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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2018년 [수필] 때로는 너무나 불편한 시선 외 1편 / 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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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012회 작성일 18-12-30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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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또 내게로 왔다.
설악제를 했다.
아이 손을 이끌고 나온
앳된 엄마들
얼핏 20대로 보였다.
얼굴이 몸매가
예쁜 것이 아니라
그냥 예쁘다
나도 어릴 적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가을빛처럼 물든
지금의 나도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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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너무나 불편한 시선



시선이란 말은 어학사전에 ‘눈이 가는 방향, 어떤 대상에 대한 주의와 관심’으로 풀이가 되어 있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어떤 이는 시선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 이도 있고 시선이란 자체를 싫어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나한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상대에 따라서 분명 좋고 싫음이 있을 것이다. 연예인이라면 그 관심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하나의 뜨거운 관심은 일반인으로서는 상당한 부담이 될 것이다. 나 또한 후자와 같이 끔찍이도 그 관심을 거부하는 한 사람으로서의 그런 관심들은 너무도 싫다.
나의 삶 자체는 굉장한 개인주의다. 그냥 누구든지 관심도 싫고 늘 어릴 적부터 혼자가 좋았다. 혼자 놀면 사회성이 떨어지니 협동하며 놀아야하고, 더불어 가는 세상이니 다 같이 어울려야 한다고 하니 그런 말들이 나에게는 아주 곤혹스런 시간들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사람들하고 어울리지도 협동을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나는 나만의 시간 속에 여러 가지를 즐겨한다는 것이다.
시장을 가도 혼자 가고 싶고 목욕탕을 가도 혼자 가고 싶고 산책을 해도 혼자 가고 싶다는 것이다. 친구들과 우르르르 몰려다니고 발가벗고 앉아 남의 뒷담화나 하고 그런 시간들이 싫다는 것이다. 물론 모여서 좋은 이야기 아름다운 이야기를 풀어나가면 나는 그 모임 좋다.
그러나 난 불행하게도 여러 개의 모임 중 두어 개의 모임은 남의 뒷담화를 즐기는 만남이라 그런 모임은 나가지 않았다.
나는 살면서 늘 남들의 시선 속에 살아왔다. 사람들이 예뻐서, 멋있어서 등의 그런 소리를 해대며 나에게 접근을 했고 나를 바라보고 신기해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또 나름대로의 그 시선들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상처를 많이 받아오면서 살아왔다.
어릴 적부터 엄마가 소풍 간다고 옷 한 벌을 사주면 온 동네 사람들이 구경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하늘색 원피스에 하늘색 모자 검정 똑딱이 구두였다. 다들 구경하느라 정신없이 내 앞에 몰려들어 만지고 하였지만 정작 본인인 나는 너무 괴로웠다. 새로 산 옷에 뭐가 묻지는 않을까, 혹여 찢겨지지는 않을까, 저러다 못 입고 가지는 않을까? 마음을 졸였을 그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를 생각해보라,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20살이 되기 전까지는 늘 모두의 이목거리가 되었다. 그 어린 시절에 치이는 사람들이 많아 이미 난 그때 지쳐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그 칼라풀한 색들을 접고 스무 살이 넘어서는 검은 옷만 입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미팅 때고 늘 난 튄다는 것이다. 검은색으로 한숨을 돌려 세상을 바라보니 그것도 튄다니 뭘 어쨌다는 것인지 이해하기조차 싫었다.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내가 입고 싶은 옷, 신발, 가방들도 맘대로 못 입고 못 신고 못 들고 다녀야하나? 참으로 고민 아닌 고민이었다. 결혼을 하니 시댁식구들도 튄다고 그래서 검정색만 즐겨 입었는데 검정색은 외롭다고 입지 말라고 하니, 휴 난 어찌해야 할지 몰라 하루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했었다. 그래서 다시 원색을 입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숙이 돌아가시면서 유언 아닌 유언을 하시고 가셨다. 제발 머리카락 색은 물들이지 말고 검정색으로 하고 다녀라. 그래 난 이 적지 머리색은 검정이다.
처음 속초에 이사와 시장을 갔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나를 뚫어지라 쳐다보는 거라, 잠깐도 아니고 계속 그래 화가나 왜 사람을 그리 보냐고 그랬더니 너무 예쁘게 생겨서 봤다는 거다. 그래도 그렇게 사람을 너무 쳐다보면 민망하다고 화를 낸 적이 있었다. 또 한 번은 사진을 찾으러 갔는데 사진 줄 생각은 안하고 민망하게 사람을 또 뚫어지라 쳐다보는 거라 왜 보냐고 신경질을 낸 적이 있다. 죄송하다고 연예인 줄 알았다고 했지만 난 그 말에 콧방귀를 치면서 나이 먹어 참 가지가지 한다 하며 속으로 욕했던 적도 있다. 또 한 번은 병원에 진찰을 받으러 갔었는데 의사가 진찰은 안하고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는 거라, 뭐하시냐고 하니 너무 예뻐서 그런다고 그래 난 작업 걸지 말라고 돌팔이 의사라고 신경질 내며 나온 적도 있다. 그분들께 가끔은 미안한 생각이 들지만 그 당시는 너무 기분 나빴었다.
그렇게 나는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쳐다보는 것이 너무도 싫었었다. 아니 정말 생각조차 하기 싫었었다. 예전에는 좀 껄렁껄렁한 사람들이 좀 많았지 않았던가? 지금은 그랬다간 바로 성희롱에 들어가지만 내가 살던 시절은 동네 껄렁이들, 술 먹고 지나가는 사람들, 여기저기 그런 사람들이 천지였다. 더구나 지속적으로 나를 쳐다본다 생각하니 아니 그런 시간들이 지속되다보니 내가 연예인도 아닌데 대인 공포증이 생기게 되었다.
밖에 나가기도 싫고 좋건 싫건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 싫었다. 그래서 난 지금도 장난스런 남자들의 행동들, 농담도 아주 싫어한다. 그리고 난 아직도 밖에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방콕을 좋아한다.
그 사람들은 개인 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것이지만 내가 받는 그 시선들은 상당하게 많기 때문이다. 다 좋은 시선이 아닌 음흉한 눈빛으로 비추고 징그러웠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건 너무 어린 마음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한다. 하지만 아직도 남자들이 예쁘다 하면 싫다. 그 이후로 나는 시선에 대한 트라우마까지 생기고 말았다. 어려서는 눈동자 색깔이 갈색이라고 피부가 너무 희다고 미국인, 튀기, 그런 말들이 지긋지긋하게 나에 대한 수식어가 되었다.
나는 종교 생활을 하는데 어디 가나 사람들 모임에는 말이 많기 마련이라지만 내가 다니는 종교집단은 유독 심하다. 어떤 날은 빨간색은 입고오면 안 되는 날이라 한 소리 듣고 위아래 같은 색으로 입고 다녀 별명은 깔 맞춤이 되었고 종교 단체 입구에 들어서면 저기 깔 맞춤 간다하며 오늘은 노랑색이네, 오늘은 파랑색이네, 어떤 날은 내 머리가 너무 덥다, 갈색으로 해라, 어떤 날은 머리가 산발이라 내가 너 때문에 기도 중에 분심이 든다, 내가 널 보니 더 덥다. 그래서 하루는 집에 와 펑펑 울고 머리를 빡빡으로 밀고 가? 그리고 올 블랙으로 입고가? 오기가 생겼으나 밤새 고민에 파마를 풀어 생머리도 해보니 너무너무 촌스러운 거라 ‘아하, 내가 이쁘니 질투하는구나, 촌스러워야 하는데 너무, 너무 부러워서 그래’ 하며 나를 스스로 위로 해보니 조금 편해져 신경을 끊어버리기로 했다. 또 몇몇들은 이 글을 읽고 웃기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마다의 그런 여러 가지 힘든 상황들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살아가면서 가장 피곤하고 인간관계에서 너무 힘든 과제 중 하나였다. 여전히 자금도 그 일로 상처받고 뒷말 속에 끙끙 앓으며 살고 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어릴 적 연예계 콜에 입문해서 뭐라도 될 걸 그랬나 싶다고 지인들과 농담을 하면서 견디기도 한다.


난 요즘 어떤 책을 읽으면서 마음을 다잡고 있다.
그 책을 소개하는 내용 중


누군가 내게 한 행동 때문에 고구마를 백 개를 먹을 것처럼 답답한 적이 있습니다. 상대방은 태연하게 그 일을 잊었지만 정작 나는 며칠을 속앓이를 하고 시원하게 한마디 지르지 못했죠. 그러나 인생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에게 더는 감정을 낭비하지 말자. 마음을 졸여도, 끙끙거려도, 미워해도 그들은 어차피 인생에서 지나가는 사람들뿐이다.
1. 내게 친절하지 않은 사람에게 친절하지 않을 것
2. 이해 안 되는 직장상사, 얄미운 대학 동기 저열한 인간들로부터 스스로의 존엄함을 지키기 위해 우리에게는 최소한의 저항이 필요하다.
3. 나를 평가할 자격을 주지 않을 것.
4. 주눅들 만큼 겸손하지 말 것. 당신이 가장 존중해야 해는 사람은 언제나 당신 자신이다. 타인의 감정을 염려하느라 정작 자신의 감정은 돌보지 못한다면 그 무엇도 미덕이 될 수 없다.
5. 모든 이에게 이해받으려 애쓰지 말 것. 자신들의 방식과 다르다는 이유로 나를 잘못된 사람으로 만드는 시선과 판단.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해받으려고 사는 게 아니며 당신의 삶은 당신의 것이다. 우리는 가끔씩 일, 사랑, 혹은 나 자신 때문에 흔들리고 삽니다. 그럴 때마다 나를 제 길로 돌아서게 하는 건 스스로에 대한 존중과 당당함을 되찾았을 때입니다.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나는 너무나 공감되어 이 책을 사서 읽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무수하게 많은 말들을 내뱉으면서 살아간다. 때로는 그 뱉은 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수가 되고 죽음을 부르기도 한다. 또한 그를 바라보는 시선 하나로 인생이 잘못되고 그 잘못된 시선으로 인해 수많은 편견을 일으키기도 하고 수많은 말들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요즘은 다행히 댓글을 잘못 달아도 법적으로 처벌을 받는 시대이니 어찌 보면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렇게 아름다운 눈을 갖고 그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살면서 왜 때로는 언어가 안되는 강아지 보다 통하지 않을 때가 있는 것일까? 한 번쯤은 생각해볼 문제이다.
우리는 늘 자기와 같은 시선으로 남들을 바라보고 있다. 사람은 한 사람도 똑같은 사람이 없는데 심지어 쌍둥이인 그들도 아주 미세하게 또는 많이 다르다. 다름을 인정하고 그 상대가 나로 인한 시선으로 불편하지는 않은지 알아보고 그들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나를 이제는 그만 봐, 이제 나도 늙었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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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크 러브



내가 옷을 좋아하다 보니 우리 집은 옷이 천지다. 요즘은 옷을 만들어 입기까지 하니 옷은 더 늘어나기가 그 수를 셀 수가 없을 정도이다. 다들 농담 아닌 진담으로 우리 집은 제일 먼저 정리해야 할 부분이 첫 번째 내 옷 그리고 책들이라고들 한다. 그렇게 옷이 많은 데도 겨울옷은 만들어 입을 정도의 실력이 되지 않다는 핑계를 대며 사 입기로 한다. 더구나 난 가죽, 털옷을 엄청 좋아하기에 그 수도 만만치 많다.
돈 좀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부을 상징하기 위해 걸치는 밍크도 몇 벌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동물 학대로 인한 동물 보호 운동이 시작되고 밍크, 루왁커피(kopi luwak) 등 생산과정을 보고 나서 그 잔인함에 양심이 걸려 나도 밍크는 안 입기로 했다. 그러나 털옷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 유혹을 물리치기 힘든 상황이라 한동안 유행했던 페이크퍼 옷들을 사 입기로 했다. 그렇게 페이크퍼에 관심이 막 끌리는 무렵 수업시간에 한 아이가 페이크 러브라는 노래를 듣고 싶다는 것이다. “그게 뭔데?” 하니 “선생님 그 노래도 몰라요? 방탄소년 노래라구요.” “뭐? 방탄 소년은 뭐야?”
“에이 암튼 그 노래 틀어주세요.” 한다.
수업을 하다 보면 아이들이 너무 산만하게 떠들어 대어 클래식 음악을 틀어 놓고 수업을 한다. 그러다 아이들의 요청을 받아 처음 접하는 요즘 시대 아이돌의 음악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알 듯은 하나 정작 노래 제목은 모른다. 그런데 이 노래를 듣는 순간 가사가 의미심장하며 무언인가 나의 가슴을 팍 찌르는 것이다. 그동안 아이돌이라고 해서 거시기한 춤이나 추고 신나고 그저 그런 음악으로나 생각했는데 어어 이것 봐라, 아니었다. 이 노래를 듣는 그 아이들이 뭔 뜻을 알고 듣나 싶어 물어봤다.
“너희들 뭔 내용인지 알고 이 노래를 듣니?” 하니 “에이 선생님 사랑이야기잖아요” “그래 니들이 사랑을 아냐고?” “왜 몰라요? 전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다른 애를 좋아해서 헤어졌잖아요. 그래서 제 마음이 아프다고요, 그런 게 사랑이라고요.” ‘오마이갓 사랑, 그래 사랑을 아는구나,’ 속으로 혼자 생각하고 있는데, “선생님 저 이 노래 춤출 줄 알아요. 춤 줘도 되요?” “미술 시간에 뭔 춤이야?” “응응 스트레스 풀고 싶어요.” “근게 왜 스트레스를 미 술시간에 푸냐고?” “그림 그리다 스트레스받았다고요.”
졸지에 미술 시간이 댄스 시간으로 탈바꿈하였다. 춤도 어쩜 그리 잘 추는지 얼굴 표정이며 정말 사랑의 시련을 아는 듯 표정도 절실하다.


널 위해서라면 난
슬퍼도 기쁜 척 할 수가 있었어
널 위해서라면 난
아파도 강한 척 할 수가 있었어
사랑이 사랑만으로 완벽하길
내 모든 약점들은 다 숨겨지길
이뤄지지 않는 꿈속에서
피울 수 없는 꽃을 키웠어


-방탄소년 <페이크 러브> 인용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그 아이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말 잘 춘다.
짧은 시간 난 그 노래를 들으면서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되었다.
언젠가부터 갑과 을이라는 단어가 사람들에게 회자되면서 갑질이며 을이며 우리 사회의 유행어가 되어 갔다. 갑질의 논란에 힘겨워 살려고 발버둥 치는 을들의 소리가 여기저기 마구, 마구 쏟아져 나와 내 귓가에 얹혀 버렸다. 그리고 나 또한 을이기에 먹고 살기 위해서는 슬퍼도 기쁜척 아파도 강한 척 그렇게 소위 말하는 가면을 쓰며 속으로는 저거, 저거 죽일 똥파리 같은 인간 하면서도 비겁을 무릅쓰고 살았다.
가끔이긴 하지만 사람들은 정말 예쁘지도 않은데, 정말 못생겼는데 예쁘다고 하고, 정말 좋지 않은데, 좋다고 하는 야비스러움을 갖추며 페이크적인 말들로 손발을 비비고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모자라 약자한테 강하고 강자한테 약한 비열성을 보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내 주위에도 아주 많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이 싫어 나는 연류된 일들 그만두기도 하고 그들을 외면해 버리기도 했다. 그래서 돌아온 것은 경제적으로 나만 힘겨워지는 것을 알면서도 난 그렇게 완벽하게 서지는 못했다. 나는 그렇게 세상 물정 모르게 정의를 외쳐대어 그 결과는 아픔으로 다가온다. 그러면서도 정의를 버리지 못한다. 그러기에 사람에게 뒷북도 잘 맞고 모함이며 사기도 잘 당하고 살아왔다.
우리 아들 말이 예전 넓은 주택에 살 때 아들이 학교 다녀오면 우리 집 거실은 늘 동네 아줌마들로 그득했다고 한다. 엄마는 주방에서 음식을 해서 나르고 무엇이나 새로운 것들이 생기면 퍼주었다고 한다. 아들은 그것이 좀 싫었다고… 그런 엄마 때문에 상처받았을 생각하니 많이 미안하기는 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들은 엄청 야무지고 자기 것을 아끼기로 버금간다. 더구나 아들이 여자 친구랑 데이트 비용 통장을 만들어 그 통장에 각자의 정해진 돈을 넣으며 데이트 비용을 쓴다고 했을 때 사실 난 너무도 놀랐었다. 지극히 현실적인 저 아이들을 칭찬을 해야 하나? 난 어리벙벙했었던 적이 있었다.
나는 결국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몇 사람들에게 배신과 상처를 당하고 나서야 오픈되어 있던 문도 잠그고 핸드폰 번호도 바꾸면서까지 그들과 인연을 끊어 버리고 살기 시작했다.
지금은 그 페이크적인 나의 눈빛과 미소로 사람들을 대하면서 차츰 나도 약간의 비열함도 갖고 세상이란 것에 익숙해지며 나의 하루를 지탱하고 있다.
사람을 그가 축적하고 있는 재산이나 학벌로 평가하는 시대가 아닌 실력이나 경험으로 평가하는 시대로 바꾸고자 노력한다고 한다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페이크 적이다. 무언가 그들에게 얻기 위해서 그렇게 가짜라는 이름을 내 얼굴에 달고 살면서 난 어디까지 가야 할까?
또 우리는 상대를 어떠한 모습으로 바라보아도 사람들은 그 표정을 읽을 줄 알며 그게 가식인지 진심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가령 너무 미운 사람인데도 뒤로 그 사람을 욕하면서도 그 사람 앞에서는 아닌 척 미소를 짓고 빈 인사를 한다. 나도 그렇게 살아가는 일들이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을 잘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칭찬을 하며 그것도 그 사람의 능력이라고들 평을 한다. 그래야 사는 세상이라고 한다.
그런 것에 나는 나의 모습을 잘 용서하지 못하는 1인이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나는 모습에 표정이 다 나타나기 때문에 힘들다. 그러나 가끔 나 역시 어느 순간부터 배워 위선과 가증을 많이 떨며 대하는 사람한테는 나도 똑같이 대하기 때문에 뭐라 할 일은 아니다. 그러니 괴로워하려면 가증을 떨지 말던가, 아님 가증을 계속 떨면서 괴로워하던가,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 그건 누구나 다 공감할 것이다. 차라리 상대가 가증을 떠는 모습이 억지 미소로 나를 대하는 것들이 안 보이면 내가 반가워서 좋아서
웃는 게야, 하고 말 텐데 하느님께서는 교묘하게도 인간의 뇌를 하나하나의 기능들에 영특함을 가지도록 만들어 주셨으니 어찌하겠는가? 그냥 나도 억지웃음과 진정한 웃음을 섞어가며 살아가야지 어쩌겠는가? 갓난아이도 가끔 억지웃음으로 썩소를 보내는데 다 큰 어른인 나는 견디어야지 하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여기 노래에서처럼 그렇게 페이크 러브를 하는 자신을 보며, 결국 이것이 무엇인가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그래 이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세상은 결국 페이크 적인 것은 페이크로 끝난다는 것이다.
점점 글로벌로 변하는 시대에 우리의 진정성이 얼마만큼 존재하며 진실된 사랑들은 점점 희박해질 것 같은 나만의 기우에 상당히 마음이 아픈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도 결국 물질에 밀려서 무너지고 만다. 나도 덜 사랑하는 부자 남자와 많이 사랑하는 가난한 남자 중 어떤 이를 택할 것인가의 질문에 젊었을 때는 당연 사랑을 택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덜 사랑해도 돈 많은 사람을 택할 것이다.
그러면서 무슨 말이 그리 많나 하며 나를 질책하지만 그래도 사랑만큼은 페이크 러브를 하지 않았음 하는 바람이 가득하다.
우리 그냥 러브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