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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호2003년 [시-이은자]슬픈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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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갈뫼
댓글 0건 조회 2,670회 작성일 05-03-26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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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사흘째다. 아이는 꺼이 꺼이 마냥 운다. 우는 아이를 데리고 나
는 고깔모자 60개를 만들 참이다.
「현아. 이게 좋겠니, 아님 요 모양이 좋겠니?」
뾰족하고 길쭉한 모자 하나와 야트막하고, 봉긋한 모양의 것 한 개를 번
갈아 머리에 얹어 보이는 엄마다.
코맹맹이 소리로 아이는 대답한다.
「이게 낫겠어. 엄마.」
뾰족하고 길쭉한 것을 집어 올리며 말한다. 아이는 엄마에게 제 속을 감
추려 하고 엄마는 태연한 체 너스레를 떨고 있다. 나는 일부러 더 자꾸만
아이에게 말을 건다. 슬퍼할 겨를이 없게 하려고.
「얘, 현아. 이 고깔 말이야. 풀로 부칠까? 호치끼로 찍을까?」
색색 가지 도화지 종이 고깔을 다 마름질하는 동안 아이는 돌아앉아 울
고 엄마 손은 빨리 놀렸다. 또 한번 코를 풀고 대답한다.
「호치끼로 했다가 손 다치는 사람 있으면 어떡해.」
이 와중에 남의 손에 피날까 배려하는 아이인데 왜 그런 일이? <아! 하
나님.> 시간이 많이 걸려도 아이 말대로 우리는 풀로 모자를 다 붙였다.
그리고 또 한 단계 끈을 달아야 쓰고 움직일 수 있다. 모자 색과 맞는 테
잎을 각각 자르고 송곳으로 양옆에 구멍을 뚫어 끈도 달았다.
내 아이에게 닥칠 큰 시련을 예견하지 않았기에, 나는 그 겨울 호산나
성가대 송년의 밤 진행자로서 레크레이션 이벤트까지 맡아 놓은 상태다.

성가대원 60여명은 대학 1년 생부터 노(老) 교수에 이르기까지, 생업(生
業)도 가지가지, 합창이란 목적을 배제한다면 함께 할 수 없는 개인차와
세대 차를 지닌 집단이다. 그 모두가 피차간에 벽을 넘는 길은 동심(童心)
을 되찾을 때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서 한결 같이 피노키오 고깔모자를
쓰고 입장하고 놀이에 동참하도록 구상했었다. 인간관계 훈련 프로그램에
서 따온 생각이었다. 내가 맡은 이 일을 되물리기엔 너무 임박한 즈음에
와 있어서, 그리고 내 아이의 실패를 세상에 알리고 싶지도 않고 해서 그
냥 고스란히 짊어지고 간다. 많은 소품들을 수작업 하는데도 아이의 손을
빌릴 셈이었는데 그런데 아이는 며칠 몇 밤을 그저 울기만 한다.
대입(大入) 본고사를 치고 오던 날부터 아이는 통 말이 없었다. 자기의
낙방을 예측하는 눈치였다. 정식 발표가 나고 낙방이 현실로 다가왔을 때
이 철없는 엄마는 아이의 눈치만 살필 뿐 도울 길을 몰랐다. 대책 없이 가
장 폭발적인 베이붐 시기에 너를 낳은 일이며 이런 일거리를 벌리는 일
등등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아이가 낙방한 데는 내 잘못이 컸다. 고 2년 생을 데리고 우리는 집을
옮겼다. 애미의 사업장 자금 사정이 어려워서 내 집을 세놓고 산꼭대기 싼
집을 얻어 이사했다. 그 집에서 아이는 통학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 뿐만
이 아니다. 엄마는 미주(美洲) 한국일보사 초청 연주회로 20일 간이나 떠
나 있었다. 그건 자선 모금 연주회였다. 이민 1세대는 죽기살기로 돈을 벌
었지만 가정 붕괴란 복병 앞에 무너지고 있었다.
떠도는 2세들의 보호시설을 만드는 일에, 여성으로만 구성된 우리 합창
단이 동참한 순회연주였다. 남의 집 불 끈다고 나가서 내 집 아이 떠돌게
만든 꼴이 됐다. 그리고 또 있다.
그건 현이 자기가 간청해서 한 일이다. 시골에서 재수하고 있는 사촌 언
니를 서울 자기 방에 동거하게 했다. 음대 지망생인 언니를 위해서 피아
노 연습, 청음연습 살뜰하게 자기의 공간을 양보해 주었다. 입시생 가진

집엔 손님으로도 잘 안가는 우리네 현실에서...
그 무엇보다 가장 큰 실수는 시험 전날에 있었다. 지금도 여전하지만 입
시 날만 되면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고 눈도 오곤 한다. 우리 집은 아이가
지망한 학교와는 가깝지만 눈이 오면 아이젠을 신고서야 큰길까지 내려갈
수 있다. 그 정도면 큰길에서도 차량 통행이 끊긴다. 이런 변수를 감안하
여 E대 후문 하숙촌에 방 하나 예약해 두었다. 하루 전 밤에 가서 자면서
편하게 시험장까지 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 빗나간 것 같
다.
정릉에 사는, 아이의 절친한 친구 성아가 자기 엄마와 함께 내 가게로
왔다. 자기들도 그렇게 하도록 함께 데려가 달라고, 꼭 좀 들어달라고. 성
아는 E大에 넣기는 아슬아슬한 점수였지만 소신 지원한 상태다. 마음 고
생이 심한 터라 우리 모녀는 별 갈등 않고 응락했다. 막상 전날 그 집에
갔을 때 빈방이 없었다. 집 주인은 시골 내려간 학생 중에 한 사람에게 전
화로 동의를 얻어냈다. 내가 이미 얻어 놓은 작고 아늑한 방을 성아네 주
고 우리 모녀는 청소도 안된 덩그렇고 외풍이 심한 방에 짐을 풀었다. 나
는 그 부분에서 큰 과오를 범한 것이다. 속언에 제 복 속없이 남에게 잘
주는 어리석음이, 제것 암팡지게 챙길 줄 모르는 미실이 기질이.
밤새 덜컹거리는 소리, 윙윙거리는 바람소리, 조금 만이라도 자야하는데
아이는 안절부절못하며 날밤을 샜다. 평소 침착하기 그지없던 아이였는데
온 밤 가위눌린 아이는 아침밥도 못 넘기고 몹시 기운 없게 보였다. 시험
중에도 가위 눌려 영어 문제지가 어느 갈피에 섞여 숨었는지 도무지 찾지
를 못하고 시간을 허비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제사 정신을 차리고 곰곰히
뒤돌아본다. 이렇게 입시생을 데문데문 관리한 엄마가 또 있단 말인가. 그
러고도 합격을 바라는가.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면, 어찌할꼬 가슴을 쳤다. 눈은 자고 새면 오고
또 오고, 우리의 절망과는 상관없이 시간은 간다. 크리스마스도 며칠 앞으

로 다가왔다. 산아래 마을엔 눈꽃 속에 온갖 츄리 장식이 영롱하게 빛나
고, 거리마다 캐롤과 사람 물결로 흥청댄다. 사촌도 성아도 다 합격의 소
원을 이루었다. 현이만 빼고, 창피하게…
호산나 성가대 송년파티, 그때 쓸 고깔 모자 60개 , 그리고 빙고 게임판,
성귀(聖句)짝 맞추기 카드 등 방 윗목에 수북히 쌓여갔다. 우는 아이를 데
리고 밤마다 밤마다.
드디어 성탄 이브. 산타 보따리 마냥 울긋불긋 물건을 한 자루 들고, 나
는 눈길을 걸어 큰길에 내려갔다. 너무 너무 슬픈 아이는 집에 두고 제일
즐거운 밤을 연출해야 하는 엄마는 이렇게 삐에로처럼 예배당에 갔다. 우
리의 사정을 알 턱없는 호산나 대원들은 눈물로 만든 고깔모자를 쓰고 서
로 바라보며 끈도 매어주며 정말 좋아했다. 내 예상이 적중했다. 모두 모
두 맛있게, 기쁘게, 예쁘게 그 밤 파티를 마쳤다. 고깔 한 개를 챙겨 집으
로 가져왔다. 아이에게 씌워주고 꼬옥 안아주었다. 아이는 느껴 운다. 나도
그 동안 참았던 눈물이 사정없이 흘러내렸다. 눈은 자꾸 내려 마을은 고
요했다. 사람 만나는 게 부끄럽고 싫은 아이에겐 잘 된 일 같기도 했다.
나는 몇 차례 아이와 의논하여 후기 모집원서 두 곳을 사왔다. 아이는 원
서를 들고 학교로 갔고 직인까지 받아왔다. 아쉽지만 나는 그것으로 아이
가 마음을 굳히는 줄 알았다. 원서접수 마감 일이 바득바득 다가오건만 아
이는 말이 없었다.
나는 늘 아침 일찍 일터에 나가고 어두워서야 집에 오고 늦은 저녁상을
차린다. 온종일 혼자서 집에 있었을 아이는 엄마를 반겨 손에 든 짐을 받
아준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충혈 되고 부어있었다. 휴지통에는 두루마리
휴지 몇 통이나 될까싶어 풀 죽어 덩이덩이 담겨있었다.
「내일 S여대에 원서 넣을께, 엄마」저녁 밥상에서 수저를 들다 말고 아
이는 말했다. 내가 무어라 응대하기도 전에 그의 수저에 손등에 후두룩 눈
물 방울이 떨어졌다. 아차, 내가 아직도 이 아이의 진정한 속마음을 모르

는구나!. 저녁 밥 먹는 둥 마는 둥 늦은 시각이지만 아이를 앞세워 담임
선생님 자택에 갔다. 선생님께선 내게 말했다.
「제가 보기엔 현이네 사정이 그닥 어렵지 않고, 이제껏 얘가 공부해온
성적도 아깝고 하니 재수해도 될 것 같은데 한사코 이놈이 자기는 재수할
수 없다고 하지 뭡니까. 속으로는 후기 대학가고 싶지 않는 모양인데….」
그 때 우리 집 사정이 아이에게 그렇게 보였다. 종업원들 끝간데 없는
요구 때문에 허리 휘는 엄마, 석달 전 공직에서 정년퇴직하고 작은 제조
공장에 나가는 초라해진 아버지, 두 사람 대학 학비가 겁나서 육군에 지
원 입대한 오빠,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전경으로 차출 당해 명분 없는
싸움판으로 떠밀려 몸 구석구석에 피멍들어 외박 나오는 불쌍한 오빠, 아
이는 선생님 앞에서는 재수를, 가족들을 보면 후기 모집을 생각하며 울고
또 우는 것이다.
막내들은 이래서 가엽다. 부모가 힘빠지는 그 시절에는 자기 도약을 시
도해야 하니까 눈치 보게 되는 걸 게다.
마침내 후기 원서 마감 날이 밝았다. 아침부터 하늘은 눈구름으로 어둡
다. 기상대에선 영동 산간, 전국적으로 대설주의보를 내렸다. 나는 신들린
것처럼 영동고속터미널에 갔고 속초행 마지막 표를 끊었다. 그리고 다짜
고짜 아이를 불러냈다. 샀던 표라 할지라도 되 물릴 날씨였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바람도 세차게 부는 그야말로 악천후 속에 아이를 버스에
태워보냈다. 현이에게 일차 낙방에 주는 의미는 자기불신, 자기 정체성 와
해, 가족에 대한 배반, 자기허상을 부여잡고 완전히 주저앉은 상태다. 이런
마음상태로라면 2차 시험마저도 건질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충격이 너
무 커서 연거푸 좌절하는 아이의 모습을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꼬마 적
부터 자존심 지킬 줄 아는 아이였고, 남 배려할 줄 아는 아이였다. 울 일
있으면 엄마를 염려해서 굴뚝 뒤에 가서 울고 나오던 아이다. 원서를 들
고 가며 아프게 갈등할 내 아이를 이 위기에선 보호해 주어야 할 것 같았

다.
예보한 바 그 이상으로 날씨는 무서웠다. 그 밤에 속초의 외가 식구들
은 새벽 한시 넘도록 가슴 조려 아이를 받아 안았다고 전화가 왔다. 아이
를 떠나 보내고서야 나는 왠지 마음이 평안해졌다.
현이가 다시 서울로 돌아온 것은 후기마감도 지나고 입시 학원들이 학
생 모집이 끝낼 무렵이었다. 재수하는 길만 남았다. 해가 바뀌고 아빠의
퇴직금도 정산되어 나왔다. 나도 즉시 내 집을 도로 찾고, 아이는 본래의
자기 방에 안주했다. 아이는 남산자락에 위치한 입시학원에 등록했고 정
말 치열하고도 진지하게 재수생 길을 걸었다. 힘에 부치는 나날을 살며 현
이는 하나님께 향한 태도만은 정말 예뻤다.
5月, 남산 벚꽃 잔치 행렬을 보고 오던 날 자기에겐 평생 그런 날이 오
지 않을 것만 같다던 아이, 늦은 밤 교보문고 앞 버스정류장 가로등 밑에
서 올려다 본 은행잎이 너무 슬프다던 아이, 자살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
것 같다던 아이, 결단의 날이 왔고, 가족 기도회도 계속됐다.
학과는 바꾸었지만 같은 학교에 다시금 원서를 넣었다. 그리고 감사하
게도 합격했다. 대학생이 되고 호산나성가대원이 되고, 직장인이 되고, 시
집가고….
2000년도 성가대 10년 근속자 명단에 내 딸 현이도 들었었다. 막내까지
떠나고 우리 내외는 이제 속초에 와서 빈 둥지에 산다. 속초는 마음 허전
한 사람이 살기에 참 좋은 곳이다. 큰 바위산이 있고, 넓은 바다와 조용한
호수가 있다.
눈 오는 밤 내집 베란다에 서서 미시령을 바라보며 옛 일을 회상한다.
구비구비 내려오는 차들의 헤드라이트는 묻혔다 드러났다 하는 게 마치
산골짜기 등불 같기도 하다. 누가 무슨 사연을 안고 이 밤, 이 눈길을 저
렇게 오고 있을까?
그때 우리 현이처럼. 그 아이는 이제 30을 갓 넘었다. 그 아이의 살아오

던 길목에서 손잡아 주어야 했던 이들이 있었다. 사촌언니는 음악선생이
돼서 대학에도 나간다. 성아도 학교에 국어선생이 됐고 시집도 갔다. 제
걸음을 조금 늦추고 중간 중간 그네들을 끼어 넣어 주고, 때론 먼저 가게
끔 비켜서기도 했다. 그 때는 어리석은 짓 같았다.
하지만 세월이 지난 지금 헤아려 보건대 현이에겐 결코 손해 본 것이
없다. 엄마가 보기에 그는 재수를 하면서 훌쩍 성숙됐고, 사려 깊어졌다.
하나님께서 그네들 성공과 같은 분량의 성공으로 채워주셨다. 우리의 눈
물 속에 함께 하여 주셨던 하나님께 찬송 드린다.
<현아,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