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뫼 호수별 보기

48호2018년 [수필] 나에게 필요한 것은 / 노금희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158회 작성일 18-12-30 15:45

본문

롤러코스터를 타고
쭈욱 내려갔다 다시 뛰어오른
두 해를 보냈습니다.
바닥을 치고 올라와 만난 인연.
저에게 주문을 걸어봅니다.
알 이즈 웰!!!


---------------------


나에게 필요한 것은



직장생활은 한다는 핑계로 자주 대청소를 하지 못하다가 8년 만에 이사를 하게 되어 살림살이를 온통 뒤집어 놓았다. 평소엔 잊고 지내던 짐들이 어디서 그리도 많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나는 사소한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물건들이 언젠가 쓰임새 있다고 생각했다. 버려지는건 없이 들어오는 것만 있으니 집은 늘 과식 상태다.
화장품 상자나 선물 박스, 포장 리본, 깨끗한 택배 상자, PET 음식 용기, 얼음팩, 종이백, 비닐봉지, 사은품으로 받은 물건까지 이런 소소한 것들은 그냥 무심코 버려지면 한낱 쓰레기일 뿐이다. 우유 팩이나 재질 좋은 화장품 상자 등은 서랍용 수납박스로 쓰고, 보관해둔 얼음팩은 여름에 긴요하게 쓰고, 그래도 남은 팩은 자주 가는 생선가게에 갖다 드렸다.
열렬한 환경운동가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재활용을 한다고 했는데 구석진 곳에서 자리 지키며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걸 나는 몰랐다. 가끔 TV에서 온갖 쓰레기를 집에 쌓아 두고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저장강박증’을 보면서 나 스스로 반성할 때가 있다. 정리수납의 달인들은 ‘몇 가지 물건은 2-3년 지나서도 쓰지 않으면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이사를 하기 전 조금씩 비우면서 오래 손대지 않는 것은 빨리 재활용품으로 보내는 게 현명한 일인가 싶다.
이런 나의 습관에 반해 남편은 무엇이든 즉시 버리는데 필요한 걸 찾다가 없으면 남편이 버렸다고 타박을 해왔다. 꼭 버리고 나면 찾을 때가 있다는 강한 믿음을 가지며 나름 위안을 했던가 보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사를 자주 해야 집안 정리가 된다’는 우스갯소리를 한다.


정리를 하면서 속도가 나지 않는 것은 해묵은 추억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바닥에 주저앉아 책장정리를 하면서 버릴 책과 잡지 등을 묶어 놓은 틈에서 버리지 말아야 할 흔적을 찾아냈다. 고등학교 시절 문집 1권.
지금의 인쇄기술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 문집이었다. 인쇄소에 원고를 넘겨 타자기를 이용할 비용이 없었는지 B5용지에 내 손글씨로 만든 색 바랜 문집. 교장 선생님 격려사, 목차, 학년별, 편집후기, 인쇄소까지 기록해 제법 책 흉내를 낸 것인데 하마터면 영영 놓칠 뻔했다.
그 꼬맹이 문학소녀들을 떠올리며 부풀었던 꿈의 조각들을 찾아 그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학교를 다녀온 내가 문집을 만들겠다고 골방에 쪼그리고 앉아 꾹꾹 눌러쓰는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아버지가 써주신 것이 몇 편 있었다. 뒤늦게 문집을 통해 아버지의 젊은 시절 개성 있는 멋진 필체를 보았는데 연세가 들면서 글씨체가 많이 변했다는 걸 알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만 늙어가는 게 아니라 글씨도 늙어 가는구나’
그래서인가, 문학관에 가면 문인들의 육필원고를 더욱 찾아보고 싶어진다.
이 세상에 허투루 태어나는 게 있을까? 물건이든, 생명이 있는 것이든 영혼이 있으니 그 쓰임새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고 싶다. 열매는 사람들이 걷어 가더라도 땅에 떨어진 못난 씨앗이 또 다시 싹을 틔우고, 나무가 자라 숲이 되고, 아래에는 작은 들꽃, 풀 한 포기 그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한다. 살아 있는 생명은 아닐지라도 물건 또한 제 이름을 갖기까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우리 앞에 섰을 때 그도 얼마나 뜨거움의 희열을 가졌을까?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나눌 건 나누고, 다시 품을 건 제 자리 찾아주고, 버릴 것들을 분리수거 하며 끝내 소생하지 못한 물건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아 본 가을이었다.
이제 다시, 구석구석마다 나를 기다리는 것들을 찾아 정리할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