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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2018년 [수필] 벽 속의 요정 외 1편 / 권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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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780회 작성일 18-12-30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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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은 내 안의 소리이고 울림이다. 우물을 들여다보듯 그윽이 나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수필은 고백 문학이라고 했듯이 살아오면서 행복했던 일, 힘들었던 일들을 한 편씩 써나가다 보니 내 삶이 환히 들여다보인다. 어쩌면 지나간 동영상을 한 컷씩 재생해 보는 것 같아 부끄럽다. 삶 앞에 좀 더 진솔하고 겸허해져야 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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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속의 요정


가끔 드라마나 연극, 소설 등을 통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삶이나 인생관을 간접 체험할 때도 있다. 그리고 작가가 의도하는 내용에서 자신의 욕망이나 꿈을 대리 만족하기도 하고 삶의 난관에 부딪혔을 때 그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 해결하기도 한다.
속초문화회관 리모델링 준공 기념으로 지역 주민을 위한 다양한 문화프로그램이 공연되었다. 최근에는 연극배우 김성녀의 모노드라마 <벽 속의 요정>을 관람했다. 14년 전 마당놀이 <심청전>을 연극인 김성녀와 윤문식이 속초문화회관에서 공연할 때 관람한 적이 있다. 그때 두 분의 인상 깊은 명연기가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 있다.
이번 모노드라마 공연을 연극인 김성녀가 2시간 넘게 일인 다역의 캐릭터를 혼자서 소화해낸 그녀의 지칠 줄 모르는 연기 열정에 탄복을 했다. 원작 『벽 속의 요정』은 스페인 내전을 소재로 한 실화 작품으로 벽 속에서 숨어 살던 주인공 딸이 쓴 소설이다. 스페인 내전을 소재로 한 또 다른 소설로는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가 있으며 영화로도 상영이 된 적이 있다. 이 소설은 헤밍웨이가 실제 스페인 내전에 참여한 체험적인 실화 소설이기도 하다.
연극 <벽 속의 요정>은 극작가 배삼식이 1950년대 말 전쟁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던 우리 역사적인 현실에 맞게 원작을 각색 번안하여 희곡 『벽 속의 요정』으로 재탄생 시켰다. 소설의 배경은 스페인 내전을 우리나라 6.25 전쟁으로 환치시킨 작품이다. 좌우익 이념의 대치와 함께 격동기를 겪은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를 리얼하게 소화해낸 김성녀의 연기가 이날 관중들을 매료시켰다. 2005년도 극작가 배삼식이 각색한 『벽 속의 요정』이 처음 무대에 올려졌을 때 스페인 작가의 원작을 뛰어넘은 작품으로 평가되어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전쟁을 치루며 격동기를 살아온 사람이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다.
1950년대 말 전쟁은 종식되었지만 좌우익 이념대립으로 인해 40년 동안 벽 속에 숨어 지내며 딸의 성장을 지켜봐야 했던 가슴 저린 아버지의 사랑에 감동을 느끼게 된다. 이 연극은 초등학생부터 연세 드신 어르신들까지 시대와 연령을 초월하여 함께 관람하며 공감할 수 있다는 데 그 특색이 있다.
줄거리를 살펴보면 연극 <벽 속의 요정>은 6.25 때 포로로 끌려갔던 동네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함께 끌려갔던 남편이 빨갱이로 낙인이 찍히자 죽을 바엔 아예 집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아내는 울부짖는다. 그러나 결국 돌아온 남편은 40년 동안 벽 속에서 숨어서 살아야만 했다. 딸아이는 커가면서 벽 속에서 누군가의 소리를 듣게 된다. 아버지가 없는 줄만 알고 행상을 하는 어머니와 살아가던 아이는 벽 속에 요정이 있다고 믿은 채 소녀와 그리고 숙녀로 성장하면서 ‘벽 속의 요정’과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그러면서 벽 속의 요정이 돌아가신 줄만 알았던 아버지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벽 속의 아버지 즉 딸아이의 할아버지가 동네 유지로 전쟁을 전후하여 그 많던 재산을 골고루 동네 사람들에게 나누어 줘 버린다. 그런 이유로 좌우익 대립 속에서 아버지는 반정부인사로 억울하게 몰리게 되고 사람들에게 쫓겨 벽 속으로 피신해서 살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계란을 팔며 힘겹게 삶을 이어가다가 베를 짜 장사를 시작하여 경제적으로 안정을 되찾게 된다. 늦은 밤이면 남몰래 흰 수건을 뒤집어쓰고 아내를 돕기 위해 아버지는 베를 짠다. 교대를 졸업 후 교사 발령을 받은 딸이 신원조회에 걸릴까 봐 벽 속의 요정인 아버지가 아내에게 자신을 사망 신고하라고 한다. 40년 동안 행상을 하면서도 아내는 남편에게 살아 있어만 달라고 절규를 했고 딸은 벽 속에 갇혀 햇빛을 보지 못하는 아버지를 위해 나뭇잎과 단풍잎을 열심히 주워 햇빛이라고 하며 준다. 세월은 흘러 숙녀로 성장한 딸이 결혼을 하고 아버지는 마침내 사면대상이 되어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그때부터 이 가족은 짧지만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 숨어 산 지 40년 만에 처음 세상 밖으로 나와 아스팔트길을 낯설어 하며 40여 년 전의 살던 모습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몇 년이 흘러 남편은 자신으로 인해 힘겨운 삶을 살아야만 했던 아내에게 용서를 구하며 세상을 하직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벽 속에 숨어 있던 남편에게 ‘살아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라며 외치던 그녀의 말이 종소리처럼 내 가슴에 메아리로 남아있다. 요즘 변해 가는 부부상과 아버지상 그리고 가족 간의 사랑을 일깨워 주는 작품이다. 연극인 김성녀가 두 시간 동안 일인 다 역할을 해내며 열연하는 모노드라마가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의미 있는 작품이다.
이번 연극을 보며 수십 년 잊고 있던 친정집이 떠올랐다. 친정집 오른쪽 작은 마당으로 난 산비탈에는 어른 키보다 높고 30~40명은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굴(窟)이 두 개 있다. 굴속은 눈이 오거나 비가 올 때면 습하고 눅눅했다. 어릴 때 그곳에서 볏짚을 깔고 소꿉장난을 하며 비스듬히 햇빛 들어오는 쪽에서 동화책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6.25 때 멀리서 총소리와 포탄 터지는 소리가 나면 친정집 식구들은 그 굴로 피난을 했다고 한다. 그 굴 입구에 이불을 쳐놓고 볏단이나 낟가리로 앞을 막으며 공산당이나 지역 변절자들한테 들킬까 봐 온 가족이 며칠씩 숨어 지내던 곳이라고 했다. 그리고 친정집은 아래채와 위채가 있었는데 아래채인 사랑방 벽장 속에는 그 시절 공무원이셨던 스무 살 갓 넘으신 작은할아버지 두분께서 전쟁 때 벽장 속이나 마루 밑에 숨어 지내셨다고 했다. 그 시절 안동 권 씨 맏 종부로 종갓집 대가족을 거느리셨던 할머니께서 해주신 얘기다.
<벽 속의 요정> 연극을 보는 동안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작은할아버지 두 분께서 숨어 계셨던 친정집 벽장과 가족들의 피난처였던 굴이 계속 생각이 났다. 민족의 비극과 이념대립 때문에 숨어 사시던 할아버지와 가족들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시고 얼마나 긴장하며 사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명 연기자인 김성녀가 30여 년 무르익은 연기 내공을 이번에 새로 리모델링한 속초문화회관 무대에서 유감없이 발휘했다. 2005년에 모노드라마 <벽 속의 요정>을 처음 시작해서 삼 년 동안 무대에서 연기를 하다가 2017년에 다시 시작하여 지금 그녀의 나이 칠십인데 앞으로 십 년은 더 하겠다고 관람객들에게 약속을 했다. 특유의 섬세함과 자상함으로 관객을 배려하는 무대 매너에서 팔방미인인 그녀의 인품이 배어 나왔다. 극중에서 총 12곡의 노래가 곁들여지는 이 모노드라마는 연극과 뮤지컬의 경계를 넘나드는 극적 효과가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오랜 세월 동안 연극과 뮤지컬, 마당놀이 무대를 두루 섭렵하며 축적해온 김성녀만의 토속적인 말투와 장면이 바뀔 때마다 등장인물로 변신하는 옷차림과 캐릭터가 돋보였다.
연극의 3대 요소가 배우, 관객, 희곡이듯이 <벽 속의 요정>의 작품성과 모노드라마를 끌고 가며 다양한 캐릭터 역을 소화해내는 김성녀의 연기는 호평을 받았다. 또한 객석에서 관객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계란 팔이 장면과 그림자인형극 그리고 <열두 달 이야기>가 관중들과 호흡하는 색다른 흥미를 느끼게 해주었다. 관객들에게 웃음과 눈물을 선사해 주며 두 시간 동안 신들린 듯 공연하는 그녀의 연기에 빠져들며 매료되었다. 평생 동안 한 곳을 바라보며 끝없이 자기 일에 도전하여 내공을 쌓은 명품 배우의 우뚝 선 삶의 모습과 의지가 감동으로 와 닿았다. 이번 <벽 속의 요정> 김성녀의 모노드라마를 통하여 무엇을 위하여 사느냐보다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화두가 되어 내 가슴에 회오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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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파도가 잔잔한 날 멀리서 바라보는 바다는 환상적이고 아름답다. 그러나 비가 오거나 풍랑이 일 때면 바다는 광기 어린 거대한 짐승이 몸부림 치며 달려드는 것 같아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렇듯이 바다는 천의 얼굴로 하루에도 수없이 자태를 바꾸며 자신의 모습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문득 텔레비전을 켜니 오징어잡이 원양어선 ‘인성호’가 대서양에서 침몰하여 선원 6명 실종이라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 늘 이런 뉴스가 보도되면 속초에 처음 왔던 십오 년 전의 일이 생각이 나곤 한다.
줄곧 서울에서만 살던 우리는 속초에 내려와 남편은 약국을 경영 하게되었다. 큰 도로변 사거리를 중심으로 앞쪽은 중앙시장 들어가는 입구이고 뒤편에는 어업에 종사하는 분들이 여러 집 거주하고 있었다. 이분들은 우리 가게의 단골손님이 되어 객지에서 처음 개업한 우리를 많이 도와주었고,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갈 때마다 약을 주문했으며 고기를 잡아 육지로 들어올 때면 오징어, 가자미, 꽁치 등 싱싱한 생선도 많이 갖다 주곤 했다.
그분들이 배를 타고 먼바다에 나가면 한 달 이상 고기를 잡기 위해 체류해야 되기에 여러 종류의 비상약을 많이 준비해서 나가곤 했다. 그때마다 배가 떠나는 날 남편은 승용차로 부둣가까지 주문한 약들을 갖다 주곤했다. 약값은 배가 들어올 때 만선의 기쁨과 함께 계산하곤 했다.
언제인가 그분들이 약을 주문하고 떠날 때 내가 친절하게 “안녕히 가세요” 하고 인사했다가 그분들 중의 어느 부인한테 충고를 들었다. 배를 타고 고기 잡으러 떠나는 사람들한테 “안녕히 가세요” 해서는 절대 안된다고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 그렇게 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다고 한다. 그날 이후 그분들이나, 또 다른 분들이 약국에 오셨다가 배를 타러 나갈 때에는 나는 그냥 웃음으로 인사 대신 배웅하고 아무런 말을 안 했다.
그분들 중에 경아네 가족과 유독 수줍음을 많이 타는 사람 좋은 노총각 경아 삼촌과 K라는 아저씨는 동료 선원분들을 많이 소개해주었으며 우리와도 친하게 지냈다.
십오 년 전 어느 늦은 봄날이었다. 저녁 무렵 경아 아버지를 비롯해서 삼촌과 K 아저씨, 그 외 몇 분들이 약국에 오셔서 이번에도 고기 잡으러 나가면 한 달 정도 바다에 체류할 예정이라며 비상약을 많이 주문했다.
그리고 내일 아침 여덟 시까지 배 ‘문창호’가 출항할 테니 부둣가로 약을 갖다 달라고 하곤 떠났다. 이튿날 아침 일찍 남편은 그분들이 주문한 약들을 배에 실어다 주고 ‘문창호’가 떠나는 걸 보고 돌아왔으며 고기가 많이 잡히길 마음속으로 빌어 드렸다. 그날 점심때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오후 다섯 시 뉴스에 속초에서 출발한 ‘문창호’가 동해 해상 몇백 마일에서 침몰되었다는 보도와 함께 선원 7명 실종이라는 뉴스가 나왔다. 우린 그 소식을 접하고 아연실색했다. 아침에 부둣가에서 ‘문창호’에 약을 실어다 주고 왔는데 이 무슨 날벼락 같은 소식인가, 잘못 들었나 싶어 TV 채널을 돌리며 방송국마다 뉴스를 확인해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바닷가 마을로 이사 와서 가끔 이런 뉴스나 주변 분들한테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설마 하여 나와 상관없는 먼 남의 일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사람 좋던 경아 삼촌을 비롯해서 ‘문창호’에 함께 타셨던 선원분들 한 분, 한 분과 그분들 가족 얼굴까지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 ‘문창호’ 가족분들이 지나가다가 약국에 들르면 그냥 울음바다가 되고 나는 그저 그분들 손만 잡아 줄 뿐 어떻게 위로해 드릴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 사건이 있은 지 며칠 후 K 아저씨가 약국에 나타나셔서 깜짝 놀랐다. 분명히 저분은 ‘문창호’에 타셨던 분인데 살아서 돌아오시다니 꿈인지 생시인지 몰랐다. K 아저씨는 배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 나갔는데 한두 시간쯤 지나자 갑자기 복통이 심해서 인근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던 다른 배에 옮겨 타고 속초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그 후 그분이 탔던 배가 몇 시간 뒤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다. 그분은 하늘이 도우셔서 자신은 목숨을 건졌다고 하시며 실종되신 다른 분들 때문에 많이 안타까워 했다.
그 사건 이후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다른 곳으로 가게를 옮긴 어느날 해 질 무렵 그 K 아저씨가 약국을 방문했다. 오랜만이라고 하며 우리 부부는 그분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분도 정신적인 충격에서 조금 벗어난 듯 건강이 좋아 보였다. 그분은 가슴 아팠던 그 사건에 대해 조심스럽게 입을 여시며 그때 사고 당일 남편이 ‘문창호’에 실어주었던 외상 약값을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펄쩍 뛰며 배가 침몰하고 아직 실종되신 분들이 바다에 있고 찾지도 못하고 있는 판인데 무슨 약값이냐고 한사코 거절했지만 그분은 막무가내였다. 약국에 피해를 드려서는 안 된다고하며 약값을 두고 떠났다. 사라져가는 그분의 뒷모습을 보며 아직 천 길바닷속에 있을 늘 함께 다니던 노총각 경아 삼촌이 생각났다.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수줍어 얼굴이 먼저 붉어지곤 하던 순박하고 선하던 분이셨는데… 그분과 함께 배를 탔던 다른 동료분들까지 생각이 나서 가슴이 아팠다. 할 수 없이 우리는 그분이 주고 간 가슴 저린 그 돈을 받고 멍하니 있다가 어떻게 하면 그분들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보람 있게 쓸까 하다가 그해 불우 이웃 기금에 보탠 적이 있다. 그 아픈 기억이 십오 년 전 일인데 오늘 문득 대서양에서 인성호가 침몰했다는 뉴스를 접하니 그때 일이 다시 떠올라 ‘약속’이라는 소중한 단어를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날 사회는 물질 만능 사회로 치달아 삶의 기준도 인간이 우선이기 보다는 물질이 우선이 되어 버렸다. 자신과 사회와의 약속을 어기고 자신이 저지른 일에 책임지지 않는 신용불량자를 비롯하여 원칙을 어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만 가고, 자신의 작은 이익을 위해서는 남의 생명마저도 경시해버리는 가치관의 혼란마저 초래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자신과 약속이든 사회와의 약속이든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해 다른 사람, 아니면 국가나 사회에 피해를 주고도 전혀 죄의식을 느끼
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동료 선원들을 천 길 바닷속에 묻은 가슴 아픈 현실인데도 불구하고 몇 해가 지났는데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찾아 주신 K 아저씨를 생각하니 고마운 마음보다 가슴이 아렸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이런 분만 있으면 세상은 정말 살만한 세상이 아닌가, 첫눈이 내려 세상이 꽁꽁 얼어붙는 겨울아침,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삶에 대하여 방향을 제시해 주신 K 아저씨 같은 분이 계셔서 세상은 아직 훈훈하고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