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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2017년 [시] 선풍기 외 9편 / 최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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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662회 작성일 17-12-18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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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천한 것들에게 보내는 따듯한 시인의 눈길을 좋아한다.'라는

어느 노시인이 문득 생각났다.


다시 나를 내어놓는 성찰의 제단,


부끄럽지 않도록

그들과 좀 더 많은 시간을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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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풍기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는 새가 있다


수천 날을 파닥여도 헛맴을 도는 새


몇 겁을 더 돌면 날아갈 수 있을까


독침처럼 따가운 여름 정수리


가릉거리는 숨소리 잠시 재우고


달아오른 죽지를 조용히 식히는


저기, 조롱 속에 갇힌 늙은 새 한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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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 지도



부모님이 그려주신 손바닥 지도


가다가 끊긴 생명선은 새 길을 냈고
잘 뻗은 재물선은 궁함 속에 늠름하니
욕심만 밖에 두면 추울 일 있겠는가


주먹 쥐며 살아온 세월 있어
흘러든 잔금들
바라보니 지울 길 아득하다만
어쩌겠는가, 피붙이 챙기며 가야지


말랑한 지도 두 장 주머니에 넣고
들길 따라 걸어보는 이른 봄날


잔설 위로 고개 내민 여린 풀잎 앞에서
끊긴 길 찾느라 애썼다, 애썼다
서로의 마음 끝이 눈물에 닿을까
젖은 말을 삼키며 부지런히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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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읽는 오후



솔잎 끝에 슬어 놓은 비의 알


아슬아슬 매달린
저 작고 앙증맞은 것들이
스스로 지느러미와 아가미를 만들면서
바다로 헤엄쳐 간다는 말이지


돌고 넘고 쉬기도 하면서
그렇게 흘러서 간단 말이지


구불구불 허리를 구부린 채
빗방울을 받아내는 길을 본다


조그맣고 말랑한 빗방울을 위하여
몸을 굽힐 줄 아는 넉넉한 하심


급할수록 허리를 왜 더 많이 휘는지
엄마의 허리가 왜 거기 있는지
곡선 따라 작정 없이 흘러보는 오후


흠뻑 젖은 마음 잠그지 못한 채
집에 와 누워서도 밤내 비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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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의자



탈골된 다리 하나 허공에 기대 놓고
무심처럼 제 생을 갉아먹는 나무 의자


살과 뼈로 함께하던 어제를 버리고
못은 어디로 모습을 감췄을까


이름을 놓아버린 의자와 폐목 사이
누추가 세워 놓은 꼿꼿한 기다림


기울어진 한 치가 전생보다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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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붉은 꽃잎 두 장을 마주 붙인다


불 꺼진 역사처럼 어두워진 꽃 속
목젖 아래 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안팎으로 흐르던 고요를 깨고
꽃잎 속에서 생각이 흘러나왔다
숨이 막혀요
이제 문을 열어야겠어요


늘어진 지느러미를 흐느적거리며
달그락거리던 꽃잎이 문을 열었다


차례를 기다리던 말은 보이지 않고
입속을 흐르는 뜨거운 기운


순간,
마른 침 넘기는 소리가 나고
불안을 감지한 꽃잎이 저절로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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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의 서(書)



툭,
끈이 끊어지듯
툭,


생의 전부를 놓고 가는 뒷말이
저리 뭉툭하다니


하지만
이보다 더 깊은 고요가 있을까도 싶고
이보다 더 아픈 이별이 있을까도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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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의 우화



겨울 건너온 애벌레들이
곤한 잠을 자고 있다
나무는 깰까 까치발 들고
잠갔던 물관의 밸브를 연다


사는 건 늘 기다리는 것이란다
아직은 시리다고
지나가던 햇살 귀띔해주지만
선잠 깬 애벌레들 답답한지
껍질에다 군데군데 바람구멍을 낸다


그래, 그럴 때 있었지
함부로 날개를 꿈꾸던 시절
세상은 나를 위해 돌아 줄 것이라고
설익은 마음 따라 길 나서던 때 있었지


꽃눈 정독하기도 분에 겨운 이른 봄


조급히 허물 벗는 목련 나무 아래 서서
돋다 만 내 날개의 안부를 물으며
아픈 등줄기를 가만히 쓰다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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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당부



가파른 산길
몸으로 계단을 만든 늙은 나무가 있다


맘 놓고 밟고 가라
걱정 말고 딛고 가라
비탈마다 써 붙인 낯익은 육필 편지


가셔서도 못 미더워 나무로 오셨는가
여미지 못한 불효에 목젖이 타는 아침


닳아 반들거리는 불립문자 앞에 서서
후회 타서 마시는 막심(莫甚) 한 사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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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바위



날마다 조금씩
조금씩 흔들리며 서쪽으로 간다
제 몸 부수며 서쪽으로 간다


흔들리고 흔들려야 건널 수 있는 곳
부서지고 부서져야 닿을 수 있는 곳


하지만
기다림을 울던 먼 데 사람아
이제 더는 아파 마라
발자국도 세지 마라


너는 다시 태어난 설악의 바위다
전설에 피가 도는 살아 있는 바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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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의 힘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
속수무책 당한 길이 아우성이다
여기저기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몇몇은 제 몸 헐어 물길을 만든다


언제 그랬냐는 듯 비는 멎었지만
웅덩이엔 떠나지 못한 빗물이
포로인 듯 갇혀 있고
가라앉힌 슬픔 위에 떨어진 갈잎 한 장
바람이 불 때마다 쪽배처럼 일렁인다,


누군가 던진 말 한마디에
가슴 깊은 곳에 구멍이 난 적 있다
잊지 못할 만큼은 아니었으나
쉬이 잊어서도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다짐처럼 온몸에 파고들었을 때처럼
길도 그렇게 아팠으리라


하지만 꼬깃꼬깃 접어 넣었던 말의 상처가
스스로 자국을 지우며 희미해진 것처럼
길도 볕 당겨 흔적을 말리고
바람 불러 새 살을 돋게 할 것이다


가두는 삶은 습하고 무겁지만
열린 곳은 언제나 환하고 맑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