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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2018년 [동화] 붕가완 솔로 ―아름다운 강물 / 이희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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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968회 작성일 18-12-27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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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그 마음에
누구나 하나의 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끝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세월의 강 속에
어린 유년이 헤엄치고
거친 물결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아름다운 호수를 기대하던 수많은 흐름이 있었다.
미움과 불신, 차별의 강은 마르게 하고
구원이 있는
사랑의 강이 마음속을 넘쳐흐르게 한다면…
내 맘의 강을 그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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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가완 솔로
―아름다운 강물


[1]


적도*의 한낮 햇빛은 하얗다 못해 눈부셨다. 유나는 손차양을 하고 하늘을 한번 흘끗 바라보았다.
‘음, 소나기는 없겠군.’
뜨거운 숨을 푹푹 내 쉬는 열대 수풀 사이를 유나는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붕가완 솔로 아름다운 꿈을 ~


라미네 집에 도착하기도 전, 노랫소리가 먼저 유나의 귓가에 닿았다.
‘요런 깍쟁이.’
유나는 눈을 살짝 흘기며 입술이 오므라지도록 힘을 주었다. 오솔길 수풀이 끝나는 약간의 내리막길 위로 유나의 발걸음이 빠르게 움직였다.


영원한 꿈 싣고 저 멀리 흘러가네. ~


‘음, 나보다 연습 더 많이 한다 이거지?’


유나는 다시 입술을 샐룩거렸다. 유나는 혼자 노래를 부르는 라미를 떠올렸다.
‘안 봐도 비디오.’
라미는 지금 혼자 거울을 보며 노래할 것이다. 분명 뒤로 단단히 묶은 꽁지머리가 강아지 꼬리처럼 흔들릴 것이다. 그리고 입을…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은 라미의 입 모양이다.
‘입을 너무 요란하게 벌렸다 오므렸다 해. 닭살 돋으려고 해, 얄밉기도 하고. 한 대 쥐 박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야. 얼굴 표정은 또 뭐야. 무슨 공포영화 출연하니? 난 네가 노래 연습할 때마다 ‘우웩’ 하고 싶어. 근데, 근데 말이야. 그게 정말 그게…’
유나의 종종걸음이 탁 멈췄다. 눈물이 핑 돌았다.
‘넌 꼭 끝에 가서 날 울게 해.’
유나는 잠시 내린 손차양을 다시 만들었다. 멋쩍게 웃음이 나왔다.


어린 시절에 어버이 손 잡고~


라미네 집 마당에 들어섰을 때 노랫소리가 딱 멈췄다. 귀 밝은 라미가 유나의 기척을 알아차린 게 분명하다.
‘귀신이 따로 없다니까.’
유나는 입맛 쓴 표정을 지으며 라미가 문을 열리기를 기다렸다. 거짓말 안 보태고 일초도 안 걸렸을 것이다. 삐그그 소리가 나며 방문이 열리며 라미의 동그란 얼굴이 쏙 나타났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동그랗게 뜬 라미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했다.
‘시침때긴 진짜.’


유나는 어이가 없어 툭 튀어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라미의 눈짓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라미는 방안 구석 작은 상 위에 올려놓은 바나나 한 송이를 유나 앞으로 내밀었다. 라미 표정이 어딘가 어색해 보였다.
“우리 엄마 방금 딴 거야.”
유나는 웃으며 바나나를 받았다.
“라미야, 바나나 향기가 참 좋다.”
유나의 말에 라미의 얼굴이 확 펴졌다. 얼굴 밑에 숨겨진 그림자 같은 것이 벗겨지자 라미 본래의 예쁜 얼굴이 나타났다.
유나는 바이올린을 꺼내 들고 음을 맞췄다. 탱탱 소리가 라미네 집 안을 울렸다. 유나가 눈짓을 하자 라미는 알았다는 듯이 유나 앞에 섰다. 두 손을 앞에 모으고 턱을 가지런히 든 채. 표정은 진지하게. 완전 자동이다.
유나는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했다. 바이올린 선율이 조용히 울려 나왔다.
라미는 숨을 몇 번 크게 고르더니 소리를 냈다. 첫소리부터 너무 고았다.


붕가완 솔로, 아름다운 강물
늘 함께 불렀지 그리운 그 노래를 ~


적도의 불같은 햇볕이 숨 막히도록 내려앉은 라마네 집 지붕을 뚫고 라미의 목소리와 유나의 바이올린 소리가 어우러져 모락모락 솟아오르고 있었다.
라미는 지금 인도네시아 아이로 산다. 하지만 한국 아이다. 라미 엄마는 인도네시아 사람이고 한국 사람에게 시집을 왔다. 라미는 한국에서 나고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지금은 인도네시아에 와 있다.
라미는 엄마와 단둘이 산다.


라미는 노래를 부르면서 서서히 눈을 감았다. 유나는 바이올린을 켜는 손목에 가볍게 힘을 주다 라미의 모습을 보고 웃음이 나와 혼났다.
‘으, 닭살은 끝이 없네,’
라미는 어느새 노래에 푹 빠져 있었다. 라미는 참 감정이 풍부한 아이다. 유나는 그런 유별난 감성의 라미가 어떤 때는 밉상이지만 끝내 라미의 모습에 눈시울이 뜨거울 때가 많다.
‘어쩜 저렇게 연기를 잘할까?’
하지만 유나는 안다. 라미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아물지 않는 상처가 있다는 걸. 라미가 살아간 그 모든 일이 생채기가 되어 라미의 가슴을 콕 콕 찌르고 있다는 것을.


“라미야. 이제 다른 길이 없어. 외할머니가 사는 인도네시아로 가자.”
엄마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라미는 딴청을 피우다 결국은 마구 악을 쓰며 나뒹굴었다.
라미는 이미 가정이 파괴되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 학교를 더 이상 다닐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따돌림당하는 것까지는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이젠 등신 취급까지 받는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면 견딜 수 있다. 그런데 매일이다.
매일 매일 숨이 막히는 괴로움을 그냥 견디며 사는 아이는 이 세상에 자기밖에는 없을 거라 믿었다. 라미는 그래도 자기 하나가 참고 또 참으면 모든 일이 풀릴 줄 알았다. 거친 비바람 뒤에는 밝은 햇빛이 비친다고 하니까. 선생님도 그렇게 자길 위로했다. 또 외국에서 시집온 엄마 친구
들도 그랬다. 하지만 그건 립싱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결국은 아무 쓸모도 없는 위로와 격려의 말들이 라미 정신만 사납게 했다.
누가 친구들이 쏜 독화살 말과 행동을 맞아보기나 했나. 그럴 때마다 견딜 수 없는 감정의 조각들이 마구 몸을 찌르는 아픔을 겪어봤나. 저항할 힘도 없이 고스란히 당하고 있던 긴 시간을 느껴봤나. 고통만 남기고 안개처럼 모습을 감춰버린 일들의 실체를 아는 사람이 있었나. 당하며 사는 사람 외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그 비밀스런 진실을 나만큼 누가 잘 알 수 있을까.
라미는 마치 코스요리처럼 차례를 지어 들어오는 힘든 학교생활에 완전히 두 손을 들었다. 거기에다 가정까지 무너지는 모습이 눈앞에서 일일 연속극처럼 횟수를 거듭하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라미를 돌게 만들었다. 그러니 라미는 소리 지르며 발버둥 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해야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가 조금은 용서될 수가 있을까.
그러니까 다 필요 없어. 어린 라미는 이렇게 변하고 있었다.


세월은 끝이 없이 흘러 어버이들은 가셨건만 ~


유나는 점점 커지는 악절에서 바이올린의 활을 크게 저었다. 라미도 턱을 당기며 입을 더 크게 벌렸다. 마주 잡은 두 손이 가슴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높은음이 올라갈 때 라미 특유의 모습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높은음이 올라가며 세어질수록 라미의 목소리는 정말로 맑고 우렁차다는 것이다.


밀려오는 저 물소리는 영원한 것일까 ~


유나는 힘차게 활을 저으며 포지선 짚은 손가락 끝을 마구 흔들었다.
유나는 연주하면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라미도 목소리를 올리면서 스르르 눈을 감았다. 유나가 켜는 바이올린 비브라토 선율은 애잔한 음색을 내며 라미의 목소리와 조화를 이루었다. 유나의 바이올린은 잔잔히 물결 치는 솔로 강*이 되고, 라미의 목소리는 물결 위의 바람이 되어 조용조용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붕가완 솔로* 노래 연습이 끝났다. 라미는 아직도 눈을 뜨지 않았다. 유나는 자신도 모르게 나온 눈물 한 방울이 톡 하고 바이올린 위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유나는 얼른 한 손으로 눈물 자국을 치웠다.
“라미야 어떡해~ 너무너무 좋았어.”
유나는 라미의 손을 잡았다. 천천히 뜨는 라미의 게슴츠레한 눈에서 금방 와락 쏟아질 것만 같은 눈물이 가득 맺혀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지가 무슨 폼을 잡아. 눈물이 나오니까 그걸 막으려고 눈을 감고 있었지. 내 모를 줄 알고?’
유나는 애써 라미의 눈물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라미야. 이걸로 마지막 연습은 끝난 거야.”
유나는 라미 눈물의 의미를 모르는 척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라미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웃는 라미의 두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유나와 라미는 서로 쳐다보고 괜히 쑥스러워 바나나를 와락 입에다 물었다. 웃음이 나왔다. 참으려 하다가 유나가 먼저 푹하고 바나나 조각들을 입 밖으로 날려 보냈다. 라미도 푸푹 하며 바나나를 유나의 얼굴에 날려 보냈다.
“아하하하 아하하하.”
“으호호호, 으호호호”
둘은 배꼽을 쥐고 웃었다.
라미의 사정을 잘 아는 유나, 유나의 생각을 잘 아는 라미. 말이 필요 없었다. 웃음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잠시 후 유나가 일어섰다. 라미가 얼른 바이올린을 케이스에 넣어 유나 손에 쥐어줬다. 유나가 살짝 웃었다. 눈물이 다시 핑 돌았다.
“잘 있어. 내일 보자.”
유나의 종종걸음 모습이 열대 수풀 오솔길 사이로 움직였다. 라미는 숲길로 사라지는 유미를 향해 두 팔을 높이 들고 마구 흔들어 주었다.



[2]


내일은 유나의 아빠가 경영하는 회사에서 가든파티*가 열리는 날이다.
유나 아빠는 인도네시아 직원들 가족을 위해 일 년에 몇 번씩 가든파티를 연다.
유나 아빠는 젊었을 대학생 때 인도네시아에 여행 왔다가 바틱*에 반했다. 바틱의 아름다운 문양과 색상에 넋이 나간 유나 아빠는 한국에 가서 일하던 직장을 정리하고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로 아예 짐을 싸가지고 왔다. 아빠는 어렵다는 바탁을 제작의 기본부터 철저히 배우며 반복했다. 그러나 바틱의 세계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바틱은 스치듯 보면 단순해 보이기만 한 인도네시아의 옷감에 불과하다. 하지만 바틱의 생산 과정으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유나 아빠는 그 힘들고 복잡한 바틱에 뛰어들었지만 인도네시아 말도 서툴고 인도네시아 사람과도 서먹서먹한 상태에서 사업을 벌였다. 한마디로 말하면 열정이 넘쳐 앞뒤를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유나 아빠가 바틱을 제작하는 일을 시작하자 곧바로 바틱의 생산에 따른 기쁨보다 힘들고 고달픈 상황을 먼저 만나게 되었다. 수없는 시행착오와 실패를 거듭하면서 겨우 ‘이젠 됐다.’라고 생각한 순간 형편없는 바틱을 생산했다는 비난이 쏟아지고 바틱을 사가는 상인들이 등을 돌리고 가버리는 일이 허다하게 일어났다.
‘아, 이 일이 나에겐 뜬구름 잡는 일인가.’
유나 아빠는 때로는 실의에 빠지기도 하고 아예 포기할까 하기도 하면서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바틱의 세계는 정말 정교하고 섬세하여 좋은 바틱을 만든다는 건 불가능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빠는 바틱을 만드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며 익혔다.
바틱 만드는 과정은 크게 세 가지인데, 첫 단계는 면이나 비단 같은 천을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왁스와 염료가 잘 스며들도록 식물성 기름에 담근 후 건조하고 다듬이질 하는 작업이다. 둘째 단계는 준비된 면에 원하는 디자인을 입히는 과정이다. 면에 밑그림을 그린 뒤 왁스나 파라핀(양초)이 조금씩 흘러나오는 짠띵이라는 모기 주둥이같이 길고 가늘게 나온 작은 컵 같은 도구를 이용하여 밑그림 위에 왁스를 입힌다. 한쪽 면을 작업한 뒤 다른 면에도 똑같은 작업을 해야 한다. 때문에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 셋째 단계는 염료를 푼물에 왁스 작업이 끝난 천을 넣어 염색한다. 주로 천연식물에서 나온 염료로 베이지색, 파란색, 갈색, 빨간색, 검은색 등을 사용한다. 짙은 색을 내기 위해선 며칠 동안 천을 담가 놓는다. 염색 작업이 끝나면 천을 삶아 왁스를 제거하면 바틱 제품이 완성된다.
한 번의 작업으로 한 가지 색만 입힐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다양한 색의 바틱 제품을 얻기 위해서는 같은 과정을 여러 번씩 반복해야 한다. 가령 열 가지 색채의 천을 얻고자 한다면 열 번의 왁스 및 염색 작업을 해야 한다. 바틱은 이렇게 많은 시간, 엄청난 노동력과 인내에 또 인내를 거듭하는 작업이다. 한 벌의 옷을 완성하기까지 한 두 달이 걸리는 경우가 보통이며 더 정교한 작업이 요구되는 의상은 6개월이 넘게 걸리기도 한다.
유나 아빠는 바틱은 사람의 땀과 눈물을 먹고 태어난다고 했다. 인도네시아인들의 웃음과 울음, 기쁨과 고난의 삶이 바틱 속에 스며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틱은 인간의 아름다움과 아픔을 동시에 잘 나타낸 결정체라고 믿고 있다. 사실 이런 바틱의 가치는 인도네시아의 고유한 문화로 인정되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유나 아빠는 십여 년 동안 바틱 공장을 운영하며 수렁 같이 끝없는 바틱의 깊은 세계를 파고들었다. 그러다가 유나 엄마와 결혼을 하게 되어 잠시 한국으로 왔지만 한국에서도 바틱에 관한 꿈을 버리지 못하고 늘 바틱에 대한 정보를 손에 놓지 못했다. 그래서 서울 인사동 바틱 가게는 아빠의 단골 가게였다.
유나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아빠는 다시 인도네시아로 왔다. 바틱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동안 고생한 일도 아까웠지만 바틱을 보는 새로운 눈이 떠졌다고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나 아빠는 족자카르타에 와서 본격적인 바틱 공장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유나 아빠의 정성이 통했는지 드디어 공장에서 나오는 바틱이 괜찮다는 평을 받기 시작하더니 금방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유나바틱. 아주 훌륭합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평가가 좋아지면서 유나 아빠의 바틱은 바틱의 나라 인도네시아에서도 통하게 되었다.
“이들이 저를 살리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한 일 없습니다. 매일 이들이 만드는 바틱 세상 속으로 들어가 경의의 눈으로 바라볼 뿐입니다. 이들의 바틱 솜씨는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합니다. 전 이들이 예쁘고 멋진 바틱을 만들어 낼 때마다 존경의 맘을 보냅니다.”
유나는 아빠가 인도네시아 TV 방송에 나와 말하는 그 모습에 감동했다. 아빠의 말씀은 정말 진심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 아빠가 유명한 바틱을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에는 직원을 존중하고 가족처럼 대하는 아빠의 남다른 운영 비결이 한몫을 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아빠는 바틱을 만드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매우 귀하게 대하여 주셨다. 아빠는 직원들을 위해 여러 가지 복지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그들이 걱정 없이 일을 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발휘하도록 힘썼다. 특히 직원들 가족까지 살펴보며 늘 가정의 크고 작은 일에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다. 가든파티도 그런 아빠의 마음이 담긴 행사라고 보면 된다.
아빠는 한편으로는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때 인도네시아로 오는 유나의 역할도 생각해 두었다. 같이 일하는 사람이 사실은 얼마나 고마운 사람인지, 그걸 잊으면 안 된다는 걸 아빠는 딸에게 배워주고 싶었다.
“유나야, 어때, 우리 직원들을 위해 짜잔 어때.”
아빠는 바이올린 연주 흉내를 우스꽝스럽게 내며 유나의 바이올린 탁쳤다. 유나는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몇 번 입상을 한 실력 있는 예비 바이올리니스트이다.
“피이, 아빤. ‘멋진 연주 좀 부탁드려요. 제발 부탁이에요 딸내미님. 아니 바이올리니스트님’. 이렇게 해도 할까 말까 하는 데 흥!”
유나는 흰자위만 보이게 눈을 흘기며 아빠를 보고 말했다. 그런데도 아빠는 마냥 입가에 웃음이 가득하다. 유나는 어리광 작전을 그만두고 곧 심각 작전으로 들어갔다.
“근데 아빠.”
유나는 아빠를 바라보며 잠시 말을 끊었다. 아빠는 괜히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유나를 바라보았다.
“아빠, 라미랑 같이 연주할래.”
“라미?”
아빠가 무슨 말인지 통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딴전을 피웠다.
“여보, 산드라 씨 딸 말이에요.”
엄마는 아빠가 정말 상황 파악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끼어들었다.
“아~ 산드라 씨. ”
아빠는 유나에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하며 씩 웃었다. 그런데 표정이 뭔가 숨기는 것 같았다. 딱 보면 안다. 아빠는 절대 날 못 속인다. 아빠는 내 손바닥 위에 있으니까.
“여보, 산드라 씨 요즘 어때요?”
엄마가 약간은 굳은 표정으로 아빠를 보고 말했다.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어. 하지만 마음은 많이 안정된 것 같아.”
아빠의 말에 엄마가 성이 차지 않는 표정을 짓자
“참 당신도. 내가 그렇게 뭘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아?”
아빠는 숨겨 논 비밀이 들켜버린 것처럼 괜히 어깨를 들썩거리며 얼굴을 실룩거렸다.
‘유나야. 사실은 라미와 꼭 함께 음악을 연주해 주기를 내가 얼마나 바라고 있는 줄 아니?’
산드라는 아빠 바틱 공장에서 제일가는 직원이다. 손놀림은 말할 것도 없고 바틱의 밑그림 그리는 일. 파라핀을 묻히고 제거하는 일, 색을 혼합하는 기술은 남이 따라올 수 없는 솜씨다. 그래서 산드라는 족자카르타에 서 최고 수준의 기술자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족자카르카의 최고는 바로 인도네시아에서 최고라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산드라는 그런 기술자이며 화가다. 바틱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을 여기서는 화가라고 한다. 그런 산드라가 바로 한국 국적의 사람이란 걸 유나아빠는 너무 늦게 안 것이다.



[3]


일 년 전 어느 날이었다. 오랫동안 정성을 기울여 만든 바틱에 결점이 발견되었다. 남들은 그 정도 결점은 결점도 아니라고 말했지만 완벽주의 유나 아빠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꽃문양의 왁스 녹은 자리에 원하는 색깔이 선명하지 못했다. 그냥 봐선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바틱 제품이라고 하겠지만 유나 아빠는 잘못된 부분만 보였다. 유나 아빠는 속이 상했다. 하지만 직원들에게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들의 피나는 수고를 아니까. 그러나 속상한 맘은 어쩔 수 없었다. 분명 누군가 잠시 방심하는 사이 파라핀 입히는 걸 잊었거나 적게 입혔을 것이다.
아빠는 직원들이 퇴근한 뒤 스쿠터를 타고 무작정 달렸다. 낮 동안 뜨겁게 내리쬐던 해가 붉고 둥그렇게 민낯을 보이며 서쪽 평원 열대우림 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달리는 스쿠터 위로 제법 시원한 바람결이 느껴졌다.
유나 아빠는 스쿠터를 세우고 강가에 섰다. 요 며칠 사이에 비가 많이 내려 불어난 강물이 출렁거렸다. 늘 멀리 보이던 메라피 화산*이 성큼 가까이 다가와 보였다. 메라피 산 봉우리가 구름에 살짝 가렸다. 메라피 화산은 지금도 산봉우리에서 연기를 내 품고 있다. 메라피 화산 아래에 사는 족자카르타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산인데 오늘은 구름 속에 가려서 그런지 덜 위험해 보였다.
유나 아빠는 강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며 마음을 달랬다. 강물은 황토빛깔 물살을 일으키며 힘 있게 흘러가고 있었다.
유나 아빠는 우연히 건너편 강가로 눈길을 돌리다가 엄마와 딸 같은 사람이 손을 잡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행동이 이상하게 보였다. 잠시 후 그 모녀에게로부터 가늘고 높은 가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소리를 지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가락이 담긴 노랫소리였다. 유나 아빠는 자기도 모르게 그 모녀가 서 있는 강 위쪽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십 미터 남짓 되는 강 건너편이라 노랫소리가 정확하진 않았는데 문득 아빠의 귀속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것이 있었다. 인도네시아어의 가사였다.
“븡아완 솔로 리와얏 무 이니. 스다리 둘루 자디 뻐르하띠안 인싸니.”
강을 건너온 엄마와 딸의 노래는 유나 아빠의 가슴 속으로 살포시 날아 들었다. 유나 아빠의 마음이 갑자기 찡했다.
‘솔로 강이 끝없이 흘러가듯이 우리의 사랑도 흘러갑니다.’
이런 노래가사다. 신경 써서 들으니 모녀의 노랫소리가 참 맑고 고왔다. 유나 아빠는 끊길 듯 이어지는 노래가사에 정신이 빠져 돌처럼 굳어진 채 노래를 들었다. 어느새 답답한 마음이 스르르 가라앉는 걸 느꼈다.
마음이 점점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아, 아름답구나. 저 노래가.’
유나 아빠의 불편한 마음은 강물과 함께 어느새 흘러가 버렸다. 아빠는 모녀의 노래를 좀 더 가까이에서 듣고 싶었다. 하지만 낯선 사람이 난데 없이 눈앞에서 얼쩡거리면 놀랄 것 같아 참았다. 아빠는 그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짐짓 딴청을 부리는 듯 행동했다. 그러나 아빠는 눈길을 강물로 향했지만 노래는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두 귀를 바짝 세웠다. 강 건너 모녀는 그런 줄도 모른 채 노래를 이어갔다. 때론 낮게. 때론 높게.
노랫소리는 강물과 같이 출렁거렸다. 불그스름한 하늘이 강을 더욱 붉게 물들였다. 열대 수림 너머로 해가 막 넘어가고 있었다.
‘아, 저 모녀는 지금 울고 있구나,’
유나 아빠는 그런 느낌이 딱 들었다. 노래가 점점 처량하게 들렸다. 노래 곡조에는 마음속에 풀지 못하는 무슨 안타까움이 맺힌 듯했다. 거기에다 틈틈이 들리는 높고 가는 여자아이 목소리가 더 가슴을 긁으며 처량했다.
‘노래를 무척 잘하는 아이네.’
강물은 모녀의 노랫소리를 싣고 계속 흘러갔다. 유나 아빠는 더 어둡기 전에 떠나야 할 것 같아 스쿠터에 시동을 걸었다. 아빠는 뜻하지 않게 맘을 편안하게 해 준 그 모녀가 고마웠다.
‘난 참 운이 좋은 사람이야.’
유나 아빠는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다시 참았다. 그 대신 그 모녀와 그 노래는 잊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 위로 어둠이 서서히 내리기 시작했다. 유나 아빠의 스쿠터가 움직였다. 강 건너 모녀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유나 아빠의 마음 한 조각을 강가에 둔 채 스쿠터는 회사를 향해 달렸다.
며칠 뒤 유나 아빠 사무실로 라이샤라는 여직원이 들어왔다.
“사장님, 바틱 달인 한 명 있는데 제 친구예요. 우리 공장에 오면 좋겠어요.”
유나 아빠는 지금 한국 인사동 바틱 전시회에 출품할 제품을 만드는 중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좋은 바틱 제품 만들어지지 않아 그 일로 고민하던 중이라 유나 아빠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라이샤는 한 여자분을 데리고 왔다. 첫인상은 꽤나 가냘픈 몸매로 보였지만 얌전한 모습에 눈빛이 강한 사람이었다.
“산드라~입니다.”
유나 아빠는 한국말로 인사하는 산드라를 보고 놀랐다.
“어떻게 한국말을.”
산드라의 표정이 잠깐 어두워졌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대답을 하지 않았다. 유나 아빠도 얼른 눈치를 채고 바틱에 대한 말만 몇 마디를 나누었다. 라이샤 말대로 산드라는 바틱에 대한 지식이 대단했다.
산드라는 다음 날부터 바틱 공장으로 출근했다. 그런데 이미 공장 직원들은 산드라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직원들은 산드라에게 인사를 하며 친근하게 대하였다. 직원들은 일을 하다가 약간의 문제라도 생기면 산드라에게 물어보고 그녀의 말에 귀담아듣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산드라가 만들어 낸 바틱 제품은 모두의 눈을 놀라게 했다. 남보다 배나 빠른 속도로 우수한 바틱을 만들어 내는 실력은 모두의 혀를 내둘리게 했다. 산드라는 날이 갈수록 회사의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산드라가 온 뒤로 바틱 생산 공장은 다시 활기가 넘쳤다.



[4]


유나 아빠가 산드라가 라미의 엄마인 것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날 라미가 공장으로 찾아왔다. 인도네시아 아이 같지 않은 소녀, 라미.
“라미야,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거니?”
라이샤가 라미를 데리고 공장 마당을 질러가는 걸 유나 아빠가 보았다.
왠지 라미란 아이가 낯설지 않게 보였다.
‘어디서 봤지?’
유나 아빠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나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라미가 유나 아빠를 보고 인사를 했다.
‘인사성도 참 바른 애구나.’
그때 유나 아빠는 깜짝 놀랐다. 드물게 한국말을 잘하는 인도네시아 아이란 사실보다 낭랑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더 놀랐다. 갑자기 강가에서 노래 부르던 소녀 아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너 혹시 얼마 전에 강가에서 노래 부르지 않았니?”
유나 아빠는 다른 걸 물어볼 사이도 없이 그 말을 먼저 꺼냈다. 처음 보는 사람이 묻는 말치곤 뜬금없는 질문인데 라미는 잠깐 머리를 갸웃하더니 얼른 대답했다.
“네, 강가에서 노래 불러요. 솔로강에서 매일.”
‘그럼 그 소녀가 이 아이란 말인가.’
“엄마도 같이 노래 부르니?”
“네. 같이 불러요. 엄마 때문에 노래 불러요.”
유나 아빠는 라미의 이야기를 듣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엄마 때문에?”
라미는 고개만 끄덕였다.
“여기에 너 엄마가 있니?”
“네”
이번에는 짧게 대답했다.
“엄마는 왜 찾아왔어?”
“할머니가 많이 아파요. 갑자기.”
“뭐라구?”
유나 아빠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급히 산드라를 불렀다. 산드라가 달려오고 아빠는 부리나케 자동차에 산드라와 라미를 태우고 달렸다. 라미네 집은 족자카르타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프람바난 사원*이 있는 동네였다. 솔로강이 옆에서 흐르는 동네다.
라미 할머니는 오랜 병으로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힘들어했다. 거기에다 갑작스런 기침이 멋지를 않았다. 유나 아빠는 회사 지정병원으로 할머니를 옮겼다. 의사들의 처치로 할머니 기침은 금방 멈췄다.
유나 아빠는 할머니를 당분간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게 하였다.
“사장님, 고맙습니다. 이 은혜 어떻게 갚아야 할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라미 엄마 산드라는 눈물로 인사를 했다. 유나 아빠는 죄송하다는 말을 유난히 되풀이하는 산드라를 보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정작 그녀가 한국에서 얼마나 고생하며 살았는지는 몰랐다.
“사장님, 저는 한국 경기도에서 살았어요.”
병원 복도에서 산드라는 자신의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냈다.
산드라는 아가씨 시절부터 바틱을 만든 기술자였다. 어느 날 한국에서 족자카르타에 여행 온 아주머니가 산드라와 친해지면서 중매를 섰다. 오랜 망설임 끝에 산드라는 한국으로 시집을 갔다. 산드라는 낯선 한국 생활이 어렵고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열심히, 한국에 시집온 사람으로서 매일매일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 사람들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최우선으로 한국말을 최우선으로 배웠다. 그리고 한국식 밥 짓고 반찬 만들고 김치 담그고 장 보고 명절일 하는 등 한국 사람이 되고자 있는 힘을 다했다.
그러다가 라미를 낳고 그런대로 잘 살았다. 남편도 일하던 유통업이 잘되어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산드라는 다만 인도네시아에 홀로 남겨둔 어머니가 걱정되어 가슴앓이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산드라의 평탄한 한국 생활은 거기까지였다.
라미 아빠로부터 불행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빠가 유통하던 축산물이 위생에 문제가 있다는 방송이 한 번 나온 뒤 라미 아빠의 사업은 무너졌다. 생각지도 못한 일로 하루아침에 사업이 무너져버린 라미 아빠는 충격으로 술에 찌들었다. 그리고 성격이 점점 포악해지며 거의 매일 라미엄마와 다투었다. 말이 다퉜지 라미 아빠의 일방적인 공격이 계속되었다.
“재수 없는 너가 우리 집에 들어와서 이 꼴 난 거야.”
라미 아빠는 말끝마다 저주가 담긴 말을 퍼붓고 잘못 돌아가는 일은 모두 산드라에게 뒤집어씌웠다. 포악해지고 소리 지르고 물건을 내던지고 라미 아빠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라미는 아빠가 무서워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라미아빠는 한바탕 크게 집안을 뒤집어 놓고는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산드라는 혼자 집안을 꾸려나갔지만 모든 것이 힘에 부쳤다. 나중에는 팔 수 있는 건 다 팔아가며 생계를 꾸려갔다. 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산드라는 라미를 집에 두고 여기저기 일자리를 구하러 다녔다. 아이를 집에 두고 시간별로 일할 곳은 거의 없었다. 또한 꾸준한 일감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라미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라미를 누구보다 한국 사람으로 잘 키우겠다던 희망도, 자신의 바틱 공예 기술을 한국에서 펼쳐 보려던 산드라의 계획은 뜬구름처럼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산드라를 가장 힘들게 하고 무섭게 한 것은 어린 라미가 혼자 집에 있는 상황이 바꿔지지가 않은 것이었다. 일을 끝내고 집으로 달려올 때 산드라는 매일 백 미터 달리기 선수가 된다. 힘들어 지친 몸보다 종일 혼자 있는 라미를 먼저 껴안는 일이 더 급했기 때문이다.
달랑 신랑 하나 믿고 먼 나라 한국으로 시집온 산드라는 더 이상 한국사람으로 살아갈 힘도,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힘도 없었다. 모든 희망은 허무하게 날아갔다. 그런데 설상가상이란 말이 있듯이 라미네 가정의 불행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라미에게서부터 오고 있었다.
라미가 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곧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과, 학습 진도에 따라가지 못 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걱정은 했지만 막상 현실에 당해보니 이건 정말로 심각한 문제였다. 아직 한국말은 어눌하지, 누가 이런 어려운 상황을 자세하게 도와주는 사람이 없지. 하니 한참 학교생활을 재미있게 해야 할 라미에게는 모든 것이 두려움뿐이었다. 라미네 가정에 닥친 상황은 결국 라미가 모든 걸 고스란히 떠안고 가야 했다. 산드라는 그게 견딜 수 없이 힘들고 괴로웠다. 라미는 걸음마 걸을 때부터 주위로부터 똑똑하다고 칭찬이 많았다.
“어머, 웬 어린아이가 목소리가 요렇게 곱다냐.”
“그것뿐 아니야. 저 날렵한 행동 좀 봐. 이담에 뭐가 되도 잘 될 거야.”
라미를 보는 사람마다 유명한 성악가가 될 거라고 했고 운동선수가 될거라고 했다. 하지만 막상 라미의 꿈을 실현 시켜 줄 학교에 가니 오히려 그런 꿈을 막는 현장만 라미의 눈앞에 벌어지고 있었다.
언제나 라미는 따돌림 신세다. 한국 아이들은 모든 게 빨랐다. 쉬는 시간에, 체육 시간에, 공부하는 시간에. 모든 게 바쁘게 돌아가는 시간 속에서 아이들은 말이 어눌하고 못 알아듣는 라미를 처음에는 딱하게 쳐다보다가 그다음은 무시했다. 사실 아이들이 처음부터 라미를 무시하려고 한건 아니다. 하지만 한국 아이들은 무슨 일을 할 땐 너무 빠르고 바쁘다. 라미는 그런 한국 아이들이 하는 행동을 따라가지 못해 뒤에서 쳐다보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장거리 달리기 하다보면 유달리 멀리 뒤처지는 사람이 있다. 그게 바로 라미 같은 사람이다. 라미는 뒤쳐진 곳에서 종일 멍하니 두리번거리다 집으로 오곤 했다. 그러다 보니 날이 갈수록 학교 친구들과 라미의 사이는 멀어지기만 했다. 그리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 거리는 더더욱 멀어졌다. 학교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라미를 제쳐두었고, 라미는 아예 처음부터 그럴 줄 알고 아이들과 섞이지 않았다.
“잰 정말 등신 아니니?”
어느 날 전학 온 아이가 뭘 모르고 혼자 점심을 먹는 라미를 향해 말했는데 그걸 라미가 들었다. 그날 라미는 울면서 집으로 왔다. 라미는 3학년이 되면서 등신이 되어 있었다. 등신이 되고 난 뒤 라미는 끝내 한 가닥 남은 자신의 자존감조차 무너졌다. 모든 일에 부끄러움만 커져갔다. 활발하던 몸짓도 노래 잘 부르던 목소리도 어느새 숨바꼭질하러 간 것처럼 숨어버렸다. 성격이 완전 변했다. 라미의 학교생활은 숨이 턱턱 막혔다. 유일한 라미의 쉼터는 오직 방 한구석뿐이었다. 라미는 그곳에서 쪼그리고 찔끔거리고 졸았다. 하루 종일 일에 치어 파김치가 되어 오는 산드라는 라미의 모습에 기가 막혔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형편에 절망했다. 모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서로 껴안고 눈물만 흘리는 일이다. 산드라는 딸의 눈물을 닦아 주면서도 실처럼 가느다란 희망을 잡아보려고 애를 썼다.
“라미야. 너랑 나랑 한국말 더 열심히 배우자. 넌 한국말만 잘하면 모든문제없어.”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주철호 씨 집 맞지요?”
경찰이 라미 아빠를 찾아왔다. 아빠가 남의 돈을 쓰고 갚지 않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라미 아빠는 수배 인물이 되었다. 산드라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며칠을 일어나지 못했다. 끝없는 어둠의 터널을 산드라와 라미는 걸어가고 있었다.
며칠 만에 일어나 두 눈이 퀭하게 들어간 산드라가 초췌한 얼굴로 식당 일을 할 때 주인이 급한 전화가 왔다고 불렀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국제 전화였다. 친구 라이샤의 목소리가 들렸다.
“산드라. 엄마가 위독해.”
산드라는 다시 식당 바닥에 쓰러졌다. 머리가 빙빙 돌았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정신이 희미해졌다. 그때 갑자기 고향이 산드라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강가에 서서 아버지와 노래하고 있었다. 강바람이 머리카락을 마구 흩뜨렸다. 하늘로 치솟은 열대 나무에 빙 둘러쳐진 고향 집에 어머니가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알록달록 앙증스런 바틱 부채였다. 산드라가 만들어 주고 온 부채였다.
“엄마, 나 이제 집으로 돌아갈래.”
산드라는 중얼거리며 정신을 잃었다. 식당 사람들이 라미 엄마를 흔들었다.
집에 온 산드라는 밤새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밤새 울며 쓴 편지를 아침에 부쳤다. 라미 아빠 친척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산드라는 라미를 데리고 인도네시아로 떠났다. 어여쁘고 재능이 톡톡 튀던 인도네시아 아가씨 산드라가 고향을 떠나 한국으로 갔다가 꼭 10년 만에 다시 고향 집으로 온 것이다.



[5]


다행히 라미 외할머니는 위독한 상태를 벗어났다. 하지만 병명을 알 수 없어 산드라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늘 초조한 날을 보냈다. 산드라는 막상 지긋지긋한 한국을 떠나 집으로 왔지만 잠시의 후련함 뒤에는 끝없이 밀려오는 고통스런 생각들로 괴로워했다. 산드라는 우울증과 신경쇠약에 미칠 지경이었다.
“엄마, 강가에 나가 노래나 불러. 후련하게.”
오히려 라미가 엄마를 챙겼다. 라미의 손에 이끌려 강가로 나가는 라미엄마는 몸부림을 쳤다. 라미가 노래를 불렀다. 강바람이 라미의 치맛자락을 가볍게 흔들어주었다.
“엄마, 할아버지랑 부르던 노래 붕가완 솔로 부르자.”
엄마는 라미와 강둑에 서서 노래 불렀다. 가난했지만 불행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어린 시절. 다정했던 아버지가 노래 부르면 어머니와 함께 따라 부른 붕가완 솔로. 아버지 또한 아버지의 아버지로부터 따라 불렀던 그 노래. 많은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갔지만 라미에게까지 흘러와 그 가슴 속에서 여전히 흘러가는 붕가완 솔로. 하지만 지금 엄마 앞에 보이는 저 강은 절망의 강이다. 솔로강은 어느새 이렇게 세월과 사람에 따라 절망의 강으로 변했단 말인가. 산드라는 철철 눈물을 흘렸다. 이절망의 강물은 어디로 흘러가는 것인가. 이 강이 붕가완 솔로가 맞기는한 것일까. 산드라는 좌절과 낙심에 떨며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라미는 달랐다. 라미는 슬퍼도 아름다운 솔로강을 노래했다. 절망의 강이 아닌 희망의 강, 사랑의 강을 노래 불렀다. 라미에게는 아직 솔로강은 엄마를
눈물 흘리게 하는 어쩜 낭만의 강이 아닌가.
‘솔로강이 끝없이 흘러가듯이 우리의 사랑도 흘러갑니다. 까마득한 과거 어버이들의 사랑과, 지금 우리의 사랑, 그리고 먼 훗날 우리 자식의 사랑이 그 강물 속에 하나가 되어 끝없이 흘러갑니다.’
산드라는 붕가완 솔로의 원래 노래 속 내용을 음미하며 라미를 쳐다보았다.
‘가엾은 라미.’
한국 학교도, 인도네시아 학교도 다니지 못하는 딸. 엄마 산드라는 라미의 손을 붙잡고 노래 부르다 울고, 울다 노래를 불렀다. 라미는 속으로 흐느꼈다. 엄마가 더 슬퍼할까 봐.
그날 유나 아빠가 강 건너에서 그런 라미 모녀를 본 것이다.
라미 모녀가 이렇게 나와 노래하던 날들 중 가장 복된 날이 될 줄을 산드라나 라미, 또 유나 아빠 모두가 몰랐던 바로 그날이었다.
“산드라 씨. 당신은 우리 한국의 며느리이자 엄마입니다. 누구보다 산드라씨는 우리들과는 깊은 관계가 있는 사람입니다. 부담스럽게 생각마시고 라미와 산드라 씨를 위해 도움이 되려고 하니 거절하지 말아 주길 바랍니다.”
유나 아빠는 라미 엄마의 자존심이 상할까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얼마 뒤 라미 모녀가 이사를 왔다. 프람바난 동네에서 바틱 회사 관사로 온 것이다. 바틱 공장 너른 정원 한 모서리에 관사가 있다. 유나네 집과는 열대 나무 숲만 지나면 되는 거리다. 산드라의 출퇴근이 쉬워졌다. 친정엄마가 있는 병원도 잠깐 걸음이면 된다.



[6]


그리고 한 달 뒤 유나가 여름방학이 되어 족자카르타에 왔다.
라미와 유나가 만났다. 유나와 라미는 처음 만날 때부터 마음이 잘 맞았다. 노래 잘하는 라미, 바이올린을 잘 켜는 유나. 인도네시아 말 잘하는 라미. 인도네시아말 잘 못 하는 유나. 한국말 잘하는 유나. 한국말 잘 못하는 라미. 둘은 서로 비슷한 점. 다른 점을 따지다가 더 친해졌다. 방학 내내 유나는 한국 이야기를. 라미는 족자카르타 동네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가끔은 아빠 자동차를 타고 솔로 강변에 나가 바람을 쐬며 노래도 불렀다. 방학이 끝나면 둘은 떨어질 수 없는 자석처럼 힘들게 헤어졌다. 다행스러운 건 유나 아빠의 도움으로 라미도 인도네시아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라미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욱 목소리가 커지고 고와졌다.
“산드라씨. 당신은 유능한 인재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한국에서 고생했지만 그게 다는 아닙니다. 멋진 자신을 다시 찾으세요. 언젠가는 라미 아빠를 만나 다시 한국에서 살지도 모르는데 그땐 지금과는 완전히 다를 것입니다. 한국도 인도네시아의 유명한 인재 며느리를 알아보는 날이 꼭 있을 겁니다.”
산드라는 열심히 일했다. 산드라가 바틱을 만들기만 하면 대박이 터졌다. 유나 아빠의 회사도 이름이 유명해졌다.
가든파티의 날이 왔다. 총총히 뜬 적도 하늘의 별들은 아름다웠다. 정원 군데군데 밝은 조명들이 비추고 있었다. 정원을 가득 메운 직원과 그 가족들이 서로 웃으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고기를 굽고 해산물을 삶고, 인도네시아의 음식이 나오고 한국의 음식도 나왔다.
“이번 가든파티는 좀 색다르게 준비했습니다.”
늘 파티를 주관하는 홍보팀의 박 팀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아, 아주 유명한 음악가를 모셨습니다. 정말 모시기 힘든 분들인데 제가 누굽니까. 짱 모셔왔습니다. 다 함께 박수로 맞아주십시오.”
박 팀장 아저씨의 너스레가 끝나자 스포트라이트*가 한 곳을 쫙 비췄다. 그곳에는 반짝이 원피스를 입은 두 소녀가 서 있었다.
“아우~ 유나, 라미. 라미. 유나!‘
사람들이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알았지? 잘할 수 있을 거야.’
유나가 라미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물론이야. 너도 잘할 수 있지?’
라미의 텔레파시가 느껴졌다.
유나의 바이올린에서 감미로운 가락이 퍼져 나왔다. 색 전등에 물감 옷을 입은 키다리 열대 나무들은 마치 환상의 나라에서 온 것 같이 번뜩였다. 바이올린 가락은 그 나무들 사이를 지나 초록 풀밭 양탄자가 펼쳐진 파티 정원으로 흘러 들어갔다. 잠시 후 바이올린 선율 위로 라미의 목소리가 살짝 얹혀 함께 흐르기 시작했다.


붕가완 솔로 아름다운 꿈을
영원한 꿈 싣고 저 멀리 흘러가네
어린 시절에 어버이 손 잡고
정답게 들었지 맑은 저 물의 노래
세월은 끊임없이 흘러 어버이들은 가셨건만들리는 저 멜로디는 영원한 내 사랑
붕가완 솔로 아름다운 꿈을
영원히 싣고서 저 멀리 흘러가네


정원은 아름다운 노래가 흐르고 사람들은 저마다 추억을 떠올렸다. 살랑대는 바람결에 고요히 흐르는 솔로강물처럼 아름답게 흘러간 추억도 떠올리고, 비바람 부는 날 성난 물결이 되어 흐른 솔로강물처럼 아픈 추억도 떠올렸다. 하지만 아픈 추억도 지나면 예쁘게 포장되어 간다는 걸느끼기라도 한 걸까. 라미가 후렴*을 부를 때 모두 같이 붕가완 솔로를 불렀다. 그들에겐 친숙한 자기들의 민요가 아닌가. 우리의 아리랑처럼.
반짝이는 별빛처럼 저마다의 박자를 가지고 밤하늘을 울렸다.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 한 가족이 마음이 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박 팀장이 말하자 직원들은 모두 밤벨* 악기를 양손에 들고 섰다. 유나아빠도, 유나 엄마도, 라미 엄마도 라이샤도. 그리고 유나와 라미도.
“우리 모두 함께 연주해요. 붕가완 솔로를.”
박 팀장 아저씨가 말하자 밤벨 연주가 시작되었다. 우아하고 애잔한 밤벨 소리는 살갗이 오그라질 정도로 감동 있게 사람들을 휘감았다. 한 악기에 한 음만 가지고 있는 밤벨 악기. 그래서 어느 악기 하나 소중하지 않는 게 없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자기 음을 내야 할 때 소리를 못 낸다면 그 연주는 실패로 끝난다. 밤벨 악기를 손에 들 때 비로소 나 하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귀하다는 걸 느끼기도 한다.
지휘자 지휘에 맞추어 자기만의 음 밤벨을 흔드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날을 위해 틈틈이 밤벨 연습했던 직원들과 그 가족들은 모두 황홀한 기분이 되어 연주와 함께 노래를 불렀다.
밤벨의 대나무 통이 부딪히는 깊고 중후한 자연의 소리, 티 없이 순수한 소리는 반짝이는 별빛처럼 저 마다의 박자를 가지고 밤하늘 속으로 스며들었다.


[7]


3년이 지났다.
“웬일이야. 나올 시간이 5분이나 지났어.”
“얜, 5분이 뭐가 길다고 난리를 치는 거니.”
유나는 인천국제공항 입국 문 앞에서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있다.
‘5분이 짧다고? 5분이 초로 따지면 얼마게. 3천 초야. 우아 길다 길어.’
엄마는 유난을 떠는 유나를 보고 웃음을 참지 못해 손으로 입을 가렸다. 오늘은 라미가 한국에 오는 날이다. 진짜로 라미가 오는 날이다. 라미는 엄마와 함께 온다. 라미는 이제 한국에 와서 맘껏 노래를 부를 것이다.
아니 라미는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라미는 한국 국민이니까.
‘라미야. 걱정 마. 내가 있잖아.’
유나는 이제 막 공항 입국 문을 열고 나올 라미에게 기를 넣어준다고 손바닥이 앞을 향한 채 팔을 쭉 내말고 힘을 주었다.


♥ 귀국을 환영합니다. ♥
라미. 신드라. 엄청 보고 싶었어. 정말이야 ㅠㅠ ^^^


라미 아빠는 피켓을 들고 서 있다. 사실은 유나가 만들어 준 피켓이지만. 피켓을 두 손에 꼭 붙들고 어색하게 서 있는 라미 아빠의 표정을 보니 정말 라미가 귀국하는 게 맞구나 실감이 났다. 라미 아빠는 작년에 경찰에 자수를 하고 법의 심판을 받았다. 그리고 그 동안 유나 아빠와 많은 통화를 했다. 새사람이 되어 가족과 다시 만나겠다고 굳게 약속했다. 물론 행복하게 사는 건 기본이고. 그리고 라미 엄마와 함께 인사동 홍보점도 멋지게 운영하겠다고 했다.
유나 아빠는 라미 엄마 산드라를 한국에 다시 보내기 위해 그 동안 많은 수고를 뒤에서 했다. 산드라가 한국으로 떠나는 날 유나 아빠는 한편으로 많이 아쉬워했다.
“라이샤. 바틱 달인 어디 또 없어? 좀 찾아봐. 난 이제 어떻게 해.”
아빠가 어설픈 개그를 했지만 사실 그건 아빠의 진심이다.
인천공항 입국 문이 열렸다. 라미가 보인다. 유나는 두 손을 버쩍 들고 소리쳤다. 곧이어서 메아리가 들려왔다.
“라미야. 주라미!”
“유나야. 신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