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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2017년 [시] 죽순의 노래 외 9편 / 김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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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813회 작성일 17-12-1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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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 이 년 차가 되다 보니 한결 여유가 생겼다.

걸음걸이도 느긋해졌고 마음도 편해졌다.

새롭게 시작한 해설사 일도 재미있으니 그럭저럭 지낼만하지 않은가.

그런데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있을까.

사십여 년 함께한 박명자 시인의 급작스러운 타게는 충격이었다.

반듯한 삶을 사시면서 우리 문학회의 영원한 문학소녀로 불리던 고인이었다.

부디 좋은 곳에서 편히 쉬시길 간절히 빈다.

갈뫼 문학기행으로 제주도에 다녀왔다.

전체 회원이 참석치는 못했지만

그래도 많은 회원들과 새로운 환경을 접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함께 글을 쓴다는 것은 이런저런 경험을 공유하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회원 모두가 건강하고 좋은 글 쓰는 새해를 맞이하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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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순의 노래



죽순 돋는 거
이게 노래다.
이리저리 땅속에서 솟구치는
크고 작은 힘들의 불끈거림
금방이라도 펼치면 날아오를 잎사귀들은
드르륵 감겨 있는 소리다.


몇 걸음 뒤에서 둘러싼 대숲에선
좋은 바람 소리가 들리고
묵밭으로 은밀하게 뻗어 낸 생각들이
소리로 여물고 있다.


하늘 쪽으로 귀 대고 있는 사람아
오늘은 대숲이 키우는
여린 속내를 적어 보자.


얽힌 속사정이야 누군들 없을까
이리저리 불쑥거리다가
오로지 그대 가슴을 관통하고
이 한해 몽땅 힘쓰고 잘려나갈
한 줄기 속마음을 노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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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네 집



꽃나무 심고 마당에 잔디 키우던
반듯하게 지붕 올린
친구네 집.


지붕 밑으로
주렁주렁 반짝이 등 달고
지금은 민박집 영업 중.


이 사람 자고 가고
저 사람 머물다 가는데
집 팔고 떠난 친구는
무얼 하고 사는지.


봄꽃 무더기로 피었다 지고
아카시 꽃 쏟아지는 밤.


반짝이 등 혼자 깜박거리는
빈집 한번 들러 보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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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두렁 길



우린 약관을 갓 넘긴
팔팔한 면서기였다.


마을에 나가
퇴비 증산 독려하다가
해가 뉘엿거릴 때
노을 지는 제방 둑을 걸었다.


시 쓰는 고형렬과는 그렇게 만났다.
얼굴에 밭고랑 만들며
살아가는 사람들 얘기했다.


논두렁길은 제방 둑을 지나
시멘트 길로 이어졌고
신작로는 빠르게 도시로 달려갔다.
길을 보면 가고 싶을 때였다.


머리 허연 그가 와서
면서기 때 다니던 마을로 갔다.


우린 은퇴를 했고
막국수 집에서 막걸리 한잔 하기엔
시간이 넉넉했다.
별 얘길 나눈 건 아니었지만
찬찬히 보니 그의 얼굴에선

감실거리며 논두렁길이 살아났다.


논두렁은 작은 숲길과도 통하기도 한다.


무얼 그리워하기에 괜찮은 시간
서로의 얼굴에 석양빛이 들기 시작했다.
기분 좋은 술기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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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다니는 집



하늘과 마주 보는 숨구멍 뚫어 놓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 모습이라니
드나드는 문은 어찌나 낮은지
허리를 굽혀야 마음을 전하네.


비는 내리는데 지붕은 열려 있어
행여 젖을까 걱정했는데
뽀송한 그리움 모락모락 피워 올리며
떠다니는 집.


언젠가 비워주어야 할
무거운 집 한 채 내려다보며
어찌 보면 웃고 있고
어찌 보면 울고 있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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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흐려지면 보이지 않다가
구름 몇 점 걷히면 환하게 드러난다.


누구는 발바닥 간지럽다 하고
누구는 발목 푹푹 빠져 헤맨다는 길


싱싱한 이파리의 가로수가
이야기를 건네고
가끔은 당신이 두 손 내밀어 주는


꿈틀, 꿈틀거리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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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꽃



늘 그렇게들 불렀다.
서울 사는 큰 처형도
그렇게 불렀다.


나이 들면 팔도 처지는가.
땅바닥까지 내린 가지에서
무더기로 꽃망울이 맺혔다.


한 삼십 년 같이 살았으니
그 속을 모르랴.
장모님 아끼시던 목단꽃
마당에서 붉게 웃는다.


찬찬히 보면 묵은 가지 속에서
새 가지 나오고
작년에는 돌아앉아 한쪽만 피워대더니


사방 둘러보며
환하게 손짓하는 붉디붉은 엄마꽃
바라보는 아내도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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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 바위



허리를 감고 있는
한 줄의 선
잘 두른 허리띠다.


두툼한 광목치마에 질끈 동여맨
옥색이 곱다.


한 번의 만남 이후
한 번도 풀어 내린 적 없는
단단한 마음이 오늘도 파도에 젖는다.


뜨거웠던 날 너울너울 춤추던 몸속으로
한 줄기 빛으로 지나간 떨림의 흔적.


오랜 날 간직한 채
소금에 절인 바닷바람 맞으며
참 곱게도 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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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아픔은 꽃에 스며라.
그리움은 잎에 물들라.


꽃 보면 아릿하고
잎 보면 눈물 난다.


세상에 꽃 아닌 게 어디 있으리.
지지 않는 잎 어디 있으랴.


사방이 따스하니
이 볕도 꽃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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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씨



단맛 빼고 신맛 빼고
살구씨 모아
베개를 만들었다.


사그락거리는 알맹이에
머리를 대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신맛 단맛에 물든 날에
붉디붉은 소리로 박힌
씨알 하나의 힘.


어둠 속에서도 묻히지 않는
그리움을 만지작거리며
푸른 잠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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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지호 둘레길



두백산 기운 스멀스멀 거리는 걸
발바닥으로 느끼면
걷기 편하다.


솔숲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바닷냄새는 안개비로 맞는다.
낯설지 않다.


재첩과 붕어의 근황을
수초가 알려준다.
스스럼없이 말을 거는 초병들.


철새의 눈으로 처음인 듯
하늘을 본다.
가슴 시원해지고 눈이 맑아진다.


십 여리 짭조름한 이 길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