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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2018년 [시] 선재길을 걷다 외 9편 / 양양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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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048회 작성일 18-12-30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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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단풍 소식이 들립니다
나무들은 무성한 잎을 달고 혹독한 더위 속에서도
여전히 아름다운 가을을 준비했는데
2018년 내 삶의 열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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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재길을 걷다


매미 소리보다 큰 물소리 들으며 걸었다
커다란 나무 틈새로 간간히
파란 하늘 얼굴을 내밀고
오대천은 심심했던지
소란스럽게 내려가다가 폭포를 만들고
조금 내려가다 또 다른 폭포를 만들곤 한다


흘러가는 물길 따라 천년 옛길을 걸으며
선재 동자가 얻은 깨달음은 못 얻었지만
길은 나에게
삶의 즐거움을 가득 안겨 주었다


내 지나온 삶의 세찬 소용돌이와
잔잔한 시절 떠올리며
남은 삶은
초록의 이끼처럼
깊고 포근하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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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벌레


보이지도 않는 작은 발로 얼마나 빠른지
집 안 구석구석 없는 곳이 없다
벽에 붙어 있다가도 손이 가까이 가면
눈 깜짝할 사이 뛰어내려 죽은 척한다
잡아도 잡아도 나오고 또 나오고
검은 점만 보면 손이 간다


어느 나라 어느 곳에나
이런 바구미 같은 사람들이 있다
잡아도 잡아도 다시 나타나
이웃을 괴롭히는 해충들
지구는 늘 이런 인간 바구미들로
조용할 날이 없다


잠깐
혹시 나도 누구에겐가
이런 바구미였던 적은 없는지
속으로 움츠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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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마을


농사가 안된다고 버려진 땅이었다
검은 흙 거무스름한 집들
마을 가운데로 검은 물이 흐르고
골목마다 뜨거운 증기가 눈앞을 가리는 곳
구로카와


오랜 세월 오고 갔던 소식을 켜켜이 쌓아놓은 듯
두 뼘도 넘는 억새이엉을 머리에 얹고
나무로 만든 공중전화 부스가
나이를 자랑한다


전쟁터에서 상처 입은 장수가
온천수에 몸을 담가 나았다는 소문에
백 년도 넘는 세월 동안
너도 나도 몰려든단다


달걀 익는 냄새 계곡의 물 흐르는 소리 들으며
욕심도 이기심도 온천물에 풀어버리고
나 또한
마을의 한 부분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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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물


셀 수도 없는 수많은 물방울들
어우러저 한 몸이 되었다


하늘도 품어 보고 지나가는 자전거도 품었다가
몰래 버리는 쓰레기마저 품에 안으며
쉬지 않고 그렇게 흘러간다


길가에 서 있는 나무도 올려다보고
늦은 밤 찾아와 반짝이는 별들도 쳐다보며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몰라도 좋다
그저 다른 물방울 따라 함께 흘러간다


우리네 인생도 힘들다고 한탄만 하지 말고
조잘조잘 웃으며
함께 흘러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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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챗구멍 속 지구


마음에 쌓인 먼지를 씻으려고
졸졸 물소리 따라 걸음을 옮겼다
순간
내 눈도 마음도 휘둥그레졌다


맑디맑은 몸에
하얀 거품 잔뜩 뒤집어쓰고
무거운 듯 천천히 흐르고 있는 물


졸졸졸
노래가 아니라 신음이었다


지구의 병이 깊었음을
조그만 수챗구멍으로 보았다
나도 함께 죽어가고 있음에
마음이 철렁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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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채화 한 폭


주방에 조그만 창 하나 있다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 좁은 공간
한 폭의 수채화가 그려진다


뚝방에는 계절 따라 옷 갈아입는
나무들 서 있고
파란 하늘엔 뭉게구름 떠 있지만
그 아래 안양천은 늘 말없이 흐른다


눈부신 태양도 기우는 저녁놀도
넉넉한 품에 끌어안으며
물은 하루를 그렇게 흘려보낸다
반딧불이 같은 불을 매달고
영원히 멈출 것 같지 않던
자동차 신음소리
조금씩 잦아드는 새벽


어느새 수채화 속에도
파르스름 아침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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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내장 수술을 받고


낡아버린 수정체를 바꿨다
안 보이던 검버섯이 보이고
이마의 주름은 왜 그렇게 깊은지


몸과는 다르게
고개 숙여지는 아름다운 마음도
감추고 싶어 하는 지저분한 마음까지도 보일 만큼
마음의 눈은 더 밝아졌다


할머니라는 이름으로


보고 싶지 않은 얼굴
대하고 싶지 않은 거짓 마음도
풀잎에 반짝이는 이슬 바라보듯
아름답게 볼 수 있는
맑은 눈을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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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 위에 발자국


제 몸도 숨길만 한 커다란 배낭
두발로도 모자라 지팡이까지 짚으며
노란 화살표 따라 걷고 또 걷는다


마음이 지은 죄를 육신의 고행으로 갚으며
한 성인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전을 찾아서


천년도 넘는 묵은 발자국 위에
갖가지 어려움 마다하지 않고
멀고 먼 순례의 길 가는
또 다른 발자국들
흙먼지 일으키며 걸어간다


부르튼 발바닥 감사하며
기도의 단을 쌓느라
산티아고 가는 길은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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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하나


높은 하늘 아래
미끄러질 듯 얹혀 있는 무덤 하나
면도라도 한 듯 단정하다


헤아릴 수조차 없는 욕망 때문에
내가 아닌 나로 살았을
헛개비 같은 세월 그 속에 있다


그러나
기쁨의 때에도 슬픔의 순간에도
흐트러짐 없는 나이고 싶은 자존감이
한 개의 사마귀처럼 돋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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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등


퇴색한 담벼락 앞
감나무 한 그루 서 있다
무성한 초록잎 다 어디 가고
초파일 절마당 연등처럼
메마른 가지에 감들만 있다


무슨 염원이 깊어
한결같은 주홍등 저리 밝혔나


올해도 슬픈 일이 많아 가슴 아프다고
땅이 갈라져 살던 집에 갇혀버린
영혼들 불쌍하다고
밤낮으로 등 밝혀 비는 걸까