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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2017년 [추모특집] 대표 詩 1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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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765회 작성일 17-12-19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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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蓮 이미지



木蓮 밤마다
제 향내를 길어 올려
다리를 놓았습니다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一群의 이슬도 함께 깨어
香城寺 새벽 參禮는
그 다리로 오갔습니다


어느 날 木蓮은
무거운 그리움을 떨어뜨려
고운 다리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木蓮은 은혜의 물결 속
여문 燈이 되어
아래로 물살지게 되었습니다


法華經의 바다가 내미는 손을 잡고
木蓮燈은 더 깊은 곳을 열고 갔습니다.


⁎ 제 1시집 『아흔 아홉의 손을 가진 사월』 일신출판사(日新出版社, 1979),
『현대문학』 등단작품(197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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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 있었읍네



서천(西天) 머흐는 구름 속에
당신 혼자 보내 놓고
이제껏 떠내려와서 생각이 나네


진솔 속치마 얼룩질까 봐
재막에 숨어 소나기 피하던
아득한 그날부터
내게로 뭉청뭉청
무너져 내리던 당신의 숨 가쁜 感性


거기 파묻혀 平生 외눈 뜨고
당신만 내다보며 달려왔었지


온통 내 四園에 반짝반짝
당신의 純粹 당신의 虛妄


몸을 조여 오던 幸福 빛깔의 밧줄
이 테두리 안에 와서 사위어 드는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칼칼 한 低音


잊고 있었읍네 잊고 있었읍네


⁎제 2시집 『빛의 시내』 (강원일보(江原日報社,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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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거미줄



시인의 거미줄은
죽음보다 한 치 높게 걸려
영원을 펄럭인다


시인의 거미줄에는
다리 밑 종말을 기다리는 절뚝발이 노파의
잔기침이 걸리운다


시인의 거미줄에는
노래 잃은 나이팅게일의 마지막
객혈이 걸리운다


광장에 나서서 밀실에 앉아서
펑펑 쏘아 올리는 언어의 은빛 화살이
걸리운다


시인의 거미줄은 자유보다 한 치 높게
죽음보다 한 치 높게 걸려
어둠의 시대를 펄럭인다.


⁎제 3시집 『바람의 생명율』(文學世界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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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



때가 다하여 나무가 떠나고 있다
하나의 왕국이 저물고 있다


하루가 피곤하여 어둠의 문을 내리듯이
정념에 타던 목청이 저만치 사라지고 있다
스르르 한 생애를 맺고 있다


찬란히 빛나던 왕관 거두어들이고
희망 속 밝히던 촛불도 끄고
그 여자 눈물의 생애가 닫히고 있다


굽이굽이 숨차게 밟아온 고갯길 벼랑길
채머리 흐드러지게 풀어헤치고
꽃잎이 물처럼 흐르고 있다


지난날 젊음 뒤란에서 시고 덟던 맛
구구절절 두루마리 긴긴 사연 접어들고


꽃이 진다
여자의 왕국이 저물고 있다.


.제 4시집 『나무의 은유법』(한국문연,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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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아홉의 손을 가진 사월



감춰둔 수정 상자가
댓돌 위에 와그르르 엎질러졌다


나는 하루의 울타리를 새어 나와
목련과 볼을 맞춘다


방금 꽃잎을 성큼 딛고
깨어나는 이슬
하늘과의 눈부신 해후


나는 간지럼 타는 짐승을
잉태하고 자꾸 메스꺼워
캄캄한 먼지 송이를
꽃 잔등에 토해 낸다


아이가 놀다 버린
종이 비둘기가 마당귀에서
생흙 가지를 사각사각 마신다
하늘가에서 무너져 내린
꽃폭포가 뜨락 가득히 현기증을 몰고
종이 비둘기가 흠칫 눈을 뜬다.


⁎제 5시집 『자유의 날개짓』(未來文化社,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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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기는 짐승



나를 숨겨다오
나는 지금 쫓기는 짐승이다


이 시대 매커니즘 바람
산업사회 계층에서 오는 공해 매연
내 정수리를 밟고 지나가는
정글의 억센 힘의 발자욱


밀물져오는 세기의 파도타기
나는 지금 쫓기고 쫓기어 숨차 있다


빈 몸 빈손 부끄러움 감싸 안을 옷 한 벌 없이
시대의 바람 속에 혼자 떠밀려 운다


나를 쫓아오는 저 무리들은 손에 손에
검을 들었구나


여직 나를 은신할 오막살이 한 채
짚덤불 한 무더기 보이지 않고
지금 향방 모르고 변두리로 변두리로
쫓기는 나는 숨찬 짐승이다.


⁎제 6시집 『매일 일어서는 나무』(문협출판부,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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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봉 푸른 솔



설악산 대청봉 위에서 세상사 내려다보면
황금도 한낱 티끌입니다


구름 위에 우뚝 솟아 발아래 굽어보면
금력도 권력도 한 오리 바람입니다.


사람들은 한 치 앞을 못 보면서
하나 더 갖겠다고 싸우는 소리


사람들은 마음을 욕심에 가두고
조금 더 높이 올라앉겠다고 힘주는 소리
눈 덮인 청봉위에서 눈 외투를 입고 내려다보면
인간 그 원죄의 빛깔이 피보다 붉습니다


오늘은 찬바람 속에서 가슴을 활짝 열고
추운 이웃들의 아픔을 나이테에 둥글게 감아 봅니다.


⁎제 7시집 『시간의 강하』(답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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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하는 소나무



해 뜰 무렵 소나무 그늘에 갔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오직 오래오래 시간을 건너온
소나무 한 그루
나는 생각을 비워 버리고
빈 그릇처럼 그 곁에 갔다


소나무는 깊은 명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내 마음도 이상한 에너지의 조화 속으로 빠져 잠겼다


육체는 에고를 껍질처럼 벗어두고
자유의 날개를 달고
소나무와 텅 빈 마음은 하나가 되었다
조선 소나무 깊은 옹이마다 깨달음의 문을
삐긋이 열어 보이고
가까운 곳에 일어선 풀들이 경배하는 몸짓


아 일상의 근심 걱정 선뜻 놓아 버리고
완전한 자유, 무아의 기쁨
가벼운 나래 천천히 파문 지으며
소나무 그늘에 깊숙이 잠겼다.


⁎제 8시집 『혼자 산에 오는 이유』(시문학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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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진을 시작하는 4월의 나무들



지난 겨울 모멸의 긴 아픔 열고
4월 아침
빛의 화살이 고목 가슴에 꽂히었다.
 
그제서야 호명 받은 장병들처럼
일제히 일어서는 나무들.


눈 내리던 깊은 겨울밤 불면의 긴 긴 이야기
검은 시름은 이제 접어두자.


지난 겨울 고독의 아픈 잔을 마신 나무만이
4월 아침 연둣빛 금이 가슴에 곧게 그이는가.


지금 막 일어난 나무들은
사관생도처럼 가슴 가득 빛 부신 단추를 달고
4월의 거리를 가볍게 행진한다.


⁎제 9시집 『시간의 흔적을 지우다』(月刊文學 출판부,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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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새들은 톱니바퀴를 굴리며 간다



머리카락 흐트러진 한 사내가
허무의 길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다


그는 저무는 느티 아래로 한 박자 뜸 들이고
계속 걷는다


땅에 떨어진 잎새를 줍는다
잎새에는 톱니바퀴가 치아처럼 가지런하다


사내는 주운 잎새 위에 상형문자로
“빛”이라 새긴다


먼빛을 향하여 사내는 톱니바퀴를 조율한다


피곤한 오늘의 땀을 건너
사내는 촘촘한 톱니바퀴를 굴리며 조그맣게 사라져갔다


⁎제 10시집 『잎새들은 톱니바퀴를 굴리며 간다』(글나무,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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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 15분의 청보리밭



45도 비탈진 산 밭 이랑을 건너가는 흰 구름 자락도
가로세로 펄럭이는 유월, 창끝같이 예리한 햇살이
청보리밭 두렁에 떨어진다.
유월의 해시계 아래 누가 이마에 방아쇠를 당기고 있나.


느닷없이 술렁이는 k씨네 청보리들…
2시15분의 청보리밭 두렁은 활시위처럼 팽창한다
놀란 보리 이삭들은 시인의 말보다 빳빳하게 수염 세우고
긴장한다.
무성한 웅성거림은 사방 연속무늬로 풀어지며…


맨몸으로 눕는 금색 보릿단 사이로 누가 비척 비척
걸어 나간다.
앗 반 고흐 !
뒤를 흘깃 돌아보는 수염 속 사나이


부서진 유월의 탱크는 녹이 슬고 멈춰버린 지뢰는 잡초 속에
돌이 되어 가지만 생전에 그가 쏟아내지 못한 말들이
끈적한 객혈로 보리밭 시간 위에 흘러 번지네.


⁎제 11시집 『2시15분의 청보리 밭』(한국문협,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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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산성비



M상가 13층 빌딩 뒤편에서
시큼한 비 냄새가 돌아 나온다


가만히 솟구치던 낯선 새싹 하나
보도블록 사이로 까칠한 주둥이를 얼른 숨긴다


빗방울 두어 개가 점프하며 지나간 후
반달무늬 상처가 내 손등에 금방 생겼다


어슬렁 돌아다니는 산성비 사이 사이로
풍덩한 바바리 코트의 사내 하나가
기침하며 담뱃가게 코너를 돌아 나갈 때


문득 세상을 건너뛰는 일이 치사해져서
나는 몸을 조그맣게 움츠렸다


밭두렁 논두렁 파충류들조차 발돋움하고
장애물을 건너뛰는 눈이 부신 시간
나의 몸은 왜 밧데리가 약해지는가


짜놓은 연고처럼 시큼하게 무너져 내렸다


⁎제 12시집 『떠도는 나무』(글나무,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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넝쿨장미 울타리



넝쿨장미 울타리 그 집 앞을 지나올 때
나는 두 눈을 꼭 감는다


층층이 하늘 계단을 오르는
꼿꼿한 관능의 그녀들 손톱과
유릿가루처럼 흩어지는 웃음소리 …


한순간 아찔해 버린다


송이송이 말문을 열어 폭죽처럼
솟구치는 교성이 겁난다


그녀들 꽃뱀의 혀 같은 덩굴손이
나란히 다가올 때 나는 몸을 조그맣게 움츠린다


가시덩굴 사이사이로 막 도망쳐 나올 때
가슴이 콩 콩 콩 뛰었다.


⁎제 13시집 『낯선 기호들』(글나무,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