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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2017년 [시] 전화 외 8편 / 장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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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866회 작성일 17-12-18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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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열심히 세상을 보러 다녔습니다.

1월에 인도 북부지방 배낭여행, 5월엔 스웨덴,

핀란드 교육시찰연수, 7~8월엔 러시아와 북유럽을 둘러 보았습니다.

이 기억들이 숙성되어 좀 더 편안해지고

맑은 언어로 표출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학교 디지털 방송시설을 완비하고 다목적실(예지관) 음향과

조명시설 공사와 함께 도서관을 새로 만드는 일에도 공을 들였지요.

개인적으론 색소폰 거리연주도 하고 시낭송 행사에도 참가하고,

거의 20년 만에 그동안의 시들을 묶어 집을 지어 주는 일도 하느라 많이 바빴지만

보람 있었습니다. 내가 살아 움직이므로 많은 생각들이 스쳐 갑니다.

말로 다 옮길 순 없지만 늘 깨어 떨리게 함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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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휴일 밤늦게 전화가 온다
미국 사시는 이모님이다
“잘 지내니?” 애절하게 온다
한 번 오면 30분을 넘기기 일쑤라
졸면서 받은 적도 있다


“어디 아픈 덴 없으세요?”
“괜찮아 다 괜찮아 약 먹으며 잘 살아”
그렇게 살아 있음을 먼저 전하신다
식구 한 사람씩 차례로 안부를 물으신다
언제나 똑같다 다를 것도 없다


전쟁 폭격에 집이 사라진 걸 보고
어찌어찌 낯선 곳까지 가 억척스레 이어온 삶
남편 먼저 보내고 TV랑 사시니
이산가족 찾기 방송 덕에 만난 고국의 피붙이
얼마나 대견하랴 생각하면서도
내가 먼저 못 걸고 늘 받게 되어 미안타


외로움의 깊은 강
무서운 흙탕물이 흘러와 묻을까 봐
눈물이 전해와도 애써 경쾌하게
“아이 러브 유 아이 러브 유
사랑해요 이모님”
“전화 안 오면 죽은 줄 알아라
많이 사랑한다 많이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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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시



조드푸르에서 우다이푸르로 가는 버스 안에서
미간에 붉은 점 크게 찍은 인도 여인이
나를 바라본다 그녀의 큰 눈이 내 심장을
머리에 푸르고 붉은 두건 쓰고 오랫동안


내 마음의 중심을 환히 내어 준 느낌이다


열차 침대칸에 누워 삼킬 듯 쳐다보던
남자의 눈도 그랬다
어릴 적 함께 마주 보던 그 소의 눈이다
말 한마디 없이도 나는 말 하지 못한


내 부끄럼들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감시카메라보다 훨씬 많은 세상의 생명들이
눈 뜨고 날 바라본다 나무도 새도 꽃도


정말 잘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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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아포리즘



여행은 몸으로 하는 독서
독서는 머리로 하는 여행*


젊어 여행은 나를 찾는 길이지만
나이 들어 여행은 나를 버리는 길


Life is not measured by the number of breathe we take
but by the places and moments that take our breath away**


다리 떨릴 때 가는 여행보다
가슴 떨릴 때 떠나는 여행.


*이희인, 여행자의 독서(2010)
**Anonymous, 1,000 Places To See Before You Die(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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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저녁



결국
한순간인데
단 한 줄로라도
기록되기 쉽지 않은 삶인데


비 맞아 툭 떨어지는
썩은 새끼줄 같은
그런 인연에 매달려
살아온 것 같다고 했다


사람들 사이 길들을 묶어내
함께 가는 길 만들어 보려고
애써 왔건만


결국
남은 건 혼자였다고
인간은 본래 혼자인 것 같다고
눈발이 조금씩 날리던
그 저녁 소란스런 자리에서
그는 취하지 않았으면서
취한 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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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



흰 민들레 간에 좋다 장복하다
간암으로 먼저 간 사람
새벽 산에 올라 소나무에 등 부딪히기
하루 천 번씩에 허리 병 얻은 사람
그럴듯한 이유로 우린 모두
어디엔가 무엇엔가 다소간 빠져 있다


하루에 2만 보를 걸어야 된다고
다짐하는 사람은 다 걸어야 맘이 편하고
그 수모와 핍박을 견디면서도
담배 한 대 피워 무는 행복감으로
구름 위를 산책하는 사람들 있다


몸과 마음이 손에 손잡고
오래도록 은밀하게 내통하여 저지른 죄
지은 집, 만든 생물, 드넓은 세상
목숨마저 가벼운 멈출 수 없는 즐거움
내성이 생겨버렸어 금단증상도 있어


덕분에 더 나이 들 수 없는지 모른다
내 몸에 내 맘에 아로새겨진
당신, 그 달콤한 흔적들 때문에 나는
찬 이슬 비끼는 언덕에 서서
언제나 기도를 멈출 수 없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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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



박희선
역사조각라고 누군가에게 불렸던
이 땅의 소나무를 좋아했던 그가
날이 선 도끼를 만들어 세웠다
도끼날이 온통 둥근 몸통에 박혀 있다


분단된 한반도를
위태로운 씨알의 땅을 사랑했던 사람
그가 찍어내고자 별렀을
찍혀 넘어질까 조바심했던
수많은 위협의 부리들을 어찌하랴


술병들 세워 놓고
애꿎게 호통치고 쓰다듬고
울다가 잠들던 기억 놔두고
그는 떠나고 너무 일찍 떠나고


조바심 놓아버린 염원
입 벌리고 팔 벌리고
넓은 날개 바람개비로 돌거나
통일로 부활하거나
바이올린 선율 따라 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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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교실
─ 시골 동창회



어려서 장난꾸러기
사업으로 성공하고
잘 우기고 허풍 세던 그는
금배지 달고 갑론을박
소심하고 말 없던 난
책 읽고 아이들 가르치며
환갑이 다 되었네
아직 농사일을 놓지 못하고 있거나
공사판에서 귀신이 다 된 친구들과
세월 깔고 앉아 서로를 바라보노라면
교실은 단지 우리를 잠시 품었다 내놓는
새 둥지 같아
부대끼며 울고 웃던 추억들과
파도 파도 다 못 캐낼 기억의 조각들을 안주로
별빛 기울여 밤을 통째로 마시고 있는데
어찌 사는 게 더 나았을까
성취의 기쁨도 후회의 눈물도
옳다 그르다의 경계도 희미해져
역사의 섭리를 들먹이는 것조차 미안해졌는데
그래도 철없던 코흘리개 시절을
함께했다는 것만으로
이런 호사가 어디 있겠느냐
아무렴 이구동성 아무렴 아무렴
이슥토록 불 밝힌 교실 한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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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교실
─ 적재적소



인사발령 때마다
귀에 못 박히게 듣는 원칙
연고지를 고려하여 능력에 따라 적재적소
그런데 한 꺼풀만 벗겨보면 이건 립 서비스
입맛 따라 내 맘대로 끼리끼리 봐주기


학습능력 빠른 인사 대상자들
눈치껏 줄을 찾아 이리저리 움직이고
소신껏 일해 봐야 득이 없다고
입소문 타고 판단하는 사람 늘어나
숨죽이고 앉아 세월아 가라 하니


쌓아온 경험과 교육철학에 따라
혼신의 힘을 쏟는 건 아예 힘든 일
더구나 정치가 교육현장 들어온 이후
정권이 바뀌면 이전 정권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부역자로 변신하여 보복성 불이익도 받으니


걱정되네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
바람에 흔들리는 미래의 뿌리들이
적재적소는 그저 이상향일까
사람을 키우는 일 그 일 맡은 사람들이
흔들림 없이 소신 펼칠 날은
언제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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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교실
─ 국제교류


한 곳에 태어나 살다가 그곳에 묻히는 삶
그렇게 살던 분들은 답답했을까 행복했을까
지구라는 행성 속 땅과 사람들 연결되고 좁아져
이제는 좋든 싫든 하나의 공동 운명체 되었는데
그래서 아이들 더욱 우물 안 개구리 안 되게
글로벌 리더로 키워야 한다는데


다른 나라 학교들과 자매결연 맺고
서로 방문도 하고 손님맞이도 하면서
색다른 문화도 체험하고 애써 배운 외국어 실력도
발휘해 보는데 어릴 때 정들어 성인 되어서도
우정 이어 가자 하는데 중요한 것은 우리의 정체성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 지켜야할 에티켓
상대 나라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공부 없이
우선 비행기 타고 나가는 것도 문제
홈스테이 외국 친구 평시와 달리 우대하는 것도


한국 여학생들 입술 너무 빨갛고 화장 많이 해요
치마가 짧고 옷이 몸에 딱 붙었어요
수업시간 휴대전화 보거나 잠자는 사람 많아요
나이키 신발 신고 비싼 스마트폰 가졌어요
씩씩하고 춤도 잘 추네요 참 친절해요


남을 통해 나를 바로 보는 교육적 교류
드넓은 세상으로 마음의 영토를 넓히는 교류

서로 다르지 않은 사람임을 느껴 사랑하고
평화로운 지구 집* 지구 배**를 만들어 나가는 교육
한 번 보여주고 한 번 둘러보고 끝나는 게 아닌
지속가능한 삶의 가치를 함께 일구어가는 교육.


* 한비야 씨는 지구촌 대신 지구집이라 불러야 한다고 2016 월드비전 세계시민학교 학교장협의회에서 세계시민교육 교장 자격으로 말했다.
** Raja Roy Singh 박사는 2016 태국 방콕에서 열린 제18회 유네스코-아태지역 국제회의 개막 기조 강연에서 지구는 한 척의 큰 배와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