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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2017년 [수필] 감정 노동 외 1편 / 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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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972회 작성일 17-12-13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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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참 예쁘다.

늘 내게 찾아와 주는

그 가을이 예쁘다.

그리고 열심히 살아와 준

나도 예쁘다.

그런데 뭐가 문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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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노동


어느 모임이든 가보면 내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이 꼭 한 둘 있다.
그냥 말하고 싶지 않고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싶다. 우리는 애써 그 마음을 감추고 미소를 보낸다. 딱 저 사람만 안 보았으면 좋겠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 사람과의 나의 악연은 계속 시작된다. 공교롭게도 우연히 옆자리에 앉는다. 애써 옆자리를 피하며 멀찌감치 떨어져 않는다. 사람 수가 많아지면서 자리는 좁혀지게 되고 결국 내 근접 자리까지 오게 된다. 아니면 바로 옆자리로 오게 된다. 그도 의도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때 나의 감정노동은 시작된다. 내 마음속의 감정들이 뒤섞이며 나의 뇌 속은 주인의 표정관리를 위해 어떤 것이 옳은지 제대로 판단을 해야 한다. 미소를 지어 줘야 하는지 외면하며 무시하는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공격성을 띠며 말 하나하나에 받아쳐야 하는지 나의 머리는 복잡해진다. 순간 나의 감정들은 힘겨운 노동을 한다. 물 섞이듯 자연스럽게 하는지 물과 기름이 되는 듯 나의 감정 분장을 시작해야 하는지 머릿속은 어지럽다. 잘 판단해야 한다, 그래야 비난받지 않고 겉으로 봐도 너그러운 사람인 척 내 편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애써 그 순간을 모면했다. 나는 이렇게 내 감정에게 무거운 노동을 안겨 준다. 내가 이렇게 감정 노동을 할 동안도 그 당사자인 사람도 나처럼 힘겨운 감정싸움을 할지도 모른다.
멀리서 아는 이가 온다. 낯익은 이다. 아마도 내게 수업을 받았던 아이의 엄마 같았다. (그가 나를 아는 척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다. 이제는 그 애를 수업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아는 척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예의가 있는 학부모는 먼저 꼭 인사를 한다. 내가 그 아이를 기억하지 못할 만큼 오래된 시간이 지났어도 목례라도 한다. 난 속으로 참 예의가 있다고 흐뭇해한다. 기분이 참 좋다. 그러나 분명 아는 이인데 나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써 딴 곳을 바라보는 이도 간혹 있다. 그러면 기분이 참 나쁘고 또 내 기준의 잣대로 참 예의 없다. 내가 참 잘못 살았나 하면서 나를 자책하기 시작한다. 그게 뭐라고 그 아는 척이 뭐라고 그날은 기분을 다 망친 것 같다. 요즘 세상 자기 자식 담임도 안 챙기고 아는 척도 안 하는데 내가 뭐라고 그깟 몇 년, 몇 달 미술 배운 선생이 뭐라고 애써 나를 위로 하며 합리화시킨다. 나의 오버이겠지만 기분은 솔직히 그렇다.
나도 그렇게 정말 보기 싫고 어디서든 마주치지 않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그럼 그 모임을 하지 말든지 그 사람을 영영 안 보든지 하면 될 텐데 왜 힘들게 내 마음을 혹사 시키면서까지 나가는지 모르겠다.
세상이 그렇게 만만치가 않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지는 않기 때문이다. 피하면 피할수록 어디서든 만남이 잦아지고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 원수처럼 꼬인다. 그러다가 억지로 곁에 앉아 다시 상태가 복귀되기도 하고 더 일그러지기도 하니 나를 위로한다. 그도 그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나의 감정싸움에 더 이상의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방어한다.
우리의 감정은 이상하리 만큼 느낌이 전해진다. 일부러 피하는 모습인지 정말 본 것인지 명확히 구별해주는 착한 마음의 눈이 있기 때문이다. 그 몇 초 때문에 평소에 자신감이 넘쳤던 나는 그날 행복한 마음도 상하고 만다. 나의 정서적 자원을 고갈 시키면서까지 마음은 긴장하고 위축된 모습으로도 전략하고 만다. 그 몇 초를 위해 나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였다.
나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저렇게 상대적으로 똑같이 외면한 적은 없었는지 생각해 본다. 많다. 가식이 섞인 아주 짧은 미소로 그러나 눈빛은 마주치지 않으면서 말이다. 또 나에게 적을 두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를 생각도 해본다.
인간이란 본시 나를 나타내기 좋아하고 나를 위하는 마음이 가장 최선에 있을 때 자신의 위치 선정을 아주 높게 측정하는 버릇이 있다.
어딜 가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열이면 그중 둘은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둘 만인 것이 참 다행 아닌가? 그만큼 내가 잘살아왔다고 나를 위로 할 법도 되건만 나는 많은 욕심을 부린다. 모두가 다 나를 좋아해 줄 것이라는 착각을 한다. 그러나 착각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힘든 감정 에너지는 나의 육체적 건강에까지 손실을 준다.
감정이란 우리가 세상과 대결하며 생존과 진화를 위해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내는 환경에 대응하는 반응 시스템이라고 한다. 뇌 과학적으로 보면 뇌의 안쪽 뇌(변연계) 안에 포함한 편도체가 분노의 중심지인데 화가 나면 이 편도체로 들어간다. 이때 편도체는 이 화 감정을 전두엽으로 보낼지 대뇌겉질로 보낼지 결정한다. 분노의 감정이 커지면 전두엽의 혈류가 증가하기 시작한다. (‘아 느끼는 뇌로 들어가 버리면 우리 주인이 폭발 하겠구나, 논리 사고를 담당하는 뇌로 들어가자’) 이때 분노의 중심지인 편도체는 혈류가 빠르게 증가하는 바깥 뇌 전두엽으로 들어간다. 화가 나더라도 참게 한다. 우리의 똑똑한 뇌는 편도체와 전두협의 균형을 잘 조절 한다. 그런데 이게 조절이 안 되거나 손상되면 우리의 그 화난 감정은 편도체가 전두엽을 압도한다. 그러면 느끼는 뇌로 들어가 이성, 논리 생각할 시간도 없이 이 분노에 불을 지펴 방아쇠가 당겨지고 편도체가 광분하기까지 몇 초도 안 걸린다는 것이다. 드디어 폭발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똑똑한 뇌를 나의 감정노동으로 힘들게 하고 지치게 한다. 또 우리의 감정 호르몬에 영향을 주어 균형도 잃게 된다. 우울해지거나 속상한 감정이 증가해 식욕도 떨어지고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도 감소하여 우리의 감정을 늘 피곤하고 짜증나다로 물들어 버리게 된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과도한 스트레스를 주고 나의 뇌를 망가뜨리며 건강도 잃게 한다.
이 모든 감정싸움들은 다 내 감정에서의 시작이다. 남을 미워하는 감정도 남을 혐오하는 감정도 내 출발점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를 아는 척하지 않은 감정도 상대는 내가 표 내지 않으면 모른다. 다만 감정처리 과정에서 내가 나를 힘들게 하며 옛말로 나를 볶는다. 즉 나의 자존심이다 뭐다 하면서 나를 과시하려는데 있는 것이다. 나를 과대평가 하는데 있는 것이다. 이러니 우리 자신의 건강한 삶을 위해서 감정 노동에 충실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지킬 것이 많다. 잘 먹고 잘 자야 한다는 것, 다른 사람의 행동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 또 오지랖질 하지 않고 나나 잘사는 것, 아는 이가 나를 애써 피하면 피해줄 것, 그 감정에 내가 슬퍼하지 말 것, 그리고 다른 사람 감정에 동요하지 말 것이다. 나는 그동안 쓸데없이 나의 소중한 감정을 스마일마스크 증후군(smile mask syndrome), 가면 우울증(masked depression) 등으로 나를 들볶았다. 그런 것들을 치우자, 감정노동에서 벗어나자. 그리고 이제는 진짜로 해피 스마일하자. 해피스마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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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덩어리들 버리다


십여 년만에 집 정리를 했다.
얼마나 오래된 짐들이 끌려 나오는지 힘겨운 싸움을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십 년만인 게다. 그 긴 시간 동안 이 많은 잡동사니를 안고 살았다.
나의 잡동사니 2가 탄생한 것이다.
버릴 것인지 또다시 넣을 것인지 갈등들은 끝없이 반복되었고 결국 내 힘으로는 안 되고 타인의 손으로 버려졌다.
무엇이든 미련이 많은 탓에 나의 집안은 온통 잡동사니들로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수업하려고 쌓아 놓은 종이들, 추억이라며 모아 놓았던 사진들, 읽지도 않으면서 쌓아둔 책들, 지금은 듣지 않는 카세트테이프들, 가전제품들, 그릇들, 수많은 옷가지 등이 수북하다.
내 생각이지만 우리 집은 없는 게 없다. 뭐든 다 있다. “무엇이든 필요한 것은 물어보세요.” 하며 농담을 하지만 내가 봐도 너무하다. 내가 쌓을 수 있는 곳까지 책들과 수업 자료들로 가득하다. 식탁과 침실. 심지어는 화장실까지 침범한 상황까지 되었다. 아니 구석, 구석 빈틈조차 여유를 주지 않았다.
책들은 언제고 읽은 것이라 못 버리고, 수많은 수업자료들은 수업해야 하니 못 버리고, 옷들은 언젠가 유행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못 버리고, 여기저기 아이들이 써준 편지들은 그 아이들의 정성이라 못 버리고, 많은 테이프들과 사진들은 추억이라 못 버린다. 이 모든 것들을 미련이란 이름으로 버리지 못했다.
왜 나는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가끔 내가 저장 강박 관념이 있는 것이 아닌지 갑자기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나도 나름 치웠다. 의도치 않게 그리된 것도 많았다. 아들은 믿지 않았지만 치웠다고 주장했다.
“엄마 물건을 하나 새로 사면 옛것은 꼭 버려 알았지?”
아들의 성화에도 난 이적지 같이 두고 살았다. 그러면 새것을 산 의미가 없다고 난리를 부리는데도 한 번 더 쓰고 버린다고 한 것이 이처럼 쌓아두고 산 것이다.
보다 못한 아들이 지인 동생과 힘을 합치더니 작정을 하고 버리기 시작했다. 적어도 한 트럭을 버렸을 것이다.
어느 정도 정리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두 사람은 아직 반 이상은 더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들이 야단법석이다. “버려, 버려...” 내가 볼 때는 정말 많이 버렸는데 거실이고 주방이고 휑하건만 아니라고 하니 속이 탄다.
그 많던 시간들에 모아 놓았던 것들 버리려니 이리 힘겨운 것이다.
이것저것 버리고 나니 빈자리 여기저기에 스티커들로 끈적인다.
아이들이 수업하면서 나 모르게 장난삼아 붙여 놓은 것들인가 보다. 꽤 된다. 꼭 들러붙어 떼어지지 않는다. 붙일 때는 그리 척 잘 달라붙더니 왜 이리 안 떼지 것인지 여러 가지 방법 써 봐도 안 된다. 조그마한 스티커 하나로 열을 받아 밤새운다. ‘니가 이기냐? 내가 이기냐?’ 하며 아침까지 실랑이를 하다 결국 떼지는 못했다. 물을 부어 질척하게 해놓았다. 오후 시간이 되니 저절로 다 떼어졌다. 나는 별것 아닌 것에 목숨 걸듯 미련한 오기를 부린다.
또 가끔 재봉하다 잘못 박은 것을 다시 뜯으려고 하면 진땀을 쏟는다. 아니 박을 때는 스스르 잘도 박히더니 왜 이리 안 뜯어지는 거야.

문득 그 스티커와 잘못된 박음질을 보면서 우리의 인생도 이렇지 않은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질긴 인연이라고 했고 미련이라 했나 보다. 그렇다고 그 버리지 못한 것들을 인연이라고 합리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질긴 인연이다. 그래서 못 버린 것이다.)
나는 사람과의 만남에서도 쉽게 잘도 만나지지만 헤어짐을 두고는 참 미련이 많다. 나를 힘들게, 모질게 하는데도 정을 떼지도 못하고 그 마음을 비우기 쉽지 않다. 그렇기에 마음을 더 많이 상하고 힘겨운 싸움으로 나를 혹사시키기도 한다. 좋지도 않으면서 거절하지도 못하고 갖고 싶지도 않으면서 주면 받아오고 하던 나의 습성이 이렇게 되었나 싶기도 하니 한심스럽다. 이 모든 것들이 나를 이기지 못하는 나약한 인생 같아 슬프다. 버려야 할 것들도 못 버리고, 힘들게 하는 사람들도 인연을 끊지 못하는 나. 그러나 이제는 나를 힘들게 아프게 하는 사람들과도 이별을 고하자. 미련을 두고 가슴 아파하지 말자. 모 신부님 말씀 마따나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은 만나지도 말라 말씀하셨다. 그래 만나지 말자. 이제 나의 모든 건강을 위해서 앞으로는 당장 쓰지 않을 물건들, 2년 동안 안 쓴 물건들은 모조리 버리자. 더구나 집안에 많은 물건들이 쌓이면 풍수지리설로도 복이 달아난다 하고 대인관계도 나빠진다고 한다. 현관은 늘 깨끗해야 하고, 우산은 꼭 우산꽂이에 두어야 한단다.
에너지가 침체될 때 잡동사니가 쌓인다 한다. 쌓이는 물건이 많으면 사람이 살아가는 에너지 흐름이 좋지 않다고 한다. 버리자.
언젠가 쓰일지도 모른다는 나의 강박 관념들로 소중한 긴 연휴에 쉬려고 온 귀한 아들을 몸살 나도록 부려먹고 말았다. 버릴 물건들을 수없이 들어 나르는 아들이 미안해 이사하는 거 같다 했더니 아니란다. 리모델링 하는 것 같단다. 서로 크크 거리면서 치우기는 했다. 여자 친구까지 데려와 말끔히 정리를 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결국, 가기 전날 몸살감기를 앓다 갔다. 집은 깨끗하게 정리가 되었지만, 미련한 엄마의 욕심 때문에 몸살 난 아들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나도 버리는 것들이 너무 많아 그 미련이 많았던지 며칠 동안 몸살감기로 눕고 말았다.
“여보게 저승 갈 때 뭘 가지고 가지”
석용산 스님의 말씀을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