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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2018년 [소설] 밀고 가는 레일 바이크 / 이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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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722회 작성일 18-12-29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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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Me Too) 운동이 연초부터 들불처럼 번졌다.
예술계, 교육계, 종교계. 심지어 군(軍) 안에까지.
거목이 거꾸러지고 높기만 하던 탑이 무너지고 별도 땅에 떨어졌다.
그들이 함부로 여겼을 아주 작지만 용기 있는 한 사람이 자기 인생 모두를 걸고 파
렴치한의 민낯을 고발한 것으로부터였다.
<황혼이혼> 건 수 또한 최대치로 보고됐다.
이 두 사안이 전혀 별개의 맥락에서 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존여비> 남성우월주의에 짓눌려온 여인들이,
긴 세월 품은 한이 <오뉴월 서리>로 내리는 중이다.
여성이 완전한 <자기 실존>을 누리는 길은 아직 멀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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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고 가는 레일 바이크


우리가 탄 버스, 정선 레일바이크 출발점에 도착했을 땐 바이크 출발이 임박해 있었다. 직원들은 몇 대 남은 바이크 앞문을 열고 재촉해서 우리를 태웠다. 발 빠른 회원들이 두서없이 뛰어가 닿는 족족 탈 수밖에 없었다. 총무는 미리 짜놓은 배정 표를 펴들고 레일 한복판에 서서 넷씩 짝을 지어 탈 것을 호명했지만, 회원들은 아랑곳 않고 뛰어가 닫는 대로 바이크에 올라타기에만 열중했다.
순녀처럼 나이 든 여자 셋이 늦게나마 남은 바이크 한 대에 탈 수 있었다. 늙은 여자는 소변을 자주 보는 생리현상을 이겨내지 못한다. 세 여자는 급하다는 인솔자의 소리를 들었음에도, 그보다 더 급한 일에 직면했다. 길에 나서면 떠날 때 소변보고 어느 곳에든 차가 멈추면 또 소변을 봐야 한다. 소변 때문에 뒤에 처진 여자 셋이 한 바이크에 타는 것을 본 총무는 발만 동동 구르다 뛰어가 맨 앞 바이크에 가까스로 올라탔다. 늙어보기 전엔 모른다. 주책없이 닥쳐와 난감하게 하는 생리현상을.
총무는 문학기행 참가자 명단을 놓고 신중히 조를 짜 두었다. 각 개인의 건강과 힘의 안배에 입각, 넷씩 조를 짜 두었지만 현장에서 흐트러지는 일행을 보며 제 노력이 아무 소용없음에 허탈했다. 세 여인에게 허락된 바이크. 앉자마자 출발이다.
가을들녘, 레일 양옆엔 코스모스, 맨드라미, 쑥부쟁이, 이름 모를 들꽃이 도열해 폈다. 바람은 살랑살랑, 하늘은 가없이 파아랗다. 마음 들뜨기에 모든 여건이 충분한 날이다. 오랜만에 탁 트인 시야, 청량한 바람을 마시며 별 힘들이지 않고 잘 나가는 바이크에 앉은 세 여자. 앞 좌석엔 순녀와 이 시인, 뒷좌석엔 송 시인 혼자다. 출발지점에서는 관리인 남자 두 사람이 힘껏 밀어주어 명쾌하게 달려나갔다. 페달을 밟았다기보다 페달에 발을 올려놨을 뿐이다.
순녀는 입원실에서 나온 지 불과 3개월 정도, 옆에 자리한 이 시인은 오른쪽 발목 복숭아뼈 주위가 멍들어 있고 발등이 뽀오얗게 부어 있었다.
뒷자리에 혼자 앉은 송 시인은 허리병으로 달포 동안 문밖 출입을 못하다 문학기행 빠지기 아쉬워서 억지로 외출한 사람이다. 송 시인은 앞자리 두 여자보다 젊고 체격도 좋은 사람인데 달포 전 선반 위에 얹혀둔 교자상을 내리다 상을 안고 그냥 뒤로 넘어져서 허리를 다친 것이다. 몸이 고장 났거나 부실하기 짝이 없는 여자 셋이서 한 조가 돼서 바이크를 저어야 할 형편에 처한 것이다.
출발점에서 한참 동안은 곧잘 달리는 듯 앞차와 간격을 잘 유지했다.
기분 짱이었다. 페달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저절로 저어졌다.
“야호! 우와! 멋지다! ”
한쪽 팔을 높여들어 휘졌고 달렸다.
“아! 가을이다 아 아 아 ”
순녀네 바이크 속도가 차츰 느려지고 페달을 밟는 발과 장딴지에 힘이 들어갔다. 무거웠다. 산기슭을 돌고 강줄기를 따라 시야가 뻥 뚫린 구간을 지날 적에도 그럭저럭 간격을 유지했었다. 사는 길에 어찌 평지만 있으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힘이 빠지고 있었다. 터널만 지나면 종착점이 보이는 평평한 레일이 있다고 하는데 순녀는 터널을 겨우 지나며 마지막 힘을 다 소진했다. 터널은 언덕지고 굽어 있었다. 터널을 벗어나니 저 멀리서 먼저 도착한 일행들이 손짓했다. 아무리 응원을 받아도 순녀들 바이크는 떡하니 멈춰서서 요지부동이었다. 뒤따르는 바이크 여러 대가 그녀들 바이크 때문에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더니 멈춰 섰다.
이런 때 쓰는 말이 ‘사면초가’ 아닐까? 연장자 순녀는 퍼뜩 떠오르는 생각을 외쳤다.
“우리 내려서 밀자구.”
“우리 때문에 저것 봐. 남들이 섰어. 방해가 돼선 안되잖어?”
말과 동시에 순녀가 먼저 선로에 내려 바이크 뒤쪽으로 갔다. 송 시인이 뒤따라 내렸다. 둘이 바이크를 뒤에서 밀고 이 시인은 그대로 앉아 페달에 발만 올려놓았다. 마침내 뒤에서 야유가 쏟아졌다.
“우하하ㅋㅋㅋ 웃긴다 ㅋㅋㅋ”
“야야 저것 좀 봐, 바이크를 밀고 가는 거ㅎㅎㅎ”
몇몇 사람이 스마트폰을 우리들에게 조준했다. 스마트폰을 높이 쳐들고 순녀들을 찍는 모양이다. 야지와 웃음과 아우성 소리가 앞산에 부딪혀 메아리져 퍼지건만 정작 세 여인은 식은땀 더운 땀, 입속이 바짝바짝 말랐다.
“정선에 오면 밀고 가는 바이크도 있다네요ㅎㅎㅎ”
“조금만 더 힘내세요, 다 왔어요오-.”
일행들이 응원으로 부추기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순녀들은 한계점에 놓여 있었다. 저 앞 종착점에서 스카프며 모자를 흔들어 응원하는 회원들이 인형처럼 작게 보이는 것으로 봐서, 빤히 보이지만 저곳까지 가기는 역부족이란 예감에 그녀들은 자갈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디서 달려왔는지 관리자 남성 한 사람이 그녀들 곁에 달려왔다.
“모두 타세요.”
청년은 순녀가 앉았던 앞자리에 앉더니 앞바퀴를 힘차게 젓는 게 아닌가? 청년이 밟은 마지막 몇 번의 힘찬 페달로 종착점에 닿을 수 있었다.
부끄럽고 민망한 맘 주체할 수 없어서, 종착점에선 얼굴 가리고 내렸다.
“내가 이럴 것 같아서 세 사람을 다른 사람들 속에 고루 배치해 두었댔는데…”
기진맥진한 세 여자들을 보자, 총무는 못내 아쉬움을 거듭 뇌였다. <밀고 가는 레일바이크> 해프닝은 한바탕 웃음으로 지나갔다. 밀고 가던 바이크마저 멈추어 요지부동인 그 순간, 순녀 눈에 사진 한 장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5년 전 일이다.
석 달 동안 입원했다가 퇴원해 집에 돌아오던 날, 남편의 팔에 의지해서 순녀는 현관에 들어섰다. 바깥 공기보다 오히려 찬 집안 공기가 순녀를 맞았다. 싸늘한 집안 공기는 병자인 순녀 몸 한기보다 더 스산했고, 순녀는 손님처럼 거실에 엉거주춤 손가방을 내려놓았다. 안방 문을 천천히 열었다. 한 발 들여 놓을 때, 대항할 수 없는 힘이 순녀를 밀어내고 있었다. 정면에 가지런히 놓인 문갑이 그녀를 밀어내는 듯 눈앞에 확 달려들었다. 두 짝 문갑, 한 개는 순녀가, 또 다른 한 개는 남편이 각자 애장품을 진열해 놓고 살았다. 순녀 자리엔 백자 항아리 한 점, 목각 기러기 한 쌍, 그리고 굽도리 청자 사발 한 점이 있어 왔다. 세 가지 모두가 명인의 작품이며 그녀에게 온 사연이 있어서 무척 아껴하는 것들이다. 남편 자리에 것들은 먼지를 뿌옇게 쓴 채 그대로 있건만 그녀 문갑 위만 달라져 있었다. 그녀가 집을 떠나 있는 사이, 내 집 내 안방에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그녀 애장품은 모조리 간데없고 2호짜리 사진 한 장이 떡 하니 버티고 있었다. 문갑 위에 놓기엔 너무 큰 사진이었다. 사진은 얼핏 봐도 유리 액자에 껴 있었다. 전등 불빛에 번뜩였다. 사진 속에서 남편은 어떤 여인과 단둘이 레일바이크를 타고 가면서 둘 다 희희낙락이다. 남편은 만면에 웃음 가득, 한쪽 팔을 높이 쳐들어 휘젓고 있었다.
‘50여 년 함께 세월을 건너면서 남편의 저런 웃음을 본 게 언제였었나?
몇 번이나 됐었나? 완전 무절한 행복감을, 만족감을?’
“흑.”
눈물이 쏟아졌다.
주책없는 눈물, 입원 중에는 그렇게도 갈망했던 눈물이다. 한번 목놓아 울었으면 시원할 것 같았다. 울어버리고 나면 병에서 놓여날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녀 감정은 너무나 메말라 있어서 한 방울 눈물조차 자아 올리지 못한 채 석 달 동안이나 뿌연 세상에 갇혀 있었다. 그 도도한 울음이 어울리지 않게 이 시점에서 툭 튀어나오는 것이다. 야속한 울음. 눈물이…
‘오랜만에 남편의 완전 행복한 웃음을 보는데 왜 내가 눈물 바람인가?
이런 광경에서 나는 바락바락 울화가 치받쳐, 할퀴고 물어뜯고 해야 맞지않을까?’
설명이 안 되는 그녀의 눈물, 야릇한 심사였다.
안방은 낯설어서 그녀가 몸을 뉘일 곳이 아닌 것 같았다.
‘이 집엔 이젠 내가 머물 자리는 없구나. 나 아니라도 이 남자는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저 사진 한 장이 말해주지 않나? 그것도 모르고 집에 가기만 고대하다 기어든 내가 미련했구나. 십수 년 이어온 나의 병치레로 어둡게 살기보다는 다른 여자와 저렇게 명랑하게 살 수 있는 남자를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내가 어리석었구나. 퇴원했어도 집에는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그냥 죽어버렸어도 되는 거였구나. 사부작사부작 되살아나는 게 아니었어.’
순녀는 곧장 서재로 발길을 돌렸다. 대충 자리를 깔고 누웠다.
누워 있는 순녀 귀에 대고 소곤대는 또 다른 순녀가 있었다.
‘누가 자주 아프래? 누가 집을 오래 비우래?’
제 탓을 자신에게 재우쳐 일깨우는데도 주책없는 눈물은 멈추지 않고 베개를 적셨다.
며칠 뒤 막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퇴원 뒤라 집에서의 일상이 염려돼서 걸었다고 했다
“현아, 나 괜히 집에 온 것 같다. 병원에서 그냥 죽었어야 할 것을…”
“엄마, 무슨 말에요, 무슨 일 있는 거죠, 또?”
“이 집엔 내 자리가 없어. 안방에 들어가서야 알았다.”
“엄마 무슨 일인지 자세히 좀 말해 봐요.”
“나란 존재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어졌더라. 안방 문갑 위에 엄마가 아끼는 작품 세 가지, 너도 알지? 그것들이 싹 치워지고 그 자리에 커다란 사진틀 한 개가 떡 벋치고 있구나. 네 아버지가 어떤 여자하고 둘이 레일바이크에 올라 희희낙락 손을 흔들고 있구나.”
“그래서, 그래서 엄마 어떻게 했어요?”
“어떻게 하기는, 순간 모멸감 때문에 내 서재로 바삐 와 버렸지.”
“엄마두, 그걸 그냥 못 본 채 내버려 두었다구요? 그 사진 아직 그냥 안방에 그대로 있나요?”
“그럼 어쩌겠니? 아내이기 이전에 인간에게 대한 예의로도 이건 아니지 싶구먼, 네 아부진 늠씰하다.”
“엄마, 기왕 서재에서 생활하시는 거 그냥 그렇게 지내고 있어요. 내가 곧 갈 때까지.”
연말엔 외지에 사는 자손들이 하나둘 자기네 시간표에 맞추어 부모 집에 다녀가곤 한다. 막내는 그때를 말하는 것이다. 순녀 집은 방이 두 개, 거실, 주방으로 돼 있다. 혼자 오는 자손은 서재에, 가족이 오면 안방을 내주고 그녀 내외는 거실에서 자곤 한다.
그 겨울 막내는 12월 28~30일까지의 친정 나들이를 알려왔다. 순녀는 두 달 이상 서재에 기거하며 남편과 동거인처럼 지냈다. 순녀가 육신을 추스르는 기간이었다.
아이들이 온다기에 순녀는 쉬엄쉬엄 대청소를 했다. 친정을 찾아 제 식솔을 거느리고 올 막내를 위해서다. 모처럼 안방에 들어가서 장롱을 열어 침구류를 골라내어 겉풍 쐬고, 구석마다 쌓인 먼지를 훔쳤다. 그 문제의 사진틀에 덮인 뽀얀 먼지를 털었다. 막내가 와서 이 사진을 재판할 일을 기대하며.


띵동 띵동
“엄마 우리 왔어요.”
“어서 오너라, 이 서방은?”
“아, 네. 주차시키고 올라올 거에요.”
막내는 아버지의 반기는 몸짓엔 아랑 곳 않고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더니 들고 온 짐을 거실 바닥에 내던지듯 내려 놓고 안방에 들어갔다. 순녀는 순간 움찔했다.
잠깐 사이에 사위가 어린 아들 앞세우고 현관에 들어섰다. 부산한 수인사를 하고 안방에 짐을 푼 딸네 가족이 다시 거실로 나왔다. 순녀 내외가 나란히 자리하고 앉았다. 늘 하던 대로 큰절을 받았다. 풋풋한 막내딸 세 식구가 깊은 애정으로 하는 절을 받고 남편은 흐뭇해서 덕담을 늘어놨다.
순녀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외동이 손자 손을 꼬옥 쥐어 보았을 뿐이다. 이런 배치도가 새삼 어색했다. 저녁밥을 먹고, TV 시청 한 자락, 아홉 시 뉴스를 끝으로 막내는 제 식구를 안방으로 몰고 들어갔다. 안방에 들어간 세 식구가 한바탕 깔깔대더니 금세 조용했다. 여독 때문에 곧 잠들었지 싶었다. 순녀도 제 잠자리 서재로 돌아왔다.
“아빠. 나랑 맥주 한잔 하실래요?” 막내 목소리다.
“그러자꾸나.”
남편은 얼씨구나였다.
‘눈치 없는 영감, 그저 좋아라.’
순녀는 막내의 ‘맥주 한 잔’이 무얼 뜻하는지 짐작이 갔다. 그러니 자기가 낄 자리는 아닌 것, 불을 끄고 귀만 거실에 내놨다.
“아빠, 이거 뭐에요?”
“뭐긴, 지난 가을에 정선 가서 레일…”
“누가 레일바이크 몰라서 묻는대요? 이거 웬 사진이냐구요?”
“그 사진, 노인정에서. 정선에…”
“누가 그걸 묻는 대요? 이 사진이 왜 안방 엄마 문갑 위에 놓여 있냐구요.”
“그 할머니가 다리 아파서…”
“대체 아버지는 내가 무얼 묻는지조차 감이 안 와요?”
“내가 왜? 이 사진 어때서?”
“아이구, 아버지. 내 말뜻은 그게 아니고요. 이 사진이 왜 하필 엄마 자리에 있어야 하냐구요?”
“마땅히 놓을 자리가 있어야지…”
“아버지. 이게 엄마가 아끼는 물건까지 밀치고 그 자리에 있다는 게 보통 일이라 생각하세요? 이걸 보는 엄마 맘 어땠을 거 같애요?”
“네 엄만 암말 않더라.”
“엄마가 암말 않다구 여태까지 그대로 뒀어요? 우리 애아범이 볼까 겁났어요. 아버지. 아버진 정말 너무하시네요. 병원서 죽을 고비 넘기고 겨우 집에 온 엄마 맘, 아버지는 눈꼽만치도 헤아리지 않으시다니 이건 아니지요”
“니네 엄만 옛날에도 늘 그랬어. 내가 출장이나 여행지에서 여자들과 찍어온 사진들 죄다 내 앨범에 붙여 주더구나. 너도 종종 봤잖어.”
“그랬어요 그땐, 엄마가 건강하고 젊었을 때죠. 지금 엄만 병중이잖아요. 죽을 수도 있었잖아요?”
“죽긴 왜 죽는다고 그래?”
“더두 말고 아버지, 한 예로 아버지가 우연히 저희 집에 오셨다가, 사위 서재에서 제 남편이 어떤 젊은 여자와 정다이 찍은 사진이 테이블 정면에 놓인 거 보신다고 생각해보세요. 아버지 맘이 어떨 것 같나요?”
“그거야 안 되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치요 아버지? 내 딸이 이렇게 무시당하고, 괄시받고 사는구나 싶어서 얼마나 서운하고 사위가 괘씸하겠냔 말이에요.”
“그것과 이것이 같으냐?”
“예를 든 것이지만 다르지 않지요 뭐. 엄마도 여자예요. 지금 허약하고 자신감 자존감 모두 잃은 상태란 걸 몰라요?”
“그래서 나까지 축 늘어져 지내야 맞다는 거니? 나만이라도 활기 있게 그 세월 살아내야 집구석이 되지 않겠니?”
“좋아요. 다 좋다구요. 아버지의 활발한 노년 생활을 나도 응원해요. 그렇더라도 지금은 이런 사진 엄마에게 보이지 말았어야지요. 적당히 아무데나 둘 일이지 엄마 자리까지 치우고 놨어야 해요? 무심코 놨다가도 엄마가 퇴원하게 되면 곧 치우시던가…, 눈치 없게 이게 그냥 몇 달을 안방에 버젓이 있게 하다니요. 아버지의 그런 무정함이 엄마를 얼마나 우울하게 하는지 아세요?”
“야 좀 봐라. 내가 네 엄마를 정신병자 만들었단 말이냐?”
“꼭 그렇다는 게 아니구요. 아내가 미워도 최소한 인간에 대한 예의로서 이건 아니란 말이에요. 어른들이 잘 쓰는 말, ‘역지사지’란 말도 있잖아요? 사람이 늙어지면 다 아버지처럼 되나요?”
“그게 그렇게 잘못된 일이라면 당장 치울 게 이리 줘.”
남편은 딸의 공격에, 설명에, 지적에 전혀 가책이 없는 눈치다. 딸에게 그냥 져 주는 것뿐이다. 자라면서 그러했고 출가해서 애 어미가 돼서까지 아버지에게 대놓고 따지고 든 적이 없는, 그래서 아버지 사랑을 제일 많이 받는 자식이다. 둔감한 아버지와 예민한 딸아이의 실랑이는 이쯤에서 흐지부지, 맥주 캔을 오그리는 소리로 막을 내렸다. 모두 제 잠자리로 가고 순녀는 잠이 오지 않았다.
남편, 아니 우리나라 8~90대 남자들 대다수의 여성관이 저것이었다.
아내를 사랑해서 혼인한 게 아니라, 남들이 다 걷는 길을 따라 걸었을 따름이고, 자손을 얻어 자식으로서 조상대대 집안을 이어야 할 책임을 다했을 뿐이다. 중매쟁이가 반쯤은 감언이설로 맺어 주었고 살아가면서 정을 붙였다. 여자에게 시집은 살얼음판, 낯섦, 고된 일상이었다. 가솔들의 조석을 지어 대는 책임, 아이 낳는 도구였다. 공공연히 허락받은 ‘노예’나 다름없었지 않은가?
<여섯시 내고향> 같은 tv에서 간혹 시골 8~90대 할머니들에게 마이크를 대고 신혼의 추억을 말 해 보라면 하나같이 서럽고 매섭던 날들, 고된 세월을 말한다. 그럼에도 농촌 아낙들은 다 늙은 영감에게서 “내게 와서 고생 많았다. 미안하다. 살아줘서 고맙다.”라고 위로받는 것을 볼 수 있다. 반면 내로라 살았다는 영감의 아내들은 남자로부터 “미안해, 잘못되었어, 고마워” 따위 말을 평생 못 들어본다고 답한다. 그녀들의 남자는 다 <갑>이었으니까.
이렇듯 여자를 대하는 우리나라 남정네들 의식 속에는 암묵적으로 흐르는 비인격적인 관념이 꼬투리로 남아 있다.
순녀가 60년대에 근무하던 시청 산하, 구청, 보건소에서 견딜 수 없어서 사표를 내던 그때나, 90년대 막내가 대학 졸업하고 근무하던 금융계 직장생활 때에도 여직원들의 근무 여건은 거의 같았다. 60년대엔 회식이나 본청에서 감사를 나오면 여직원들은 퇴근을 저지당했다. 술자리에서 여직원들을 남성들 중간 중간에 끼워 앉혔다. 심지어 술을 따르란 강압에 직면했다. 막내는 최첨단 컴퓨터 세대다. 진급시험에서 대리를 땄는데 나이 많은 남자들에게 양보하란 인사과의 공공연한 대기발령에 분해서, 집에 와 울고불고했다. 남자 직원들이 함부로 군다고 치를 떨었다. 그럴 적마다 아버지는 타이른다는 말 .
“직장생활이란 게 다 그런 거다. 참아야 한다.”
MT 가거나 출장을 가서도 술 한 잔 걸친 남자 동료들의 무례함에 진저리를 쳤었다. 그것도 남들이 다 견디어 오는 일이니 참으라 했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딸애 초등학교 4~5학년 때, 반 애들의 투표로 뽑힌 반장 자리를, 차점인 남자애에게 양보하게 했다.
우리 세대가 다 죽고 나면, 새 세대가 사회의 중견이 되면 없어지려나이 못된 남성우월정서.
남편의 레일바이크 사진을 문제 삼는 내가 오히려 이상한 여자다.
갖은 비유를 들어가며 실상을 지적해도 별 가책 같은 거 받지 않는 남자. 아무런 개념 없는 구세대 대표적인 남자를 질타하는 나와 딸이 도리어 별난 모녀라 생각하는 남자.’
막내딸 세 식구는 2박 3일 일정을 보내고 떠나갔다. 그들의 방문, 엄마대신 아빠에게 시시비비를 따져주고 갔다. “내가 잘못했다. 혹은 미안하다.” 같은 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 남자란 것을 잘 알기에 그쯤으로 재판이 충분하단 생각으로 순녀는 옹쳐먹은 몸과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막내가 오던 날 이후로 그 문제의 사진, 부적처럼 꺼림칙한 사진은 오간데 없고, 문갑 내 자리는 빈 채로 여러 날을 그렇게 지났다.
<갈뫼> 1월 월례회 날이다. 순녀의 건강에 관심이 쏠려 있는 회원들은 앞 다투어 근황을 물어봐 준다. 그 관심사에 답례랍시고 안방 문갑 위 사진을 얘기했다. 지나간 에피소드 한 꼭지쯤으로 털어놓은 이야긴데 여기 저기서 날센 소리가 날아들었다.
“그걸 그래 그냥 놔 두었다구요?”
“망치로 한 방에 박살을 낼 일이지.”
“그 집 아저씨 정말 간 큰 남자네 아하!”
“나라면 당장 이혼 도장 찍겠어요.”
“왜 참으세요. 단박에 대응하고 결단내지 않구.”
“아유 답답해 정말.”
“이 선생, 착한 건가요, 바본가요?”
“그만들 하세요. 내가 오래 앓다 보니 전의(戰意)조차 남지 않았나 봅니다.”
친구들이 말한다. 순녀가 두세 차례 암과 맞닥뜨리는 데엔 일상에서 그만한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대체로 그 스트레스의 원인 제공자 절반은 배우자인 경우가 많다.
서울 집을 팔고 속초로 내려온 그 몇 년 동안 남편은 아내 투병으로 노후자금이 바닥났다며 살아갈 일에 매우 두려워하고 예민해지던 때가 있었다. 문패도 없는 집 <작은 아파트>에 사는 것을 부끄러워하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면서 당신이 허드렛일로 고생하며 늙어간다고 개탄하기도 했다.
어찌 됐건 순녀는 계속 의료비를 빼먹고, 남편은 푼돈을 벌어 모은다.
당신이 일말의 원인 제공자란 가설에 절대로 동의하지 않는 눈치다.
순녀 역시 남의 탓 하는 사람을 제일 혐오한다. 순녀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비겁한 사람이다. 남 탓 잘하고 핑계 대는 인간이다. 때문에 어떠한 사항에 처해도 순녀는 남편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지 않으려 애써 살아왔다.
이제 와서 악을 쓴들 무엇이 달라질까? 공손하고 극진히 아버지를 대하던 막내가 돌연 팔짝뛰며 조목조목 따져 들어도 그게 그렇게 잘못된 일이라는 충분한 자각이 없는 늙은이인 것을.사람이, 남자 나이 80이 넘으면 개념 자체가 없어지는 걸까?


<입춘대길> 축문을 내거는 아침에 순녀는 허드레 잡동사니를 정리했다. 베란다 한구석에 버려졌던 그녀의 애장품 백자 항아리, 목각 기러기 한 쌍, 굽 달린 청자 사발을 찾아냈다. 묵은 때를 밀어내고 여러 번 어루만져 가슴에 안아보기도 하다, 안방 그녀 문갑 자리에 예전처럼 올려 놓았다. 그리고 깊은 연민에 창밖을 내다보며 혼잣말로 주저리주저리 주문처럼 읊조린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삶의 무게를 지니고 산다. 그 누구의 것보다 제것이 제일 무거울 것이라 생각하겠지. 아무도 대신 져 주거나 덜어내 줄 수 없는 자기 무게다.
황혼길에 선 내가 곱게 물들어 땅에 떨어질 때가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남아 있을지는 모르지만, 더욱 나 스스로 나를 어루만지고 위로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이 담엔 또 이런 일방적인 어처구니를 만나지나 말기를. 이후에 또 이렇게 자존심이 짓뭉개지는 일이 생길 때는 망치를 들어 박살 낼 의욕이라도 남아 있기를…’


정선 레일바이크, 밀고 가면서 여러 해 동안 가슴에서 내려가지 않고 있던 남편 레일바이크 사진을 떠올렸다. 조금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내 자존감을 훼손한 무례함은 어쩌나? 그 시대 남자들 대다수가 다 그렇다니 나도 용서해야겠지.
그 남자를 용서하는 데 5년이나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