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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2017년 [시] 나도 그래야지 외 9편 / 김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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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036회 작성일 17-12-1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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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어가는 것이 확실하다.

말을 줄이는 일이 어려운 걸 보니

시도 그렇다.


안일과 평안, 자만과 자긍, 쾌락과 행복감의

경계를 자꾸 만져본다.

가만히, 그리고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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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래야지



따뜻한 눈으로 마주 보며
손 잡아 주기
어깨 안아주기
등을 가볍게 쓰다듬거나 두드려 주기


그러셨구나
얼마나 힘드셨어요
참 잘 하셨네요


햇살이 비추어 주며
저녁이 오며
단비 내리며
바람이 지나가며

나에게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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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 토끼네



보름달이 기우는 것은
울산바위 때문이다
겨우 둥글어진 보름달
조심스레 넘어서도
끝내 짓궂은 뾰족 바위


울산바위 꼭대기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것은
보름달 토끼네 방앗간
떡가루 콩가루 쏟아진 때문이다


그래도
달은 몸 부풀려 토끼를 키우고
토끼들은 떡방아를 찧고
보름달 가만가만 울산바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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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나무의자



아버지 손수 만드셨던 나무의자는
떠나신 지금도 정겹다
어디 갖다 놓아도 어울리는 풍경이 되고
누가 앉아도 한 몸처럼 편했다


마당에서 처마 밑으로 창문 아래로 옮겨 다니다
다리 하나 삐끗한 뒤로
커다란 벚나무 아래 멈추어 섰다


벚꽃 피고 지고 세월 가는 일이
저 의자에 앉으신 아버지의 노래인 것만 같아
창문 밖으로 자주 눈길이 간다


대청봉 첫 얼음 소식에
붉은 잎들 의자 위로 쌓이는 아침
아버지
추워지는데 이제 그만 들어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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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소주병



나 뛰어내릴 거야


골목 귀퉁이집 시멘트 담 위
반 잔쯤 남은 소주병 하나
뜨거운 햇살에 술기운을 토하며
취기로 흔들거린다


불끈한 용기로
누군가의 오장육부를
달래고 태우고 남은 반 잔
그 손의 체온과 입김이
아직 증발 중이다


햇살 가라앉고
그늘이 어둠을 끌고 들어서는
골목 귀퉁이집 시멘트 담 위


흐린 가로등 불빛 꾸역꾸역 마시더니
혼자 고요하다
푸른 소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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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일기 2



마당 끝에 심은 산수국이
잉크 빛 꽃숲이 되었습니다
친구들을 초대한 붉은 저녁
웃음소리 나누던 정원 식탁을 치우고
나뭇가지에 등불을 걸고 보니
그제야 세월 지나온 모습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반짝거렸던 어린 날들
눈부셨던 젊은 날의 기억이 잦아들자
조금씩의 외로움과 고단함의 무게를
찻잔 손잡이가 먼저 알아차립니다


거친 나뭇결 거슬러 쓸어 만지듯
삶은 누구에게나 녹록지 않아
지나간 후회와 허물까지도
우스갯소리 함께 담담히 흘러갑니다


익모초 모깃불 연기로 매운 눈을 닦다 보면
웃다 울다
화장 다 지워진 거기서 거기인 얼굴들


모닥불 피워 놓고 마주 앉아서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

누가 시작했는지
함께 부르는 옛 노래로 밤이 깊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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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꽃



온실에 시계꽃 가득 피었다
시침 분침 초침
햇살이 태엽을 돌려주는
열 개의 시간을 가진 보랏빛 꽃


넝쿨손 가는 대로 시계시계 걸어 두고
신나는 제 세상 확장해 간다
하나 피면 열 시간 열 개 피면 백 시간
하나 지면 두 개 피고 두 개 지면 네 개 피고


온실로 불러내어
늦도록 차 마시고 책 읽고 노래 부르게
시계꽃 자꾸만 시간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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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지으면



세 그루의 메타세쿼이아를 심어야지
높게 자란 나무를 보면
멀리서도 우리 집 알아볼 수 있게


자작나무 목백일홍 라일락 아래
크고 작은 정원석을 놓아두고
철 따라 피는 파랑 보라 분홍
하얀 꽃들을 심어야지
온실 가득 제라늄을 채우고
시계초 으아리로 아치를 덮어야지


휘파람 소리에 목도리 털 휘날리며 달려오는
멋지고 큰 콜리도 키워야지
따스한 햇살에
숲에서 온 바람 가만가만 지나다닐 때
큰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차를 마시며 책을 읽으면
내 옆에 엎드려 잠이 든 버프콜리


봄 여름 가을 겨울
바다와 산맥으로 해 달 뜨고 지는 풍경
큰 유리창 가득 담아두고
저녁이면 멀리 하얀 길 따라
내 식구들 돌아오는 모습을 지켜보아야지


집을 지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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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여행



가는 곳이 어디인지 알고 떠난 사람의
벗어 놓은 옷처럼 평안한 몸


천국과 지옥을 농담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오늘도
영혼은 영원한 생명임을 증명하는
넘쳐나는 성경책 수많은 교회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서의 분명한 선언
죄와 죽음의 문제를
‘다 이루었다’


생명의 비밀
듣고 읽고 믿은 사람의
가는 곳이 어디인지 알고 떠나는
아름다운 여행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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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차장을 나서며



네 큰 눈에도
눈물이 고이는구나


가릉거리는 심장에
열쇠를 꽂아 두고
나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잘 있거라
그리고
잘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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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를 땅에 묻었다



긴 여행을 마친 낙타처럼
아직
내 마음의 온기를 기억하고 있을
늙은 가죽구두


잘 닦아
꽃밭 한쪽에 묻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