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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2017년 [시] 어머, 늙나 봐 외 5편 / 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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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147회 작성일 17-12-18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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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나무는 늘 한자리에서 바람으로부터 세상 소식을 듣고,

가끔은 절절한 휘파람 소리를 내며 꽃을 피운다.


나 또한 그 가능성에 쓸쓸함을 넌지시 안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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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늙나 봐



햇살을 깔고 앉아도 심심해지면
주머니마다 빛줄기를 툭툭 꺾어 넣어요
별이 되고 싶냐구요?
그립죠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고요를 노래 삼아
팡팡 터뜨리는 봄꽃에
한 줄기 숨결로 꽃가루 날려 흥을 짓기도 해요
보도블록을 뒤꿈치로 콕콕 찍으며
치칫 뿜 칫 혹은 북치기박치기라도
별이 되진 않아요
그립죠


그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에요
별들을 잊어서도 아니구요
아직도 많이 자라야 할 철부지이기 때문이죠


심심해지고 싶어 햇살을 깔고 앉기도 해요
주머니에 꽂힌 빛줄기에
등 타고 내리는 고요 닿기라도 하면
혼자 애쓰지 말고 언제고 오너라, 치칫 뿜 칫
보이지 않는 별빛까지 모두 줄 것이니, 북치기박치기
들려요
아니, 부르죠


(도리도리) 뭐라도 자주 그리워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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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



우리 엄마에게는 향기가 살고 있다.
지어 주시는 밥 속에서도
말 속에서도
누구든 빈손으로 보내지 않는
뭉툭한 집게손가락에도
자글자글한 주름 속에서도
아흔여덟 해 내내
향기가 났다.


그런 엄마, 우리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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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푸른 핏줄기는 어디서 왔을까?



어머니는 재봉하기를 좋아하셨다.
한낮,
어린 나는 재봉틀 소리를 들을 때마다
재봉틀 발판에 내 발을 대고 잠이 들곤 했다.
심심할 때도 재봉틀 발판을 밟으며
규칙적인 소리에 내 심장을 맞대고 꿈꿨다.
식지 않는 열정이
세상을 바늘땀처럼 촘촘하게 살아가는 방식이
어머니가 재봉하실 때마다
내게로 온 것은 아닐까


내 푸른 핏줄기는 어디서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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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거운 생각



사람들이 내 밖을 지나칠 때
바람이 나를
나뭇잎인 양 어스름인 양 지나갈 때
늦도록 공부하던 골방이 생각난다
바람이 잘 들지 않았기에 생각이 고였고
햇살이 통하지 않았기에
온전한 내 색깔이 발효되던 골방


멍하니 바람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김없이 열리는 골방문


걸어 나오는 싱거운 생각도 生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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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드화



언제부터 누드를 그리고 싶어 했는지 모른다.
왜 그리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단지,
누드를 그리고 있으면 순수라는 단어가 온몸 가득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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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이 집에 들다



산봉우리를 삼킨 감천문화마을에는
여름날, 좁은 골목길 따라
열린 방문으로 나무뿌리인 양 삐죽이 나온 발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나무의 한 살이나 사람의 한살이나
다를 바 있을까
숲이 집에 들어가 살고 있는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