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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2017년 [시] 노가리 외 8편 / 정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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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727회 작성일 17-12-13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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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처럼 살고 싶었다.

한 편의 시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시도 제대로 못 쓰면서 시인이 되고 말았다.

쓰면 쓸수록 늘 뒤통수가 부끄러웠다.

삼류시인임을 고백한다.

삶은 난해했고

나는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적이어서

좋은 시 쓰기는 틀렸다.


그대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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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리



노가리의 고향은 을지로다


저녁마다
노가리로 만선이 된 맥줏집
셔츠 소매를 걷고
넥타이를 푼 채
질겅거리며 씹고 있는 허무맹랑한 말들
노가리가 되어
다시 먼 바다로 흘러든다


사랑한다고
너 없이는 못산다고
혀 꼬부라진 소리로 고백하다
고꾸라진
옆 테이블의 명태 한 마리
흥,
노가리 까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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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발짝



찌개에 넣을 두부를 꺼내려고
냉장고를 열었다
한참을 서 있다
문을 닫고 돌아섰다
싱크대에서 냉장고까지는 딱 세 발짝
그새 까먹은 것이다
오십 년을 걸어온 길보다
더 먼 세 발짝
웃기면서도 눈물 나는 세 발짝을 위해
냉장고를 열 때마다
물건 이름을 외우기로 했다


오늘 저녁 삼겹살을 굽다
소주 한 잔 생각나
소주소주소주소 외우다
주소를 왜 여기서 찾지
갸우뚱거리다
냉장고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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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밟고 가는



젊은 여자가
아기 손을 잡고 제비꽃처럼 걸어간다
아장아장 걷는 작은 우주
지금 엄마 손은 탯줄이다
손과 손으로 흐르는 인연이 배경이 되어
걸어가는 뒷모습 눈부시다
액자가 없어도 그림으로 걸리는
엄마와 아기가 있는 풍경


아들이 첫걸음을 떼던 날
몽돌 같은 발에 입 맞추며
나도 세상을 향해 다시 첫걸음마를 했다
작은 손 꼭 잡고 제비꽃으로 피던 순간들
언제 서로의 손을 놓쳤는지 기억에 없지만
까마득한 후회
아들은 나의 바깥으로 타인처럼 멀어졌다


넘어질 듯 뒤뚱거리는 아기 발이
꾸욱 내 가슴을 밟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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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죤



회전하는 것들의 내면은 언제나 둥글죠
속이 둥근 세탁기 위, 비둘기 한 마리
은근슬쩍 둥지를 틀었죠
네 식구가 언제나 토닥거리는 이 집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을 허밍 하며 평화를 입죠


지구처럼 세탁기는 날마다 돌아가죠
아직 비둘기를 만나지 못한 저 호전적인 몸통들
서부의 총잡이 같은 물 푸른 청바지가
둥근 머리를 빠져나온 티셔츠와 월남치마를 잡아당기며
몸싸움을 하네요
몰래 다리 한 짝 숨긴 청바지
팔 없는 티셔츠의 목을 조르지만 헛된 싸움이죠
비둘기에게 타전된 평화가
마지막에 그들을 구하기로 예정되어 있죠
어떤 향의 평화를 원하세요?
핑크로즈, 옐로미모사, 블루비앙카, 소프트화이트
혹시 비둘기의 이름이 맘에 들지 않나요
이란, 이라크, 파키스탄, 이스라엘보다 훨씬 안전하지요


물 한 방울 없이 종전된 탈수가
강강술래를 돌며 둥근 평화를 만들고 있네요
비둘기가 흘린 눈물에 부드러워진 지구촌의 몸통들이
화합처럼 악수하며 은유의 향을 발산하죠
알파벳이 쓰인 티셔츠를 탁탁 털면

피죤 밀크를 먹은 새끼비둘기들처럼 포근해지는 가슴께
어지간한 집 세탁기 위에 죄다 둥지를 튼 물 비둘기
드디어 대한민국 텃새가 되었군요


*비둘기집 노래 가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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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



한 번도 꽃 피운 적 없었던 것처럼
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처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당신을 벗어 버린 그녀는
지금, 잘살고 있습니다
키스인지 입술인지 모를 아릿한 자국을 남기며
온몸으로 당신을 글썽거리던 맹세
모조리 삭제하고
새 출발 하였습니다 그녀는


벚꽃이 이별로 흩날리는 것도
우리가 머물렀던 시간 잊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숨 막히게 당신에게로 퍼붓던 손짓들을
꽃이었다고 전하지 않겠습니다
한 번도 사랑한 적 없었던 것처럼
는개 내리는 거리에서 우리는 어깨를 스치며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쳐 갈 것을
이젠 믿겠습니다


단단한 기억 속에 박혀 있는 꽃피운 흔적들이야
상처를 지닌 사람만이 읽어 낼 수 있는
옹이겠지만
연고를 바른 듯
꽃 버린 자리마다 감쪽같이 새살 돋아
말짱한 초여름
푸른 잎 무성한 과거를 그늘 삼아

표정 없이 멀어지고 있습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내일을 끌고 가는 그녀의 발걸음이
저 멀리 봄을 빠져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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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커피



너를 뺀 나는 어둠이었네
캄캄한 너를 앞에 놓고
나 먹빛이네
네가 열었던 내 안의 문들
천천히 닫히고
마지막 한 줄기 빛
흔적도 없이
까맣게 울고 싶었네


한 모금씩 줄어드는 우리
검은 눈물로
따뜻했던 시간들
이제 빈 잔으로 놓였네
이국처럼 멀어질 쓰디쓴 너를
단숨에 마셔야겠네
가장 어둠이 짙은 시간에
새벽이 오듯
환한 어둠 속으로
우리 천천히 녹아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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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염색하며



막,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다
뽀얀 젖니가 올라오면서 아이가 말을 트듯
파꽃처럼 수다스럽게 올라온 흰머리
나는 지금부터 중년의 필체로 붓을 잡아
한 가닥씩 말을 걸어
먼 기억의 뿌리부터 깨워 볼 참이다


염모제와 중화제를 섞어 철없는 나이를 만든다
이 나이는 모든 경계의 선(線)이 허물어지지만
특히 청춘이 넘어간 지점부터 바짝 신경을 써야겠지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간 시간 속을 헤매다가
후회할지도 몰라


비닐을 두른다
가장 오래된 시간의 뿌리부터 더듬더듬 내려가면
흔들린 시간들 부스스 끊어져 내리고
수십 명의 내가 걸어간 끝에
낯선 여자 하나 갈대밭에 서 있다


그녀를 만나기 전
자연 갈색 3호로 나를 통째로 염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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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습관



오늘도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그대는
오래된 습관이다


관절이 욱신거리고
목젖도 뻑뻑하여
아스피린 몇 알과 흐린 하늘을
삼킬 나이쯤 되면
푸른 핏줄로 일어서는
그리움
빈 소주병처럼 말끔히 가셔질 줄 알았다


그대가
흔들지 않아도
그리움 쥐고 스스로 흔들리는
나는


오래된 습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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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독



점심, 순댓국밥집에 갔다.
손님으로 꽉 찬 식당
눈으로 빈자리를 찾고 있는데
건장하게 생긴 스님 한 분이
이를 쑤시며 일어섰다.
뜨끈한 순댓국을 맛나게 드셨는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과 반들반들한 이마에는
땀방울이 기름처럼 흘렀다.
순간
세상이 잘못 돌아가니
중도 고기를 먹는구나
나는 절에도 다니지 않으면서 속으로 한탄했다
스님이 앉았던 탁자에는 소주병도 있었다.
승복이라도 벗고 먹던지…
알지도 못하는 스님을 향해 목탁 같은 소리를 냈다.
빈 그릇을 치우면서 주인 여자가 말했다.
중도 아니면서 왜 저리 승복을 입고 다니는 지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