객이 다른 집에 비해 많았다. 빠듯한 월급쟁이 집 쌀독이 단 사나흘 분이 딸리는 일이 종종 생겼다. 지갑도 비고. 우리 교회 성도 중에 쌀 가겟집이 두 집이나 된다. 한 말 정도 외상 달래면 누가 거절하랴마는 부끄러워 못했다. 봉지쌀은 자존심 상해서 그도 못 샀다. 아침밥만은 천하 없어도 지어야 한다. 도시락을 꾸려야 하기 때문이다. 하여 저녁밥은 곳간을 뒤져 나오는 대로 녹두, 팥, 밀가루로 메웠다. 아이들은 그런 어미 사정을 모른다. 녹두전, 팥죽, 수제비 모두가 별식일 따름이다.
내핍은 가르치지만 궁핍은 숨겼다. 빈이 5천 원 달라면 1만 원을 주곤 했다. 어미에게 돈 타내야 할 적마다 얼마나 망설이며 말했으랴 싶어서다.


빈에게도 사춘기가 왔다. 그새 밑으로 동생 둘이 태어났다. 빈은 제법 의젓한 형아고 오빠야였다.
하루는 이발 기계를 사 오더니 뒷뜰 한쪽에 간이 이발소를 차렸다. 우리 교회에서만 봐도 머리 깎을 시일이 한참이나 지나 있는 중학교 남자애들이 많이 보였다. 월요일마다 학교에선 용의 검사를 하는 것이 상례다. 그런 애들은 분명 학칙에 어긋난 학생으로 걸릴 것이다. 학생과에 불려가서 얼차려를 맞거나 변소 청소 따위 벌을 받을 것이다. 그 사실을 엄마들이 다 안다. 몇 푼이 없어서 손 놓고 내버려 두는 것이다. 빈은 그런 후배들이 안쓰러웠다. 한 번도 이발 기계 작동을 배운 적 없는 빈이 어쩌자고 기계부터 사왔단 말인가. 엄마의 낡은 나이롱 치마를 케이프 삼고 제 책상 의자를 끌어내서 걸상을 삼고 이발을 시도했다. 처음엔 아이 몇이 아프다고 찡그리고 비명을 질렀다. 서너 명이 견습 대상으로 곤혹을 치른 뒤부터 기계는 거침없이 곧은길로 내리달렸다. 주말이면 우리 집 뒷마당엔 동네 중학생 사내아이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가난한 동네, 수해 난민의 집단 이주 지역이라 단돈 백 원이 그립던 부모들이 대다수였다. 우리 빈의 이발소는 강변 마을에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대견했다.
뒷마당이 왁자하여 나가 보고 나도 어쩔 수 없이 웃고야 말았다.
아이들이 오는 족족 머리통에 한 줄만 기계 자국을 밀어놓고는 또 다음, 다음……
아이들 머리통에 제 각각 신작로 하나씩 나 있었다. 이마에서 정수리까지. 다른 애는 정수리에서 시작하여 뒷목까지, 오른쪽 귀밑에서 왼쪽 귀밑까지, 또는 적십자 마크가 얹혀 있었다. 아이들이 서로서로 동무의 미완성 머리통을 보고 배꼽 빠져라 웃어댔다.
“빈아 너 무슨 짓 하는 거야?”
“엄니, 일단 금 그은 애들은 내가 다 책임지고 오늘 안으로 깨끗이 이발해 주겠다는 인증 도장 찍은 거예요. 히히… .”
빈이 맞았다. 서툰 이발사로서 기다리다 해 넘어가면 자기 차례가 안 될까 조마조마해 하는 아이들에게 약조로 금을 긋는 것이라 했다. 모두가 지루하지 않게 웃어가며 작업을 한다는 것이리라.
더구나 빈의 그런 유머러스움이 반가웠다. 빈이 가정에서나, 일상에서 긴장을 풀고 살아가는 징표로 보였기 때문이다.


빈이 사춘기를 겪는가 보다. 말수가 줄었다. 혼자 있기를 좋아했다.
제 방에서 혹은 뒤뜰 나무 그늘에서 리코더를 불 때면, 나는 그에게 일일이 묻거나 낯빛을 주시하지 않고서도, 어떤 노래를 또 어떤 가락으로 부는지에 따라 그의 기분 상태를 가늠할 수 있었다.

‘저놈이 지금 슬프구나, 아니면 많이 속상하구나, 오늘은 기분 아주 좋구나…. ’
그 실력 때문에 교회에서 연말마다 열리는 가족 합창 대회에서 우리 가족은 우수상을 받곤 했다. 아빠는 립싱크 빈은 리코더로 두 사람이 음치를 감추면 전 가족이 모두 참가하는 가산점 때문에 일등상을 받는 것이다. 빈과 인격적인 대화가 통하는 시절이 온 것이다. 엄마에 대한 신뢰 또한 완벽한 것 같았다.
따스한 햇볕 내리쬐는 어느 가을날, 나는 고구마를 삶았다. 빈 아래로 다섯 살 어린 동생 오뉘가 뒤뜰 산목련 그늘에 자리를 깔고, 바둑이를 가운데 앉히고 오빠 한 입, 바둑이 한 입, 누이동생 한 입, 바둑이 한 입 나눠 먹고 있었다. 빈이 밖에서 들어와 리코더를 챙겨 뒤뜰로 갔다.
“형, 어디 갔댔어?”
“오빠야 우리 고구마 먹었어. 근데 오빠가 없었어 어떡하지?”
빈은 대뜸 대꾸하기를
“걱정 마. 내 거 엄마가 어따 감춰 뒀을 테니까.”
부엌에서 빈의 그 확신에 찬 응수를 듣는 순간 나는 가슴이 짜릿하도록 고마웠다. ‘빈이 진정 엄마를 신뢰하고 있구나.’
“빈아, 다 다음 주부터 우리 교회 부흥사경회인 거 너도 알지? 강사 목사님을 이번에도 우리 집에 모셔야 될 것 같구나. 너 고등학생인데 공부에 지장 줘서 어떻게 하지?”
“엄마두 늘 하던 대로 하면 되지 뭔 걱정이래요?”
“그러게나 말이다. 네 방은 언제나 강사 목사님 방이었지. 고맙다. 우리 잘 하자. 응?”
“알았어요. 주일 날 짐 옮길게요. 걱정 마세요.”
그랬다. 교회와 담 하나 두고 있는 우리 집에 강사 목사님 모시는 일은 연중행사나 다름 없었다. 빈은 제 짐을 꾸려서 교회 종탑 위에 자리 하고 사경회 기간 내내 종탑 위 골방에서 지낸다. <노틀담의 곱추…?> 밥 때만 집에 들렀다. 그 기간 내내 빈의 등교 전략은 더욱 치열했을 것이다.


“빈은 한사코 육사에 지원하겠다 하는데요?”
빈의 담임 선생님과 세 번째 면담이다.
“집에서도 같은 태돕니다. 나는 빈에게 Y대를 권하고요.”
“나도 그렇습니다. 성적으로 봐도 넉넉하거든요. 육사에 대한 로망이 크게 있었나 보죠?”
“아주 없다고 볼 수는 없겠습니다만 본인의 지론이 더 피할 수 없어요. 아버지는 박봉 공무원인데 엄마는 많이 아프고, 동생이 둘이나 있는데 자기는 남의 애들 꼴통 과외공부 알바는 죽어도 못 하겠으니, 돈 안 드는 육사에 가는 게 맞는 길이다. 엄마에게 더 이상 짐 되지 않았으면 한다고.”
“돌아가 계십시오. 내 한 번 마지막으로 Y대 진학을 권해 보겠습니다.”
학부모 상담 세 차례가 그렇게 끝났다. 빈이 내게 부담이었던 건 사실이다. 허나 기왕지사 부담일 바엔 그의 인생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빈이 어미에게 빚진 마음이란 데까지는 생각지 못했었다. 잘못된 언행, 버릇 때문에 내 회초리를 많이 맞았다. 중학 1학년까지 나는 빈에게 번번이 회초리질을 했다. ‘하나님께서 내게 위탁한 생명’이기에 그분의 말씀대로 못된 버릇을 바로잡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직무유기이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자식을 보면서 <초달을 대지 않는 자식은 의붓자식이니라 (잠언서)>.
남들은 그 장면도 제 새끼 아니라서 저리 때린다며 수군거렸다. 나는 수군거리는 줄 알건만 내 양심에 거리끼지 않으면 신념에 충실하려 했다.
빈이 제일 듣기 힘들어하던 말이 있다.
<신사답지 못한 놈>이었다.
그런 빈이 딱딱한 규율로 일관될 육사에서 청년기를 보내야 한다는 것이 못내 쓸쓸했다. 집에서 못다 누린 정서적 푸근함이라던가 인간적 자유로움을 미션 대학에서 누리며 꿈꾸기를 바랐다. 낭만이 넘치는 교정에서 금자탑을 쌓았으면 좋겠다.
‘육사. 육군사관학교라….’
빈에게 정말 육사에 대한 로망이 자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빈이 내게로 온 그해 가을, 국군의 날이었다. 주인집 아버지는 당시 해병대 군정감 실장이어서 진해에 가 있고 이따금 주말에 서울 집에 들렀다. 사모님이 어린아이 셋 데리고 홀로 큰 집에 사는 게 무섭기도 해서 양 옆에 셋방을 준 것이다. 막내아들이 빈 보다 두 살 어린 창은이다.
창은이 아빠가 국군의 날 행사장 참가증을 마당 안 가족에게 선사했다. 마당 안 세 엄마는 아이 일곱을 거느리고 동대문 근처 서울운동장에 갔다. 좌석표시에 따라가 자리 잡고 앉으니 본부석이 바로 마주 보였다. 본부석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육군, 해군, 공군 사관생도들이 제복을 입고 위풍당당하게 앉았고 그 앞엔 특별나게 옷을 입은 사람 한 둘이 지휘를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손짓 발짓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신기했다. 그 사람은 응원단 대장이라고 옆 사람이 알려주었다.
빈은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행사하는 멋진 것을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으리라. 그 날 해질 때 우리는 감동 또 감동을 안고 집에 왔다. 아마도 빈은 어린 가슴으로 그 날 서울운동장에서 이미 결심을 굳혔는지도 모른다.


“빈이 엄마, 우리 애덜 거기 있어요?”
사모님이 내 집 문 앞에서 소리쳤다. 해가 지고 마당에 어스름이 끼는데 몇 녀석이 보이지 않아 나도 걱정하던 터였다.
“아니요. 난 안집에 있나 했는데요?”
“이놈들이 또 철조망 넘어간 거 아니오? 큰일이네….”

우리가 살던 집은, 사이에 나지막이 철조망 하나 쳐 놓은 상태로 해군본부와 구획 지어 있었다. 맘만 먹으면 아이들도 쉽사리 넘어갈 수 있으리만치 철조망이 좀 허술했다.
철조망을 넘으면 바로 해군 군악대 연습실이다. 매일 여러 가지 악기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와 사모님은 그런 환경조차도 감사했다. 애들 정서에 도움이 될 터이므로…….
그런데 그 감사가 어느 날부터 걱정이 되었다. 삼사 체육대회를 구경하고 온 후로 이 녀석들이 철조망을 넘어가는 일이 어른들 눈에 자주 들켰다. 부모에게 들키면 곧 잡아내면 별문제 아닌데, 어른들 몰래 넘어가는 게 문제였다. 꾸짖고 호통치고 때로 회초리를 대지만 이 녀석들의 호기심과 의기투합을 막아내는 데 한계가 있었다. 세 집 엄마는 제각각 아이들이 갔음직 한 곳을 달려가 보고 빈손으로 마당에 들어섰다. 엄마들이 사색이 돼서 두런거리자 창은이가 얼떨결에 하는 말.
“아까 형아들이 저기 넘어갔어 엄마.”
“이놈들이 그럼 여태 그곳에서… ?”
“이거 큰일이네. 이번엔 이 녀석들이 해군 아저씨에게 잡혀 벌 받고 있는 모양이네. 저들 아범이 이 일을 알면 야단날 건데, 애덜 단속 그리 못하냐며….”
세 집 엄마는 사모님을 선두로 해군본부 위병소로 갔다. ‘사분이 여차여차하니 우리 애들 좀 찾아봐 주십사….’ 위병은 우리를 기다리게 하고 부대 안으로 한참 동안 전화 교신을 했다.
“부대에선 모르는 일이랍니다.” 단호했다.
“저기, 죄송합니다. 군악대 사병들에게 다시 한번 만 알아봐 주실 순 없을까요? 군악대 아저씨들 중엔 우리 아이들을 아는 아저씨가 좀 있어요.”
“그 사병들은 오늘 저녁 행사가 있어서 부대 밖으로 나간 상탭니다.”
엄마들은 또 빈손으로 마당에 들어섰다. 우리는 창은이 엄마만 바라봤다. 사모님이라면 부대에 적극적인 도움을 요청할 길이 있을 것이란 기대로…….
“안 되겠다. 내가 쫓겨나는 한이 있어도 애덜 찾아놓고 쫓겨나든지….”
막다른 골목에 선 심정으로 사모님은 큰 결심 하고 방에 들어가더니 우체국을 불러 장거리 전화 신청을 하였다. 진해 군정감 실장에게 울며불며 사연을 고했다.


대문께에 수런수런 인기척이 있었다. 녀석들이 돌아온 것이다. 아이들을 먼저 들여보내고 뒤따라 해군 병사 두 명이 따라 들어섰다.
“사모님, 죽을죄를 저질렀습니다. 서둘러 주신 데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은 군법에 의해 벌 받겠습니다만 먼저 사모님의 용서를 구하고자 왔습니다.”
흙 마당에 두 사병이 무릎을 꿇었다.
“왜 이러세요. 일어나세요.”
“우리 두 사람의 불찰로 애들을 죽일 뻔했습니다. 군정감님께 저희들 선처를 말씀드려 주십시오.”
“암튼 아이들 이렇게 찾아 주셨으니 일어나세요. 참말로 우리가 애들 단속 못 한 게 더 죄지요. 감사합니다.”
엄마들은 두 병사를 안집 거실에 들여 자초지종을 들었다.


해군 군악대는 다음 날 공항에서 국빈을 맞을 준비로 여느 날 보다 더 연습에 열중했다. 점심 식사 끝나자 즉각 연습에 들어갔다. 합주에 앞서 개별 연습 중인데 꼬마들이 또 창틀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모두 긴장해야 하는 시각에 녀석들 출현에 병사들이 귀엽다며 손짓을 까딱거리거나 웃어주며 부산스러웠다. 두 병사는 요놈들을 오늘 혼찌검을 낼 요량으로 붙들었다. 연습실은 콘세트(concert) 건물이었고 바로 뒤엔 부식 냉장고 건물이 있었다. ‘녀석들을 그 냉장고에 잠깐 넣었다 풀어 주리라. 그래야 다시는 철조망을 넘어 들어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날따라 합주가 지휘자 마음에 들지 않아서 모두가 쩔쩔매고 지휘자는 지휘봉을 보면대가 부서져라 내리쳐대며 몰아가는 통에 분위기가 험했다. 그런대로 군악대 정복으로 갈아입고 급히 현장으로 이동 구령이 떨어졌다. 두 병사는 상관의 날 선 서슬에 그만 아이들을 잊고 떠났다. 이동할 차에 타서는 피차 상대방이 풀어주었거니 생각했다. 부대에 비상이 걸리고 군악대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지휘자에게 전통이 날아오고 두 사병이 손들고 대열 앞에 나서고…….
아이들은 거의 30여 분 간 냉장고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다행인지 천행인지 그날 냉장고엔 부식이 남아 있지 않아서 담당 사병은 이참에 냉장고 안 청소를 하려고 전기 코드를 모조리 뽑아 둔 상태였다.
두 병사를 돌려보내고 아이들을 주목했다. 입술이 아직 새파랗게 얼어있고 손엔 ‘시레이션 초콜릿’이 들려 있었다.
사모님이 회초리를 들었다. 4학년 큰 녀석, 바로 아래 2학년 외동딸. 넋두리를 쏟아내며 방바닥을 내리쳤다. 사색이 돼서 살아 돌아온 새끼들에게 어미들은 차마 매질은 못 했다. 나도 빈에게 그리 못했다. 빈은 네 살 창은이 보다 체구가 작았다.


빈은 끝내 제 소신에 따라 지망했고 합격의 기쁨을 가져왔다. 내게 또 한 번 보람을 안긴 사건이다. 온 동네가 경사 났다 하고 온 교우가 축하했다.
육군사관학교 합격 통지서 받고 입교까지 두어 달의 공백기가 있었다.
빈은 그간에 체력 단련에 몰두했다. 새벽에 일어나 서빙고동 집 뒤뜰에 드럼통 반절에 찬물을 가득 부어 놓는다. 그리고는 그 무렵 막 개통한 제3 한강교까지 달려 돌아온다. 뒤뜰에서 드럼통에 받아 놓고 갔던 찬 물로 냉수마찰을 한다. 얼마나 멋진 아들이었던지.
6살 때, 4살배기 창은이 보다 작던 빈이 대한민국 육군사관 생도에 합당한 체격이 된 것이다. 그 와중에 중경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인 한 아이에게 수학 과외를 요청받았다. 주 3회 과외선생 노릇까지 했다. Y대에 안 가는 이유로 첫손에 꼽던 과외선생이라니 나는 의아했지만 그 또한 빈에게 좋은 경험이 되려니 맞장구를 쳤다. 한 달이 지나서 빈은 얼굴이 불콰하니 씩씩대며 집에 돌아와 돈 한 웅쿰 방바닥에 던져 놓더니
“어머니 나 과외 오늘로 그만입니다. ”
“왜 아이가 영 시원치 않더냐?”
“애는 웬만해요. 그런데 그 엄마란 사람 태도가 만정 떨어졌어요.”
“애만 잘 따르면 됐지, 뭘 그 엄마까지 따지냐?”
“……”
“어쨌는데?”
“오늘, 아이 수업 마치고 일어서는데 걔 엄마란 사람이 어데 갔다 급히 들어왔어요. 날 보더니 그 자리에서 돈 지갑을 쓱 꺼내서 내 앞에 보란 듯이 지갑을 열지 뭐요. 지갑에 한가득 돈이 들어 있었어요. 한 모습 집어내더니 그 애 보는 앞에서 쓱쓱 세서 알돈을 내 앞에 쑥 내밀며, ‘참 오늘 학생 과외비 주는 날이지.’ 하잖아요.”
“아이 보는 앞에서 수고비 받는 게 민망해서?”
“그것두 그렇지만 알돈을 내민다는 건 나를 모욕하는 거 아닌가요?”
“응, 네 말뜻 알겠다. 그래서 오늘로 집어치운다 이거로구나.”
“그럼요. 그딴 교양 없는 집 자식 수학이나 갈쳐 뭣해요?”
“아쉽다, 야. 엄마에게서 언제 이만한 큰 용돈 받아 본 적 있었냐? 네 힘으로 단번에 이런 돈을 벌었는데, 더구나 애초에 두 달간으로 약속했다며?”
“몰라요, 나도 내 멋대로 굴 거예요.”

<신사답지 못한 놈>이 최대의 욕으로 여기는 빈으로선 제가 가르치는 아이 면전에서 액수가 노출되는 알돈을 받는 일이, 큰 모욕 거리였나 보다. 나는 아이들에게 주급 내지는 월급을 줄 때, 비록 작은 돈일망정 반드시 봉투에 담아서 주곤 한다. 빈은 홀쭉하기만 한 제 엄마의 지갑에 비해 두둑한 그녀의 지갑에 열등감을 느낀 것일까? 아이 면전에서 알돈을 주고받는 장면이 그렇게나 모욕이었던가?
4~5년 전 싸움질로 스스로를 할퀴던 심리가 이런 거였을까?
빈의 과외 선생 노릇은 그 날로 종쳤다.


어느덧 겨울의 끝자락에 이르렀다. 빈의 입교 날도 며칠 남지 않았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빈이 육사 생도 시절엔 입교 후 6개월간 외출, 외박,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다. 내일이면 빈이 규율과 긴 훈련 세월로 들어간다. 입교 지침에 따른 제반 사물을 챙기고 저녁엔 가족들과 만찬으로 송별을 고할 예정이다. 점심나절에 빈이 나에게 나직이 요청했다.
“엄니, 애들 어데 좀 내보내요. 엄니와 단둘이 할 말이 있어서 그래요.”
저녁 만찬 준비로 바쁜 엄마를 조용히 앉히고 빈은 비로소 장성한 내 아들로 마주 앉았다. 떠나보내야 하는 내 마음에 지나간 굴곡의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빠르게 스쳤다.
“어머니, 어머니의 적자로 나를 호적에 올려주어서 내가 까다로운 육사 시험 신원 조회 모두 무난히 통과했어요. 고마워요. 엄마에게 잘 할게요. 한 가지 걱정이 있어요.”
빈은 더 말을 잊지 못하고 울먹였다.
“걱정? 뭔데, 어미가 거들어 줄 수 없는 거냐?”
“그런 건 아니고요. 부탁인데요. 어머니 맘속에서 내가 있던 자리가 흔적없이 메워지면 어쩌나 그거에요. 내가 오래 떠나 있어도 어머니 맘속에 내 자리, 빈의 자리는 그냥 놓아 주세요. 나는 어머니에게 잊혀지는 게 젤로 걱정이에요.”
빈은 소매 끝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거라면 걱정 마라. 네 자리는 오히려 더 크게 비워 두고 있을 것이야. 왜냐구, 네게 좀더 따스한 엄마가 돼주지 못한 후회가 많단다. 늘 궁핍함만 보고 자라게 했던 것도 그렇다. 도덕 선생 같기만 했던 엄마가 미안하구나. 엄마의 육아 경험이 너로부터 시작했으므로 교과서로 너를 양육하려고만 했었기에 엄마란 사람이 너무 빡빡하고 무서웠을 것이야. 동생들 낳아 기르다 보니 지난 세월이 잘못되었다는 걸 굽이굽이 깨달아지는구나. 너보다 내가 더 부탁할 말이 많아졌구나. 앞으로 우리 잘 하자.”
빈은 오랜만에 제 방에서 리코더 연주를 길게 길게 하고 나는 식구들 오기 전에 상차림을 마칠 요량으로 부엌에서 분주했다.


일찍 저녁상에 둘러앉았다. 빈이 좋아하는 소고기 갈비찜도 푸지게 담았다. 갈비찜, 빈의 유년 명절이 새삼 생각났다. 명절 앞두고 우리는 큰댁에 아이들 몰고 모인다. 숙모 두 집 아이들까지 다 모이면 마당에 아이들이 7~8명이나 된다. 새 옷을 입고 새 신을 신었다. 나라 안 대다수가 보릿고개를 겪던 시절인데, 명절 우리 큰댁엔 온갖 먹을거리가 풍성했다.
사흘 전에 가서 장만한 음식, 명절 다음 사흘까지 접빈객으로 보냈다. 한 주 동안 큰댁에 있는 기간에 유독 빈이만 탈이 났다. 내가 감히 못 해먹이는 갈비찜인지라 빈은 그여 배탈이 난다. 새 옷에 토를 하거나 설사를 해서 망친다. 몇 년을 내리 명절 큰댁에 갈 적마다 겪는 연례행사였다.
‘의붓에미가 얼마나 애들을 주리게 했으면 기름붙이를 먹고 저렇게 탈이 날까? ’
‘다 같은 음식 한 식탁에서 먹어도 빈이만 토사곽란을….’
나는 오물을 묻힌 새 옷이 아까운 것도 있지만 남들의 눈빛이 부끄러워 참말로 괴로웠다. 갈비찜을 대할 적마다 큰댁 명절 빈의 토사곽란이 잊혀지지 않고 떠올라 슬펐다.
저녁상을 물리고 우리 가족이 잘 하는 놀이가 시작됐다. 빙고 게임이다. 상품 때문에 어린 두 동생을 울리고야 끝났던 빙고 게임이다.
빙고 판을 거두자 빈은 식구들 보는 앞에서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우아! 형 힘세다.”
“오빠야 정말 힘세다. 오빠야 군인 아저씨가 되도 되겠다.”
한 바탕 손뼉을 치고 난리가 났다.
“어머니는 너무 가벼워요. 내가 가고 없어도 엄마, 밥은 똑같이 지으세요. 내 먹던 몫까지 엄마가 더 잡수시고 무거워지세요. 진짜 부탁이에요. 너희 덜 엄마 속 썩이면 안돼? 알았지.”


빈이 집 떠나는 날, 아빠가 태릉 육사 정문까지 배웅하고 왔다. 몇 주 지난 뒤부터 가족 면회가 허용된다기에 애어른 모두 태릉으로 갔다.
그 날 이후로 6개월 동안 주말마다 식구들은 피크닉 가듯 태릉 화랑대 면회장으로 밥 싸 들고 다녀왔다. 집이 서울인 내 아들 경우는 매 주 제가 좋아하던 음식이나 원하는 음식을 푸짐하게 싸 들고 갈 수 있지만, 지방 출신 생도들은 농번기이기도 하고 거리가 멀어서 매주 우리처럼 그리 못했다. 빈은 그런 급우들 몇 명씩은 우리 테이블에 데리고 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은 내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 제가 육사 합창단에 들어갔어요. 놀랐지요?”
나는 정말 놀랐다. 육사란 곳이 아무리 규율이 엄하고 생도들 역시 엄격하게 품위를 지켜야 한다 해도, 내 아들 빈이 합창단에 든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관생도가 되더니 평생 못 고칠 것만 같던 음치마저 고쳐지는군. 군인이 받는 훈련 기압에 #나 b이 모두 원위치에 가서 잘 놓이는 것이란 말인가?
“잘 해 봐라.”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되면 서울운동장에선 여일하게 국군의 날 행사의 일환으로 삼사 체육대회가 열린다.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엔 그 행사가 국가적인 잔치였다. 운동선수들 못지않게 흥분된 관중들과 각 학교 생도 응원대가 스탠드에 서로 대각선으로 정렬했다. 경기보다 응원이 더욱 흥미롭기까지 했다. 그 응원 역시 점수에 든다는 것 때문에 제반 응원 컨셉은 연습 기간 동안 비밀리에 진행한다고 들었다. 치어걸이 아니고 치어맨 복장과 움직임은 참으로 이채롭다. 머리 좋다는 놈들이 모인 학교란 말대로 얼마나 연습을 했던지 정말 볼만 했다. 사관학교마다 그들만의 고유의 제복이 뚜렷이 구별된다. 색깔, 디자인, 모자, 장갑, 신발들이 모두 매스게임과 카드섹션의 소도구가 된다.
공군 생도 응원석에선 전투기가 쌕쌕 날고, 네 대씩 혹은 두 대씩 편대를 지어 난다. 짙푸른 상의 단추를 열면 붉은색 안감이 내비친다. 박자에 맞춰 열고 접고 하면서, 또 모자 장갑 낀 손바닥을 엎었다 뒤집었다 하면서…. 육군 생도 응원석도 그에 질세라 탱크, 수류탄, 박격포 등등. 거기다 한창 유행하는 포크 음악까지. 저절로 어깨춤이 들썩일 정도다.
해군은 희고 검은 제복과 넓은 세라복 칼라로 군함이 됐다가, 갈매기 몇 마리 날다가, 함포사격 하다가…. 응원가 또한 다양하다. 디스코, 발라드, 트롯트, 군가 등등.
관중들 중엔 필드의 경기엔 별 관심 없고 응원석만 보기 위해 온 사람도 많은 것 같았다. 100명, 80명 혹은 60명이 모두가 하나같이 일사불란하게 소품과 제복으로 변신하는데, 혹여 그중 한 생도라도 아차 실수해서 다른 색깔을 내보인다면 그 카드섹션은 흠집이 날 것이다. 내 아들이 그 스탠드에 있어서일까, 나는 괜한 걱정까지 하고 앉았다.
비행기 날개가 기총사격 당한 꼴이 되거나 장갑차 포신이 구부러지거나, 또는 머리통이 떨어져 나간 갈매기가 날아가면 어쩌나?
한편 군악대와 합창단 경연대회도 연습에 피치를 올리고 있다고 했다.

삼사 체육대회가 끝나고 며칠 뒤 아들은 집에 외박 나와서 내게 말했다.
“우리 합창단 지휘자는 귀신이요. 내가 맘 놓고 크게 부르기만 하면, 지휘봉을 가로로 딱 멈춘 채(합창도 멈춘다) 쭈욱 훑어보며, ‘딱 한 사람 소리가 틀린단 말이야. 한 사람이…. 누구라고 지적하진 않겠다. 본인이 알아서 잘하라.’ 하고는 다시 가는 거 있지요.”
빈은 자기 가슴을 손바닥으로 때리며
“엄마 그게 나야 나, 하하하… .”
나도 어처구니없어서 아들을 따라 웃었다. 나는 그가 여섯 살 적 겨울, X-MAS가 생각났다.
“그래 어쨌니, 쫒겨났니?”
“엄마두 아들을 어떻게 보고 그런 말씀을. 그럴 땐 방법이 있지요. 입만 크게 벌리고 정작 소리는 아주 작게 내거든요. 전혀 죽이지요. 그러면 지휘자는 이젠 맞는다며 흡족해하지요.”
“넉살 좋은 내 아들, 기어코 이번만은 합창단에서 쫓겨나는 일 없겠구나. 합창이란 본래 그런 거다. 아무리 정확하고 좋은 소리를 가지고 있다 해도 한 사람 소리만이 유독 두드러진다면 그건 잘된 합창일 수 없어. 합창이란 잘하는 한 사람보다 비슷비슷한 모두의 소리가 어우러지는 것이다. 각자 자기 맘대로 성량 껏 부른다면 합창이 아니지. 자기 개성 자기 성량을 절제하며 옆 사람 소리, 다른 파트의 소라까지 경청해서 키를 맞추는 일이 중요해. 합창을 단지 음악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자기절제나 남을 배려하는 인격함양 과정이라 생각해야 한다. 절대 자기를 낮추는 훈련이다. 그래서 행복한 화음을 얻게 되는 길이기도 하지. 세계적인 성악가 파바로티나 카르소, 릴리폰스, 우리나라의 조수미, 신영옥 같은 사람이 합창단원이면 좋을 것 같지만 그네들 소리는 데스칸트(descant)로서는 좋지. 전체 소리와 융합되기는 어렵단다.”
빈은 어미 말에 깊이 동의를 표했다.

그다음 주말, 빈이 집에 외박 나왔다. 아들은 내게 커다란 사진 한 장을 들이밀었다. 과히 네놈이 부러워했을 만한 사진이었다. 사진 아래 여백에는 ‘육군사관학교 합창단 일동’ 날짜가 적혀 있었다. 7, 80명쯤 돼 보이는 사진엔 붉은색 정복에 금테 레이스가 출렁이고, 흰색 휘장에 청색으로 수를 놓았다. 어느 어미라도 그렇듯이 나도 내 아들 빈을 먼저 찾았다. 셋째 줄 한 가운데에서 함박웃음을 웃고 있었다.
‘네놈이 기어코 해냈구나.’
“축하한다. 육사생도 합창단원이 된거.”
“네. 내가 말했잖아요. 어떻게 해서든 생도합창단 유니폼을 입고 사진 배기는 것이 소원이라구요. 앗싸, 해냈다구요.”
“애썼다. 그럼 앞으로도 계속할 셈이냐?”
“엄마두 내 맘 알면서, 그 사진 한 장 소원을 달성했으니 미련 없이 나왔지요.”
“그럼 이제 어느 동아리에?”
“승마부에 들었어요.”
“잘했다. 허나 말(馬)은 조심해라.”
“걱정 마세요. 어머니”
우리 모자는 사진 속 생도 하나하나의 얼굴을 짚어가며 긴 대화를 나누었다. 빈은 어미에게 한 생도씩 개인사를 들려 주었다. 그 사진 한 장은 내게 많은 이야기를 유추하게 했다. 자기의 약점을 인정하고 그 약점이 남에게 피해 주지 않으면서 자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리고 제가 있으면 안 될 자리를 떠나야 함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빈아, 내 아들로서 내 충고 잘 듣고 따라와 줘서 참 고맙구나. 너의 육사 4년의 세월에 축복을 빈다.”


사춘기 시절 빈이 방황할 때 그에게 자주 했던 내 넋두리.

<나는 네게 새엄만 건 물릴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네가 이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다가, 내가 죽은 담에 내 무덤을 파헤치며 원망하는 일로 세월을 또 허비하겠니? 내가 살아있을 때, 지금 내 어깨를 밟고 일어서. 그리고 훌쩍 뛰어올라. 이놈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