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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2017년 [추모특집] 추모편지 - 박명자 시인에게 / 이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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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749회 작성일 17-12-19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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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자 시인에게



이 은 자


박 시인께서 강릉 청솔공원에 유택을 정하던 날 나도 따라갔다 왔건만 편지하려도 그 곳엔 수취인이 없다 합니다. 전화하려 해도 033 국번이 닿지 않는다 합니다. 시인께 닿는 국번이 세상엔 없다 합니다.
다만 시인과 함께했던 세월을 회상할 뿐입니다.
내가 박 시인과 만난 것이 1974년 겨울, 『갈뫼』 6집 출판기념 문학의 밤이었습니다. 지금 나는 내 서가에서 『갈뫼』 6집을 뽑아 펼쳐봅니다.
A4 용지 반쪽만한 책, 122쪽 누렇다 못해 흑갈색으로 변한 갱지에 금속활자 세로쓰기 열 사람의 작품이 실려 있습니다. 출향인이었던 내가 단편소설 사표(辭表)를 들고 입회했었습니다. 속초에 하나밖에 없었던 <문화인쇄소>에서 활자 하나하나 골라 찍어낸 이 책이야말로 속초의 문화유산이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때 내가 서울에 살고 있어서 월례모임에 자주 참석하지 못하는데 박 시인의 편지글은 얼마나 따뜻했던지요. 200자 원고지에 그어진 금을 무시하고 짧게 써 보내는 편지를 받으며 시인을 부러워했었습니다.
나는 편지지 두 세장쯤 담아야 할 말 다 할까 말까인데 박 시인은 그 한 장마저 다 채우지 않았지요. 한 편의 시 인양 짧은 문장으로 할 말 다 하는 그 솜씨가 존경스러웠습니다. 낯가림하던 새내기 나에게 얼마나 살뜰하고 따스하셨던지요. 그때 박 시인은 한학자 이원섭 선생님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서 추천완료 등단해 있었고 이성선, 이상국, 최명길, 최재도님들이 앞다투어 등단의 대열에 서 있었습니다.
1975년 이른 봄, 생각나세요?
이원섭 선생님 주소 쪽지 한 장 들고 내게로 오셨던 일. 서울 도봉구 방학동…. 우리가 물어물어 선생님 댁 대문가에 다가섰을 때 마침 이원섭 선생님이 산행 차림으로 대문을 열고 우리와 맞닥뜨렸던 일. 한발 늦었더라면 못 뵈올 뻔했던 날, 선생님께서 매주 어느 노스님과 도봉산 기슭을 다녀오신다 했습니다. 우리는 시골 변방에서 시를 쓰는 후학에게 정다이 시선을 주신 대학자에게 공손히 예를 표하고 격언의 말씀도 받아왔지요.
<갈뫼>란 이름을 제의한 사람이 박 시인이란 사실을 후배들은 잘 모릅니다. 이 곱고 멋진 시어(詩語)를 지어낸 박 시인을 이제는 그저 그리워할 뿐입니다. 우리가 더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은 해마다 연말이면 『갈뫼』 출판 기념식 후 하룻밤을 함께 유숙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일찍 잠들고 치아 간수를 하도 잘해서 70 넘은 나이임에도 충치 혹은 의치(義齒) 하나 없었다는 사실, 그래서 우린 박 시인님이 장수할 거라 믿었습니다. 잔병치레 없이 경포호 걷기를 부지런히 하신다지요?
늘 새로운 패러다임에 귀 기울이셨지요. 소녀처럼 천진스러웠지요.
한 자락 감추는 일 없이 액면 그대로였지요.
얼마 전 내 주변 한 사람이 당뇨 합병증으로 왼쪽 발목 아래를 절단한 일이 있었습니다. 석 달이 지난 요즘에도 그 사람은 가끔 왼발 엄지가 가렵답니다. 긁으려고 손을 더듬다가 곧 없는 발을 인정한다는군요. 그 말이 어찌나 내게 와 닿는지요. 아침 자리에서 눈을 뜨곤 박 시인을 떠올리며 ‘연락해야지….’ 하다가 ‘아하 박 시인은 자고 있지. 아무리 불러도 잠에서 못 깨나겠지’ 합니다. 그리곤 어제와 또 다른 회한을 곱씹습니다.
강릉에서 속초행 버스 타고 오실 적엔 친정 가듯 설레고 기대에 찬 가슴으로 오신다 했습니다. 모든 회합 끝나 강릉으로 되돌아가실 적엔 어떠하셨을까? 나는 무정하게도 그 심정을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군요.
합평이랍시고 버릇없이 내뱉은 말, 지나치게 상처를 드렸을 것들이 날이 갈수록 후회됩니다. 박 시인 강릉 돌아가는 길에
얼마나 야속했을까요?
얼마나 허전했을까요?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2017년 10월 어느 날 밤에
이은자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