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뫼 호수별 보기

47호2017년 [시] 다녀올게 외 9편 / 채재순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899회 작성일 17-12-18 17:40

본문

수척해진 내 시를 바라본다.

세상일로 바스락거리느라

내 몸과 시를 저만치 두고 살았다.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온다.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것들이 있다.


---------------------------------------------


다녀올게



평생 제 몸이 연장이었던 그가 건넨 마지막 인사


다녀올게


그날따라 욱신거리는 맘 다잡고 나섰는데


여러 생각까지 지고 밖으로 나간 나날


어떤 생각은 몸을 갉아 먹고


구멍 숭숭 뚫린 마음에선 바람 소리 났지만


무언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글썽이던 날들


이런 날이 올 거라는 생각 미처 할 새도 없이


갔다


걸어온 시간을 저만치 두고


----------------------------------------------


레스토랑



몸져누워 있는 동안 문득 생각난 레스토랑
이 말은 회복시켜주는 음식을 파는 곳이라지
레스토랑의 다시(RE)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시간
앓고 난 후 저무는 강가에서
중얼중얼 허공을 향해 말 걸다가
죽을 것처럼 아팠던 순간들이
온몸으로 이곳까지 끌고 왔음을
끄덕이는 저녁


남은 여정 어디에도 있으며 어느 곳에도 없는
레스토랑 찾아가려네,
울음 그치게 할 심야식당
병과 싸우느라 소진된 몸 북돋아 줄
잠들 수 없는 밤을 건너
숱한 풍경으로 스친 레스토랑 지나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갈 것이니
가야겠으니


-----------------------------------------


만약에



자두를 따 먹다가 든 생각
지금까지 먹은 자두 씨앗을 심었다면
그 씨앗의 씨앗을 또 심고 심었다면
지금쯤 아주 너른 자두 과수원 주인이 되었을 거야


자두꽃들이 시킨 일로
딴전 피울 새 없이 그렇게 나이 들어갈 거야


개와 늑대의 시간을
자두꽃이 저녁 말할 무렵으로 바꿔 부르며
울울창창 나무 그늘에 벗들 불러 모았을 거야
더불어 자두를 따서 자루가 불룩해졌겠지


밥상에 숟가락 슬몃 더 올려놓고
두런두런 그렇게 저물어 갈 거야


천지사방 서성이는 마음
우거진 자두 과수원 풍경 속으로 불러들여
내 안의 폐허 다독이며
시큰한 세월 여한 없이 건너가고 있네
저녁노을 유난히 드높네


-----------------------------------------


발자국



야류공원에 다다른 것은 흐린 오후였다
오롯이 패어 있는 당신 발자국 위로
이번 생엔 한 줄기 바람으로 머물다간다


곁에 있어서 빛나던 시절이 있었다
일렁이는 나뭇잎 사이로
한 사람만으로도 환해질 수 있던 시간
거뭇거뭇 찰랑이고
날은 어둑해지는데
가벼운 이별은 없어서
구멍 바위로 저렇게 한 천년
아픈 무릎을 세우고 앉아
또 다른 이름으로 살고 있는지


잠시 말 잇지 못할 마음으로 스쳐 가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잊을 수 있을까
그만 이쯤에서 길을 잃어버릴까
온몸으로 생각을 밀고 가는데
새 한 마리 허공을 삐뚜루 날고 있다


---------------------------------------------


벼락바위



태초에 실금이 있었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그 틈으로 바람이 드나들었고
밤이면 고요도 놀러왔지
내(川) 한가운데서 물소리시낭송회 열렸지만
벚꽃놀이 한창일수록 헛헛해졌고
장마철엔 큰물이 잔돌 옮기는 소릴 들었지
단풍들 적에 들일 데 없는 마음 앞산을 떠돌고
가끔 지나가던 새떼들 쉬어 가며
어미새가 아기새에게 들려주던 세상 이야기
몸에 아로새겼지
몇백 년의 겨울과 봄 지나는 동안
틈새는 헐거워졌고 온몸 야위어갔지
어느 날 벼락 치던 통에
가슴 한가운데가 뻐개지면서
한동안 몸살을 앓을 수밖에
그해 겨울은 유난히 많은 눈이 내렸지
백 년 만의 큰 눈이라고 야단법석이었지


------------------------------------------


비밀정원*



“지는 가을, 그대에게”
─1981. 깊은 가을날 공지천에서─
오래된 책 정리하다 만난
낡은 시집 한 권
빛바래고 조금 너덜너덜한 표지
결 흐릿한 그 옛날 삼중당 문고판
첫 장을 열다 해후한
누군가에게 받은 헌사
가물가물한 글씨
정원을 지나 더 집 안으로 들어가자
시집 한쪽 귀가 접혀 있네
그 사람 얼굴
그의 말
호수 들러온 바람 냄새까지
문장으로 자리해
머리 맞대고 덜 여문 인생 논하던
한 시절을 훑고 지나가네
밑줄 친 연필 자국 희미해졌지만
밤잠 설치던 절규, 우왕좌왕이
바스락거리며 살고 있는
그 가을날 아릿한 비밀정원


* 책의 겉표지와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메인 사이에 있는 여백, 잉여의 빈 공간의 종이를 가리켜 책의 ‘비밀정원’이라 부름.


-------------------------------------------


그의 방식



궁형을 자청한 그날부터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먼 구름에 눈길 두며 하염없이 걸었을
등줄기에 식은땀 흘러 옷 적시지 않은 적 없었던
사마천의 날들


거대한 수레바퀴 속에서
이 악다물고
문장으로 말한 그의 방식


처절한 시간을 써 내려간 독기


행간 속 험준한 날들 읽고, 또 읽어
허우적대며 가던 길 바닥 치며 일으키는


불굴의 의지가 남긴 사라지지 않는
발자국
수많은 이름 속에 자신을 심어 두고
온 힘으로 붉어진 역사


--------------------------------------------


꽃의 안부



속삭이는 것들 사이에서
얼굴 매만지며 오는 햇살


꽃 안부를 물으러
마실 걸음으로 오는 꽃샘바람


꽃잠 자던 것들 모두 깨어나
눈빛 주고받더니
아지랑이 불러 봄나들이 나서는 순간
언덕 위에 피어나는 봄꽃


잠시 멈추고 바라보는 것들 사이에서
꽃은 피어나고
온몸이 귀가 되는 사랑의 박동으로
열꽃은 피어나고
오르막길 7부쯤에
어디 먼 데 다녀온 듯 피어난 꽃구름
꽃나무 위 뭉게구름 한 잎


---------------------------------------------


대필



밤마실 가자는 달빛을 대필하는 보름밤


봄꽃 아래로 불러내는 달의 귀엣말


달빛을 대필하자 산이 따라오고
산의 말을 받아 적으니 새들이 따라오고


도처에 써야 할 것들 도란거려
도저히 멈출 수 없는 대필의 날들


오래된 약속 같아
차마 떨쳐버리지 못하고
강 건너를 대필하고,
초저녁 불빛과 저녁 강물 소리를 받아 적고


이렇게 책장을 넘기는
시인을 향해 하는 말
많이 외롭구나
누가 자꾸 흔드는 걸까
한밤의 기척


----------------------------------------------


별일 없는 날



오늘은 비가 잠시 내렸다
별일 없이 하루가 갔다


정원 구석
꽃사과나무 환하다


비 그친 오후
이쪽 나무에서 저쪽 나무로
새 두 마리 옮겨 앉는다


이 책 저 책 뒤적이다
나비에게 잘 지냈나 말을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