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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2017년 [소설] 오래된 집 / 강호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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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271회 작성일 17-12-12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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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집



용인으로 진입하는 지방도를 눈앞에 두고 승용차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급했다. 올해 들어 기억력이 부쩍 감퇴하고 건망증이 심해졌지만 잊어버릴 것이 따로 있다. 어떻게 그걸 잊어버릴 수 있었는지 자신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집을 떠날 때 혹여 빠트린 것이 없나 하고 일층 이층을 돌아다니며 샅샅이 살펴보기까지 했다. 이삿짐을 쌀 때부터 챙길 목록 1호였는데 막상 이삿짐을 다 꾸리고 집을 떠날 땐 깜박하고 말았다.
덩치가 큰 가구와 가전제품 같은 것은 아내와 함께 먼저 이삿짐 차로 보냈다. 챙길 것은 빠짐없이 다 챙겼다고 생각했는데 운전하는 중 내내, 뭔가 아주 중요한 것을 두고 왔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선친의 유품이나 집안 대대로 내려온 손때 묻은 골동품 같은 것은 손수, 자신이 모는 낡은 승용차의 트렁크에 실었고 좀 더 귀중하게 아끼던 것은 눈에 잘 보이게 차 뒷좌석에 간수했다.
용인을 바로 지척에 두고 사거리에서 차를 우회전하여 갓길에 세웠다. 그는 경험상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방금 떠나온 서울은 한낮인데도 중국발 황사로 어둑어둑했지만 서울을 조금 벗어났을 뿐인데도 공기가 한결 상쾌하고 맑다.
도대체 무엇을 잊고 왔는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한참 만에 그는 <아-!>하고 선불 맞은 짐승처럼 소리 내며 심하게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어떻게 그걸 잊어먹을 수가 있었는지 스스로에게 놀랐다. 나이를 먹어서 그렇다고 간단하게 치부할 일은 아니다. 거의 절망적인 기분을 느꼈다. 매연과 황사와 미세먼지로 뒤덮여 있는 서울로 다시 되돌아가야 된다는 사실에 더욱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언가에 억지로 끌려가는 기분으로 그는 핸들을 고쳐 잡고 왔던 길을 되짚어 자신이 살았던 집으로 향했다.
도심으로 들어서자 차들이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차간거리가 좁아지면서 진땀이 났다. 나이가 들면서 순발력이 점점 떨어지는 것을 느끼는 요즘이다. 차도 낡을 대로 낡았다. 진즉 차를 폐차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아내 때문이다. 손목이 아프고 무릎 관절이 부실한 아내의 저잣거리 출입을 돕기 위해서 폐차할 수 없었다.
사람이 떠난 집은 이제 폐가나 다름없다. 빈집 앞에 차를 세우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잎이 넓고 긴 파초와 목백일홍, 석류나무와 소나무 등의 정원수 등 제철 화초들이 생기를 띠며 다시 돌아온 주인을 새삼스럽게 화들짝 반기는 것 같았다. 정원 가운데 서 있는 두 그루의 청청한 소나무는 이층 지붕을 거의 다 가릴 만큼 큰 키에 멋지고 우람스럽다. 밖에서 보면 집은 보이지 않고 무성한 정원수와 멋들어지게 자란 소나무만 보인다. 70년 전 그의 아버지가 남산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에서 씨앗을 받아 심었다.
텃밭 쪽에는 싱그러운 호박 넝쿨이 뻗어 나가고 있다. 얼마 전부터 지붕에 올린 박도 초저녁부터 소복한 미녀처럼 하얀 꽃을 피우더니 달걀 크기만 한 여린 연두색 열매를 달았다. 한밤중 하나 가득 쏟아지는 달빛을 받고 피어 있는 박꽃은 청초하다 못해 요염하다. 박씨는 조 박사 집에서 가져와 파종한 것이다. 세월이 지났어도 호박꽃과 박꽃을 볼 때마다 그녀의 생각이 새롭다. 그녀와 같이 한 시간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곧장 정원을 가로질러 집안으로 들어섰다. 급한 발걸음에 이 층으로 오르는 낡은 나무계단이 금세라도 내려앉을 듯 삐걱거리며 비명을 올린다. 몇 번이나 개수를 했지만 워낙 오래되고 낡은 집이다. 다락방 문을 밑에서 위로 밀어 올렸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가로로 길게 노출된 대들보다. 대들보에는 아직도 선명한 일본식 상량문 붓글씨가 그대로다.
이 집을 지은 정확한 날자가 일제 식민지 때인 1916년(대정 5년) 9월 28일로 적혀 있다. 청나라와 일본이 한반도 내에서 서로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일으킨 지 22년 후의 일이다. 청일 전쟁에서 참패한 청나라가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고 물러가면서 일제는 본격적으로 조선에 대한 본격적인 내정간섭을 시작하던 시기다.
목조 이 층인 이 집은 연 건평 40여 평으로 일제 때 헌병대장으로 알려진 인물이 살았던 집이다. 미닫이 유리창으로 하루 종일 채광이 좋다. 복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다미가 깔려 있었다. 1층 가운데 거실로 사용하는 공간에는 방한을 겸한 차를 끓이는 화로가 있고 그 옆의 한 계단 아래가 부엌이었다. 좁은 복도 끝의 서쪽 구석에 실내 화장실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처음 이 집에 입주하면서 가장 먼저 했던 일은 냄새나는 다다미를 모두 걷어내고 온돌로 바꾼 일이다. 화장실은 근년에 들어서 수세식으로 개조하고, 부엌도 입식으로 개조했다. 콜타르를 먹인 외벽은 판자로 덧댔고, 함석이었던 원래 지붕을 걷어내고 조선 기와로 바꿨다. 집 옆의 마구간을 헐어내고 텃밭을 만들었다. 많이 변모했지만 미닫이 유리창이며 브이 자를 거꾸로 세운 현관 지붕은 아직 옛날 그대로다. 해방이 되고 중국으로부터 그의 아버지가 귀국하면서 미 군정청으로부터 인수했던 집이다.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 거의 모두를 독립군 군자금으로 상해로 보내고 아버지 자신도 중국으로 가서 독립운동을 했다. 해방이 되어 귀국했을 때 그는 빈털터리였고 가족들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다. 적산가옥이나마 서울 한복판에 있는 집을 차지할 수 있었다는 건 그의 가족으로선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대지가 자꾸 줄어들었다. 처음에는 500평이었으나 지금 남은 땅이 100여 평에 불과하다. 해방이 되었지만 다시 득세한 친일파들이 정부 조직을 장악했다. 보이지 않는 압박 때문에 그의 아버지는 아무 직업도 가질 수 없었다. 가족들의 생계와 자식들의 학비를 대기 위해서 대지를 쪼개어 팔았다.
아침마다 확성기에서 시끄럽게 노래가 흘러나왔다. 쿠데타를 일으킨 만군 사관학교 중위 출신의 박 소장이 가사를 짓고 곡을 붙였다는 노래였다. 군 내부 남로당 총책이었던 그는 군 내부의 남로당원을 밀고하는 조건으로 사형언도를 면하고 김일성이 남침 전쟁을 일으킨 덕분에 군적과 계급장을 되찾았다. 그가 쿠데타에 성공하면서 맨 먼저, 국시라고 내건 슬로건은 아이러니하게도 반공이었다. 일본 천황에게 바친 보국충정(報國忠正)이라 쓴 혈서 대신 반공이라는 슬로건을 미국에게 내걸었다. 4.19로 학생들이 피 흘려 민주주의 길을 닦아 놓은 지 채 1년이 되기도 전에, 일제에 충성을 맹세했던 관동군 장교의 군홧발에 무참하게 짓밟혀 버렸다. 어쨌거나 국민소득 60불이 고작이었던 나라를 이만 불, 삼만 불 가깝게 비약적으로 나라 살림을 발전시킨 것은 그의 공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해 전통과 역사를 왜곡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고문하고 죽였다. 종신 집권을 위해 임의로 헌법을 바꾸기도 했다. 그가 죽은 뒤, 다시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땡전 장군으로부터 민주주의를 되찾긴 했으나 군사 독재정권 30년 동안 억눌렸던 자유에 대한 욕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주위가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고 있었다. 산비탈에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들과 산비탈을 허무느라 부연 먼지를 일으키며 덤프트럭이 쉴 새 없이 드나들었다. 며칠 사이에 직사각형의 콘크리트 5층 아파트 건물이 산기슭을 가렸다. 산기슭뿐만 아니었다. 곳곳이 파헤쳐지고 빌딩들이 들어섰다. 이제 다시 그 아파트들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25층, 35층의 초고층 현대식 아파트가 성채처럼 들어섰다. 그가 사는 집이 하루아침에 섬처럼 고립되었다. 부동산업자들이 뻔질나게 찾아왔다. 일대의 집들을 모두 철거하고 재개발을 하겠다는 것이다. 관절이 아프기 시작하면서 이사를 가자는 아내의 푸념도 더욱 잦아졌다.
단독주택은 관리 유지가 만만치 않다. 워낙 오래된 목재 가옥이라 때맞춰 개수나 보수를 하지 않으면 비가 새기도 하고 목재들이 훼손되기도 한다. 나이가 들면서 백여 평의 정원관리도 힘에 부쳤다. 그럼에도 이 낡고 관리가 어려운 집을 선뜻 팔지 않고 이사를 가지 못하는 진짜 이유를 그의 아내는 알지 못한다. 아내가 집을 팔고 아파트로 이사를 가자는 데는 오래된 단독주택의 주거환경 불편함에도 있지만 다른 속내가 있다. 집을 팔아서 아파트로 이사를 가고 남는 돈으로 빚을 갚고 아들에게 다시 아파트를 마련해 주자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다.


마치 컨베이어 벨트에 실린 제품이 차례대로 쏟아져 나오듯 사람들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철역 바깥 출구로 나온다. 1번 출구 몇 걸음 앞에 지하철 환풍구와 돌출한 전기 시스템 박스가 있다. 거기서부터 도로변을 따라 종로 2가의 낙원동 사거리까지 노인들의 난전이 펼쳐져 있다. 펼쳐 놓은 물건들이란 하나같이 허접스럽다. 신던 구두와 운동화와 가죽 지갑, 선글라스, 핸드폰 충전기, 중국제 배터리와 짝퉁 시계 라디오, 허리띠 등 같은 것들이다. 그 주위로 허접스럽게 늘어놓은 물건들만큼이나 늙고 남루한 노인들이 가로수에 기대거나 주저앉아서 시간을 죽이고 있다. 아침 열 시부터 시작되는 이 거리의 일상적인 낯익은 풍경이다. 하루에도 수십만 명이 오가는 거리다.
노인들 틈에 여자들이 어슬렁거린다. 50대에서 70대까지로 보이는 늙은 창녀들이다. 얼핏 보면 여염집 가정주부처럼 보인다. 어떤 여자는 립스틱 같은 것도 바르지 않았다. 여자들은 무심을 가장하고 있지만 지하철출입구로 나오는 사람들과 행인들의 얼굴을 예리하게 살피고 있다. 천연덕스러운 그녀들의 모습은 마치 약속을 하고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얼마 전까지는 그녀들의 아지트가 지하철 밖이 아니고 지하철역 안이었다. 시민들의 여론이 나빠지자 지하철역 밖으로 내몰렸다.
전신주와 가로수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여자들의 눈이 갑자기 빛나며 한쪽으로 쏠렸다. 이제 막 에스컬레이터를 내려 보도에 내려선 남자 때문이다. 등에 배낭을 메고 있다. 60대 후반이나 70대로 보인다. 구릿빛 팔과 다리에 근육이 잡힌 다부진 몸매다. 건설현장의 일용직 노동자이거나 순박한 시골 홀아비 같은 모습이다.
먼저 행동을 취한 것은 지하철 바깥 출구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여자다. 여자는 잘 아는 사람인 것처럼 자연스러운 미소를 띠며 남자 앞으로 다가갔다. 남자가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여자를 보았다. 여자가 남자에게 뭐라고 말을 걸자 남자의 얼굴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여자가 때를 놓치지 않고 남자의 손목을 잡아끌어 보석점 옆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 안에서 여자가 다시 뭐라고 남자를 설득했다. 남자의 얼굴에 헤식고 약간은 당황하고 겸연쩍어 보이는 웃음이 떠올랐다. 여자가 어울리지 않는 교태를 부리며 남자의 팔을 꼈다. 남자와 여자는 마치 초로의 다정한 부부 같은 뒷모습을 보이며 종3의 뒷골목으로 사라졌다. 그쪽에 모텔이 있고 서울답지 않게 아직도 야외 영화촬영장 세트 같은 외관의 여인숙이 있다.
‘쳇! 저년 벌써 하나 물었네.’
항상 배낭을 멘 등산복 차림에 아랫배가 쌍둥이 밴 것처럼 둥그렇게 나온 여자다. 시커멓게 눈썹에 먹물까지 들였다. 곁에 있는 다른 여자를 보며 혼잣소리처럼 내뱉었다. 종로 3가 일대에는 언제나 노인들로 북적인다. 서울 사는 노인은 물론 근교의 노인들까지 매일 출근하다시피 이곳으로 모여든다. 그들은 왕년에 사우디의 사막이거나 독일의 광부와 베트남의 전쟁터로, 아니면 국내의 건설 현장에서 나라의 부강을 이끌었던 사람들이다. 정권과 결탁해 저임금으로 재벌이 된 그들의 고용주는 서민들을 우습게 보면서 거들먹거리지만 정작 그들은 갈 곳 없이 거리로 내몰렸다. 파고다공원과 종묘와 종로 3가 지하철역이 그들의 쉼터가 된 지 오래다.
반대쪽에 2번 출구가 있지만 그쪽은 가파른 계단이어서 종묘 쪽으로 가는 노인들도 대개 1번 출구의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한다. 그는 에스컬레이터를 내려 보도에 발을 내려놓는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노인들이 바닥에 늘어놓은 물건들로 향한다. 향수가 서린 옛날 물건들을 비롯해서 출처는 알 수 없지만 더러 쓸 만한 물건들도 있다. 지금 그가 신고 있는 짝퉁 나이키 신발도 이 노점에서 샀다. 새것이나 다름없는데 오천 원이었다. 물건값이 싸다는 남대문 시장에서도 이만 원을 줘야 살 수 있다. 번듯한 새 신발을 사서 신을 처지가 안 되는 것도 아닌데 아내의 지청구를 들으면서도 그는 오랫동안 몸에 밴 검소한 습관을 버릴 수 없다.
그는 한 달에 서너 번 이곳에 온다. 두 번은 조 박사를 만나기 위해서, 그리고 한 번은 이발을 하기 위해서다. 이발비가 만만치 않다. 집 근처에 있는 <블루> 뭐라는 가장 싼 이발소도 머리 자르는 데만 8천 원이다. 염색까지 하면 2만 원이 넘지만 이곳에서는 머리를 자르고 염색까지 해도 8천 5백 원이다. 이 이발소 역시 조 박사가 알려주었다. 조 박사는 이 종로 바닥에 모르는 곳이 없을 정도로 훤하다. 퇴직한 동료 교사들과 이 일대의 기원에서 자주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가 찾는 이발소는 종로 2가의 파출소 옆길로 탑골공원의 담장을 끼고 50미터쯤 들어가는 곳에 있다. 탑골공원 옆문의 맞은편이다. 이발소로 가는 골목길 역시 길바닥에 노인들이 좌판을 벌여 놓았다. 주위에 같은 이발관이 20여 곳이 있지만 이 이발관이 특히 유명하다. 6.25 때 황해도에서 단신 월남했다는 유명 노 연예인이 이 이발관을 이용하면서부터다. 노 연예인은 아직도 현역이다. 일요일이면 ‘전국노래자랑!’이라고 외치는 90객인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성공한 연예인인데도 오만하지 않고 근검절약하는 모습에 저절로 고개를 숙여지게 하는 인물이다. 이발관 안의 벽에 이발하는 그 연예인의 사진이 도배되어 있다.
길바닥에 늘어놓은 물건들을 눈으로 대충 훑으면서 직선거리 70미터 거리에 있는 햄버거 가게로 향한다. 앞뒤 좌우로 바쁘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때문에 하마터면 가게를 지나칠 뻔했다. 햄버거 가게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붐비는 때가 바로 이 시간대다. 점심시간 전후 두 시간 동안, 6천 원짜리 햄버거를 5천 원에 판다. 소고기 패치와 양상치, 피클과 토마토 케첩이 든 햄버거와 감자튀김, 콜라 한 컵이면 주머니가 얄팍한 사람들의 한 끼 식사로는 부족함이 없다. 가게를 찾는 사람 중에 젊은이들도 많지만 상당수가 노인들이다. 점심으로 햄버거를 사 먹을 수 있는 노인들은 그나마 여유가 있는 축이다.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꾸어지자 양방향의 차들이 멈춘다. 횡단보도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길을 건넌다. 양쪽에 멈춘 차들은 거의 값비싼 브랜드의 외제 차 일색이다. 수억을 호가하는 차들이 호기롭게 사차선을 누비고 있다. 길가의 후줄근한 차림의 노인들과 대조적인 풍경이다. 드문드문 국산 차도 끼어 있다. 길가의 높은 빌딩들 유리창에 햇빛이 날카롭게 반사되고 있어서 눈이 아프도록 부시다.
가게의 문을 밀고 들어서자 이면 골목으로 나가는 뒷문 안쪽의 어두운 구석 자리 2인석에 조 박사가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언제나 그렇듯 그 자리다. 아니면 그 옆자리이거나. 예의, 돋보기안경을 끼고 책을 읽고 있다. 셔츠 위에 덧옷으로 연두색 경찰 마크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었다. 그를 만난 뒤 바로 일터로 나갈 요량인 모양이다. 조 박사는 3년째 학교 지킴이 일을 하고 있다. 오후 한나절, 학교 주위를 돌고 월 40여만 원을 시급으로 받는다. 그 벌이나마 내년부터는 나이가 너무 많아서 그만두어야 한단다. 학교지킴이로 받는 40여만 원과 국민연금 20여만 원을 합쳐 모두 60여만 원이 조 박사의 한 달 생활비인 셈이다.
그가 사는 집은 그의 아내가 살아있을 때부터 40여 년 살아온 정릉 산비탈의 단독주택이다. 말이 단독주택이지 몇 년째 수리를 하지 않아 부분적으로 서까래가 내려앉고 비가 새서 내다 버린 모노륨 비닐 장판과 루핑으로 지붕을 덮은 폐가나 다름없다. 3평 4평 되는 방 세 개 중에 부엌이 딸린 방 한 개를 조 박사가 쓰고 있다. 방은 책상 겸 식탁과 누울 자리만 남기고 사방 어지럽게 원고 뭉치와 책들이 천정까지 빼곡히 쌓여 있다.
골방이 달린 서쪽의 방 하나는 처마 끝을 잇대어 부엌을 만들고 세를 놓았으나 몇 년 전부터 세입자가 없다. 몇천만 원의 비용이 들어가는 집수리를 못 한 탓이다. 서쪽 방과 붙은 골방은 그에게 너무 익숙하고 가슴 아픈 곳이다. 고문과 살육이 공공연히 자행되던 어두운 시절 그는 두 달 동안이나 그 골방에서 지냈다.
그의 서대문 집은 밤낮 형사들이 진을 치고 무시로 집안을 드나들며 그를 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를 잡기만 하면 당장 몇 계급의 승진과 포상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조 박사가 먼저 자기의 집으로 피신할 것을 제안했다. 옷 몇 벌과 세면도구, 숨어 있을 동안 읽을 책들을 챙겨서 판자촌이나 다름없어 보이는 정릉의 산비탈 조 박사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조 박사의 부모들도 흔쾌히 그를 받아들였다.
조 박사의 집으로 피신하던 날, 조 박사는 아이들 과외공부를 시키기 위해 시간을 낼 수 없어서 혼자 조 박사의 정릉 집을 찾았다. 미리 대문 열쇠를 넘겨받았다. 낮에는 집에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조 박사의 말을 믿고 열쇠로 대문을 따고 곧장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전에 한 번 온 적이 있어서 그가 숨어 지낼 골방의 위치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소지품을 들고 골방으로 들어서는데 골방 맞은편 벽에 뭔가 걸려 있었다. 창문이 있지만 뒷집의 높은 축대가 바투 있어서 골방은 한낮인데도 어둡다. 갑자기 환하게 형광등 불이 들어왔다. 누군가 전기 스위치를 올렸다. 벽에 걸린 것은 화선지에 붓으로 쓴 예사롭지 않은 활달한 필체의 현수막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현수막치고는 좀 어울리지 않다 싶게 붉은 낙관까지 그려져 있었다.
<○○○ 애국자 동지의 영광스러운 입주를 축하합니다. 조○○ 가족 일동>
익살스럽고 과장된 표현이었다. 주위가 익숙해지자 누군가 방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여자였다.
‘짜-안! 저희 집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저는 조○○ 오빠의 동생 되는 조향지라고 합니다. 앞으로 오빠로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환하게 웃으며 그녀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는 얼떨결에 손을 잡았다. 난생처음 잡아보는 이성의 손이었다. 갓 탄 목화솜처럼 포근하고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는 왠지 민망스러울 만치 심장이 마구 뛰면서 전신에 진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우아하다는 말이 모자랐다. 세상의 모든 것을 집어넣을 것 같은 크고 투명하도록 맑은 눈이 그를 보고 있었다. 루즈를 바르지 않았는데도 입술이 선지 빛처럼 붉었다. 입술 사이로 드러난 하얀 이가 백옥 같았다.
단순호치(丹脣皓齒)는 예부터 동양 미인의 필수 조건이지만 향지는 묘하게 현대적인 아름다움과 고전적인 미인의 요소를 고루 갖추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사랑하게 되리라는 예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때까지 그는 조 박사에게 미대에 다니는 여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조 박사의 가족은 청계천에서 공구상을 하는 아버지와 파출부로 생계를 보태는 어머니, 여동생과 단출한 네 식구였다.
정릉 조 박사의 집은 그가 숨어 있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경사가 50도의 60계단 맨 위쪽에 집이 있었다. 너무 가파른 산비탈에 있는 집이라 형사들이 찾아오기가 어려웠다. 겨울이면 계단이 온통 얼음으로 덮여서 엉금엉금 기다시피 올라가야만 했다. 지금은 북한산으로 돌아가는 길이 나고 집 뒤쪽에 시내버스 정류장이 생겼다.
그가 이 집 골방에서 하는 일이란 잠을 자거나 책 읽는 것이 전부였다. 세상 돌아가는 바깥소식은 그녀와, 몰래 과외공부 선생을 하고 있는 조 박사가 가져왔다. 독재 군사정권을 저지하기 위한 동지들과의 연락은 조 박사와 향지가 맡았다. 3선 개헌론 설이 돌고 영구집권을 위한 군사 독재정권의 마각이 천천히 드러나고 있었다.
골방에서도 초여름의 햇살이 느껴졌다. 너무 무료해서 참지 못하고 골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집 앞은 마당이랄 것도 없는 다섯 평 남짓한 뜰에 두 평 남짓 화단을 가꾸어 놓았다. 생뚱맞게 화단에는 꽃 대신 키 높이의 옥수수와 지지대를 감아 올라간 오이 넝쿨이 있고 보라색이 선명한 가지 등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꽃은 체면치레하듯 화단 앞 가장이에 백일홍과 백합, 채송화 몇 그루가 전부다.
10여 미터 아래, 앞집 뒤쪽에서 가파르게 쌓아 올린 축대가 아슬아슬하다. 축대 끝자락에 블록으로 두른 담장 밑에 심은 호박 넝쿨이 뻗어서 온통 담장을 덮었다. 노란 수꽃과 암꽃이 커다란 녹색 잎사귀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이미 꽃술이 떨어지고 달걀 크기만 한 호박이 달리기도 했다. 서쪽 화장실 지붕에는 박넝쿨이 뻗어 가고 있었다.
담장 앞에 이젤이 세워져 있었다. 그 앞에서 그녀가 호박 넝쿨과 캔버스를 번갈아 보면서 붓질하기를 반복했다. 담장의 싱싱하고 잎사귀 넓은 호박잎과 노란 호박꽃이 6호짜리 캔버스 하나 가득 옮겨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의 옆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럽다. 그녀는 유화뿐 아니라 한국화와 전각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때로 화선지를 방안 가득 펼쳐 놓고, 가운데 철심을 박은 단풍나무로 만든 문진(文鎭)으로 양쪽을 눌러 놓은 다음, 난초와 화조를 치기도 했다. 문진은 목공소의 도움을 받아 그녀가 손수 만든 것이었다. 몸체에는 예사롭지 않은 솜씨로 논어의 시경 한 구절을 음각으로 새겨 놓았다.

그림 그리기에 온 정신이 팔려서 곁에 사람이 다가가는 것도 모른다. 학교가 데모 때문에 휴강 중이었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그도 향지의 권유와 지도를 받아들여 한국화를 배워보기로 했다. 생각보다 어려웠다. 향지가 직접 그의 손을 잡고 운필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때마다 그는 향기로운 향지의 체취에 정신을 놓았다. 와락 그녀를 껴안고 싶은 욕망을 억눌렸다. 활달한 성격답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먼저 한 것은 향지였다.
“저 오빠 사랑하는 거 아시죠?”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혹시 잘못 들은 것이나 아닌지, 뭔가로 호되게 얻어맞은 것처럼 얼떨떨했다. 그 말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입술을 맞춘 채 방바닥에 넘어졌다. 어느 사이 향지의 몸 위에 그가 있었다. 향지의 일그러진 얼굴이 아픔을 참으며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죽으라고 껴안았다. 한없이 향기롭고 부드러운 향지의 속살을 느끼면서 그는 격정으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가 다가가서 뒷머리를 툭 치자 읽던 책에서 눈을 떼고 돋보기 안경알 위쪽으로 그를 올려다본다. 조 박사의 손에 잠시라도 책이 떠난 적이 없다. 짬만 있으면 버스에서든 전동차 안이건 어디서든 책을 읽는다. 소설책에서부터 천체물리학이나 영문으로 된 사이언스 같은 과학 잡지와 전문서적을 망라한다.
박사학위를 두 개나 가지고 있다. 문학박사와 물리학박사가 그것이다. 문학과 물리학을 병행해서 공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인데도 조 박사는 별로 어렵지 않게 학위를 취득했다. 천재가 따로 없다.
그런데도 조 박사는 만년 고등학교 평교사로 사립학교에서 정년퇴직했다. 고등학교와 같은 재단에서 여러 번 교수로 영입을 권유했으나 조 박사는 거절했다. 기부금을 빙자한 뇌물이 문제였다. 돈을 내고 교수가 된다는 것은 그의 자존심에 관한 문제였다. 당시 대학은 실력이 있건 없건 연줄과 돈으로 교수가 되는 것이 관례이다시피 했다. 지금도 수십억을 주고도 교수하겠다는 사람이 쌔고 쌘 세상이다.
“이번에는 무슨 책이니?”
“이거, ○○○○의 ○○○○라는 소설이야. 요즘 ○○내에서 한창 인기 있다는 소설이지.”
읽던 쪽에 손가락을 넣은 채 책의 표지를 들어 보인다. 소설 제목의 이름을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아직 읽진 못했다.
“나가지.”
그는 오늘만은 조 박사와 같이 좀 괜찮은 음식을 먹고 싶었다. 앞으로 예전처럼 자주 만날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다. 편의상 만나긴 햄버거 가게에서지만 꼭 햄버거를 먹는 건 아니다. 두 사람은 가게의 뒷문을 통해서 종3의 뒷골목으로 나온다. 누가 뭐라지는 않지만 눈치가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 골목은 60년대에서 80년대까지 사창가로 번성했다. 지금은 업종들이 바뀌었다. 1층은 거의 식당들이고 한길 도로변은 보석점들이 성업 중이다.
<장어정식>이라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는 식당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했을 때 한번 들렸던 집이다. 장어 한 마리를 구어 밥과 함께 내놓고 2만 5천 원을 받는다. 크게 마음을 먹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는 식당이다. 조 박사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돌아본다. 식당으로 들어가려는 그의 팔을 잡는다.
“뭐 하는 짓이야?”
힐책하는 얼굴이다.
“왜 그래? 나 오늘 돈 좀 있어. 오랜만에 원고료 좀 받았거던.”
거짓말이다. 원고청탁이 없어진지 오래다. 어쩌다가 조금씩 들어오는 인세마저 끊겼다. 초청 강연은 말할 것도 없다. 일흔을 넘기면서 그는 이 사회에 존재가 없는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조 박사가 눈을 부라리기까지 하면서 막무가내로 팔을 잡아당겼다. 누구보다 그의 경제 사정에 빠삭하다. 아들이 미국에서 공부한 자신의 컴퓨터 기술만 믿고 벤처 기업을 차렸다가 수십억의 빚을 지고 망해버렸다. 집을 담보로 빌려준 사업자금을 고스란히 그가 갚아야만 했다. 부부가 같이 연금을 받아, 중산층의 이상의 생활을 했는데 졸지에 빚쟁이가 되었다. 한 달에 몇백만 원씩 나오는 은행이자 갚기에 허덕이며 겨우겨우 생계를 유지해 가는 것을 알고 있다.
조 박사의 제지가 너무 완강해서 그는 더이상 고집하지 못하고 그가 끄는 대로 단골 이발소 옆 건물의 처마 끝을 이어내 식당을 차린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 웬만한 음식은 다 있다.


선지해장국 2000원 콩비지 2000원
닭곰탕 3000원 설렁탕 3000원
닭국수 3000원 순대국 5000원
닭한마리 5000원 냉면 3000원


등등의 40종류가 넘는 음식 이름이 빨간 바탕에 흰 글씨의 프린트 현수막이 비닐로 막은 바깥벽에 둘러쳐져 있다. 점심시간이어서 자리가 거의 다 찼다. 마침 안쪽에 음식을 먹고 일어서는 사람이 있어 두 사람은 그곳으로 가서 앉는다.
10여 미터 저쪽, 모퉁이를 돌아 이발소 앞쪽, 탑골공원 담벼락을 끼고 길게 노인들이 줄을 서 있는 것이 보인다. 무료급식을 기다리는 중이다. 서서 기다리기가 힘겨운 듯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노인들도 보인다. 그 줄이 어떤 때는 200미터를 넘어 한길가 경찰 지구대까지 이어진다. 식당 안이 소란스럽다. 한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70대쯤으로 보이는 늙은 사내 둘이, 거친 경상도 사투리로 음성을 높이고 있다.

“우○우, 김○준이라는 그 새끼들 말이다. 참 더러븐 놈들이제. 우○우란 놈 처가 땅 팔 때 지는 얼씬도 안 했다 카더니 장모의 계약을 돕기 위해 그 자리에 있었다고 말을 바꿨제. 우째 그런 새끼가 안 나오고 그 자리에 버티고 있노. 고래 심줄을 묵었나. 박그네가 왜 그런 놈을 끼고 있는지 참말로 모르겠다. 그런 놈을 그 자리에 계속 놔두면 박근혜 지가 더 곤란해질텐데 말이다. 김○준이란 놈은 검사들 지네들끼리 향연 받고 뒷돈 받으면서 지 동창 뒤 봐주다가 용코로 걸린기라. 일국에 부장검사라는 기 조폭보다 못한기라. 조폭은 의리라도 있쩨.”
“야아 높은 놈들이라는 게 하는 짓이 점점 점입가경 아이가. 피의자에게 뒷돈 받아묵었다는 부장판사라는 놈은 어짜고. 외국에 나가서 수십억 도박으로 돈 날린 놈이나 피의자들 뒤나 봐주고 돈이나 챙기는 거기 어떠케 판사고 검사고. 정치하는 놈들이나 판검사라는 것들이 써거면 이 나라가 다 썩는기라. 웃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말쩨. 그놈들이 현직에 있을 때, 우리가 지 놈들한테 위임한 권리를 가지고 힘없는 국민들을 상대로 갑질이란 온갖 갑질을 다 하고는 옷버꼬 나서는 전관예우다 뭐다 해서 끼리끼리 짜고 일 년도 안돼서 수십억을 챙기는 놈들이 입만 벌리면 사법정의를 찾는 놈들인기라. 내가 그 새끼들 배지 살찌울라고 베트남 가서 전쟁한 거 아니거던.”
“그런데 문제는 말이다. 지들만 잘 살면 뭐하노.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는 말 있쩨.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말 말이다. 우리 같은 서민들이 잘 먹고 잠자리가 편안해야 살아야만 지들도 잘 살 수 있다는 이치를 모르는 놈들인기라. 불란스와 러시아에서 혁명이라는 게 왜 일어났는지 니 알제. 백성들은 굶주리는지도 모르고 소수 귀족들만 잘 묵고 잘 살다가 일반 국민들이 견디다 못해 일어난 기 볼쉐비키 혁명이고 프랑스 혁명이야. 도대체 지도자라는 것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북쪽에는 귀때기 새파란 놈이 핵 장난질을 하고 있는데 그걸 막자는데도 여야 국회의원이라는 것들이 장군멍군하면서 말도 안 되는 싸움질이나 하고 있으니 말이야. 이러다간 김정은이에게 홀라당 나라 전체를 갖다 바치게 생겼어.”
목이 타는지 식탁 위에 놓인 소주병을 들어 잔이 넘치도록 따라 한 번에 입속으로 부어 넣는다. 맞은편에 앉은 사내도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르고 단숨에 마시고 다시 술을 따른다. 그들은 대낮부터 술을 마시면서 좁은 식당 안이 떠나가라 음성을 높이며 비분강개하고 있다. 누가 조용히 하라고 한마디 할 법도 하지만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다. 시끄럽긴 하지만 대부분 그들의 대화에 공감하고 있다는 표정이다.
음식 나오기를 기다리던 그는 문득 군사정권 시절 생각을 떠올렸다. 참으로 살벌한 시절이었다. 한밤중에 가죽점퍼를 입고 검은 선글라스를 쓴 사내들이 집으로 쳐들어와 강제로 아버지를 지프차에 태워 갔다. 그 후 아버지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가족들이 경찰서로 행려병자 수용시설로 사방팔방으로 찾아다니고 수소문했으나 허사였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의 아버지는 지금까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그가 집을 팔지 않은 이유의 하나는 혹시나 어느 날 거짓말같이 그의 아버지가 돌아올 것 같아서였다. 혼자 몸으로 자식을 키우느라 억척스럽기만 했던 어머니도 아버지의 실종으로 종내 몸져누웠다가 돌아가시고 말았다.
만약 지금이 그 당시라면 저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남산으로 끌려가서 반 주검이 되도록 맞고 고문을 당하거나 얼토당토않은 반공법 위반 명목으로 형무소를 갔을 것이다. 주인 사내가 곁으로 다가왔다. 식당은 60대가 넘은 초로의 부부가 운영하고 있다. 남자가 주문을 받고 설거지, 청소 같은 것을 하고 여자가 음식을 만든다.
“뭘 먹을래?”
“냉면이나 먹지.”

“아니야, 오늘은 비싼 거 먹어. 나 정말 돈 있다니까.”
이 식당에서 제일 비싼 음식이 오천 원이다. 만 원이면 두 사람이 풍족하게 점심 한 끼를 때울 수 있다. 얼마 전 청와대라는 곳에서 대통령이 여당 국회의원들과 밥 먹는 자리에 상어 지느러미 요리인 삭스핀이 나왔다 해서 화제가 되었다. 거기에 상어 알인 캐비어까지 곁들였다면 밥 한 끼에 시중 가격으로 삼사십만 원은 훨씬 넘을 것이다. 국회의원 백몇십 명이 그 밥을 먹었다니 오륙 천만 원이 한 끼 밥값으로 들어간 셈이다. 문제는 그 돈이 다 국민들의 혈세라는 점이다.
몇 년 전부터 병적으로 사람들이 먹는 것에 집착하고 있다. 그걸 광적으로 선도하는 게 TV 방송이다. 케이블 방송은 물론이고 국영방송과 공중파 방송까지 거의 매일이다시피 화면 가득 온갖 산해진미와 진수성찬을 소개하고 있다. 대부분의 서민들은 접근도 못 해보는 음식들이다. 6~7십 년대 굶주리면서 쉰밥까지 물에 씻어서 먹었던 한이 서려서라면 말이 된다. 한 끼 밥값이 적으면 3만 원에서 이십만 원, 삼십만 원을 넘어선다. 그렇게 값비싼 음식들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배고픔을 모르고 자란 젊은 세대들이다. 그들에겐 돈이 넘쳐나서 주체를 못 하는 것 같다. 청년 실업자가 10%나 된다는 나라인데 그 돈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일이다.
청년 실업률이 자꾸 높아지고 있다는 뉴스를 들을 때마다 그는 그게 <무슨 소린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60년대 그는 남대문 시장에서 지게 짐을 졌다. 짐 하나를 지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을 했다. 지게를 받쳐 놓고 하루종일 기다려도 짐 하나를 차지 못했던 날이 많았다. 치열한 경쟁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는 업종을 바꿨다. 새벽 4시 통금이 해제되면 20킬로 미터의 거리를 걸어서 남대문 닭 시장의 노동시장까지 갔다. 2원 50전의 전차 비를 아끼기 위해서다. 일진이 좋아서 다행히 공사하는 곳이 많아 일을 얻는 날이면 일당 120원을 받았다.

지금은 널려 있는 게 일자리다. 외국인 노동자가 60만 명이나 들어와 일을 하는 나라다. 가진 자의 염치 없는 탐욕이 갈수록 심화되면서 빈익빈 부익부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좁은 골방에서 라면 하나로 끼니를 해결하고 거리를 방황하는 노인들과 몇백만 명의 구조적인 빈곤층에게 TV의 맛 자랑은 모욕이자 또 다른 고문이다.
그는 조 박사의 말을 무시하고 닭볶음탕과 소주 한 병을 시킨다. 소주를 주문하는 것은 전에 없던 일이다. 조 박사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본다.
“니 술 묵을라 카나?”
“그래, 우리도 오랜만에 한잔 하자. 나 집 팔았다.”
“뭐, 집을 팔았다고? 야아! 결국 팔고 말았구나. 그 집에서 너희 한 70년 살았다고 했나? 섭섭하겠지만 잘 팔았다. 그 노무 아들 빚도 갚아버리고 이제 좀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라. 그리고 보니 이 자리가 예사 자리가 아니네. 이젠 자주 못 보겠구나. 어디로 이사 가는데?”
“용인 쪽에 있는 아파트를 계약했다.”
조 박사의 얼굴에 서운한 빛이 역력하다. 고등학교 때는 같은 반이었고 과는 달랐으나 대학도 같은 대학에서 공부했다. 두 사람이 급속히 가까워진 것은 4.19와 군사정권 반대 데모를 하면서부터다. 같이 닭장차에 실려 가기도 하고 남산과 보안대 끌려가서 발가벗겨져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직장생활을 할 때는 자주 만나지 못했으나 지금은 한 달에 두세 번 만난다. 만나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하면서 비싸지 않은 점심 먹고 서울 시네마에 가서 노인 우대 반값 영화 한 편 보고 헤어진다. 직장생활 후 서로의 안부가 궁금해서 처음 만났을 때 조 박사가 먼저 자주 만나자고 제의했다.
<우리 자주 만나자.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도 우리 살아생전에 몇 번이나 더 만나겠니?>
참으로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조 박사는 이제 혼자다. 조 박사의 아내는 너무 늦게 발견한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내를 살리기 위해 무진 애를 썼으나 허사였다. 아내가 죽자 퇴직연금을 일시불로 받아 거액의 아내 병원비를 갚았다. 조 박사에게 남은 것은 폐가나 다름없는 정릉 산비탈의 집 한 채뿐이다.
“이제 너 만나기도 힘들겠다.”
“무슨, 용인은 급행버스 타면 여기서 잠깐이야.”
“이사는 언제 가는 거야?”
“다음 주에.”
“그렇게 빨리?”
“그래, 일이 그렇게 되었어. 너무 실망하지 마라. 나 시내에 자주 나올 거야.”
“그기 그렇게 쉽겠나?”
조 박사는 서운한 표정을 쉽사리 감추지 않는다. 그 서운함이 그에게도 전이 된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침묵한다. 주문한 닭볶음탕과 밥과 술이 나오고 중국산 수입 김치와 콩나물 같은 반찬도 서너 가지 따라 나왔다. 소주병의 뚜껑을 따고 그가 먼저 조 박사 앞에 놓인 유리잔에 술을 따른다. 잔이 차자 조 박사가 그의 손에서 술병을 받아들고 그의 앞에 놓인 술잔에 술을 따랐다. 술잔을 동시에 들어 올려 부딪혔다. 목소리를 낮게 <위하여!>라고 말하고 술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무엇을 위해선지 모른다. 건너편 자리의 비분강개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 30년의 군사독재가 이 나라를 4분 5열 시킨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한 나쁜 놈들은 고시 공부를 한 놈들이야. 소위 판검사와 변호사라는 놈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는 기라. 그 좋다는 대가리 가지고 사람 되는 공부는 안 하고 법조문 딸딸 외워서 세 치 혓바닥으로 온갖 합법을 가장해서 권력을 남용하고 뒷돈 받아 챙기면서 국민들을 우습게 보는 기라. 그뿐이면 내 말도 안 한다. 그런 놈들이 법복 벗으면 또 국민을 지 맘대로 주무르고 갖은 특권을 다 누리는 국회의원이 돼 가지고 온갖 위세를 다 떠는 기라. 보라고 국회의원이라는 놈들 삼분지 이 이상이 판검사 했던 놈들이 아니겠어. 그놈들이 다시 국회의원 돼가지고 나라를 망치고 있는 기라.”
“야아! 그건 너무 심하다. 판검사나 국회의원이라고 다 그런 건 아니잖아. 그중에 몇 놈들만 그렇지.”
“뭐가 심하다는 거야. 그놈들이 그놈들인데. 판검사 국회의원 그놈들 권력 누가 위임한 줄 알아. 시팔노무 새끼들 그 권리, 나라 잘 이끌어달라고 우리가 위임한 거야. 지 배때기가 웬만큼 부르면 그다음엔 나라 생각도 하고 국민들 생각도 좀 해야 되는 거 아니야? 개새끼들, 양심이라는 것이 눈곱만치도 없는 더러운 놈들이야.”
“니말이 옳긴 하지만 생각해봐. 우리가 민주주의 한 지 얼마나 됐어. 겨우 삼십 년이 지났어. 지금은 과도기라고 생각해야 돼. 세월이 흐르면 차차 나아지겠지. 미국도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데 이백 년이라는 세월이 흘렸고 민주주의 본산이라는 영국도 우여곡절 겪으며 몇백 년이 걸렸어.”


다락은 길고 넓지만 천장이 낮다. 지붕의 경사면과 바닥이 만나는 북쪽 구석에 두꺼운 마분지로 만들어진 종이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엉금엉금 기어서 상자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상자 위에 작은 입자의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다. 먼지가 날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상자의 뚜껑을 연다. 다행히 상자 안은 깨끗하다. 카키색 포장지에 싸인 그림액자와 문진(文鎭)은 그가 간수한 그대로 얌전히 상자 바닥에 누워 있다.
본디 이 그림 액자와 문진은 그의 서재에 있었다. 어떤 계기로 향지와의 사이를 아내가 알게 되면서 다락방으로 추방되고 말았다. 결혼하기 전의 일인데도 아내는 그 사실을 참아내지 못했다.

포장지를 제치자 그림이 나왔다. 활짝 핀 호박꽃과 반개한 호박꽃을 중심으로 진녹색의 잎 넓은 호박잎을 배치한 6호 크기의 유화다. 세월이 한참이나 흘렀는데도 이 그림을 보면 그는 언제나 가슴이 먹먹해진다.
모처럼 조 박사와 그가 정릉 집에 있던 날 형사들의 급습을 받아 피할 겨를도 없이 형사들에게 제압당했다. 대역죄인처럼 포승줄에 겹겹이 묶여서 호송차에 실렸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향지가 그의 부탁을 받고 비밀리에 그의 동지들을 만나기 위해 시내로 나간 날이었다.
그날 이후, 그는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었다. 터무니없는 간첩죄를 뒤집어썼다. 향지는 물론 같이 잡힌 조 박사와 조 박사 가족의 소식도 듣지 못했다. 형무소를 나와 조 박사의 집을 찾아가서야 두 사람이 잡혀가던 날 향지도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아리랑 고개에서 정체 모를 군용 지프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가 엉터리 재판을 받고 형무소에 있는 동안 국회라는 곳에서 3선 개헌이 날치기로 통과되고 다시 영구집권을 위한 유신헌법이라는 게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그림 액자와 문진을 조심스럽게 다시 상자에 넣은 다음 뚜껑을 닫았다. 상자를 가슴에 안고 머리가 천정에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다락방을 내려왔다. 집 밖으로 나와 승용차 뒷자리에 상자를 실은 다음 문을 닫았다. 운전석에 오르기 전에 무심코 얼굴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서울 하늘은 여전히 중국에서 날아온 황사와 미세먼지로 갇혀 있는 듯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