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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2017년 [추모특집] 추모시 - 이충희, 채재순, 김춘만, 이구재, 정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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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795회 작성일 17-12-19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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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人 박명자를 哭하며 쓴 弔詩


이 충 희


문학으로의 우정 62년을 함께한 친구를
병문안 한번 없이 졸지에 보내는
이 황망함 이 참담함 이 기막힘
뭐라 표현할 길 없음에 이르러
오호 통재라.


어제는 초당성당에서 삼우제 미사 바치고
암자로 돌아와 극락왕생을 지장전에 올리고
나들이 가는 친구를 배웅하듯 보내고
나는 때 되면 밥 먹고 잠 오면 잠자고
더러 웃으며 이야기도 나누고
명치끝에 박힌 응어리로 가슴을 치며
사는 일 아무것도 아니다 아니다 되뇌며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시라
당부 한 줄 써서
빈방으로 弔花를 보내며
나는 죄인이듯 흐느끼네요.
오호통재라.


돌이키면 영민하고 침착한 성품의 문학소녀
강릉사범학교 2학년에 이미 탄탄한 실력을 발휘
이화여대 주최 전국여고생 문학작품 공모에서
장원 그 필명을 전국에 떨친 재색을 겸비한 재원
어느 역술인이 문창귀인(文昌貴人)이라는 점괘를
내놓더라며 흡족해하던 일화며
詩에 대한 열정 하도 펄펄 끓어 손 데이지 싶어
쉬엄쉬엄하시라 일러도 막무가내
생의 구심을 文學! 오직 詩에로의 전력투구
그런 친구가 14권째의 시집 『아픈 나무를 위하여』
준비를 서두르는 중에 그 시집이 유고집이 되다니요.
오호통재라.


연탄가스 중독 삼 일 만에 소생 그 영민하던
뇌 기능 일부가 손상되어 힘들게 힘들게
그래도 그 집념 詩의 끈 붙잡고
꾸준히 시작 활동을 이어온 초인적 능력 지금 돌이키니
이건 순전히 그 문창귀인의 신통력이지 싶은
별생각 다 떠오르는 그래요
에이는 마음 추스르느라 얼이 빠진 나는
오호통재라.


무슨 억하심정도 없으면서
부지불식간에 저지른 이런저런 말 혹여
가시로 박혔으면 뽑고 가시게
다 내 못난 탓이니 그리하시게

기억도 희미한 세월을 부대끼며 살다 보니
역지사지의 경우 까마득 잊고
그대 가장의 책무 지중함 까무룩 잊은 일
용서하시게 서운함도 버리고 가시게.
오호통재라.


갈뫼 동인 함께 나누던 지난 2월 23일 점심이
이승에서 함께든 마지막 식사였음을
뉘 알았겠는지요
그리 달게 자시며 다음엔 내가 사줄게라더니
그러네요. 그 약속은 이승에선 무효하지만
내 가슴에선 여전히 유효한 선약이네요.
오호통재라.


늘그막의 큰 슬픔이 오랜 벗 잃는 일이라고
몸 가누기 힘든 내게 위로로 전해주던
엄 시인의 그 말씀이 이토록 옳음을 증명하는
내내 나는 그 슬픔을 삭이느라 가슴 저리네요.
오호통재라.


오랜 내 친구 詩人 박명자
하늘나라 그 안식의 천상에서 부디 영면하시게.


이 弔詩 한 편을 열아흐레 걸려 겨우겨우 탈고
내 오랜 친구 詩人 박명자 영전에 바치느니.
오호통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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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저쪽


채 재 순


봄 들판에 삼월 햇살 원 없이 들어올 때
먼 저쪽으로 갑자기 건너가시니
그 발자국 사이로 생전에 바라보던 나무들
말없이 서 있고
봄 꽃 피어나 생글거리는데
사월이 오면 함께 소풍 가자던 약조 잊으셨는지


‘나무들의 흰 뼈’, ‘나무의 아침 표정’ 만지작거리느라 바쁘신가
종달새의 지저귐 속에 빠져 이쪽 일은 영영 잊으셨는지
입성 좋은 소나무 찾아 어느 골짜기로 가고 계신지
그곳의 하늘도 저리도 푸르른가요


호수의 반짝임으로 밝아지던 그 얼굴 생생한데
빈자리마다 퐁당거리는 솔바람
저녁노을 저리도 환하고
산마루엔 별들 반짝이는데 그 별 중의 별로
이쪽 소식 궁금해
가끔 우두커니 된 우릴 향해 깜박이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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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발길


김 춘 만


그것이 벼랑길이라는 걸
아니면 한 줄 바람이란 걸
그가 걸어간 뒤 알았네.


나무를 바라보면
연하고 연한 새눈이 열리고
나무를 안은 가슴으로
수만 개 수관으로 통하던 시인의 DNA


나무를 끌어안고
나는 나무다 나무는 나다
그렇게 속삭이고 속삭이다가
물오르는 봄날
한마디 말도 없이 나무 곁으로 걸어간 그


저 많은 나무 속 어디쯤 서 있기나 한지
나무속으로 드나들던 발길
그를 찾아오던 나무들의 발길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벼랑길에서 맞는

한 줄 바람

문득 코끝에 걸리는
‘아흔아홉의 손을 가진 4월’*의 향기에
가슴 저리다.
시인의 나무는 이렇게
내 곁에 서 있구나.


⁎2017. 3. 14 타계하신 박명자 시인의 『현대문학』 등단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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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명자 시인을 그리며


이 구 재


“구재씨, 요즘 건강 괜찮아요?”
한 이레쯤에
한 번씩은 전화 안부를 물어 오던
카랑카랑한 목소리
그립습니다.


내가 수술하던 날
병상을 지켜 밤새워 주신 분
고마움 갚지도 못했는데
어찌 그리도 황망히 떠나셨는지요.


“눈비 오는 날 빼고는
매일 경포호수를 걷는다”
자랑하시더니
왜 아무도 모르게 가셨나요


미지의 세계와 미궁의 세계를 *
넘나들며 사차원적 메시지를 남기시더니
기어이 그 환상의 나라로 가신 겁니까

“내 작품은 일종의 신들린 나비의 유희”
라 하시더니
그 신들린 나비 날개를 달고
천국으로 날아가신 건가요


무서운 눈초리*
가슴 콩콩 뛰는 겁이 없는 곳
쫓기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부디 아름다운 노래
평화를 노래하소서.


⁎박 선생님의 시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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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자나무


정 영 애


명자라는 이름처럼 시를 위해 한평생 붉은 꽃 뜨겁게 피워내던 당신은 한 그루 명자나무였습니다
담장의 장미와 세상의 모든 나무들과 *바람의 생명율까지 사랑했던 당신


*비탈에 선 나무처럼 시의 절벽에 서서도 격렬하게 시를 갈구하던 당신

맨발로 *나무의 은유법을 딛고 *아흔 아홉의 손을 가진 4월이 오기도 전, 이천십칠 년 삼월 어느 날 너무도 급히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시간의 흔적을 지우듯 작별할 시간도 없이 남겨진 우리는 *떠도는 나무처럼 마음 시려와 마리아 앞에 기도하듯 흐느꼈습니다


지금쯤 *자유의 날갯짓으로 하늘에 오르신 당신
*시간의 강하를 넘어 *2시 15분의 청보리밭을 내려다보신다면 아이처럼 신나서 또 시 한 편 쓰고 계실 당신 모습이 그려집니다 *매일 다시 일어나는 나무처럼 꿋꿋하게 시를 일으켜 세우던 당신
작은 *잎새들이 톱니바퀴를 굴리며 가는 이른 봄날이면 어김없이 명자나무 한 그루로 걸어와 우리 기억 속에 영원한 명자꽃으로 피어날 것입니다
편히 잠드소서


— 영원한 문학소녀였던 박명자 선생님을 추모하며


⁎ 박명자 선생님의 시집 제목 혹은 시의 제목을 인용함 : <바람의 생명율> <비탈에 선 나무> <나무의 은유법> <아흔 아홉의 손을 가진 4월> <시간의 흔적들을 지우다> <떠도는 나무> <자유의 날개짓> <시간의 강하> <2시15분의 청보리밭> <매일 다시 일어나는 나무> <잎새들은 톱니바퀴를 굴리며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