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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2018년 [평론] 지역 문인의 시(詩) 작품에 나타난 ‘청호동과 갯배’의 이미지 / 김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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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944회 작성일 18-12-2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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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들어가는 말


속초문화원의 ‘청호동과 갯배, 실향민의 삶을 다룬 문학작품 해설’이라는 주제를 받았다. 원고를 쓰기 위해 우선 청호동과 갯배를 주제로 한 문학작품, 그중에서도 시(詩) 작품을 찾기 시작했다. 의외였다. 청호동과 갯배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작품이 생각보다 매우 적었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 나왔다 청호동에 정착한 피난민 1세대의 삶을 그려낸 실향민의 이야기를 통하여 ‘분단 문학’과 ‘통일문학’에 관한 작품은 상당수가 있지만, 청호동과 갯배를 소재로 실향과 망향의 이미지를 소재로 형상화한 작품은 그리 많지가 않다.
필자가 본 소고를 작성하기 위해 청호동과 갯배에 대한 자료를 조사해본 바, 대부분의 자료가 역사적, 지정학적, 향토자료학적 측면의 조사자료이었다. 문화예술 자료로는 엄상빈 사진작가의 사진집 『속초 아바이마을, 청호동 가는 길』과 『아바이마을 사람들』이 출판되었다. 문학적 자료로 피난민의 삶을 소재로 실향과 망향을 이야기하는 작품은 많이 있으나, 청호동에 관한 지역 문인의 시 작품은 20여 편, 갯배에 관한 시 작품은 10여 편에 불과했다. 그러나 2000년도에 채재순 시인이 <속초시 피난민 정착사>라는 향토자료 속에 “문학 속에 투영된 ‘속초시 거주 피난민’들의 삶과 그 공간”이라는 제목으로 시, 소설, 희곡 등 다양한 문학작품을 분석하여 ‘속초 실향민 문학’을 개관한 바 있다.
따라서 본 소고는 지역 문인의 청호동에 관한 작품 20여 편과 갯배에 관한 시 10여 편을 중심으로 지역 문인들의 눈에 비친 청호동과 갯배의 이미지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Ⅱ. 청호동의 역사에 관한 소고


먼저 청호동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자.
속초문화원의 자료에 의하면 청호동은 속초시의 최동단에 위치한 마을로 동쪽으로는 동해바다, 서쪽으로는 청초호를 두고 남에서 북으로 길게 뻗은 형국을 하고 있다. 청초호는 육지로 굽이쳐 들어온 바닷물이 퇴적층에 막혀 호수가 형성된 것으로 전형적인 석호(潟湖)다. 석호와 바다와의 경계는 그 사이에 퇴적된 모래사장에 의한 경우가 많다. 물론 청초호도 동해 바다와 모래사장을 사이에 두고 막혀 있었다. 이를 사구(砂丘)라고 하는데, 청호동은 바로 이 사구, 즉 모래밭에 생성된 마을이다. 마을의 형성은 피난민 1세대의 설명에 의하면, 1.4 후퇴 때 내려왔다가 국군의 북진과 시기를 같이하여 귀향하다가 잠시 짐을 푼 곳이 바로 청호동이라는 것이다. 6.25 전쟁 당시 북진하던 국군이 중공군의 개입에 막혀 잠시 주춤했다가 다시 38선을 넘은 것이 51년 3월이므로, 마을의 형성은 그 이후가 될 것이다.
속초시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6.25전쟁 이후 속초 및 주변으로 이동한 피난민의 규모는 48,722명에 이르는데, 이들 중 배를 이용하여 이동한 사람들은 주로 속초항 주변에 거처를 마련하였고, 육로를 통해 이동한 사람들의 대다수는 현재 종합 공설운동장 뒤편인 학사평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청호동의 옛터는 여러모로 거주지역이 되기는 힘들다. 모래사장인 탓에 지반이 단단하지도 않고, 바닷물을 머금고 있는 탓에 식수 확보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런 곳에 사람들이 살게 되었을까?
당시 청호동에 거주하던 사람들의 출신지를 보면 함경남도가 92%로 절대적인 다수를 차지하였고, 이들 중 반 이상이 어업을 생계로 하여 생활을 유지하였다.
이들이 속초 정착 후에도 어업을 생계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고향에서 어업에 종사했었기 때문에 어업 관련 기술에 숙련된 이들이 많았고 전쟁 시 피난 수단으로 배를 이용한 이들이 많았기에 보유된 선박과 인력을 빠르게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기 정착민들은 대부분 피난민들로, 이곳을 종전 후 귀향을 위한 거점으로 생각하고 임시로 정착한 상황이었다. 북에서 남하할 때 청호동에 자리 잡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배를 이용하여 피난을 나왔으며,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도 배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배를 정박하기 쉬운 지역이 임시 거주 공간으로 적당하였을 것이다. 더욱이 청초호의 사구는 빈터여서 다른 지역에 비해 큰 갈등 없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휴전선으로 남북이 가로막히자 모래사장의 임시 정착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이곳에 정착하게 된다.
어느 정도 마을이 형성되면서부터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피난민들은 이곳에 친척이 있어 이주하거나, 같은 고향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주하는 등, 여러 계기로 모여들어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피난민들이 유입되면서 일시적인 움막 형태의 집들이 들어섰고, 동향 사람을 찾아 몰려든 이들이 정착하면서 신포마을, 정평마을, 홍원마을, 단천마을, 앵 고치마을, 짜꼬치마을, 신창마을, 영흥마을, 이원마을 등의 집단촌이 형성되었다.
또한 청호동은 ‘아바이 마을’이라는 별칭으로도 유명하다. 사전적으로 ‘아바이’라는 말은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를 의미하는 방언으로 경상북도와 평안도, 함경남도 일대에서 사용되며 지역마다 어감은 조금씩 다르다.
과거 청호동 주민들 중에서는 함경남도 북청군 사람들이 주로 ‘아바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지만 현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보다 나이 많은 남성들을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아바이마을’이라는 단어의 연원을 밝힐 수 있는 자료는 찾기 힘들다고 한다. 그러나 단어의 연원보다 관심을 끄는 것은 ‘아바이 마을’이라는 용어가 갖고 있는 자기 정체성의 자각이다. ‘아바이’라는 것은 전쟁 피난민을 상징하는 근원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마을’이란 현실적 기반을 의미한다. 즉 청호동을 대변하는 이미지는 ‘실향과 망향’이다. 이 두 가지는 청호동에 대한 소속감과 정체성의 키워드다.
청호동의 인구가 정점을 이르던 때가 1966년경이다. 이후로 청호동의 인구는 완만한 감소세로 돌아서고 1980년경에 가장 많은 인구가 빠져나갔다가 이후로 다시 완만한 감소세로 돌아서게 된다. 청호동 인구의 감소는 당연히 어획량의 감소와 관련이 있다. 주지한 자연 환경적 영향 이외에도 청호동 생활환경의 변화나 속초시의 팽창, 정착민 2세 및 3세들의 외부 진출 등도 청호동의 어업 위축에 복합적인 영향을 주었다. 마을이 유명세를 타게 되면서 관광지화되어가는 분위기는 식당과 커피숍 등 다양한 서비스 산업이 마을의 중심이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또한 신수로 개설과 금강대교, 설악대교가 개통되면서 두 개의 청호동으로 분리된 오늘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Ⅲ. 지역 문인의 시 속에 나타난 청호동의 이미지


지역 문인 중 실향민의 이야기를 가장 많이 이야기한 시인은 단연 이상국 시인과 김춘만 시인이다. 이상국 시인은 청호동, 갯배와 함께 그 마을 속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노래하였다. 반면 김춘만 시인은 본인이 태어난 고성 공현진에 뿌리내린 피난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실향과 망향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 중 지역 문인들이 노래한 20여 편의 시 작품을 통해 청호동의 형상화된 이미지를 찾아보자.


1. 피난민 1세대들의 디아스포라로서의 청호동


디아스포라의 개념을 명확히 하기 위해 2010년에 강원대학교 문화인류학 김민정 교수가 <가족과 문학> 제 26집 3호에 발표한 「복 없으니 고생이지 : 한국사회의 변화와 ‘피난민 장 씨의 생애 이야기’」에 인용된 논문 일부를 요약해 옮겨 본다.


전쟁 때문에 집단적으로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피난민은 ‘국내 난민이주자’라는 디아스포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화와 통합의 측면에서 볼 때 국제 난민의 사례와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디아스포라로 볼 것인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사실 디아스포라의 개념 규정은 애매한데, 가장 고전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샤프란의 정의를 먼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디아스포라는 첫째, 하나의 중심에서 적어도 두 개 이상의 주변 장소로 분산되며, 둘째, 원 고국에 대한 기억과 신화를 유지해야 하고, 셋째, 자신이 방문국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그럴 수 없다고 믿으며, 넷째, 고국은 때가 되면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할 곳이라 여기며, 다섯째, 고국의 유지나 회복을 위해 헌신하고, 여섯째, 이들의 집단의식과 연대는 고국과 지속되는 관계로 정의된다. 그런데 김귀옥에 의하면 ‘월남민’들은 고전적 의미의 디아스포라로 보기 힘들다. 이들에게는 귀향이 보장되지 않으므로 유대인 집단을 설명하던 디아스포라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우며, 남한 시민의 정체성을 가지기 때문에 해외 한인과도 다르며, 뚜렷하게 사회적 소수집단으로 인식되는 것도 아니며, 민족공동체 의식에 위협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퇴렐리안(Tölölian)의 견해처럼, 오늘날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이주자와 국외자, 난민, 이주노동자, 추방커뮤니티, 재외 커뮤니티, 종족 커뮤니티와 같은 말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의미영역을 일컫는다.


지역 문인들의 청호동에 관한 시 몇 편을 살펴보자.


청호동 방파제 너머 떠다니는 섬이 있다는 걸 /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장화를 신은 채 청호동 사람들마저 잠들고/ 흥남이나 청진물이 속초 물과 쓰린 속으로/ 새섬 근처에서 캄캄한 소주를 까다가 쓰러지면/ 북쪽으로 날아가는 새 섬을 사람들은 보지 못한다./ 헐떡거리며 짐승처럼 날다 바다의 벽에/ 다치고 돌아와 죽은 듯이 잠드는/ 청호동 방파제 너머 새섬을 사람들은 모른다./ 청호동 사람들의 동해 밑바닥 국적 없는 고기를 잡거나/ 모래 위에 집짓고 아이들을 낳는 사실을/ 믿거나 믿지 않는 건 무서운 일이다./ 나룻배 끊기면 흐르는 땅 모래 껴 앉고 아바이들 잠드는/ 청호동 방파제 너머 이남 물과 이북 물이/ 야 이 간나이 새끼 마이 늙었구만 하며/ 공개적으로 억세게 무너지면/ 동해 속으로 사라질 청호동은 잠시 객지일 뿐이고/ 분명히 객지여야한다./ 청호동 방파제 너머 청호동 사람들의/ 흐르는 섬이 있다는 걸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이상국, 「청호동 새섬」


떠나야지./ 청호동은 청호동 사람들의 땅이 아니고/ 그저 남한의 공유수면일 뿐,/ 이곳에선 물이 흐를 때마다/ 자꾸 발목이 빠진다./ 잊혀지지 않으려고/ 잠들지 않으려고/ 서로 모래뿌리는 저녁,/ 갈매기들이 청초호 더러운 물에 부리를 박고 있을 때/ 늙은 아바이들이 눈시울을 적시며 바라보고 있다./ 섬이 아닌 줄 알면서도/ 끝끝내 떠도는 섬,/ 흐르고 물이 흐르는 동안/ 청진이나 신포 부두에 매어 놓은 배들이 삐걱거린다.//

― 이상국, 「떠도는 청호동」


이상국 시인은 청호동은 섬이 아니되 섬이라고 말한다. 즉 지정학적으로는 섬이 아니지만 피난민 1세대들이 뿌리 내리지 못하고 언제든 떠날려고 마음먹고 있는 청호동 모래밭은 ‘청호동 사람들의 땅이 아니고, 그저 남한의 공유수면일 뿐’이고, ‘이남 물과 이북 물이 공개적으로 억세게 무너지면 동해 속으로 사라질 청호동은 잠시 객지일 뿐’인 곳이다. 그러나 여기서 섬은 또 다른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바로 피난민들이 가지고 있는 ‘단절’에 대한 함의적 단어이기도 하다. 고향과 고향에 담긴 추억, 생사조차 알 수 없는 피붙이와 일가친척들, 생업과 예전에 가졌던 것을 찾지 못하는 상실감 등이 가져다주는 단절감을 시인은 갈 수 있으되, 쉽게 갈 수 있는 곳은 아닌 ‘섬’으로 1세대 피난민의 디아스포라를 보여주고 있다.


새는 이곳에서 먹이를 찾지 않는다
두 눈과 두 발을 모두 걷고
청초호 어디쯤 잠기어 가는 신촌이나 함흥을
청호동 가는 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김영준, 「청호동 일기 3」


햇발이 종종걸음으로/ 달려오는 날에도/ 캄캄한 대낮이 걸려드는 청호동 그물// 핏발선 광녀의 목청이/ 와-와 울며 걸려도/ 소금에 절여진 모래땅이/ 등 따신 아랫목이 될 수 없다며/ 비릿한 바람으로 몰려와 안겨도/ 어제 놓아준 명태가/ 청상과부로 늙고 있는 고향을 몰고 와/ 저녁노을로 걸리고// 청초호 갈매기 떼/ 속초 하늘을 끼룩이는데/ 섣달 하현달을 건져 올리는/ 청호동 그물.//

― 채재순, 「청호동 그물」


열 개의 다리가 있는 일 열/ 허공에 매달려 있다/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인연으로/ 청호동에 모여 나부끼고 있다// 소금기 묻은 바람 불어와/ 온몸 탈수가 일어나는 한낮이면/ 죄어오는 그리움에/ 눈이 짓무르도록 울어버리고// “먹물 뿜어내던 그 바다 돌아갈 순 없을까”// 목이 아프도록/ 청호동 하늘의 별을 세며/ 오징어들은 밤이슬 맞고 있다// 북쪽 고향바다 그리워/ 줄에 매달린 채/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인연으로 팔에 팔을 걸치고/ 바다보다 속 깊은 청호동 사람들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권정남, 「오징어 덕장이 있는 청호동」


이상국 시인이 ‘섬’으로 디아스포라를 표현 했다면, 김영준 시인은 ‘청초호 어디쯤 잠기어 가는 신촌이나 함흥’을 통해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청초호 물속에 가라앉은 불빛으로 표현했고, 채재순 시인은 그들이 깔고 앉은 청호동이 ‘소금에 절여진 모래땅이 등 따신 아랫목이 될 수 없다며’ 늘 떠남의 열망을 가진 그들이 따스하게 등 붙일 곳이 아님을 이야기한다. 권정남 시인은 청호동은 그들에게 그토록 돌아가고 싶은 ‘먹물 뿜어내던 그 바다’가 아니라 ‘소금기 묻은 바람 불어와 온몸 탈수가 일어나는 한낮이면 죄어오는 그리움에 눈이 짓무르도록 울어버리고’ 싶은 대기소일 뿐이었다.


2. 피난민 1세대들의 희망과 좌절의 땅 청호동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청호동은 피난민 1세들에겐 고향으로 가기 위해 잠시 머무는 대기소요, 피난처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온전한 집을 짓고 터를 잡은 것이 아니라 모래밭 위에 임시로 움막을 짓고, 집 앞 바다에서 생선을 잡으며 귀와 눈을 북쪽 땅을 향해 크게 열어 두고 살아갔다.

그날 단천에서/ 뱃길로 사흘 객지 속초에 와/ 나무를 심는 일은 단천을 버리는 일이다./ 그렇게 청호동 모랫바닥에 엎드렸다가/ 한두 달이면 떠나야할 객지,/ 청호동에 나무를 심고 뿌리를 키운다는 건/ 단천나무를 욕하는 일이다/ 철공소집 변돈도 받아야 하고/ 삐뚤네 콩 멍석 두 닢도 돌려줘야 하는/ 단천이 보이지 않는다./ 뱃길 사흘 머나먼 단천 때문에/ 나무를 심지 못하는 청호동 사람들의 단천은/ 단천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겐/ 아프리카나 마찬가지임을/청호동 사람들은 눈치채고 있지만/ 아직 청호동 모랫바닥에 나무를 심는 일은/ 뱃길 사흘 단천을 아주 버리는 일이다.

―이상국, 「청호동에 나무를 심는 일은」


그물이나 작살로는 잡을 수 없는 안개 때문에/ 원산이 보이지 않는다. 원산이 보이지 않으면 결코 보일 수 없는 서울, / 안개 속에 넘어진 아바이들은 모래바닥에 못을 박으며/ 캄캄한 소주만 마신다./ 안개가 청진을 먹고 원산 진남포를 먹어 치우고/ 목포 인천을 먹으며 영을 넘어와/ 뻔뻔스럽게 청호동 여자들과 동침하는 밤에도/ 인천 등대와 같은 속초 무적霧笛으로는 속수무책이다./ 청호동이 아프면 같이 아프다고 그리움 속에 몸을 숨기고/ 지워져야 한다고, 아픈 청호동은 지워져야 한다고/ 안개는 속삭인다./ 전라도나 함경도는 지구에 없다고/ 먹어 치우는 안개 잡으려고 작살이나 그물 펴들고/ 넘어진 아바이들 기 쓰다 잠들면/ 지워지지 않으려고 우는 청호동.

―이상국, 「청호동 안개」


물은 모여도 이곳에선/ 모래를 끌지 못한다// 새들은 새섬까지 갔다 다시 돌아오고/ 주둥이 가득 거품만 물고 있다// 작은아버지가 아버지의 술잔을 달래고 있을 때/ 고인 물처럼 점점 어두워가는 파도가 오늘도 다만 침묵하고 있다// 아픔이라고 하자/ 허연 생채기 같은/ 우리들 끊겨진 길이라 하자// 아침과 아침의 말을 고이 보내고 난 다음/ 청호동 네 굳은 어깨 너머/ 기침 같은 소주만 보이고// 물은 모여도 이곳에선/ 꽃이 되지 않는다/ 처박고 앉을 나무가 되지 않는다//

― 김영준, 「청호동 일기 1」


그런 청호동 아바이들의 삶을 이상국 시인은 ‘청호동에 나무를 심고 뿌리를 키운다는 건 단천나무를 욕하는 일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사흘이면 돌아갈 수 있는 고향 단천을 두고, 돌아가서 헤어진 이웃들에게 줄 것도 받을 것도 있는 청호동 아바이들에게 눌러살 목적으로 청호동에 집을 짓고, 나무를 심는 일은 고향을 포기하는 일이다. 그러나 생각과 현실은 늘 틈이 있어 ‘시간과 환경’이라는 청호동 안개는 ‘청호동이 아프면 같이 아프다고 그리움 속에 몸을 숨기고 지워져야 한다고, 아픈 청호동은 지워져야 한다고’ 속삭인다. 이제 그만 잊어버리라고 속살거린다. 그러나 그러기엔 너무 많은 것들이 있기에 ‘넘어진 아바이들 기 쓰다 잠들면 지워지지 않으려고 우는 청호동’으로 각인된다.
김영준 시인도 그 시절 청호동을 아바이들의 삶을 ‘물은 모여도 이곳에선 꽃이 되지 않는다 처박고 앉을 나무가 되지 않는다’라고 노래한다. 주둥이 가득 거품을 물고 새섬을 갔다 와도 끊겨진 길은 다시 이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제 청호동 아바이들은 서서히 좌절과 체념을 배운다.


청호동 일원에 마른 바람이 한 때 지난다/ 서서히 파도치기 시작하던 청호동의 좁은 어깨 펄럭이는 판자지붕/ 동에서 서로 바삐 움직이는 비릿한 손놀림// 망각의 연기로 꺼져가는/ 청호동 골목골목의 혼들// 청호동 골목길에는 파도가 혀를 내밀다가도/ 아주 속속들이 사리를 틀었다// 청호동 옷 소매 속/ 부엌 아궁이까지 날 세운 바람은 자리를 굳히더라// 청호동 바람은 밤마다 청호동을 떠메고/ 고향 뜨락까지 다녀서 바삐 돌아온다 하더라/ 고향집 텃밭도 돌아보고 안방도 기웃거리다가/ 새벽이면 스르르 제자리로 돌아온다더라/ 청호동 골목은 그러니까 검은 파도가/ 한의 높이까지 치솟아 오르지/ 청호동 아낙들은 밤 깊도록 낚시 바늘에/ 고향을 찍어서 바람을 찍어서 이야기처럼/ 서리서리 대바구니에 그걸 담는 일을/ 아주 이슥토록 하더라

―박명자, 「청호동 바람」


가지를 치고 있어요./ 파고들어 모래뿐인 땅 위에 피는 소금꽃/ 나무들은 흔들리며 소금을 뿜어내요./ 이 세상 한복판 낯선 땅에서 날아온 가지들이 버린 안개와 모래 바람 속에서/ 그렇게 쓰디쓴 수액을 나누는 일은 신기해요./ 보아요./ 발바닥 써늘한 소금밭에 지난날을 묻어 두고/ 흰 뼈의 통통선은 어디로 가는지/ 안개가 끌고 다니는 적막 속에서 맨발의 아이들이 뛰어올라요.
그물을 치고, 친 그물을 끌어 올리는 익숙한 장난질 속에는/ 펄떡거리며 아비가 놓친 고기떼가 걸려들고 와와 작은 섬을 채우는 환호 소리에 나무가 흔들려요./ 흔들리며 소금을 뿜어내요.

―김춘만, 「청호동 나무」


박명자 시인의 청호동 바람에서 이제 청호동 아바이들은 꿈속에서 고향 뜨락을 돌아보고 다시 새벽이면 제자리로 돌아와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아마이들은 밤 이슥토록 명태낚수를 찍어낸다. 이제 눈에 가물거리는 고향 보다 커가는 자식들이 더 눈에 밟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청호동의 변화를 김춘만 시인은 청호동 나무에서 ‘모래뿐인 땅 위에 흔들리며 피는 소금꽃 같은 청호동 나무’를 본다. 그 청호동 나무는 청호동 아바이들이 나무를 심으면 고향을 버리는 것 같은 죄책감으로 심지못한 나무 대신 ‘펄떡거리며 아비가 놓친 고기떼를 잡고, 환호 소리로 소금을 뿜어내는’ 아이들이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청호동 주민으로 자리 잡게 된다.


바람이 불어 가끔 해금강 하얀 모래를/ 청호동 방파제 위로 한 마장씩 부려놓고 간다네.// 수평선 위에는 가끔 붉은 달이 떠오르고/ 달 속에 숨었던 어린 나의 연인이/ 선연한 눈물 한 줄기 떨어뜨리고 가기도 한다네.// 때로는 처자를 남겨두고/ 바다 건너 한사코 떠나겠다고 마음먹기도 한다네.// 손 내밀면 닿을 것 같은 내 고향/ 뗏목을 타고 건너도 한나절일 텐데/ 나는 가지 못했네.// 나는 이제 걷지도 못하고/ 나의 연인을 알아보지도 못하네.// 아무것도 그리워할 것이 없다네/ 아무것도 보고픈 것이 없다네.// 그러나 지난 밤 차가운 비바람 속에/ 청호동 모래밭에 숨어있는 메꽃 한 송이/ 꽃잎이 다칠까 작은 손바닥으로 가리느라/ 전전긍긍하였다네.//

―최월순. 「아버지의 일기 –청호동에서」


봄은 오지 말라고 / 냉이 꽃 피었습니다./ 별들의 폭죽/ 금강산 왕벚꽃나무 가지에/ 매달려 울다 / 세월(歲月) 다 갔수다.// 쉽게 오진 않을 거라던/ 청호동 돌담길/ 속살 드러낸 향기/ 진동하네요.// 가긴 가는데/ 비무장지대 꼭대기 대동강 가/ 간헐성 폭발 장애 증후군 앓는 큰 아이 집에/ 진달래 피어야/ 가네요.//

―김영섭, 「속초, 청호동」


영영 다시는 못 만날 것을 알면서/ 얼싸안은 꿈결에 비단 자락 흔들며/ 겁으로 이별하는 동기간이다./ 북망산천 다다라서/ 문풍지처럼 서러운 미수에/ 혈육의 여한을 염장하는/ 처절한 눈물 강/ 범람하는 겨레가 있다./ 바라보는 별 밭이면 그립지나 않지./ 함께 묻힐 수 있는 고샅이면 서럽지나 않지./ 심장을 옥죄는/ 자절의 끈이 어디더냐?/ 농잇소를 다 팔아 주고/ 전지 거두어다 바치고라도/ 아니 되겠나이까/ 단전 저린 눈빛/ 상봉 채비 서슬서슬한 흰 고무신/ 상여꽃이 피었네.

―김영섭, 「다시 청호동에서」


청호동 모래밭에 잠시 짐을 부렸던 피난민 1세대들은 결국 귀향을 먼 훗날의 일로 기약하며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해 자리 잡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나는 가지 못했네. 나는 이제 걷지도 못하고 나의 연인을 알아보지도 못하네.’라고 말하지만 늘 그들의 눈과 마음은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1985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또 다른 희망이었다.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가슴 깊이 묻어 두었던 피붙이들과 만날 수 있고. 아스라이 멀어진 고향길이 다시 보이는 가느다란 연결고리였다. 그러나 그 희망의 끈을 잡기도 힘들었고, 피붙이를 만난 이들도 그다음이 보이지 않았다. ‘논밭과 소를 팔아서라도 함께 하고 싶지만, 상여꽃이 피도록 세월만 다 갔수다’라고 다시 절망한다.


3. 실향민 2세대의 삶이 가지는 청호동의 이미지


청호동 바닷가의 삶은 늘 치열했다.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피난민 1세대들은 악착같이 살아가야 했다. 남정네들은 툭하면 바람 부는 동해바다에서 섬으로 가라앉았다. 오징어를 말리거나, 밤늦도록 명태 낚수를 찍어야 하는 엄마 곁을 손가락 빨며 맴도는 아이들이 눈에 밟혀 고단한 하루를 열심히 살아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살아 있어야 고향도 갈 수 있으니까… 이제 그들은 피난민이 아닌 실향민으로 청호동에 얕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새벽을 건져 올리던 바람이/ 어지러운 물살로 뒤척인다// 어느 아침이면 돌아갈 수 있을까/ 그물질을 기다렸던 명태가/ 비릿한 바람으로 걸려들고// 청호동 마실을 따라 나란히 선/ 단천상회, 북청이용소 간판이/ 네 이놈, 네 이노옴! / 뚫어지게 내려보는 걸/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들// 아이들이 햇살로 깔깔거려도/ 설악산 대청봉 바람에/ 손발이 시린 청호동은 아침이 오지 않는한/ 캄캄한 바람, 어두운 대낮이다.

―채재순, 「청호동 바람」


이제 아이들은 ‘단천 상회, 북청 이용소’ 간판이 가지는 의미를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른들의 몫이고, 아직 어른들은 돌아갈 아침을 기다린다. 그래서 아이들이 깔깔거리고 열심히 뛰어노는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청호동은 아직 어두운 대낮이다.


내가 죽었다면/ 그것은 목울대가 메었기 때문이다// 갈매기를 모래밭에/ 울며 받아 적고 / 울고 읽은 이름들/ 유언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김향숙, 「청호동 바닷가에서」


청초호를 가르는/ 휴전선 닮은 모래톱 위/ 집들이 나지막하다/ 잠시 비를 긋고/ 바람만 막기 위해/ 오래전/ 그들은 흔들리는 모래톱 위에/ 그렇게 엎드려 있었다/ 먼 훗날을 살아가기 위함이 아니라/ 잠깐 쉬어 가는 곳/ 그렇게 내린 실뿌리가/ 50년 묵은 뿌리로 자리 잡아/ 이제는 훌훌 털고 일어설 수도 없다/ 갯배 위로 철다리가 놓이고/ 바닷길이 뚫려도/ 고향으로 가는 길은/ 아직도 멀어/ 죽은 이는 혼으로 떠나고/ 살아있는 이는 등 떠밀려 떠나고/ 어쩌지 못하는 사람만이/ 하나둘 높아져 가는 집들 속에/ 가쁜 숨 몰아쉬며/ 납작 엎드려 숨죽이고 있다

― 김종헌, 「청호동 낮은 집」


기차도 기찻길도 없는 속초 역사(驛舍)에서/ 전쟁의 아픈 기억이/ 7분짜리 영상물로 상영되고,/ 남루한 판자촌은/ 지워져 가는 기억의 증인으로/ 빈 역사를 지키고 있다.// 며칠, 아니 몇 달을 기약으로/ 시작된 피난살이/ 고향 땅 다시 밟을 희망이 있어/ 거친 바다에 삶을 내린 함경도 아바이들/ 모래땅 한 평짜리 판잣집도/ 배고픈 설움도 견뎌낼 수 있었다는데// 그리움으로 지켜낸 무심한 시간은/ 기약도 희망도 모르는 척/ 저 혼자 흘러가고/ 청호동 아바이마을에 뿌리내린/ 대를 이은 실향의 아픔만이/ 빈 역사와 남루한 판자촌으로/ 실향민 문화촌, 꽃비 내리는 뜰을 지키고 있다.//

―정명숙, 「청호동 아바이 – 실향민 문화촌에서」


그렇게 청호동 모래밭에 내린 얕은 뿌리들이 제법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가 될 만큼 깊은 뿌리로 잡아가게 되자, 이제 1세대 피난민들은 ‘울며 받아 적고, 울면서 읽은 이름’ 때문에 목울대가 메어 하나둘 죽은 혼으로 고향을 찾아간다. 거기에 청호동이 드라마 촬영지로 뜨면서 상업자본이 청호동을 잠식하고, 개발에 밀려 청호동 낮은 집을 떠나 시내로, 객지로 이사를 가며 청호동이 점차 본 모습을 잃어가게 된다. 이제 오래된 속초의 뿌리를 보려면, 실향민 문화촌 꽃비 내리는 뜰에 박제된 청호동을 보러 가야 한다.


청호동에 가본 적이 있는지/ 집집마다 걸려있는 오징어를 본 적이 있는지/ 오징어 배를 가르면/ 원산이나 청진의 아침 햇살이/ 퍼들쩍 거리며 튀어 오르는 걸 본 적이 있는지/ 그 납작한 몸뚱이 속의/ 춤추는 동해를 떠올리거나/ 통통배 연기 자욱하던 갯배 머리를 생각할 수 있는지/ 눈 내리는 함경도를 상상할 수 있는지/ 우리나라 오징어 속에는 소줏집이 들앉았고/ 우리들 삶이 보편적인 안주라는 건 다 아시겠지만/ 마흔 해가 넘도록/ 오징어 배를 가르는 사람들의 고향을 아는지/ 그 청호동이라는 떠도는 섬 깊이/ 수장당한 어부들을 보았거나/ 신포 과부들의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는지/ 누가 청호동에 와/ 새끼줄에 거꾸로 매달린 오징어를 보며/ 납작할 대로 납작해진 한반도를 상상한 적은 없는지/ 혹시 청호동을 아는지//

―이상국, 「청호동에 가 본적이 있는지」


물길을 트느라/ 사람의 발길을 끊었다/ 아바이 마을의/ 새로운 38선// 이제 더 이상 고향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20분과 5분의 차/ 야경 사진의 멋진 배경이 된/ 두 개의 철제 다리// 잃은 것에 대해 누구도 말이 없었다// 가을동화 은서네 집/ 1박 2일이 다녀간 집/ 입맛이 아닌 입소문을 팔고 삶이 아닌 드라마가 사는 곳// 발뒤꿈치로 늘려서 팔던 말린 오징어를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고향을 잊지 않으려던 이들과/ 그들의 삶을 나르던 갯배마저/ 편도 200원짜리 인증샷의 배경이 되어버린//오늘 저녁 무렵// 청호동이 조금씩 지워지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김종헌, 「청호동이 지워지고 있다」


이제 청호동 사람들도, 실향민 2세인 우리도 선뜻 청호동에서 ‘원산이나 청진의 아침 햇살’과 ‘수장당한 어부’와 ‘신포 과부들의 울음소리’를 기억해 내지 못한다. 그러니 누가 거기에서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있는 ‘납작해진 한반도’를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고작 ‘입맛이 아닌 입소문을 팔고, 삶이 아닌 드라마가 사는 곳’으로 청호동을 리모델링해서는 안 된다. 우리 속초의 역사이자, 더 나아가 대한민국 유일한 실향민 브랜드인 ‘청호동 아바이 마을’의 뿌리를 지워가며, 관광 1번지만을 외치는 일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Ⅳ. 갯배의 역사


청호동과 중앙동을 이어 주고 있는 도선(渡船) 갯배는 일제 말기에 속초항이 개발되면서부터 그 세월을 함께 하고 있다. 예전에 반부평(청호동)으로 불리던 이곳은 속초 부월리 2구(청호동)과 속진(영랑동과 중앙동의 일부)이 맞닿아 있던 것을 준설, 외항과 내항(청초호)이 통수되고 폭 92m의 수로가 형성되자, 이 마을 사람들이 거룻배를 이용하는 것이 매우 불편하였고, 특히 자전거나 손수레의 이용은 더 어려웠다. 1955년 속초읍에서 갯배 1척을 만들어 도선에 이용하게 되었는데 본래 크기는 트럭 한 대와 우마차 한두 대를 같이 실은 정도였다. 1961년도에 1척을 더 만들어 정식 도선업 허가를 받아 재향군인회 속초지회에서 위탁하여 운영을 하게 되었다. 속초시에서는 1988년에 다시 청호동 개발위원회에 위탁 운영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현재의 갯배는 1998년에 35인승 FRP선으로 개조한 것이다. 갯배의 운항 시간은 오전 4시 30분부터 오후 11시까지 운행하고 있으며, 청호동 주민들에게는 처음부터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하고 있다. 한해 유료 이용객 수는 15만에서 20만 명이며, 청호동 주민의 이용도 연간 20만 명을 넘으면서 갯배는 피난민들의 애환이 담겨 있는 소중한 기억으로 또한 속초시민과 동고동락하는 삶의 현장으로 함께하고 있다.
갯배는 양쪽에 두 가닥을 쇠줄을 매어 놓고 각 쇠줄별로 하나의 배를 고정시켜 사람이 직접 갈고리로 쇠줄에 걸어 당기면서 배를 앞으로 끌어당기는 방법으로 운행하는 멍텅구리 배다. 이 갯배에 승선하는 사람은 노약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갈고리로 이 배를 끌어야만 청초호의 수로(바다)를 건널 수 있다. 이 배는 드라마 <가을동화>에서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의 스쳐 지나는 명장면을 연출하면서 국제적으로 유명해졌다. 최근 지상파 예능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시내로 넘어가기 위해 이용하면서 더욱 유명세를 탔다. 도로를 이용하여 중앙동과 청호동을 이동하면 30분이 걸리지만 갯배를 이용하면 5분 만에 왕래할 수 있다.

― [네이버 지식백과] ‘아바이 마을 갯배’에서 인용


이렇게 청호동 주민들의 생활 수단이었던 갯배는 이제는 시내로 볼일 보러 가는 노인들 몇 분만 이용하고, 오후와 주말에는 국내외 관광객들이 찾아와 직접 쇠줄을 끌며 새로운 추억을 만들고, 인증샷의 배경이 된 관광 상품으로 더 유명해졌다.
그런데 기존 갯배는 지난 2015년 ‘선박안전법’ 개정으로 안전검사 대상이었으나 건조 당시부터 무동력선으로 안전검사 요건인 제조검사도 받지 않아, 승선 인원을 33명에서 12명으로 감축 운항해 왔다. 2017년 11월 15일에 속초 도심과 청호동 아바이마을을 연결하는 속초의 명물인 갯배(청호도선)가 새로 건조돼 운행에 들어갔다. 새 갯배는 길이 9.5m, 승선정원 32명 규모이며, 이용요금을 10여 년 만에 현실화해 소인은 기존 100원에서 300원, 대인ㆍ손수레ㆍ자전거는 기존 200원에서 500원으로 인상했다. 이용 시간은 오전 5시~오후 11시까지며, 연중무휴다. 속초시민은 신분증을 제시하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설악신문 기사 인용)



Ⅴ. 지역 문인의 시 속에 나타난 갯배의 이미지


갯배는 속초의 또 다른 상징이자 청호동의 이미지와 늘 같이 따라다니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즉 갯배는 속초에서 실향민 하면 연상되는 1.4후퇴–함경도–청호동–아바이 마을–갯배로 연결되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우리는 뱃길 북쪽으로 돌릴 수 없어/ 우리 힘으로는 이 무거운 청호동 끌고갈 수 없어/ 와이어 로프에 복장 꿰인 채 더러운 청초호를 헤맬 뿐/ 가로막은 철조망 너머 동해에서/ 청진 원산물이 가자고/ 신포 단천물이 들어가자고/ 날래 따라나서라고 날마다 아우성인데/ 우리는 동력도 키도 없어/ 바람 물때 손바닥 보듯 하던 아바이들 모래벌에 다 묻고/ 이따위 죽은 배로는 갈 수없어/ 와이어로프에 복장 꿰어 떠도는 함경도일 뿐./ 우리는 강원도가 아니야/ 우리는 속초가 아니야.//

― 이상국, 「청호동 갯배」


갯배를 아는지/ 언제 가나 함경도/ 자벌레 제 몸 재며 가듯/ 온몸으로 기어가는 배를 아는지/ 그 배 타고 꽃 피는 단천 가는 사람들 아는지/ 한 오십 년 속초와 신포 사이를 오가는/ 꿈길을 아는지/ 가다가 가다가 풍덩/ 푸른 동해 빠져 죽고 싶은 배를 아는지/ 흑역사라는 멍텅구리 배를 아는지/ 함경도에 가본 적이 있는지/ 청호동을 아는지

― 이상국, 「갯배」


우리는/ 우리들 떠도는 삶을 끌고/ 아침저녁 삐걱거리며/ 청호동과 중앙동 사이를 오간 게 아니고 / 마흔 몇 해 동안 정말은/ 이북과 이남 사이를 드나든 것이다/ 갈매기들은 슬픔 없이도 끼룩거리며 울고/ 아이들이 바다를 향해 오줌을 깔기며 크는 동안/ 세계의 시궁창 같은 청초호에 아랫도리를 적시며/ 우리는 우리들 피난의 나라를 끌고/ 마흔 몇 해 동안 정말은/ 우리들 살 속을 헤맨 것이다

― 이상국, 「갯배 1」


지역 문인 중 ‘청호동’과 ‘갯배’를 가장 시 작품으로 많이 형상화한 이상국 시인은 초기부터 한참 동안을 갯배를 속초나 청호동으로 본 것이 아니라, 함경도 청진, 원산, 신포, 단천의 어디쯤으로 보았다. 그래서 북쪽의 한류가 속초 바다를 찾아오는 계절이면 날래 고향으로 가자고 귀향의 꿈을 키우지만, 청초호 더러운 물속에 잠긴 와이어 로프에 복장을 꿰인 갯배는 스스로 떠날 수도 없고, 그저 기어 다니는 멍텅구리 배일 뿐이다. 그러나 또한 청호동 사람들에게 갯배는 실제적으로는 단순히 시내로 가는 교통수단이지만, 심정적으로는 피난 내려와 지금까지 살아온 마흔 몇 해동안 계속적으로 드나들었던 고향과 피붙이 속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로 풀어냈다.


미시령 너머로 해 떨어지고/ 개 건너 호텔은 벌써 불야성이다./ 월급쟁이들 학생들 리어카 품팔이 갔다 돌아오는 여자들로/ 청호동 들어오는 배는 몸이 무겁다./ -야야, 성진홋집 선자야! 느 엄마가 꼬치까리 사 오래는 걸/ 내레 깜빡 까먹었다. 니 건너올 때 사와라/ 들어가는 배를 탄 아주머니가 나가는 배에 대고 소리 지른다./ -에이, 아줌만 챙피하게, 얼마친데요?/ 하고 건너다보는 처녀 얼굴이 고춧가루 빛이다./ -야 이 간나 다 컸다고 꼴값한다. 무시기 챙피하니,/ 꼬치까리 안 먹고 사니?/ 학생들이 먼저 킥킥거리자/ 오가는 배에 탄 사람들 모두 웃는다./ 오늘도 갯배는 청초호 가운데서 수없이 만나고 어진다.//

―이상국, 「갯배 3」


겨울 새벽/ 영하의 기온 속에 눈발조차 흩날리는/ 청호동 갯배// 아바이는 새벽 4시를 열고/ 명태바리 나갔고/ 동해 수평선에서 날아온/ 눈 푸른 괭이갈매기들/ 표범보다 날카로운 송곳니로/ ㅋㅋㅋㅋ 갯배머리를 쪼아대었다// 오마니는 펄펄 뛰는 생태를 고봉으로/ 고무 함지박에 담아 머리에 이고 섰다// 자전거를 끌고 배에 오는 면서기 아저씨/ 강아지를 데리고 할마시 한 분도 배에 올랐다/ 책가방을 들고 서 있는 미래의 꿈나무들 … // 살아있는 풀잎같은 생명체들이/ 빙산 같은 동체를 입김으로 움직여서/ 청호동을 떠밀고 갔다 // 청호동 갯배는 아침마다/ 만삭이었다//

―박명자, 「청호동 갯배는 만삭이었다」


그러나 한편 갯배는 청호동 주민들의 진정한 삶의 터전인 청호동과 각종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속초 시내와의 유용한 연결 고리였다. 일터로, 학교로, 시장으로 통하는 일종의 마법 통로와 같았다. 그들은 갯배를 기다리며 단천댁이 엊저녁에 아이를 낳았다는 것을 알았고, 갯배의 갈고리를 함께 당기며 함흥댁의 은근한 흉볼 거리를 속닥대었다. 그리고 스쳐지나가는 다른 갯배를 보며, 인사도 나누고 깜빡 잊어버린 물건도 심부름 시킬 수 있는 아주 쓸만한 소통의 광장이자 생활공간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너에게 내린 줄을 당기고 싶다는 건/ 내게로 오게 함이었다/ 뱃전에 달라붙는 소외된 냉기쯤/ 더 아플 것 없는 청호동 바람에 훑어내고/ 가끔 큰 배가 지나칠 때마다/ 물결 사이로 솟구치는 유혹은 두려움이기도 하지만/ 네가 왜/ 먼 바다에까지 외등을 밝히고/ 밤마다 서성이는지 알아야겠다/ 갈고리에 끼운 쇠줄/ 힘껏 당기어/ 네 가슴 한가운데를 끌어내는데/ 내 먼저 가고 있는 건/ 발 먼저 내달아지는 건 무슨 까닭인가// 바람 속 너를 끌어안고 싶은/ 오늘/ 내 가슴 한가운데로/ 굵은 쇠줄 하나 내리고 싶다.//

―지영희, 「청호동으로 가는 갯배」


줄을 당긴다/ 내가 너에게로 가는 길/ 물속 깊이 가라앉아/보이지 않는 줄을 당기면// 조금씩/ 아주 조금씩/ 드러나는 너의 나의 질긴 인연// 가 보지 못한/ 너의 길을 걷기 위해/ 오래 걸어 왔던/ 나의 길에게/ 등을 돌려야 한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저 깊은 뻘밭에/ 흘러간 시간들을 버리고/ 익지 않은 꿈도 버리고/ 나도 버려야 한다// 가까와진 만큼/ 또 멀어지는 것들로/ 청호동 갯배는/ 날마다 줄줄 눈물 흘리고 있다. //

―김종헌, 「청호동 갯배」


물가에 서면/ 돌아갈 곳이 있을듯해/ 잔잔한 파문 몰고 들어설 마을이/ 있을듯해// 골목을 몰고 다니던/ 스산한 바람/ 남아있는 사람들 몇 집 건너씩/ 쪽마루에 걸터앉아/ 검버섯 드뭇한 햇살 받아 놓고/ 시름없이/ 하여 봉분 돋우지 못한 문돌쩌귀 그대로 두어/ 무서운 겨울 손에 쩍쩍 붙던 추위/ 기억의 저장장치를 슬라이드로 열어놓고 있는/ 해가 지지 않는 마을// 물가에 서면 돌아올/ 그 누군가가 있을 듯//

― 조인화, 「청호동 갯배」


위의 갯배에 관한 시 3편은 단순하게 갯배를 실향의 상징으로만 표현한 시로 볼 수 없다. 언어가 가지는 다의적 특성을 살려 시 작품을 읽는 독자의 해석에 맡겨놓은 시라고 본다. 즉. 위 갯배에 나타난 이미지는 크게 두 가지로 읽힌다. 그 첫 번째는 속초와 갯배에 담긴 실향의 메시지를 읽어 낼 수 있는 독자는 고향으로 가고 싶어 하는 청호동 실향민의 그리움을 읽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갯배를 청호동과 속초 시내를 연결하는 끌배로 인식하고 있는 독자들은 위의 시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메시지를 해독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세월이 흘러 실향의 아픔과 망향의 그리움이 희석되었다는 의미이다.


저렇게 푸른 동해도/ 청초호에 들어오면 썩을 수밖에 없다/ 흐르는 물길 막히면/ 우리들 그리움 또한/ 이까 복장처럼 새까맣게 멍들 수밖에 없다/ 갈매기들 흰 배 뒤집으며 끼룩거리는 여름/ 낯선 관광객들은 갯배를 타고 사진을 찍는다/ 우리들 분단의 고통이/ 피서지의 추억이 되고/ 떠도는 삶이 구경 거리가 되는 동안/ 썩어가는 청초호에 몸을 담그고/ 우리는 주먹으로 슬픔을 틀어막는다.

―이상국, 「갯배 2」


그렇게 지워져 가는 분단의 아픔과 실향의 그리움을 이상국 시인은 ‘우리들의 그리움 또한 이까 복장처럼 새까맣게 멍들 수밖에 없다.’고 자조한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인증 샷의 배경이 된 갯배와 그저 피서지와 먹거리 관광지로 멈춘 청호동을 보며 ‘주먹으로 슬픔을 틀어막는’ 것밖에 할 수 없음을 가슴 아파한다.


동해의 햇살들을 갯배에 싣고/ 그리움 물그리메 아바이 마을/ 청호동 가슴으로 스미는 바람// 그리운 이 하나둘 꽃처럼 져서/ 바람에 전한 안부 소식도 없고/ 청호동 고향 되어 줄 감는 손길// 갈매기 한 마리가 갯배를 따라/ 물속을 바라보다 먼 하늘 날다/ 청호동 노을 속에 멀어져가네//

―정영애, 「갯배」


분단의 세월이 흐른 지, 어언 60여 년. 이제 실향민 3세대는 더 이상 청호동과 갯배를 보며 고향 함경도와 두고 온 가족이라는 키워드를 떠올리지 않는다. 60년간 지속되어 온 피난민의 삶의 원형인 ‘서사’가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쩌면 갯배는 그리움과 관계라는 ‘서정’만이 남아 있을 확률이 높다.


지금까지 지역 문인의 작품을 주로 살펴보았다. 지역 문인이 아닌 다른 시인은 어떻게 청호동과 갯배를 해석해 냈는지 작품 하나를 살펴보자.


아무도 살지 않던 모래 벌에/ 바람 숭숭 구멍 뚫린 헌 문짝 달아 놓고/ 바닷물처럼 간간히 밀리는 알 수 없는 그리움에/ 목젖 늘이며 살아가는 청호동 사람들// 수평선 한쪽으로 가슴 한쪽이 기우는 그리움에/ 기우는 몸 싣고 가는 갈매기 떼들에게/ 고시내 몇 번 하고 돌아오는 길/ 어느새 바다 노을이 가슴에 번지면/ 마디진 한 생을 이어가듯 그물을 깁고 또 깁는다// 꿈속에서도 누군가를 찾는 소리/ 겨울 바다보다 자식들의 가난이 더 무서워/ 빼꼼한 하늘 한쪽을 지붕 삼아/ 저녁밥 잣는 냄새에 위안을 얻었던/ 늙수그레한 청호동 아바이// 뚫리다만 원산행 철로 같은 이마의 깊은 골/ 얼마나 많은 세월을 갈아엎었을까/ 걸쭉한 사투리가/ 어릴 적 뱃길을 만들고 지우며/ 허공에 길을 낸다/ 바닷길을 연다//

―정정하, 「청호동 아바이」



Ⅵ. 나가는 말


지금까지 우리 지역 문인들의 시 작품 속에 ‘청호동’과 ‘갯배’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찾아 그 의미를 유추해 보았다. 문학 작품을 해설하는 일은 참으로 조심스럽고,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작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읽어 내는 일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고, 그 작품을 해석해 내는 일은 온전히 읽는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의 글 또한 작가의 의도와 관계 없이 필자의 스키마와 움벨트로 해석한 결과임을 밝힌다. 부디 그 의미를 제대로 찾지 못하는 ‘오독’이 가능한 적기만을 기대한다.
이제 청호동과 갯배는 더 이상 60년간 청호동을 만들고, 지켜내려 온 실향민 1세대들의 분단과 망향의 ‘서사’가 아니라, 아름다운 풍경이나 사람과의 관계를 은유하는 ‘서정’으로 변해가고 있다. 그 현상을 어쩔 수 없다고 치부하기엔 ‘청호동’과 ‘갯배’가 가진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너무 크고 소중하다.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부터라도 ‘청호동과 갯배’를 다시 한번 조명해보는 프로젝트를 우리 지역 문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해 보아야겠다. 그리하여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청호동과 갯배’의 서사를 다시 살려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