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뫼 호수별 보기

47호2017년 [시] 종이 탑 외 7편 / 권정남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215회 작성일 17-12-18 17:20

본문

지난 6월 스페인을 다녀왔다.

태양이 자글자글 끓고 있는 나라에서 내 삶을 충전 받았다.

론다 누에보 다리 위에서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마지막 종소리를 오래 오래 기억하며

금년 여름은 야성적인 헤밍웨이와 함께 보냈다.

그 모두가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이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기타 선율이 지금껏 나를 흔든다.


--------------------------------------------


종이 탑



새벽 골목길
종이 탑이 흔들리며 간다


손수레 위에 힘겹게 쌓아 올린
신문지와 헌책, 종이박스들
무너질 듯 끌려가는 공든 탑이
돌탑보다 단단하고 성스럽다


굽은 허리에 모자 눌러 쓴
키 작은 노인 얼굴이 없다
전사(戰士)처럼 세찬 바람을 뚫고
전봇대 지나 슈퍼 앞을 돌고 나면
거룩한 탑은 한 칸씩 올라간다


무한시공을 끌고 가는 저 수행자
아침을 깨우고 세상을 거울처럼 닦으며
부처처럼 정중히 탑신을 모시고
타박타박
빙판길 성지를 순례하고 있다.


------------------------------------------


사려니 숲길에서



내 전생에 걷던 길이다
몽유도원도 같은
꿈속 어디쯤 헤매던 곳이다
천 년의 고독과 침묵이
직립으로 서 있는 저 꼿꼿한 자아들
삼나무 숲이 길을 막고 다가선다
바깥세상은 동백꽃 피고 지는데
발 닿는 곳마다 똬리 튼 뱀들이 몸 풀고
신령스런 숲들이 긴 옷자락을 끌며 깨어난다
세상의 소리와 빛이 차단된 밀림에 갇혀
숨 막히는 향연을 즐기다가
산수국 이파리가 진저리치는
물찻오름 길에서
힐끗, 내 지나온 길을 돌아본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먼 소실점, 까마득하다.


* 제주시 조천읍 비자에서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 사려니 오름까지 이어지는 약 15km. 숲길을 말한다. 해발 500-600미터 유네스코 생물권 보존지역에 위치한다.


-------------------------------------------


짐꾼을 만나다



설악산 천불동 계곡에서
짐꾼을 만나다
자기 키보다 더 큰 짐을 지고
미끄러지듯 매미 소리와 함께
비탈길을 오른다


티벳의 차마고도에서 등짐 진 마방이
소금 실은 야크의 고삐를 잡고
낭떠러지 길을 매달리듯 가고
몽골의 고비사막 등짐 진 유목민이
낙타와 함께 불 땡볕 모래언덕을
오르는 모습들이 피사체로 겹친다


하늘과 맞닿은 곳에서
발바닥에 피가 맺혀 있을
그들의 삶이 아득하다


저마다 헐떡이며
모질게 제 그림자를 끌고 간다.


----------------------------------------


아름다운 미완성



모로코 수도 라버트 광장
핫산 2세*의 미완성 모스크 탑이
삼백여 개 돌기둥을 거느리며 성채처럼 서 있다


한국의 ‘역풍은 불어도 강물은 흐른다’*
미완성 장편 소설과
긴 그림자 되어 오버랩으로 겹친다


대서양 바람이 옷자락을 휘감는
이역만리, 첨탑은 하늘을 찌르고
역풍은 불어도 역사의 강물은
아직 도도히 흐르고 있는데


쓰다가 만 소설이나 짓다가만 모스크 탑엔
눈물이 배어 있다
무릎 꿇고 완성의 불심지 돋우며 안경을 고쳐 쓰던
두 예술가는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렸는지


황량한 빈 광장
첨탑을 돌아 나오던 천 년 바람이 천천히
미완성 소설 책장을 넘기고 있다.


*38년간 모로코를 통치하던 국왕(1961~1999 재위)
*윤홍렬 작가의 미완성 장편 소설 이름


-------------------------------------


철새가 되고 싶다



일상을 내려놓고 시도한 일탈
사이프러스 나무가 즐비한 해발 780고지
론다산맥*을 넘는다
허공으로 부서지는 ‘El Condor Pasa’* 선율을 들으며
날개 비스듬히 건너편 구릉을 바라본다


구불구불 영락없는 옛 미시령길이다
백두대간을 흔드는 바람 소리
울산바위를 휘감아 오르는 흰 구름
내 삶이 점점이 찍혀 있는, 먼 속초
저 멀리 누군가 손 흔들고 있다


잠시, 날개를 접고
누에보 다리* 절벽 난간에 기대어
론다식 커피를 마시며
헤밍웨이의 슬픈 종소리를 기억하며
그가 걷던 가파른 협곡을 바라보다가


다시, 날개 펼치며 이베리아반도
지중해 상공을 박차고 오른다


‘난, 철새가 되고 싶다.’


*론다산맥 : 스페인 론다지방을 가로지르는 해발 780고지 산맥
* El Condor Pasa : ‘철새는 날아가고’ 스페인으로부터 이백 년 지배하에 있던 ‘페루’ 농민반란을 주제로 한 사이먼과 카펑클의 노래
* 누에보 다리(Puente Nuevo) : 높이 120m 헤밍웨이가 작품을 집필하던 스페인 론다 지방에 있는 다리로 스페인 내전 당시 슬픈 역사를 간직한 곳


---------------------------------------


강남의 달



밤안개 흐르는 고층 빌딩 사이로
보름달이 떴다


달보다 높은 사람들이 많은 이 거리에
강남의 달을 따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
백지장 같은 얼굴로
빌딩보다 높이높이 장대를 올려
네모난 하늘 쳐다보며 목이 아프도록
허공을 휘젓고 있다


보름달이 그걸 알고
빙긋이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는
강남역 사거리


수없이 장대를 잡다가
물집이 생긴 딸의 손을 꼭 잡고
빌딩 사이사이로
달이 눈치채지 않게 신호등을 건넌다.


-----------------------------------------


바위새
-울산바위


거대한 독수리가 허공에서 날갯짓 하고 있다
세월의 나이테 앞에 환골탈태한 저 검은 깃털
태양이 떠오르면 깊고 도도한 눈빛으로
설악을 다스리다가
눈 아래 펼쳐진 시방 세계를 굽어보다가
이카루스가 되어 불새를 꿈꾸다가
미시령 밤하늘을 가르는 칼바람 소리에
거친 파도로 몸을 트는 바위새의 포효
그 깊은 신음 소리가 통증처럼 쑤셔오는데
불면의 밤을 깃발처럼 흔들고 섰는
검푸른 독수리의 태고적 울음소리를
들어 본적이 있는지


-------------------------------------


그 계단 끝에는
─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밀봉된 함성들이 출동을 기다리고 있다
막다른 골목, 빠르게 오르던 군화소리
직립으로 서 있는 이끼 낀 계단은
하늘보다 높은
임시정부청사*를 떠받들고 있다


총부리를 겨누며 따라오는 일본군들의
호루라기 소리에 자지러지듯
밀서로 주고받던 생채기 같던 조국이
명치아래 숨긴 태극기가
햇볕보다 뜨거웠다


수직 계단 위로 구름이 흘러가고
남의 나라, 매캐한 구석진 방에는
빛바랜 결재서류와 찻잔, 뿔테안경
벽에 걸린 검은 두루마기가
주인*을 기다리고
마주한 바람벽에는 ‘독립!’
광복군들의 친필 사인이 별이 되어 버린


그 계단 끝에는
횃불이 타오르고 있다.


*주인 : 독립 운동가 김구선생님
*임시정부청사 : 중국 중경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