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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2017년 [시] 아버지의 손 외 9편 / 정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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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707회 작성일 17-12-18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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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끝에선 더 이상 길이 없다고

절망 앞에 무릎 꿇었을 때

길은 허공에 출렁다리 하나 매달아 주며

내 손 잡아 주었다


나에게 시란 늘 새로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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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손



포항 호미곶
바닷속에 뿌리내린
커다란 손 하나 우뚝 솟아 있다
겨울 바다를 배회하는 길 잃은 기원(祈願)과
먹이잡이에 지친 갈매기들의
쉼터가 되어 주는 손


그 손
낯설지 않다
내가 마지막으로 잡아 본 차갑고 단단한
그래서 나무가 되었다고 믿는 내 아버지의 손을 닮았다


아버지의 로또 복권인
평안북도 운산에 두고 왔다는 할아버지의 금광이
통일과 함께 멀어져 갈수록
아버지의 일상은 황폐해져 갔다


몇 날 밤은 투전판에서 금을 주워오고
몇 날 밤은 한숨과 기침을 날라 오며
불빛 없는 황량한 밤을 헤매던 아버지가
통일을 버리고 금광을 버리고
병든 아내와 오 남매 등에 업고 생의 늪을 건너는 동안
아버지의 손은 크고 거칠고 단단한 나무가 되어갔다는 걸
왜 몰랐을까


마지막 가시는 길
눈물로 잡았던 아버지의 손이
저기 저 바닷속에 뿌리내린 채
어서 와 쉬어가라며 차가운 내 손 잡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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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허공



조류독감 발생 한 달 만에
감염이 의심되는 닭과 오리들
1910만 8천 마리가 살처분되었다는
뉴스를 본다


겨울이면 반복되는 일
종간의 벽을 넘어
간헐적으로 인체 감염 사례가 있다니
그만 죽이라 할 수도 없고


바이러스의 전파 범인은 철새라는데
각박한 겨울 살아보겠다고
먼 길 찾아온 철새들을
죄다 잡아
돌려보낼 수도 없는 일


방역체계는
길을 잃고 헤매고
붉은 포대 속에서 요동치는
오리들의 몸부림과
산목숨 묻을 수밖에 없는 손들의 울음
허공을 흔드는데


또 다른 종을 생산하며
영역 넓혀 가고 있다는 조류독감은

날개도 없이 창공을 날며
새들의 울음소리를 조용히 수거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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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 중



노란 현수막이 펄럭인다
─ 우레탄 트랙 중금속 검출
운동장 트랙을 걷지 마세요
○○초등학교장 ─


십 년 넘게 걷고 달리고 뒹굴던 곳
운동회 날이면
청백 계주의 꽃이 피던 그곳에
들어가지 말라고 한다


우레탄과 인조잔디로
운동장을 몽땅 덮은 어른들은
흙먼지 날리는 모래땅보다
무릎관절에 좋다는 우레탄의 탄성을 믿었는지
업자들의 상술에 넘어간 건지
지나간 실수를 소리 죽여 묻고


몇달 째 논의 중이다
우레탄과 모래땅 어느 것이 덜 위험한지
어느 것이 더 돈이 될지


날개 없는 아이들은
오늘도 트랙 위를 달리다
펄럭이는 노란 경고문을 본다
파란 하늘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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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에서



길은 나에게 관대했다
이정표 없는 갈림길에서 서성일 때
새 울고 물 흐르는 쪽으로
귀 열어 주었고
앞만 보고 달려가다
지쳐 주저앉았을 때
묵묵히 내 뒤따라오던 길이
뒤도 돌아보며 쉬엄쉬엄 가라고
의자 하나 내어 주었다


길 끝에서 더 이상 길이 없다고
절망 앞에 무릎 꿇었을 때도
길은 허공에 출렁다리 하나 매달아 주며
내 손 잡아 주었다


지금 나는
안개 자욱한 길 앞에 서 있다


때론 눈앞에 보이는 것이 거짓이고
보이지 않는 것이 참일 수 있다며
관대했던 길은 어서 오라 하는데
선뜻 걸음 내딛지 못하고
길의 속내만 엿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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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중한 숙제



정년은 코앞인데 주머니는 비어 있고
아들이 거처할 방을 보러 다니다
턱없이 비싼 월세에 화가 났다


눈치 보는 남편한테 짜증을 내다
몇억 짜리 아파트를 사주는 부모도 있다는데
10평짜리 원룸 한 채 못 사주겠냐고
5년 분할상환 빚내서
분양받았다


빚도 자산이라 허세 떨며
숙제 하나 해결한 부부가
실평수 6.8평인 원룸을 쓸고 또 닦는다


잡초들의 무법천지가 된 베란다 앞 공터
우리 부부 하는 양을 지켜보며
아들 방을 넘보던 명아주 무리들
키득거리며 무어라 쑥덕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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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할미꽃



도도한 자태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는
한 무더기 꽃이 있다


아찔한 절벽
어질병 몰고 오는 바람을 견디느라
줄인 키만큼 자존심을 키운 꽃


그 이름 얻기까지
척박한 절벽 흙먼지 쌓인 틈새에서
겪었을 산고
절벽을 굽이도는 동강은
알고 있으리라


동강할미꽃은
이제 더 이상, 슬픈 추억 속
꼬부라진 할미꽃이 아니다
도도한 미소로
술렁이는 사람들 동강으로 불러 모으는
봄 축제의 주연이다


* 동강할미꽃: 세계적인 희귀종, 강원도 동강 유역 석회암 절벽이나 바위틈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 꽃말은 ‘슬픈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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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눈



난방비 절감을 위해
거실에 전기매트를 펴놓고 생활하다
변색되어 가는 거실 바닥을
뒤늦게 발견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 매트 걷어내고
물걸레질하면서도
화상으로 깊어가는 바닥의 아픔을
눈치채지 못했다


살아오면서 읽어 주지 못한 아픔이
거실 바닥뿐이겠는가
어쩌면 내 마음 편하자고
고개 돌리며 살았을지도


노안 탓이라 변명하지 말자
제 모습 잃어 가고 있는 바닥처럼
내 곁에 있는 동안 감추어질지 모를
삶의 상처 더는 만들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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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비와 걷다



진한 어둠 속으로
하루가 잠식되어 가는 시간
비가 내린다
간간이 천둥을 동반한 비가
양철지붕 두들기는 소리를 내며
밤의 정적을 깨고 있다


체머리 흔드는 7월의 나무가 되었다가
안개 눈으로 휘청거리는 가로등이 되어
어둠을 응시하다가
더디게 오는 새벽을 맞으러
빗줄기와 발맞춰 양철 지붕 위를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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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알이 말씀



할머니 등에 업혀 마실 나온
생후 5개월 되었다는 아기
방글 웃음에 까꿍으로 화답하니
앙증맞은 손 내밀어
내 검지를 잡는다


힘주어 나를 스캔하던 작은 손
생글거리며 무어라 옹알이를 한다


귀 열고도 듣지 못하는 말
마음으로 읽으려 눈 맞추다
마디 굵어가는 내 손 들여다본다


검지 휘두르며 갑질한 적 없었나
굵어가는 마디만큼 욕심 키우며 살지 않았나


옹알이로 전하는 말씀 앞에
두 손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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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고기를 먹었나



미끄럼틀
계단 오르기 귀찮은 아이들
역주행을 즐긴다
가속 붙은 내리막길을
거슬러 오르는 아이
믿는 건 두 팔과
하늘도 오를 것 같은 호기
계단 오르는 수고를 거부하고
내리달리는 가속의 쾌감을 방해한 죄로
코피와 울음이 뒤범벅되고
놀라 뛰어간 교사
뒷수습해주고 돌아서면


바뀐다
가해자와 피해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