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호2017년 [시] 석등이 있는 집 외 4편 / 송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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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를 겪으며 덮어둔 장독을 열었다
나잇값 하는 장들의 묵은 냄새들
연륜에 맞게 풍겨 나오는 저들의 장맛
그보다 아주 오래 묵힌 내게선 어떤 맛이 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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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등이 있는 집
아라리 구절들이 굽이마다 깔리는
구절리길 어디쯤
고즈넉한 산사 같은
마당 가에 석등이 있는 허름한 민박집
그 집 지날 때마다
경건함에 합장이라도 하고 싶은
밤길이 아니어서
불 켜진 걸 본 적 없지만
누군가 그 석등에 불 밝히고
간절함 하나쯤 빌었으리라
깊고 먼 생을 지나오면서
몸보다 마음이 젖었던 그날처럼
그곳에서
하룻밤 묵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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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
도깨비를 보았다
보름달이 환하던 우물가에서
형체가 분명하지 않은
그림자들이 찰방찰방 물소리를 내며
목욕을 하는지 빨래를 하는지
여남은 살 적 계집아인
그들의 모습을 또렷이 보았다
아무도 믿어 주지 않는
그날의 이야기를
지금도 귓가엔 찰방거리던 물소리
아득하게 들려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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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민들레
양지바른 담장 밑
노랗게 피어 있는 민들레
철없이 핀 죄 하나로
절개로 지켜낸 꽃
지나온 바람은 얼마나 쓰디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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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소묘
초록을 풀어놓아
절정을 이루던 숲에도
푸름의 낱장을 넘기며
가을비 내린다
갈피갈피 틈새로 물든 단풍들
숙제처럼 물기를 털어내며
가슴 시리게 떠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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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길
가끔씩
꿈속에선 길을 잃는다
어딘지도 모르는
때로는 낯익은 길인데도
가는 곳을 몰라 전화를 걸려 해도
기억나지 않는 번호
때론 누군가의 쫓기움에
발걸음 떨어지지 않아
미로 속 수렁에서
허우적거리다 깨어날 때
어쩜 내
현실이 꿈속인 양
꿈속에서 길을 잃고 현실에서
꿈을 잃는 허망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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