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뫼 호수별 보기

47호2017년 [시] 산토리니의 포도 외 9편 / 양양덕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728회 작성일 17-12-13 17:11

본문

아침저녁 서늘한 바람에 무릎이 시라다,


내가 내 삶을 살아가는 건지

삶이 나를 끌고 가는 것인지

아침에 눈만 뜨면

오늘은 이거 이거 하고 또 내일은...

나이 들어서도 쫓기는 삶이다


언제나 이맘때쯤이면

시 10편을 만드느라 또 쫓기는 마음이다.


올해도 내 시들에게 미안하다.


--------------------------------------------


산토리니의 포도



사월
뱀들이 똬리를 틀고 있다


사나운 바람, 추위를 이겨내느라
둥글게 몸을 꼰 채로
알 낳을 채비를 한다


연둣빛 이파리 하나둘 피어나고
거므스름 몸통 굵어져 간다


머지않아 주렁주렁 초록빛 알들
따가운 햇빛 받아먹고
살쪄가리라


달콤힘으로 사람을 홀리고 취하게 만들
향긋한 송이송이


----------------------------------------------


아직도 아는 것이 없다



문득
손등 주름살이 눈에 들어온다
서러움이 울컥 마음에도 주름을 긋는다


돌아보면 긴 세월인데
눈앞을 스쳐 가는 잠깐임은
또 웬일인가


함께했던 정인들 하나둘 떠나고
나 또한 흙과 벗할 날 머지않건만
아직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어디서 왜 어디로
신의 뒷모습 아닌
앞모습을 보고 싶다


----------------------------------------------


작은 낙원



함박눈 쏟아지는 겨울밤
따뜻한 아랫목 이불 속
이곳이 정녕 낙원인가


꼭꼭 닫았던 몸속 세포들
느슨하게 문을 열고
날카롭게 세웠던 마음의 각
스르르 무너진다


엄마의 양수 속이 이랬을까


험한 세상 어디 있으며
내일은 또 무엇이람


지금 내 몸을 휘감는 따사로움에
모든 것 녹아내리고
무뇌의 몸이 되어
평안의 늪으로 빠져든다


------------------------------------------------


버림받은 너



아스팔트 위
바람이 너를 몰고 다닌다


버림받은 아픔에
바짝 말라버린 몸뚱아리
우르르 쫓겨 다니다
막다른 골목에 갇혔다


서로의 몸에 얽히고 설킨 채
바스락바스락 신음하는데
붉은 한숨 토하며 서산 너머 사라지는 태양


그래도
부서져 가는 몸 부둥켜안고
내년 봄 다시 피어날
어린싹을 꿈꾸는 너


----------------------------------------------


내 인생의 겨울



어두운 하늘에
총알 하나 박혀 있다


지저분한 내 심상 덜컥 내려앉는
섬찟한 밝음을 쏜다


본향 가는 마지막 모퉁이
막 돌아선 내 인생길
부끄러움 수북이 쌓여
무겁기만한 발걸음이다


모두가 돌아가야 할 낯선 길
두려움에 오늘을 떨구지 못하고
세월 뒤꿈치를 붙잡는다


커다란 등잔 심지 돋우고
반짝이는 별빛 같은
맑은 마침표를 찍고 싶었는데


----------------------------------------------


씨앗의 비밀



조그만 정원에 해바라기 한 그루
하루내 해를 쫓다 지쳐 고개를 떨군다


흙 속에는 무슨 마법이 있을까
조그맣던 씨앗이 해처럼 큰 꽃이 되다니


주먹만한 아이가 커다란 어른이 되고
또 주먹만한 아이를 낳고
돌고 도는 비밀의 쳇바퀴 속에
너와 내가 있다


한 줄 역사를 남기고 흙의 묘약으로 돌아가
씨앗의 비밀이 된 우리


---------------------------------------------


낯선 풍경



오월 잔광이
설산을 품고 있다


두 눈 가득 채운 청보리 사이로
빨간 양귀비 보일 듯 말 듯


신호등만 허리 굽혀 손님을 맞는
루불라냐 거리


성의 주인을 몰아내고
독립을 외치던 붉은 함성
이제 평화로운 숨결 되어
광장을 메우고 있다


낯선 이방인도 함께


---------------------------------------------


선택의 착각



풀 중에 선택받은 것
채소라 부른다


그물망에 걸려올려진 젊은이
취업자라 으시대며
화이트 칼라 옐로우 칼라
계급을 정하고 뜀박질한다


대지의 젖줄은 모두에게 공평하고
신의 사랑도 전체를 향하건만
행운의 또랑물 한곳에 모아
세상 주인공인 양 군림한다


영원한 이 땅 주인 없듯이
나 또한 우주의 한 조각 찰나인 것을
숱한 세월 지불한 후 깨달았다


정점이 바로 저 앞인데


-------------------------------------------


주산지의 아침



영혼마저 씻기울 맑은 물
그 속에 몸을 담근 채
백오십 년을 살았다


허공처럼 투명한 그 물을 먹고
영원을 조금씩 몸에 쌓으며
나무는 신선이 되어갔다


언제였을까
사람들의 탁한 숨기운에
생명이 시들고
켜켜이 묵은 고요가 사라진 것이


아 들리는가
왕버들의 아파하는 소리
주왕산 별바위가 서둘러 아침을 깨우는
짠한 마음이


---------------------------------------------


수도사의 꿈



천년도 넘는 오래전
까마득한 바위 위에 집을 짓고 살았다


신께 가까워지고 싶은 걸까
세상 냄새가 역겨웠을까


묵주를 친구 삼아 기도와 찬양으로
평화와 천국을 맛보며
영적 오아시스가 되었단다


사다리와 줄을 타고 오르내리며
신을 향한 사랑만 가득 채워
신 아닌 신이 되어갔을
수도사의 꿈


오랜 세월 지났어도
수도원 구석구석
무형의 발자국들
찾는 이 마음까지도 여미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