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호2017년 [시] 부부 외 9편 / 김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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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를 마감하고
또 다른 시작을 하려니
생각이 많다
사는 일 만큼
내 시도 어수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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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폭넓은 구두만 신다
멋져 보이는
날렵한 구두 한 켤레 샀다
첫날
발뒤꿈치를 종일 깨물더니
둘째 날
발등의 핏줄이 퍼렇게 멍들고
셋째 날
기어코 새끼발가락에 물집이 생겼다
열흘쯤 지나서야
주걱 없이도 신을 수 있는
헐거움이 생기고
터진 물집이 아물어야
비로소 아픔이 둔해지는
오래된 부부 닮은
구두 한 쌍
차가운 타일 위에서
어긋난 잠을 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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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나름
어스름 산책길
나무 밑을 걷다
거미줄에 걸렸다
만질수록 묻어나는
성가신 끈적거림
사람이 중얼댔다
먹을 수도 없는 놈이
먹이그물을 찢고 갔다
오늘 밥은 굶어야 된다는 것보다
밤새 짜깁기를 할 일이
더 짜증 났다
거미가 투덜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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넋두리
트래킹을 하는 개미 같은 사람들의 발자국만큼 녹아내리는
만년설의 눈물이 부끄러웠어
감탄사로 내뿜는 내 숨결에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얼음 궁전의 물방울은 더 부끄러웠지
조금씩 잠겨 가는 물 위에 뜬 집들의 계단과 폼페이 화산재 밑에 웅크린 죽음들 앞에서 아주 오랜 뒤를 생각했어
우리 사는 게 늘 거기만큼, 그만큼인 것을
어제 같은 오늘이 가고 오늘 같은 내일이 또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정하기 싫어 잔뜩 술에 취해 돌아가는 길 자동로또를 두 장이나 샀어
별로 기대는 없어 1등보다는 늘 꽝일 확률이 내 살아온 시간이
증명해 주니까
그래도
또
혹시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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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이
하루 세 번, 하루 한 번, 사흘에 한 번
한 달 한 번, 석 달 한번
일 년 어쩌다 한 번
문득 생각나면 그렇게 한 번
잊기도 하고
잊혀지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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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대
물은 골 따라 내려가자 하고
산은 봉우리 따라 올라가자 하고
길 잃은 나는 너럭바위로 주저앉아
하늘 한 번 올려다보고
깊은 소 한 번 내려다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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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
38.2도
뜨뜻미지근한 온탕에서
40분
42.8도
뜨거움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열탕에서
10분
머리 위로 쏟아지는 차가운 인공 폭포수를
온몸으로 견뎌내며 냉탕에서
10분
온탕 ↔ 열탕 ↔ 냉탕
아들놈 때 밀며
사는 게
그런 거라고
토닥토닥 등 두드려 주는
일요일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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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가는 길*
쇠똥구리 한 마리
물구나무서서
동그란 목숨 하나 굴리며 갑니다
진흙밭 깊게 파인
물웅덩이에 빠져 허우적대고
언덕에서 굴러떨어져
가시나무의 뾰족한 침 끝에 걸리고
밀림 같은 풀밭 위를 지나다
양 떼들의 발굽 아래 무너져 내립니다
다시 동그라미로 만들려고
물기를 잃어버린
부서진 내일을 끌어모으지만
해가 꼴딱 넘어갑니다
쇠똥구리의 날갯짓 위로
이룬 것 하나 없는
오늘 하루가 마감됩니다
* 다큐멘터리 ‘순례’ 3부작 ‘집으로 돌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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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집
무언가에 부대껴야
비로소 생기는
터지고 쓰라려야
더 단단해지는
물의 집
내 안의 또 하나를
지켜내려고
살갗 위에 세운
차갑고 둥근
얼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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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각담
오래된 담벼락에는
돌들이 있어야 할 곳에 있다
둥근 돌 납작한 돌
비가 흐르는 길 따라
낮게 낮게 가라앉아
시간들이 시나브로 익어가고
큰 돌 작은 돌
바람이 드나드는 길 따라
뒤척거리는
풍경들이 조금씩 낡아간다
색깔 바래가는
돌각담 위
불쑥 솟아 늙어가는
돌멩이 하나
마당 안을 그윽이 내려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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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촉사고
비 그친 뒤
서둘러 길을 나서며
가속기를 밟던 나와
미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아스팔트 위 지렁이를 쪼아대던
작은 새 한 마리
길 위에서 만났다
서두름과 욕심이 만들어낸
부고도 없는
주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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