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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2017년 [수필] 그대, 감자 같은 생이여 / 노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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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023회 작성일 17-12-13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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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9월은 참 따스했습니다.

바라보는 햇볕이 고맙고, 바람이 고맙고,

들풀도 다시 만나 고맙고, 텃밭에 갈무리할 것이 고맙고,

곁에 있는 사랑하는 많은 분들이 고맙고...

1년 전 9월, 병실에 누워 가을이 가는 줄 모르고

계절을 잊고 살았습니다.

다시 시간을 주신 모든 것들에게 감사를 드리는 마음입니다.

다시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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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감자 같은 생이여


계절을 넘기면서 통과의례처럼 맛봐야 하는, 딱 그때마다 먹어 주면 좋은 것들이 있다. 계절 구분 없이 농산물을 접하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제철에 먹는 보약만 한 음식이 또 있을까? 강원의 산하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감자. 5월 중순이 되면 계집애 웃음 같은 감자꽃이 핀다. 초록 들꽃밭이 장관을 이룬다. 소박한 흰 꽃과 보라색 꽃이 초록빛 사이에서 물결친다. 보라색 사이 노란 술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고운 색깔의 함정 같다. 보라와 노란색의 조화가 참 곱다. 프랑스 왕궁에서 감자를 관상용으로 재배했는데, 마리 앙투아네트는 감자꽃을 머리 장식으로 사용한 적도 있다고 하니 그 아름다움은 일찍이 알려진 것 같다.


감자의 생일인 하지가 되면 뻐꾸기가 울고, 튼실해진 햇감자를 만날 수 있다. 조급한 마음을 누르고 몇 포기 캐어 보면 이 시기가 유난히 감자 껍질이 얇다. 그때만큼은 칼로 감자를 깎지 않았다. 모지랭이 숟가락으로 긁어야 껍질이 많이 깎여 나가지 않으므로 그 먹거리를 아껴야 했던 어려운 시절의 지혜였을지도 모른다. 소금을 넣고 쪄내면 팍신하고 포슬포슬한 감자를 만날 수 있다. 감자 순이 누렇게 변하면 보통 감자를 캐었지만 장마를 만나면 감자가 땅속에서도 썩어버리니 요즘은 하지만 지나면 바로 캐어낸다. 하지만 전분은 캐기 직전에 많이 생긴다고 최대한 땅속에 두고 감자순이 다 마를 때까지 기다렸던 기억이 있다.


감자 재배가 적정한 기후인 강원도 어느 집이나 그렇듯이 우리도 감자 농사를 많이 지었다. 우선 햇감자를 조금 캐면 소금을 넣어 찐 감자로 맛을 보고, 조금 지나면 굵은 감자를 골라 못으로 구멍을 숭숭 뚫어 만든 강판에 쓱쓱 갈아 호박과 부추를 넣은 감자 부침으로, 그리고 감자볶음 반찬을 하고, 밥에 쪄서 먹고, 감자옹심이를 하고, 감자를 갈아 시루떡을 먹기도 하고, 우리 집만의 감잣국을 끓이기도 했다. 지금같이 감자칩이나 샐러드 같은 세련된 감자 요리는 없었지만 어렸을 때 먹던 감잣국은 어느 집에서나 먹는 음식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건 어디서도 맛보지 못한 엄마만의 요리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심지어 요리연구가들의 요리 목록에도 없는 엄마만의 감잣국. 감자를 썰어 물을 넣고 국간장과 소금으로 간을 하고 고춧가루를 약간 넣고 끓이다가 마지막에 파와 마늘을 넣어 끓이고 먹기 전 들기름을 조금 넣어 먹는 감잣국. 감자같이 올망졸망 달린 오 남매를 두고 40대의 나이에 엄마는 서둘러 세상을 떠나셨고 엄마만의 감잣국은 그 후 먹을 수 없게 되었다.


결혼 후에 엄마가 생각나고, 햇감자가 나오는 시절이 되면 유독 엄마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럴 때마다 연례행사처럼 감잣국을 끓여서 남편과 함께 먹었고, 먹을 때마다 감잣국에 대해 참으로 특별하다 했다. 보기엔 느끼한 맛 같은데 고소하고 구수한 맛이라니. 네 자매가 둘러앉으면 엄마의 감잣국 얘기를 많이 나눴다. 모두 결혼해서 그 감잣국이 생각나 끓여 먹었다고 한다. 엄마가 끓였던 감잣국은 네 자매에게 고스란히 기억되어 가족에게 맛보이는 음식이 되었고 엄마를 생각하면서 정을 나누는 소울 푸드가 되었다.


감자를 많이 심는 대농은 아니라서 감자에 물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여름 뜨거운 날이면 헛간으로 감자를 나르고, 굵기 별로 선별하고 상처 나고 썩은 것은 따로 골라냈다. 썩었다고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외면할 수 있는 썩고 상처 난 것, 탁구공만 한 작은 것들은 버리지 않고 마당의 우물가로 모두 가져왔다. 먹을 것이 변변치 않던 시절, 어른들이 대물림처럼 해오던 먹거리를 위해 깨끗이 씻은 감자는 항아리나 큰 고무통에 담았다. 뜨거운 여름 햇빛 속에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변신을 꿈꾸고 있었다. 마당 우물가를 지날 때마다 코를 움켜쥐며 저 썩어서 냄새나는 것들이 언제 없어지는지 시간이 빨리 지나기를 바랬다. 20여 일 정도 썩힌 감자는 껍질과 녹말을 분리해 체에 거르고 씻어내고 녹말을 그릇에 담고 물을 부어 여러 번 우려내어 감자의 쿰쿰한 냄새를 없애버렸다. 그렇게 그릇에 담겨서 여러 날 물을 바꿔가면서 몸을 씻은 녹말을 물을 따라내고 펼쳐 말리면 뽀득뽀득한 감자녹말이 된다.
항아리에 보관해둔 감자 가루를 익반죽하고 강낭콩이나 팥을 소로 만들어 납작하게 송편처럼 빚었다. 이걸 찌면 색깔은 뽀얀 흰색이거나, 회색빛 투명한 감자떡이 된다. 지금은 수입 녹말로 공장에서 만든 감자송편을 쉽게 만날 수 있는데 직접 만든 감자녹말가루는 어딘가 모르게 쿰쿰한 냄새가 살짝 배어 나오는데 아주 달큰하고 쫀득한 식감의 감자떡은 이제 만나기 어렵다. 이렇게 여러 과정을 통해 감자의 모양은 가루로 탄생하는데 누가 감자를 홀대하겠는가? 버려지는 일 없는 이 감자. 음식의 용도가 여러 과정으로 탄생하듯이 감자처럼 썩고 가루가 되어 또 다른 맛으로 기억되는 그런 삶으로 채워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